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흔들리는 전철 안.
평범한 사람들에겐 흔한 일상적 공간이다.
하지만 거기에 침투한 비일상적 인물이 있었으니.
“야. 저기 봐, 저기!”
몇몇 사람이 수근대며 누군가를 가리켰다.
인파 속에 섞여, 혼자 대본을 읽고 있는 남자.
“저 사람 <악인정벌>에 나왔던 그 사람 아냐? 그 빌런!”
“어? 맞는 거 같은데?”
“그런 사람이 왜 지하철을 타고 있어?”
“와. 자가 없이 그냥 뚜벅이로 다닌다는 게 진짜였어?”
바로 배우 하진무였다.
최근 <악인정벌>이라는 영화가 흥행을 했고.
거기서 빌런을 맡은 하진무의 얼굴도 알려진 것.
하지만 그런 쑥덕거림에도.
하진무는 대본에만 열중하고 있는 상태다.
그리고 그가 읽고 있는 대본.
그게 바로 <리플레이>다.
‘갑자기 대본이 바뀌었어.’
수정 분량 자체는 많지 않으나.
그게 결정적으로 캐릭터를 뒤바꾼 느낌이었다.
‘바꾸기 전 캐릭터가 훨씬 선명한데. 그쪽이 더 호소력 있고 좋아. 지금은 어딘지 모호하고 추상적 느낌이고.’
사회가 만든 괴물로 표현되어야 할 주인공이.
악마성을 점점 진화시켜나가는 미친 싸이코패스로 변모했다.
‘거기에 아역 분량이 추가되었지.’
어째서?
물론 아역 쪽의 분량은 성인 배우들 쪽보다 훨씬 적다.
영화 초반부를 이끌어가고.
캐릭터의 근간을 형성하는 건 아역 부분의 몫.
그를 보충한다고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하지만.
‘아역을 맡았다는 걔, 박유진. 엄청난 화제가 되고 있지, 아마.’
하진무는 인터넷 뉴스로 접한 유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이돌 재오의 연기 스승이라고 했던가.
거기에 케이블 드라마에서 미친 비주얼의 아역이라며 소문이 자자했다.
‘그 아이의 화제성을 좇아 대본을 수정했다면?’
상상만으로도 벌써 짜증이 치솟았다.
최근 상업영화의 씬 스틸러로 활약하고 있는 그였으나.
본래 독립영화 필모그래피가 훨씬 많다.
배우 본인이 독립영화 쪽을 더 좋아하기도 했고.
자본의 간섭이 비교적 덜하니 분위기도 조금 더 여유롭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아이디어도 즉석에서 반영되곤 하니까.
그러면 자연스레 경력이 긴 하진무의 발언권도 강해진다.
‘설마. 아니겠지.’
그런 생각으로 대본을 덮은 하진무.
그가 <리플레이>를 선택한 이유.
그건 바로 대본 때문이었다.
‘연쇄살인마가 주인공이라는 특이함. 악에 대한 진지한 성찰. 그런 악을 양성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 훌륭한 텍스트였다고.’
그런데 고작 아역의 화제성 때문에 대본을 바꿨다면.
감독 스스로가 대본의 정수를 놓친다는 것.
‘그렇다면 그런 감독 밑에서 영화를 찍을 수는 없지.’
하진무는 강경하게 나갈 생각이었다.
곧 지하철에서 내려, 역을 빠져나왔다.
리딩 시간까지 정확히 1시간 30분 남았을 때.
하진무는 다님길필름의 사무실 문을 두드린 뒤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어서오세요, 진무 씨.”
들어가자 자신을 반겨주는 감독 최희숙.
그 외 다른 스태프들이 보였다.
“역시 진무 씨. 진짜 일찍 오시네요.”
“하하. 습관이라서요. 신인시절 극단에 있을 때 연출님이 강조하셨어요. 남들보다 일찍 다니라고요.”
하진무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습관을 지켰다.
일찍 도착해 감독과 대본에 대한 의견교환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고.
성실한 배우라는 인상을 줄 수 있으니까.
“다른 배우분들은 아직 안 왔죠?”
출연 배우 자체도 그리 많지 않고.
당연히 자신이 가장 먼저 도착했을 거라 생각한 하진무였으나.
“아뇨. 먼저 와 있는 배우가 있어요.”
“네?”
최희숙이 세팅된 책상을 가리켰다.
‘명준 아역’이라고 표시된 곳.
그러자 그곳엔 웬 낯선 어린애가 앉아있었다.
“이쪽은 명준 아역을 맡은 아역배우 박유진이에요. 한 시간 전쯤 왔더라고요.”
“그래요?”
최희숙의 소개에 놀라는 하진무.
설마 아역배우가 자신보다 일찍 올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으니까.
“만나서 반가워. 아저씨는 하진무라고 해. 네 이름이······유진. 박유진이구나?”
하진무는 악수를 건네며 젠틀하게 인사했다.
평소라면 방긋 웃으며 인사했을 유진이다.
“······.”
그런데.
지금은 의자에서 내려오더니.
어째선지 차동석 뒤로 숨어버리는 게 아닌가?
“죄, 죄송합니다. 꼬맹이, 빨리 인사드려!”
당황한 것인지 뭔지.
조금 어색한 투로 말하는 차동석.
“······안녕하세요.”
그제야 유진은 꾸벅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하하. 유진이가 낯을 많이 가리는 모양이군요.”
하지만 하진무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젠틀하고 매너 있는 사람.
타인에게 꽤 관대한 타입이니까.
“네? 아, 네. 그렇죠. 하하. 아, 저는 담당 매니저인 차동석입니다.”
유진을 대신해 꾸벅 인사하는 차동석.
유진이 살가웠다면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하진무지만.
말을 걸어봤자 부담만 줄 것 같아 그만뒀다.
하진무는 곧장 고개를 돌려 최희숙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나저나 이 귀여운 꼬마가 제 아역이라고요? 이거, 영화 개봉하면 주인공이 엄청 역변했다는 소리 듣겠는데요?”
“진무 씨 정도면 비주얼 괜찮죠.”
“하하! 농담도 잘 하시네요. 뭐, 그만큼 주인공이 피폐해졌다는 증거가 되려나?”
스스로 자학개그를 치며 분위기를 띄우는 하진무.
실제로 하진무는 비주얼에 강점이 있는 배우가 아니기도 했고.
그래도 비교적 동안이라, 40대의 나이로 29세의 명준을 연기하는 것.
그러나.
그의 말에는 뼈가 숨어있었다.
‘비주얼만 봐서는 영 어울릴 느낌이 아닌데.’
척 봐도 유진의 비주얼은 화려했다.
누구나 호감을 가질 만한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리플레이>에 어울릴지는 의문이었다.
연쇄살인마의 아역이라기엔 너무 예쁘장했으니.
“마실 것 좀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감독님, 말씀드릴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네. 그러시죠.”
최희숙은 하진무의 맞은편에 자리했고.
곧 하진무가 물었다.
“대본 수정을 통해 캐릭터가 다소 좀 바뀌었던데. 혹시 무슨 이유가 있을까 해서요.”
그러자 최희숙이 잠시 유진 쪽을 돌아보았다.
유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아역 오디션을 봤는데, 거기서 매우 인상적 연기를 보여줬거든요. 그래서 그쪽으로 캐릭터를 맞추기로 했습니다.”
그 말에 순간 표정이 굳는 하진무.
‘지금 나더러 저 애한테 맞추라고?’
겉보기엔 젠틀하고, 배려심이 많은 하진무였으나.
연기만큼은 별개였다.
하진무와 같이 일한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말.
연기 꼰대.
위계서열이 심한 극단에 오래 몸담았던 사람이라 그럴까.
하진무는 연기란 나이와 경력으로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했다.
‘연기란 상상력만으로 할 수 없으니까. 어린애가 노인을 연기할 수는 없지만, 노인은 어린애를 연기할 수 있어.’
그것이 그의 철학.
그런데 대본이 좋아서 영화 주인공을 수락했는데.
감독이 느닷없이 연기 방향을 아역에게 맞추라 말하고 있다.
‘아역이 저렇게 구는 거? 나 때는 상상도 못할 일이야. 아무리 애라도 그렇지. 선배님이 왔는데 제대로 인사를 해야지! 그런데 감독은 나보고 저 애한테 맞추라는 거야? 진짜 세월 참 많이 변했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당장이라도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감독님. 잠시 둘이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최희숙과 함께 잠시 사무실 밖으로 나온 하진무.
곧 넌지시 최희숙에게 질문했다.
“감독님. 저 친구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신 겁니까?”
그런 하진무의 속도 모르고.
태연하게 대답하는 최희숙.
“우연이에요. 제 딸아이와 같은 반 친구거든요. 저희 집에 놀러왔다가, 우연찮게 아역배우라는 걸 알게 되어서요. 그때 오디션 참가 제의를 했어요.”
“아. 그렇군요. 따님 친구였다.”
지금 하진무의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에선 열불이 뻗치는 중이었다.
‘뭐야. 심지어 감독 인맥 낙하산이라고?’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모든 게 이해가 갔다.
저 예쁜 바보가 배우랍시고 나와있는 것도.
아역을 기준으로 대본을 수정한 것도.
감독이 저렇게 아역을 띄워주는 것도.
‘대본보고 승낙한 내가 멍청했지. 당장 때려치우고 싶을 정도야.’
이미 하진무에게 최희숙은 감독답지 못한 주책바가지 아줌마였고.
유진은 좀 예쁘장하게 생겼다고 배우 타이틀을 단 꼬마였다.
‘일찍 온 것도 지들끼리 수다나 떨려던 거겠지. 허! 영화가 장난이야?’
“아, 그렇군요.”
하진무는 배우답게 감정을 숨기는데 능숙했다.
“감독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기대가 되는데요? 대체 얼마나 잘하는지요.”
물론 기대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비꼬는 것이다.
낙하산이 연기를 잘 하면 얼마나 잘하겠는가?
그런데.
“지금 연기하고 있는 거예요.”
최희숙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네?”
무슨 소리냐는 듯, 얼빠진 소리를 내며 되묻는 하진무.
“리딩 전에 미리 감정 잡고, 캐릭터에 동화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하진무 배우님께 먼저 말씀드리려 했는데, 전화를 안 받으셔서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땐, 대본에 집중하기 위해 무음 모드를 해놓는 하진무다.
때문에 최희숙의 연락을 못받은 것.
“지금 저 애가, 메소드 연기를 하고 있다고요?”
메소드 연기.
배우가 극중 배역에 완전히 몰입.
그 인물 자체가 되어 연기하는 극사실주의적 연기법.
아무튼.
그렇다면 그 말은.
지금 보여주고 있는 저 모습이 연기일 뿐이란 말인가?
“아, 그래도 인사는 제대로 하라고 일러줘야 했는데. 제가 알려주고 올게요.”
“아뇨.”
최희숙이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하진무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지켜보죠.”
최희숙의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인터넷으로 보던 모습과는 괴리가 컸어.’
아예 다른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만약 연기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소속이나 대중이 만들어낸 거품이라고 의심했을 터다.
‘하지만, 그 모습들이 정말 연기라고?’
그렇다면.
“어디 실력 한 번 보죠.”
그렇게 다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
“유진아. 아저씨가 네가 연기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그러는데. 대본 한 번 읽어보겠니?”
하진무의 목소리가 제법 거만해졌다.
경력이 긴 배우로서.
유진의 연기를 평가해줄 생각이었으니까.
“······.”
유진은 어딘가 흐리멍덩한 얼굴로 차동석을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것처럼.
그러자 오히려 차동석이 더 당황했고.
“어, 음. 하, 한 번 해봐. 꼬맹이.”
그제야 느릿느릿 움직이는 유진.
ㄷ자 책상의 중앙 빈공간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아.”
게다가 대본을 놓치기도 하고.
“저어, 몇 페이지예요?”
심지어 제 분량이 어디인지조차 잘 모른다.
“······후우.”
점차 열이 뻗치는 하진무.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을 거슬렀다.
‘쟤가 정말 요즘 핫한 그 박유진 맞아? 다른 애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말도 못하고 낯을 가리는, 엄청 소심한 아이.
화려한 비주얼에 비해 움직임이 굼뜨고 느린 아이.
한 마디로.
‘예쁜 바보.’
지금 하진무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으니까.
그런데.
‘잠깐. 저게 연기라고 했지?’
뒤늦게 최희숙이 했던 말을 상기했다.
유진은 지금 캐릭터에 동화되어 연기 중이라고.
지금 저 모습은 사실 본 모습이 아니라고.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아니면 원래 성격이랑 비슷하든가.’
그 정도로 유진의 지금 모습은 위화감이 없었다.
저 움츠러든 모습이며 어눌한 목소리, 느릿한 행동.
모두 꾸며낸 티가 하나도 없었다.
연기 디테일이 아니라, 그냥 그런 사람인 것처럼 보일 지경.
‘아냐, 불가능해. 그럴 리가 없어.’
고작 8살짜리 아이가 메소드 연기를 한다는 것.
연기 꼰대로서 하진무는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연기란 재능보다 경험이야.’
연극판에 오래 몸을 담고 연기를 해온 사람으로서.
하진무는 뜨고 지는 수많은 배우를 지켜봐 왔다.
그 중엔 재능이 넘치는, 어리고 젊은 배우들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자기 재능에 취하는 경우가 많았지. 빠르게 떠올랐다가 빠르게 몰락했어.’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그렇기에 하진무는 연차, 경력을 신봉했다.
“가능할 리가 없어.”
그렇게 읊조린 하진무.
고개를 들어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래.
저 흐리멍덩한 눈동자.
저 얼빠진 얼굴이 연기일 리가 없다.
“똑바로 연기해.”
하진무의 목소리가 낮고 싸늘해졌다.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대본을 들고 멍하니 서 있는 유진에게 하는 말이었다.
유진과 하진무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런데.
‘······뭐야.’
하진무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 영혼없던 멍한 눈빛에.
점점 색이 생기기 시작하고.
이내 곧 매우 강렬한 이채를 띠었으니까.
마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오고
그게 사방으로 퍼져나가듯.
그건 너무나도 놀라운 광경이었다.
연기경력이 긴 하진무도 처음 보는 모습.
‘······대체 뭐지?’
그에 압도당한 하진무.
그대로 얼음처럼 얼어버렸다.
“죄송합니다아.”
그리고 그 얼음을 녹이듯.
갑자기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내는 유진.
“역시, 티가 많이 났죠? 아흐. 너무 어렵다!”
제 머리를 싸매며 앓는 소리를 내는 유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목소리도 웅얼거리고 굼떴던 유진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은 어깨를 펴고 당당해졌으며, 말도 빨라졌다.
목소리의 톤, 얼굴 표정, 눈빛까지.
마치 무언가 빙의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
“안녕하세요. 아역배우 박유진입니다아! 이제야 인사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리곤 처음 보는 것처럼.
하진무에게 90도 인사를 건네기까지.
“깜짝 놀라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죄송해요. 아, 아직 갈 길이 멀다아.”
유진이 갑자기 평소대로 돌아온 것.
하진무가 말한 ‘연기 똑바로 해라’라는 말 때문이었다.
즉, 여태 하진무에게 보여준 모습이 연기였고.
그를 하진무에게 간파당했다고 생각한 것.
“······허.”
하진무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간파하기는. 오히려 내가 한 방 먹었지.’
아까 유진이 보여준 그 모습들이 정말 연기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으니.
두 귀로 듣고.
두 눈으로 봐도 믿기 어려웠다.
‘메소드 연기를 했으면서 후유증이 전혀 보이질 않아. 아까와는 그냥 아예 다른 사람 같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