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빅터의 소속사 UB엔터테인먼트.
30층이 넘는 으리으리한 건물 안.
연습실에서는 재오의 연기 트레이닝이 진행 중이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와, 재오 씨. 훨씬 좋아졌는데요?”
“감사합니다.”
연기 트레이너의 칭찬에 꾸벅 고개를 숙이는 재오.
재오에게 연기 트레이닝을 붙여주지 않던 회사가.
공익광고 출연 이후 생각을 바꿨다.
아마 재오의 연기가 봐줄만한 수준이었던 모양.
‘그 이후로 뭔가 달라진 거 같아.’
재오 역시 마찬가지.
벽을 깨고 나니 재오도 제법 성장이 빨랐다.
본래 노력 하나로 살아남은 재오다.
방법을 터득한 이후로는 누구보다 열심히 연기 연습에 임했다.
‘사실 지금 받는 트레이닝들이 예전에 받은 수업들과 다를 바가 없어.’
과거 배우 지망생 시절 받았던 수업이나.
지금 연기 트레이너에게 받는 수업이나.
이론에선 큰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성장속도가 차이나는 건.
‘역시 유진이, 그 애 덕분이야.’
연기법을 알고 있는 것과 체득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유진이 가르쳐준 것은 바로 체득의 방법.
적어도 재오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물론 아직 독백연기 등은 어색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환골탈태 수준.
“모든 아픔들, 모든 고민들. 무거운 것들을 벗어던지고 저 별을 향해 날아올라.”
트레이너가 돌아간 뒤.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하는 재오.
바로 유진이 부른 ‘날아가’의 가사였다.
즉.
재오가 ‘날아가’를 언급한 건 립서비스가 아니라 진심이었다는 뜻.
“야, 재오야.”
그때.
연습실의 문이 열리고 조실장이 들어왔다.
“어, 형.”
“연기 수업은 받을만 하냐?”
“그럼, 당연하지. 진즉 좀 해주지! 왜 이제야 붙여준 거야?”
“그나마 요즘 스케줄 좀 줄어서 가능한 거지. 컴백 시즌 다가오면 아마 좀 힘들어질 거다.”
그 대답에 쯧, 하고 혀를 차는 재오.
“그럼 최대한 수업을 많이 들어야겠네. 그런데 무슨 일로 온 거야?”
“얘기해줄 거 있어서. 보건복지부 쪽에서 연락왔는데, 공익광고 곧 송출할 거랜다. 모니터링 하라고 우리 쪽에 영상 보내줬는데. 한 번 볼래?”
“아 진짜? 당연하지.”
조실장이 들고 온 모니터를 통해 재생되는 광고.
결과물을 보자 재오는 촬영 당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저도 모르게 집중해 빠져들었다.
영상이 끝난 뒤.
재오는 아무 말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치를 보던 조실장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보니까 네 분량이 좀 적긴 하네. 야, 그래도 너 첫 연기 도전치곤 잘했어. 거기에 의의를 두자고.”
“그게 문제야? 대박이다, 형. 나 진짜 영화보는 줄 알았어!”
손뼉까지 치며 감탄하는 재오.
표정이 심각했던 이유는 분량 때문이 아니라.
그저 엄청나게 집중했을 뿐이었던 것.
“와, 미쳤다. 영화 같다고 언플할만 했네! 이 정도면 반응 엄청 좋겠는데? 나도 지금 당장 아동학대 하는 놈들 족치고 싶은 심정이야.”
평소 빅터의 뮤비를 찍을 땐 내 분량이 적다느니, 이상하게 나왔다느니.
온갖 트집을 잡던 재오다.
그런데 이번 광고에선 전혀 신경쓰지 않는 모습.
“그리고 유진이 말이야. 진짜 연기 잘하지 않아? 와. 현장에서 볼 땐 몰랐는데, 화면으로 보니까 진짜 미쳤네.”
거기엔 유진의 연기도 한몫했다.
재오는 현장에선 유진이 보여준 연기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진일보한 지금은 느낌이 달랐다.
자신이 정확히 어떻게 보일지 알고.
어떻게 하면 사람의 감정을 건드릴 수 있는지.
유진은 그걸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럼 뭐 따로 요청할 건 없는 거지? 나중에 딴말 말고 지금 말해.”
“없어. 진짜 지금꺼 대박이야.”
“알았다. 그렇게 전할게.”
노트북을 닫은 조실장.
곧 무언가 떠오른 듯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그러고보니 박유진 측으로부터 연락이 하나 왔는데.”
“뭐. <날개> 시사회 참석해달라는 거?”
“어떻게 알았냐?”
“유진이가 나한테 문자했거든.”
그 말에 조실장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너, 답장 보낸 건 아니지?”
“당연히 간다고 했지. 마침 오후 스케줄 비는 날이더라?”
“하아. 재오야. 그 애 너무 띄워주는 거 아니냐?”
조실장의 말에 재오가 눈을 끔뻑이며 반문했다.
“누굴 띄워줘? 설마 유진이?”
“또 누가 있겠냐.”
“내가 언제 띄워줘? 그냥 언급 몇 번 한 게 다인데.”
“그게 띄워주는 거다. 아이돌 짬밥 몇 년을 먹었는데 아직도 그런 소릴 하냐? 요즘 자꾸 이상한 찌라시 돌잖아. 뭐 우리가 박유진 뒷배라는 둥, 둘이 뭐 친척이라는 둥.”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나? 말도 안 되는 소리 퍼뜨리는 놈들이 문제지. 어쩌다 친동생 같은 꼬마 하나랑 친해진 거 가지고 뭘.”
예능에서 노빠꾸로 유명해진 재오가 아닌가.
과연 재오다운 말이었다.
연기에 눈을 뜨게 해준 유진.
재오는 그에 대해 정말 고마워하고 있었다.
굳이 유진과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그리고 유진이랑 엮이는 거, 나쁠 거 없다며? 이미지 메이킹에도 좋다고 형이 그랬고. 지금 <날개>도 엄청 기대받고 있다며?”
“말은 잘해요, 진짜.”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닌 듯.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는 조실장.
“쯧. 널 누가 말리겠냐. 근데 그거만 명심해. 과하면 독이다.”
“알았어, 알았어.”
재오가 건성건성 대답했다.
그렇게 겨우 넘어가나 싶었는데.
“아, 형.”
“왜?”
“유진이, 나중에 빅터 뮤비에 출연시키면 어떨까?”
“얌마! 내 말을 어디로 듣는 거야?”
장난스레 재오의 등짝을 퍽 때리는 조실장.
하지만.
재오는 장난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
“후, 하. 후, 하.”
긴장했는지 연신 심호흡을 하는 차동석.
“오빠, 운전 똑바로 해.”
조수석의 장미소가 태클을 걸었다.
“똑바로 하고 있어.”
“그런데 왜 그리 덜덜 떨어?”
“긴장되니까 그렇지.”
“유진이도 긴장 안 하는데.”
차동석의 차 안이 꽉 찼다.
유진과 박태종은 물론이고.
장미소까지 함께 탑승했으니까.
“야, 꼬맹······유진아. 너 진짜 안 떨리냐?”
차동석이 백미러를 흘끗거리며 물었다.
박태종을 의식해 이름을 불러주면서.
“응? 무지무지 떨려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그 말대로.
긴장은커녕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유진이었다.
“아버님은 괜찮으십니까?”
“저, 저는. 괘, 괜찮습니다.”
그에 비해.
완전 로봇이 되어버린 박태종.
작품에 출연하지도 않은 어른 둘이서 잔뜩 긴장한 셈이다.
“난 사무실에 남아야 하는데.”
이런 와중에도 일 생각만 하는 장미소는 덤이었다.
“우리 주역 매니지먼트의 박유진 배우님 작품 시사회인데. 직원들이 빠지면 쓰나? 아, 자기야. 이참에 직원 좀 뽑을까?”
“이상한 소리 말고 앞이나 똑바로 봐.”
이들이 다 모여 이동하는 이유.
바로 <날개>의 시사회 날이기 때문.
그동안 유진은 여러 매체에 나가 <날개>를 홍보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박형광의 크레파스> 이후로 ‘날아가’를 라이브로 부르지 않았다는 것.
‘조회수가 분산되면 안 되니까.’
블루컬쳐 스튜디오 쪽이 공개한 영상.
그리고 크레파스 쪽에서 올린 유진의 라이브.
그 두 개에 조회수를 집중시킬 생각이었으니.
그리고 그 전략은 제대로 먹혀들었고.
[선공개 영상) 뮤지컬 애니메이션 <날개> OST – 날아가
조회수 – 501,232]
결국 50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이는 해외 네티즌들의 영향이 컸다.
휘즈니를 통해 공고히 형성된 뮤지컬 애니메이션 마니아들.
그들이 조회수를 보태기 시작한 것.
“지금 해외 수출도 논의하고 있댔지? 진짜 인생역전이다.”
“아직 안심하긴 일러. 개봉 후에 평가가 어떨지 모르니까.”
장미소의 태클에도 피식 웃는 차동석.
“잘 될 수밖에 없는 흐름이야. 내가 장담하는데, 분명 대박난다.”
유진은 속으로 차동석에게 동의했다.
‘그럼. 대박이 나고 말고.’
이미 미래를 알고 있으니까.
아니, 이 흐름이라면.
유진이 알던 미래보다 훨씬 대박이 터질 것이다.
잠시 후 차가 멈춰섰다.
오늘 시사회가 이루어질 곳은 동대문에 있는 메가쇼박스.
들어가자마자 <날개>의 포스터가 크게 걸려있었고.
‘날아가’의 한 장면을 본 따 만든 작은 조형물까지 전시한 상태.
“이야, 완전 꾸며놨네. 누가 보면 휘즈니 애니메이션 개봉하는 줄 알겠다.”
“그만큼 배급사에서 흥행을 예감하고 힘을 준 거지.”
직원의 안내를 받고 대기실에 도착한 네 사람.
그리고 잠시 후.
반가운 손님이 도착했다.
“유진이 하이!”
바로,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린 재오였다.
“재오 형아!”
유진은 곧장 재오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오늘 형이 진행 본다면서요? 완전 재밌겠다!”
그냥 시사회에 초대만 할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재오가 시사회 진행을 맡게 되었다.
“이 형이 요즘 예능에서 장난 아니거든. 실력 좀 보여줄게. 나를 예능 스승으로 모시게 될 거야.”
제 가슴을 팡팡 치며 호언장담하는 재오.
어쩐지 스승에 집착하는 모습이다.
그래도 한창 바쁜 와중 시사회 참석에 MC까지.
여러모로 재오가 큰 도움을 주는 셈이다.
‘물론 날 도와주는 게 선의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저쪽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니까.’
오늘의 초대권은 주로 어린아이가 있는 부모들에게 배부되었다.
재오로서는 지금의 개념돌 이미지를 더욱 확고히 메이킹하겠다는 뜻.
<날개>의 화제성에 조금 발을 걸치는 건 덤이다.
“무엇보다, 나도 얼른 보고 싶었거든. 네가 출연한 <날개>. 나중에 나 더빙 연기도 가르쳐 줘.”
“으음, 고민해볼게요.”
“하하. 역시 우리 스승님, 가르침이 호락호락하질 않으시네.”
그렇게 잡담을 나누다 보니 다른 참여 성우들도 속속들이 도착했고.
어느덧 시간이 다가왔다.
곧장 시사회가 진행될 8관으로 이동하는 일행.
박태종과 차동석, 장미소는 곧장 객석에 앉았고.
재오와 유진, 그리고 참여 성우들은 무대인사를 위해 잠시 대기했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먼저 마이크를 들고 등장하는 재오.
“안녕하세요! 오늘 시사회의 깜짝 진행을 맡은 빅터의 재오입니다.”
“헐!!”
“꺄아아아악!!”
“재오? 재오라고?”
예상치 못한 재오의 등장.
객석에서 어마어마한 환호가 터져나왔다.
“와, 오늘 <날개> 시사회에 많은 분들이 참석해주셨네요. 귀여운 왕자님, 공주님들까지! 어때요, 어린이 여러분. 오늘 많이 기다렸어요?”
“네!”
“얼만큼?”
“엄청요!”
“와, 정말 목소리들이 우렁차네요! 그 덕분에 저도 힘을 잔뜩 받아갑니다. 저도 오늘 무척 기대가 되는데요.”
재오의 능수능란한 진행이 이어지고.
점점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그럼 지금부터, <날개> 참여 성우진을 모셔보겠습니다! 큰 박수로 맞이해주세요!”
커다란 박수 세례 속.
유진은 맨앞에 서서 걸어갔다.
“와아아아아아!”
유진이 등장하자.
아까 재오 등장 때보다 큰 함성이 쏟아졌다.
그들 모두 ‘날아가’에 중독되어.
이번 시사회 티켓을 얻고자 발버둥쳤으니.
유진은 자리에 멈춰섰고.
잠시 객석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제게 쏟아진 시선들.
모두가 설렘과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와. 이런 기분이구나.’
여태 실감이 나지 않았던 유진이다.
하지만 관객들과 마주하고 나니.
그제야 조금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 더빙이긴 했지만.
처음으로 맡은 주인공 아닌가.
자신의 연기, 노래를 들으러 수많은 사람이 자리한 것이다.
이에 눈시울이 붉어지려던 유진이었으나.
‘울지 마. 이제 시작이니까.’
곧 깔끔하게 감춰버렸다.
“안녕하세요오! 주인공 솔 역할을 맡은 아역배우, 아니지. 오늘은 아역성우, 박유진입니다아!”
평소보다 더 허리 숙여 인사하는 유진.
그러자 아까보다 훨씬 큰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다.
“<날개> 정말 재미있는 작품이에요! 그리고 또, 이렇게 멋진 성우 형, 누나들이랑 녹음해서 너무너무 좋았어요. 오늘 찾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아!”
다른 성우들의 무대인사가 모두 끝난 뒤.
유진도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극장이 암전되고.
기대감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작한다.”
유진 옆자리에 앉은 재오가 속삭였다.
그것을 신호로.
영화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