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씹어먹는 천재배우님-25화 (25/237)

25화

스타일리쉬하게 머리를 빡빡 민 남자.

영화감독 정범.

그는 편집실에서 나오자마자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거절?”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캐스팅 디렉터에게 되물었다.

“진짜 캐스팅 제의를 거절했다고?”

“네.”

“이유가 뭐래?”

“다른 작품에 들어간다고 하던데요.”

그러자 정범은 더더욱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

“아니, 겹치기 출연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다른 작품 한다고 내 작품을 못 해?”

그는 스스로도 알고 있다.

최근 충무로에서 자신이 얼마나 핫한지를.

얼마나 많은 배우들이 자신과 함께 작업하고 싶어하는지를.

“대체 뭔 자신감으로 내 작품을 까는 거야?”

그래서 더욱 이해가 안 간다.

케이블 드라마로 겨우 얼굴 알리고.

아이돌 덕분에 화제성을 알린 아역이, 왜 자신의 작품을 거절했는지.

“그, 그럼 일단 다른 아역으로 바꿀까요?”

덜덜 떨며 묻는 캐스팅 디렉터.

한눈에 봐도 정범을 무서워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안돼. 걔가 한창 핫할 때 뽑아먹어야 한다고!”

아니나 다를까.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정범.

영화감독 정범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

바로 화제성이다.

그게 미담으로 인한 것이든, 논란으로 인한 것이든.

정범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대중들의 입에 얼마나 많이 오르내리느냐.

그것만을 중시하는 것.

그리고 그 자극적인 재료들을 잘 요리해 내놓는 것.

그게 바로 정범 감독의 흥행요인이다.

“지금 걔만큼 화제성 있는 아역이 있냐? 없잖아!”

이번에 그가 집필한 <짐승>은 아역의 비중이 꽤 높은 편.

즉, 정범이 캐스팅하기에 유진이 제격이다.

애초에 거절할 거란 예상을 안 했기에, 아직 다른 대안이 없다.

“다시 연락 넣어봐. 촬영 스케줄 최대한 편의 봐준다고 꼬셔보고.”

*

“용재야.”

“예?”

“우리 작품 잘 될 것 같다.”

“갑자기 뭔 소리예요? 홍삼 캔디 너무 먹더니 뭐 문제 생긴 거 아니죠? 그러니까 그것 좀 그만 드시라니까.”

마침 홍삼 캔디를 연달아 5개째 까먹고 있는 이선화 감독.

마치 줄담배를 피우듯이 말이다.

“아니, 봐봐. 내가 박유진 원한다니까 바로 연락 왔잖아! 신이 내 기도를 들어주신 거지.”

“어휴, 우리 감독님. 이젠 미신에 의지하기 시작하시네.”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는 곽용재.

“걔가 요즘 화제성이 넘치긴 해도, 아역 하나 참여했다고 뭐 크게 달라지진 않겠죠. 거기다가 박유진 걔 비주얼로 유명하다면서요? 더빙한다고 뭐 얼마나 보러 오겠어요?”

“그래도 이게 어디야. 상상만 했던 일이 현실이 된 건데. 그리고 자꾸 초칠래?”

“감독님이 너무 들뜬 것처럼 보이니까 그렇죠.”

블루컬쳐 스튜디오는 항상 이런 식이다.

이선화가 일을 벌이면 곽용재가 현실적인 일침을 놓는 형태.

얼핏 보면 티격태격하는 것 같지만.

덕분에 회사가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다.

추진력의 이선화와 현실적인 곽용재.

서로가 상호보완적 관계인 것.

“너무 큰 기대갖지 말자는 소립니다. 솔직히 퀄리티 걱정부터 해야죠. 걔 더빙 경력도 없을 텐데.”

“네네, 잘 알겠네요. 잔소리 그만하고 녹음 준비나 하자.”

장미소로부터 연락을 받은 뒤.

블루 컬쳐 스튜디오는 바로 미팅을 주선했다.

그 이후 계약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고.

곧장 유진의 녹음날짜가 잡힌 것.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안녕하세요! 박유진입니다아.”

잠시 후.

녹음실에 도착한 유진.

환하게 웃는 모습만으로 주변을 밝게 만들어주었다.

‘확실히 저런 비주얼을 놔두고 목소리 연기를 시킨다는 게 좀 그렇긴 하네.’

뒤늦게 곽용재의 말에 납득하는 이선화.

저 비주얼을 놔두고 목소리만 쓴다니.

뭔가 손해를 보는 기분이랄까.

‘메이킹 영상이라도 많이 찍어놔야겠다.’

그렇게 다짐하는 이선화였다.

“안녕하세요. 주역 매니지먼트의 장미소입니다.”

오늘은 특이하게 차동석이 아닌.

장미소가 유진의 매니저로 따라나섰다.

즉.

이곳에 온 목적이 있다는 것.

하지만 아직 드러낼 생각이 없는지.

그저 잠잠한 장미소였다.

“보내주신 영상 다 봤어요. 이거 엄청 인기 많을 것 같아요!”

더빙에 들어가기 전.

제작사는 성우에게 미리 준비할 수 있게 영상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유진은 <날개>의 내용을 미리 다 보고 온 것.

“진짜요? 고마워요. 우리도 인기가 많았으면 좋겠네.”

웃으며 말하는 이선화.

그녀에게 <날개>는 엄청난 성공을 기대하고 만드는 작품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꿈을 이루기 위한 도전.

거기에 의의를 둔 작품이었다.

“저희 작품에 참여하고 싶은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솔직히 너무 놀랐거든요.”

그래서 이선화는 궁금했던 것이다.

누가 봐도 흥행성이 떨어지는 이 작품을.

유진은 무슨 이유로 선택했을까?

“물론 저희도 박유진 배우에게 제의를 할까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아서 넣질 못했거든요.”

“우리 배우가 강력히 희망했습니다. 다른 작품 말고, 오로지 이 작품만 하고 싶다고요. 작품이 마음에 든다고 하네요.”

장미소의 대답에 더욱 놀라는 이선화.

“어떻게 저희 작품을 알고······기사가 엄청 나온 것도 아니고, 홍보도 거의 안 됐는데.”

“인터넷 사이트 봤거든요. 막 그림이랑 음악이랑 올리셨잖아요.”

이번엔 유진이 대답했다.

그 말대로.

이선화는 <날개>를 제작하며 블로그에 글을 썼다.

제작일기 형식으로.

러프 이미지, 미완성된 곡 등을 업로드했다.

영세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블루컬쳐 스튜디오가 할 수 있는 일.

그건 최대한 인터넷을 활용하는 것뿐이었으니.

‘하지만 우리 사이트 조회수 진짜 처참한데. 그걸 찾아본 거야?’

일부러 찾아보지 않는 이상 찾기 어려울 정도다.

‘신기하네. 이걸 인연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곧 더빙을 위해 녹음실로 들어간 유진.

유진의 키에 맞춰 마이크와 모니터가 세팅되어 있었다.

“자, 그럼 박유진 배우. 먼저 더빙 가이드 한 번 듣고 해봅시다.”

컨트롤룸의 곽용재가 입을 열었다.

더빙 가이드.

전문성우가 미리 녹음해둔.

‘이렇게 하면 된다’는, 말 그대로의 가이드 라인이다.

더빙 작업은 꽤 섬세한 작업.

화면 속 인물과 입길이를 맞춰야 하고.

전달을 위해 발음도 정확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인물의 감정과도 잘 어우러지는 연기를 해야 한다.

일반적 연기에 비해 제약이 많은 셈.

그래서 초보자는 헤매기 일쑤다.

그러니 이 더빙 가이드.

첫 더빙 연기를 하는 유진을 위한 배려인 셈.

“음, 먼저 제 느낌대로 해볼게요!”

그런데.

굳이 가이드를 듣길 거절하는 유진.

“네? 하지만.”

“일단 한 번 보자고. 어떻게 하는지. 나름 준비해왔을 테니까.”

영 미심쩍다는 얼굴의 곽용재.

곽용재는 더빙 디렉팅에 관해 굉장히 깐깐한 사람이었다.

어리다고 해서, 상대가 요즘 화제인 박유진이라고 해서.

결코 봐줄 생각은 없었다.

“그럼 한 번 보자고요. 얼마나 잘하는지.”

할테면 해보라는 듯.

곽용재가 의자에 몸을 기댔다.

*

그리고 2시간 뒤.

“수고하셨습니다아!”

유진은 상쾌한 얼굴로 녹음실에서 나왔다.

작품이 약 1시간 30분 분량인데.

녹음이 2시간 걸렸다.

그만큼 최소한의 NG로, 쉬지 않고 녹음했다는 뜻.

“······혹시 더빙해본 적 있어요?”

컨트롤룸에서 조우한 곽용재.

아까와는 달리,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더빙 초심자가 흔히 겪는 어색함도.

억지로 인위적인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경향도 없이.

유진은 그저 자연스럽게 캐릭터에 동화되어 연기했으니.

“아뇨. 없어요.”

그렇게 대답한 유진이었으나.

‘오랜만에 하려니 가끔 혀가 꼬이네.’

사실 배우로 잘 안 풀리던 시절.

성우 시험을 보기 위해 잠시 공부했던 시절도 있다.

성우 학원에서 유진의 실력을 칭찬하기도 했고.

‘하지만 결국 배우라는 꿈을 포기하지 못했지.’

연기라면 종류 따지지 않고 뭐든지 도전해본 유진이다.

뮤지컬 때문에 노래까지 배웠을 정도.

무명배우의 슬픔이기도 했으나.

결국 그 경험들이 재산이 된 셈이다.

“설마 이렇게 빨리 끝날 줄은 몰랐는데.”

시계를 보며 머리를 긁적이는 이선화.

이선화를 보며 유진이 물었다.

“어? 녹음 다 끝난 거예요? 노래 녹음은 안 해요?”

“네. 노래는 따로 뮤지컬 배우를 섭외해서 녹음할 생각이거든요.”

“그럼 아직 노래 녹음은 안 한 거예요?”

“네. 이제부터 박유진 배우 녹음본을 토대로, 목소리가 가장 잘 어울리는 뮤지컬 배우를 섭외할 생각이에요.”

“감독님.”

그때.

잠자코 있던 장미소가 나섰다.

“혹시 우리 배우, 노래 녹음도 가능할까요?”

그러자 흠칫 놀란 표정의 이선화와 곽용재.

“안 될 건 없지만, 노래가 많이 어려울 텐데요.”

굳이 뮤지컬 배우를 섭외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

노래 난이도가 꽤 높기 때문이다.

“어때, 유진아. 가능하겠어?”

“당근이죠!”

유진은 장미소의 물음에 힘차게 대답했다.

2시간 동안의 녹음으로 지쳤을 법도 한데.

오히려 지금부터 본방이라는 듯 눈빛이 바뀌었다.

“저 노래 대따 잘하거든요.”

유진이 <날개>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노래 때문.

<날개>의 대표곡 ‘날아가’는 공전의 히트를 치니까.

‘나도 질리도록 들었지. 노래방 가면 자주 부르던 노래기도 하고.’

회귀 전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만 가면 <날개> 얘기뿐이었고.

거리에선 계속 ‘날아가’가 흘러나왔다.

그 시대의 초등학생이었다면 모를 수가 없는 것.

수십 년이 지난 이후에도.

레트로 열풍을 타고 ‘추억의 명곡’이라 소개되었고.

다시금 인기를 끌기까지 했다.

‘명작은 시간이 지나도 사랑받기 마련이니까.’

곧장 녹음실로 다시 들어간 유진.

헤드폰 속에서 흘러나오는 건 ‘날아가’의 도입부.

유진에겐 추억이고.

블루컬쳐 스튜디오 사람들에겐 미래가 걸린 노래.

유진은 박자를 타고.

천천히 노래하기 시작했다.

나는 날개 없는 천사

여태껏 가라앉기만 했지

하지만 이제 상관없어

나는 이제부터 비행을 시작해

아름다운 비행을

내 몸이 가벼워져

난 이제 날아올라

모든 아픔들

모든 고민들

무거운 것들을 벗어던지고

변성기가 오지 않은 소년의 풋풋함과 청아함.

그 모든 게 녹아있었다.

소름 끼치는 가창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배우답게 확실한 딕션과 짙은 감정전달이 강점이었다.

저 별을 향해

날아올라

거기에 생각 외로 깔끔한 고음.

무엇보다.

어른들은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순수한 음색까지.

그야말로 뮤지컬에 가장 어울리는 가창력을 뽐낸 셈.

“어때요?”

노래가 끝난 뒤.

컨트롤 룸의 이선화와 곽용재를 향해 묻는 유진.

“저, 박유진 배우.”

이선화가 입을 헤 벌리고선 물었다.

“대체 못하는 게 뭐예요?”

처음 해보는 더빙 연기는 물론 노래까지 모두 완벽하다.

이선화의 눈에는 유진이 만능으로 보이는 모양.

“음, 춤을 잘 못 춰요!”

쑥스러운 듯 수줍게 대답하는 유진이었다.

*

녹음이 모두 종료된 후.

이선화는 헤드폰을 쓰고.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유진이 녹음한 ‘날아가’.

거기에 애니메이션을 재생하고 있는 것.

‘날아가’는 노래 자체가 좋은 것도 있지만.

애니메이션의 장면 연출이 극찬을 받았다.

날개 잃은 천사, 주인공 솔이 시련을 극복하고.

마침내 날개 없이도 날아오르는 장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드는 세심한 연출.

물론 창작자의 눈에는 그저 아쉽게 보일 뿐이다.

이선화도 마찬가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내 손으로 만들고, 수백 번은 본 장면인데. 왜 이리 새롭게 보이지.”

“노래가 더해졌으니까요.”

이선화의 혼잣말에 대꾸하는 곽용재.

그러자 이선화가 헤드폰을 벗었다.

“깐족댈 거면 그냥 가라.”

“전 그만큼 박유진의 노래가 좋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진짜, 설마 노래까지 잘할 줄은 몰랐어.”

“솔직히 가창력이 엄청 뛰어난 건 아니죠. 그런데 감정전달이 진짜······미쳤네요.”

유진의 순수한 음색.

노래에서 짙게 느껴지는 소년미.

그 덕분에 장면이 훨씬 극적으로 변한 느낌이었다.

이 노래 하나에 주인공 솔의 성장 스토리가 다 담긴 느낌이랄까?

“어? 감독님 홍삼 캔디 안 먹고 계시네.”

평소라면 오독오독 홍삼 캔디를 물고 있었을 이선화지만.

지금 그녀의 입엔 아무것도 없었다.

어쩐지 생각이 많은 모습.

“아직도 고민 중이세요?”

유진의 연기며 노래까지 기대 이상으로 뽑혔다.

그런데 정작 이선화는 기뻐하기보단 고심하는 모습.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략이라서. 넌 어떻게 생각해?”

“망하든 아니든, 이목은 제대로 끌 것 같아요.”

“도박수라는 건 확실하네. 그치?”

이선화는 아까 전.

장미소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날아가. 노래가 정말 좋네요.’

‘맞아요. 우리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죠.’

‘개봉 시기는 언제쯤으로 잡으실 생각인가요?’

‘이제 더빙 작업 끝나고, 모니터링 시사회 한 번 거치고 최종 수정한 다음 극장에 걸릴 것 같아요. 근데 아직 개봉일은 확정 못 했어요. 정범 감독님 작품이 조만간 개봉한다는 얘기를 들어서, 그것만 피하려고요.’

블루컬쳐 측은 어떻게든 상영관 하나라도 더 확보해야 하는 상황.

흥행보증 수표인 정범의 영화와 개봉 시기가 겹치는 건 자살행위였다.

‘그럼 개봉 전까지 홍보 전략은 있으세요?’

‘그게, 배급사에서 마케팅 전략을 말해주긴 했는데.’

뒷말을 흐리는 이선화.

그리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죄송하지만 박유진 배우에게 홍보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시겠지만 저희 배우는 비주얼로 화제가 된 케이스입니다. 애니메이션 더빙을 한다고 홍보해도 아마 별다른 효과는 없을 겁니다.’

곽용재와 똑같은 것을 지적하는 장미소.

에둘러서 말할 법도 한데.

놀라울 정도로 냉철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홍보 방법과 관련해서요.’

그런 장미소가 제안한 방법은.

‘이 하이라이트 장면. 먼저 인터넷에 선공개해버리죠.’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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