21화
서울 시내의 ‘다님길필름’ 사무실.
“아오, 허리 빠지겠네.”
테이블을 ㄷ자 모양으로 세팅 중인 한 남자.
최희숙과 함께 일하는 남자 스태프.
검은 목폴라를 입은 남자. 조감독 이열호다.
“세상 어느 영화 조감독이 이런 일을 하는 걸까.”
“영화 <리플레이>의 조감독이 하지.”
“말만 조감독이지, 그냥 시다바리 아닙니까?”
“감독인 나도 하는데, 조감독인 네가 놀래?”
최희숙이 책상을 옮기며 대꾸하자 무어라 툴툴대는 이열호.
그러면서도 몸은 쉬질 않는다.
열심히 의자를 배치하는 중.
<리플레이>의 스태프는 최희숙과 이열호를 포함해 10명도 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직책이 나뉘어 있긴 했지만.
서열이 존재하거나 하지 않았다.
모두 좋은 영화 하나 만들자고 모인 멤버였으니.
“원래 다 그러면서 크는 거야. 나도 조감독 할 때 많이 그랬어.”
“이거야 원. 더러워서라도 저도 얼른 독립해야겠네요.”
“어쭈, 너도 빚내서 영화 만들어볼래?”
“죄송함다! 얼른 책상이랑 의자 나르겠슴다!”
투닥대던 두 사람은 곧 웃음을 터뜨렸다.
스무스하게 일을 처리하는 배준석과 달리.
이열호는 꽤나 툴툴대는 스타일.
그러면서도 할 건 다 한다.
무엇보다, 배준석처럼 뒤로 꿍꿍이를 꾸미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냥 회의실 하나 싼데 빌릴 걸 그랬나봐요.”
“그럴 돈이 어디 있겠어.”
“그래도, 명색이 영화 첫 리딩인데요. 너무 모양빠지는 게 아닌가 싶은데.”
“우리가 돈 보고 영화 만들어? 아니잖아. 배우들도 마찬가지고. 너 그냥 세팅하기 귀찮아서 그러는 거지? 파뜩 움직여라.”
다님길필름도 명색이 회사라 사무실이 있긴 하다.
다만 그리 넓지도 않고, 입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엉망인 상태.
그래서 회의실 대여를 고민했으나, 그조차도 부담이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해야지. 원래 예술은 배고프게 해야하는 거라잖아.”
“이왕이면 배부르고 등따시면 좋잖아요.”
유진으로 아역 캐스팅을 결정한 이후.
당연히 양진우 쪽은 발을 뺐고.
배준석과도 절교하게 되었다.
양진우를 캐스팅하고, 투자금을 받았다면.
확실히 좀 더 여유로운 상황이었을 것.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한 명의 감독으로서.
한 명의 어머니로서.
“아. 그러고보니 우리 딸도 오늘 오고 싶어 했는데.”
“네? 따님이요? 이런데 오는 거 안 좋아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이열호가 놀라서 물었다.
유신애는 낯선 사람이 있는 곳을 극도로 싫어했으니.
이열호도 유신애와 몇 번이나 마주쳤지만.
아직까지도 낯을 가릴 정도였다.
“맞아. 그런데 요즘 갑자기 배우들한테 관심이 많아진 모양이더라. 책만 보던 애가, 갑자기 드라마까지 본다니까?”
유신애는 배우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가끔 자신이 쓴 소설의 가상 캐스팅을 위해 인터넷을 검색할 뿐.
그런데 최근.
책보다 TV 앞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혼자서 드라마 대사를 막 따라하기도 하고 말이다.
“하긴, 한창 TV에 빠질 나이긴 하죠. 드라마는 뭐 보는데요?”
“여러개 보는데, 재방까지 챙겨보는 건 <유별난 친구들>이라고 하더라.”
“아, 그거! 박유진이 출연하는 드라마 맞죠? 케이블 드라마치고 인기 많던데.”
최희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재밌는 게 뭔지 알아? 신애가 드라마 보고나서 드라마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유진이 얘기를 한다니까? 저 배우는 유진이보다 못 생겼다. 유진이보다 연기를 못 한다. 그런 식으로.”
“자기 친구가 TV에 나온다니까 신기해하는 모양이네요.”
“응. 그것도 그런데, 좋고 싫다는 의사표현이 늘었어. 원래 싫은 소리도 잘 안하는 애였는데.”
소심한 유신애가 최근 말이 많아지고, 제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엄마 입장에서는 꽤 기분 좋은 일.
‘거의 모든 주제가 유진이랑 관련되어있긴 하지만.’
아무튼.
밝아진 유신애의 모습에 덩달아 최희숙도 기분이 좋아지고 있는 중이다.
엄마 노릇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아 항상 마음이 쓰였기에.
때문에 유진에게 또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그나저나, 그 박유진이가 출연하는 그 드라마요. 그거 요즘 반응 완전 좋던데. 우리도 그 덕 좀 보는 거 아닐까요?”
“덕은 무슨. 유진이도 기껏 나와 봐야 단역일 거 아니야.”
“무슨 소리예요? 걔 분량 완전 주조연급인데.”
“뭐? 아역이?”
최희숙은 제 딸이 무슨 드라마를 보는지는 알아도.
딸과 함께 드라마를 본 적은 없었다.
배준석이 나간 이후.
배준석 몫의 일을 최희숙이 모두 도맡아야 했으니.
집에서도 일을 처리하기 바빴다.
그래서 유진이 1,2회 쯤 나오는 조단역이라 착각하고 있었던 것.
“그래봤자 케이블 드라마잖아.”
“진짜라구요! 시청률도 3% 넘었다니까요? 케이블 드라마가 3%라니. 전 그런 거 처음 봤어요.”
지금은 아직 케이블의 영향력이 약한 시절.
케이블 드라마의 시청률은 2%만 넘어도 대박이라고 친다.
즉, 3%면 초대박이라 할만한 수준.
“요즘 제 친구들 중에서도 그 드라마 얘기하는 애들 있어요. 요즘 박유진, 걔 때문에 드라마 본다면서요.”
놀라운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으니.
“게다가 걔 빅터의 재오 연기 스승이라고 요즘 난리잖아요. 이야, 우리 영화도 걔 덕 좀 보는 거 아닙니까?”
<리플레이>에 캐스팅된 이후.
차근차근 제 인지도를 높여온 유진이다.
마치 무언가를 준비하는 것처럼.
그때.
최희숙은 유진이 했던 말이 불현 듯 떠올렸다.
‘저 유명해질 거거든요! 제가 관객들 많이많이 모을게여!’
최희숙은 미약하게나마 소름이 돋았다.
설마 그 말이 진짜였단 말인가.
‘대단한 애라는 건 알고 있었어. 핵심을 파악하는 안목, 미친 연기력, 비주얼. 다 갖췄으니까. 그런데.’
오디션에서 유진의 잠재력을 엿보긴 했으나.
아직 어린아이라는 제약이 있지 않은가.
게다가 스타성은 별개다.
사람들의 시선을 휘어잡을 수 있는 능력.
그건 연기력과는 별개니까.
‘하다못해 중, 고등학생쯤은 되어야 뜰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내 생각보다 빨리 터지려나?’
최희숙의 생각이 깊어져 갈 와중.
겨우 책상 세팅이 완료되었다.
허리를 펴며 괴성을 내지르는 이열호.
“이따 저녁은 감독님이 쏘시는 거죠?”
“책상 몇 개 날랐다고 무슨. 그리고 난 놀았어? 같이 했는데.”
“아니, 진짜 쪼잔하시네. 아, 그럼 저랑 내기 하나 하실래요?”
“무슨 내기?”
“오늘 가장 먼저 도착하는 배우 맞히기.”
내기 내용을 들은 최희숙.
짧게 고민하다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부터 골라. 누구 찍을 건데?”
“전 당연히 하진무 씨죠.”
하진무.
연극, 뮤지컬 등 대학로에서 주로 활약했던 배우.
최근 여러 상업영화에서 ‘씬 스틸러’로 활약 중이다.
마스크가 그리 강렬하지 않지만.
그를 압도하는 분위기와 캐릭터 메이킹이 장점이다.
“원체 성실하다고 소문난 배우잖아요? 거기다가 주인공인데. 당연히 가장 먼저 오시겠죠.”
하진무는 연기경력이 제법 길고, 최근 기세를 보면 으스댈 법도 하다.
하지만 그는 성실과 겸손을 모토로 사는 배우였다.
촬영, 리딩, 제작발표회 등.
모든 자리에 언제나 첫 번째로 도착하는 사람.
“단점이 있다면, 너무 좀 꼰대 같은 면이 있다는 거지만.”
“뭐, 그만큼 프로페셔널한 배우니까.”
“아무튼 제가 하진무 씨 먼저 찍었으니까, 감독님은 다른 사람 고르셔야 해요. 이건 뭐, 내가 무조건 이긴 거지.”
유치하게 굴며 희희낙락 웃는 이열호.
그런데 최희숙도 피식 웃는 게 아닌가.
“글쎄. 난 생각이 좀 다른데.”
“헐, 진짜요? 대박. 누군데요?”
“박유진.”
뜻밖의 이름에 이열호는 헛웃음을 지었다.
“에이, 따님 친구라고 너무 띄워주신다.”
“난 진심인데?”
“지각은 안 하겠지만 뭐 하진무 씨보다 일찍 오겠어요? 아역이라 분량도 얼마 안 되는데. 아역들이 뜨는 시간 못 견뎌하기도 하고.”
“뭐, 두고 보면 알겠지.”
최희숙의 직감.
그녀는 유진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제 집에 놀러와 <리플레이> 대본을 받아가고.
오디션에서 미친 연기력을 보여주고.
결국 양진우를 제치고 캐스팅되기까지의 과정을.
‘그 아이라면, 분명 평범하지 않을 것 같단 말이지.’
“하진무 씨는 보통 약속시간 1시간 30분 전에 도착한댔죠? 지금 2시간은 남았네. 이제 30분 내로 박유진이 안 오면 오늘 저녁은 감독님이······.”
똑똑.
그때.
사무실에 울리는 노크소리.
이열호는 흠칫 놀랐다.
그리곤 문과 최희숙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해? 문 열어드려.”
설마. 아니겠지.
그런 마음으로 걸어간 이열호.
그러나, 문을 여는 순간.
“안녕하세요. 아역배우 박유진입니다아!”
그의 예측은 무참히 박살났다.
“오늘 저녁은 네가 쏘는 거다? 몸도 허한데 한우로 몸보신 좀 해야겠다.”
뒤쪽에서 최희숙이 킬킬댔다.
“으, 예. 어스오습스으.”
반드시 이긴다고 생각한 내기에서 져서 분한데.
그걸 영문도 모르는 어린애한테 표출할 수는 없고.
덕분에 이를 악물고 억지로 웃는 이열호였다.
*
“저희가 너무 일찍 온 건가요?”
차동석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뇨, 그럴 리가 있나요. 어서 오세요.”
웃으며 그들을 반기는 최희숙.
내기에서 이긴 것보다.
제 예측이 들어맞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기뻤다.
“자, 유진이 자린 여기예요.”
촬영 배우 자체가 많지 않고.
협소한 사무실에 급조된 세팅이지만.
<명준 아역 - 배우 박유진>
책상 위에 올라온 지정 표시.
A4용지를 접어서 만든.
꽤 조잡한 표시였으나.
“와. 진짜 멋지다!”
유진에겐 그걸로 충분했다.
눈동자는 감격한 듯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으니.
“유진아 뭐 마실래? 매니저님도 뭐 드실래요? 조감독. 가서 냉장고에서 음료 좀 꺼내와.”
“예, 예.”
이열호는 사무실 냉장고에서 몇 가지 음료를 골라왔다.
“감사합니다아.”
그 중에서 자신이 마실 것을 고르는 유진과 차동석.
“전 이거!”
어린애는 솔의 눈물을 마시고.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험상궂은 남자는 초코우유를 마시는 요상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유진아. 왜 이리 일찍 왔어?”
최희숙이 물었다.
그 사이 벌써 솔의 눈물 한 캔을 다 비워버린 유진.
곧 청량하게 대답했다.
“엄청 떨렸거든요! 그리고 일찍 오고 싶기도 했구. 아, 그리고 감독님하고 얘기하고 싶어서요.”
“뭐야. 신애 얘기하려고?”
느닷없이 끼어드는 이열호.
최희숙이 등짝을 때리며 만류했다.
“대본이요. 조금 바꼈자나요.”
예상과 전혀 다른 답변에 흠칫 놀란 이열호.
하지만 최희숙은 비교적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장면이 새로 하나 추가됐지.”
“아니, 거기 말고요.”
고개를 저으며 말하는 유진.
“대본 81페이지에 청년 명준의 대사도 그렇고. 171페이지 중년 명준의 대사도 그렇고. 대사가 쪼금? 바뀌어있더라고요. 그, 대사 끝부분을 뭐라고 하더라. 아, 맞아. 어미! 국어시간에서 배웠어요. 어미가 달라졌어요.”
그 말에 최희숙이 흠칫 놀랐고.
이열호는 벌어지려는 입을 억지로 다물었다.
‘설마, 대본을 다 외운 거야?’
그런데 대본을 다 외웠다는 사실이 아니라.
학교 국어시간에 ‘어미’란 단어를 배웠다는 걸 자랑하는 유진.
‘아역배우가 감독이랑 대본 얘기하려고 2시간 일찍 리딩에 도착한다고? 애늙은이야 뭐야?’
유진의 말대로.
최희숙은 얼마 전 대본을 수정했다며 새로 보내줬다.
가장 큰 변화는 새로운 장면 추가.
바로 아역 파트.
즉 유진의 분량이 늘었다.
이후엔 성인 배우들 분량의 대사 어미, 뉘앙스 등을 바꿨을 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부분이다.
그러나 의외로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내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래. 그런데 그 부분이 왜? 뭔가 걸리는 게 있니?”
“궁금한 게 있어서요. 추가된 장면도 그렇고, 혹시 그거 제 연기에 맞춰서 수정하신 건가요?”
거리낌 없이 말하는 유진.
그에 사무실 전체에 동요가 일었다.
‘어린애답지 않아. 아니, 오히려 어린애 같은 건가? 그래서 저렇게 대놓고 말할 수 있는 거야?’
나 때문에 대본 방향성을 수정했느냐.
감독에게 대놓고 물을 수 있는 배우가 얼마나 될까?
사실이라 해도 매우 건방져보일 테고.
혹시 아니라면 어마어마하게 쪽팔린 일이니까.
‘자기 연기에 대한 확신이 있는 건가? 아니면, 영화 자체를 확실히 꿰뚫고 있어서? 둘 다인가?’
이열호가 점점 오리무중이 되어가고 있을 때.
“그래, 맞아. 네 연기에 맞춰서 수정하고 추가한 거야.”
송미연과는 다르게.
쿨하게 인정하는 최희숙.
최초 구상한 명준은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이었다.
그러나 유진이 연기한 명준은 태어나길 애초에 괴물이었던 인물.
그 간극은 제법 크다.
그러나.
오디션에서 유진이 보여준 명준이 그만큼 매혹적이었고.
최희숙은 그 매력을 살리는 방향으로 대본을 수정한 것.
“으음, 그렇구나아. 근데 괜찮을까요?”
“응? 뭐가?”
“대본이 수정되면 누가 화를 낼 것 같아요.”
대본 수정에 화를 낸다니?
뜬금없는 얘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최희숙.
“음, 그러니까. 이거 표현하기 좀 어려운데.”
입술을 오물거리던 유진.
곧 차동석의 옷소매를 붙잡고 쭉쭉 늘려댔다.
그제야 의중을 눈치챈 차동석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아. 그러니까 우리 꼬맹이의 말은. 아무래도 아역배우한테 맞춰 대본을 수정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성인 배우들이 모두 불쾌해할 수 있다. 그런 뜻인 것 같습니다. 차 타고 오는 길에 대본을 보며 내내 걱정하더군요.”
이열호는 저도 모르게 와, 하고 감탄했다.
‘이젠 성인 배우들의 자존심, 눈치싸움까지 걱정하는 거야? 얘 대체 뭐하는 애야?’
게다가 정말 하기 힘든 말은 대놓고 하고.
막상 다른 말은 빙빙 돌려서 하는 것 같았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네, 진짜.’
내기고 뭐고.
이열호는 이미 유진에게 강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벌써 유진이 보여줄 연기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을 정도.
“그건 걱정하지 마. 대본 수정은 언제든 있는 일이거든. 그리고 내가 캐스팅한 사람들 다 좋은 사람들이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최희숙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강한 의지.
최희숙의 말대로.
크랭크인 이후에도 수시로 바뀌는 게 바로 대본이다.
감독의 의중이 강하게 녹아들어간 독립영화에선 흔히 있는 일.
현장 수정은 기본에, 갑자기 결말이 바뀌기도 하고.
심지어 드라마처럼 쪽대본으로 찍는 영화도 있을 정도.
무엇보다.
유진의 오디션 연기를 지켜본 건 스태프들 뿐.
일부러 말하지 않는 이상, 배우들은 모를 것이다.
“음, 전 안 그럴 것 같아요.”
그런 와중.
거리낌 없이 말하는 유진.
“인터넷 봤는데, 요즘 제 얘기가 엄청 많더라구요. 음, 뭐라더라? 맞다. 화제성! 그거 때문에 바꿨다고 생각할 거 같은데. 그죠?”
그 말에 흠칫 놀라는 최희숙과 이열호.
유진이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지적했으니까.
드라마 <유별난 친구들>, 아이돌 재오와의 인연.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유진이다.
그런 와중에 아역 분량을 추가하고, 대본을 수정한다?
“······감독님이 화제성을 쫓는다고 생각할 여지가 다분하네요.”
이열호가 말했다.
최희숙은 유진의 오디션 연기에 감명을 받아 대본을 수정한 것 뿐이지만.
그 타이밍이 공교롭게 겹치고 만 것.
“무엇보다 하진무 배우가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 연기경력, 연차, 나이. 이런 거 엄청 따지는 사람이잖아요?”
이열호의 말대로.
하진무는 프로페셔널함과 꼰대스러움을 동시에 갖춘 배우였다.
이 사실을 알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터.
“최대한 잘 설명해야지.”
그렇게 대답한 최희숙이지만.
그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진무 배우든 누구든, 유진이의 연기를 보면 다 납득할 거야. 하지만.’
결국엔 유진이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흐름이다.
최희숙의 욕심으로 벌어진 일이지만.
정작 최희숙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괜한 짓을 해서 이 아이에게 짐만 지워준 건가?’
최희숙이 그렇게 자책하고 있을 때.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활짝 웃으며 말하는 유진.
최희숙과는 달리 걱정따윈 전혀 없는.
천진한 장난꾸러기의 미소였다.
“제가 그 배우님, 깜짝 놀라게 해볼게요!”
그러나 아주 잠깐.
유진의 눈에 도는 이채.
그 눈빛은 기선제압을 노리는 승부사의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