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씹어먹는 천재배우님-32화 (32/237)

32화

몇 주가량이 흐른 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차동석의 자동차 안.

“아으, 힘들어!”

차동석은 어째선지 지독히 피곤한 얼굴이었다.

“위촉식이라고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계속 서 있느라 허리가 너무 아프더라. 뭔 축사부터 시작해서 구구절절 읊는 것도 많고. 갑자기 광고 시청은 왜 하는 건지.”

투덜투덜 불만을 쏟아내는 차동석.

대체 무슨 일인가?

해답은 유진이 들고 있는 상장 케이스에 있었다.

[위 촉 장

직책 : 홍보대사

성명 : 박유진

위 사람을 아동학대 근절 캠페인 홍보대사로 위촉합니다.]

공익광고가 예측보다 더 큰 반응을 불러일으키자.

보건복지부 쪽에서 유진을 ‘아동학대 근절 홍보대사’로 위촉한 것.

아동학대 근절 캠페인 홍보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게 그 이유다.

방금까지 그 위촉식이 진행되었던 것이고.

“꼬맹, 크흠. 유진아. 넌 안 힘드냐?”

주먹으로 제 허리를 두들기며 묻는 차동석.

유진은 위촉장을 꼭 껴안고 대답했다.

“넵. 쌩쌩해요!”

물론 행사가 좀 길긴 했지만.

그런 것쯤 아무래도 좋을만큼 벅찼으니까.

‘내 연기가 이렇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니.’

자신의 연기로 인해 누군가 아동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되고.

그로 인해 세상이 더 좋아질 수 있다면.

생각만으로도 뿌듯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위촉장을 통해 유진은 그를 인정받은 셈.

“공익광고 하길 잘한 것 같아요!”

그런 유진의 반응을 감지한 차동석.

“크흠. 무, 물론. 나도 자랑스러워. 그런데 행사가 너무 길어지니까 좀 힘들다는 거지.”

어른인 자신이 괜히 투정을 부린 것 같아 민망한 얼굴이었다.

그러는 사이.

박태종이 유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아주 잘했어, 우리 아들. 네가 자랑스럽다. 분명 하늘에 있는 엄마도 같은 마음일 거야.”

유진은 그런 박태종을 올려다보았다.

전에 서림미디어를 찾아갔을 때처럼 양복을 입고 있다.

오늘에서야 그 차림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된 셈.

‘어? 오늘은 안 우시네.’

평소라면 유진과 관련된 사소한 일에도 펑펑 우는 박태종.

그런데 오늘은 종일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유진을 바라보더니.

곧 제 품에 유진을 안아주었다.

“자랑스럽다. 내 아들. 하지만 힘들거나 지치면 아빠한테 언제든 말해. 알았지?”

그 말을 듣고서야.

유진은 박태종의 마음을 눈치챘다.

‘날 걱정하고 계시는구나.’

<날개>의 흥행으로 최근 바쁜 일정을 보낸 유진이다.

그 와중에도 학교는 빼먹지 않았고.

좋은 일만 계속 생긴다곤 하지만.

그런 와중 혹시 유진이 지치지 않았을까.

힘든데도 밝은 척하는 건 아닐까.

박태종은 그를 염려하고 있는 모양.

아이가 너무 빨리 달리다 넘어질 것을 걱정하는 것처럼.

“네. 하지만 전 괜찮아요!”

달리기는커녕.

아직 시동도 걸지 않았으니.

“그래. 아빠는 유진이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어.”

유진의 어깨를 힘껏 토닥여주는 박태종.

역시 여린 듯 보여도.

아들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박태종이다.

“고마워요, 아빠.”

그 모습을 백미러로 흐뭇하게 바라보는 차동석.

오늘도 아이를 갖고 싶다는 욕구가 늘어가는 중이다.

“모처럼 이후 스케줄도 없고. 케이크랑 먹을 것 좀 사서, 소소하게 자축이라도 할까 하는데요. 어떠십니까, 아버님?”

“아, 네. 좋습니다.”

그때 유진이 손을 번쩍 들었다.

“케이크는 무조건 떡케이크! 떡케이크로 해주세요!”

“······넌 케이크마저 그렇게 아재처럼 먹어야겠냐?”

그렇게 떡케이크를 비롯.

먹을 것을 사들고 사무실에 도착한 일행.

장미소와 함께 지금까지의 성공을 자축했다.

“<날개> 쪽 분들도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박태종의 말에 차동석이 대답했다.

“거기가 지금 엄청 바쁩니다. 작품을 만들던 때보다 더 바쁘다고 하더군요.”

물론 전세대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날개>이지만.

뮤지컬 애니메이션이다보니 아이들에겐 특히 주가가 높았다.

관련 상품을 내달라는 문의가 속출할 정도라고 하니까.

덕분에 블루컬쳐 스튜디오는 뒤늦게 장난감 업체들과 계약하기 시작했고.

캐릭터 상품 제작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덕분에 여러모로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일하고 있다고.

그러는 사이.

[선공개 영상) 뮤지컬 애니메이션 <날개> OST – 날아가

조회수 – 750,316]

점차 ‘날아가’의 조회수가 높아져 가고.

[망고 실시간 음원차트

······

7위 – 날아가(영화 <날개> OST)

아티스트 – 박유진

······]

음원차트 성적도 상승세가 꺾이지 않았다.

[국산 애니메이션의 기적. <날개> 200만 관객 돌파!]

거기에 200만 관객 돌파까지.

물론 이 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충무로 스타 감독의 작품 등.

위협적인 경쟁작이 없는 것도 한몫했다.

“그건 그거고. 우리는 이제 차기작을 정할 시기야.”

역시 자축파티에서도 워커홀릭인 장미소.

대충 파하는 분위기로 흘러가자 일 얘기를 꺼냈다.

<날개>의 흥행, 그리고 ‘날아가’ 음원발매로 인한 수입 증대.

몇 개월간 그를 위해 홍보에 열을 올렸던 유진이다.

그 결실을 맺었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갈 차례다.

“확실히. 이대로 <날개> 쪽으로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도 안 좋아.”

이쑤시개를 쑤시던 차동석도 동의했다.

‘날아가’의 예상 밖 흥행은 분명 호재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덫이 될 위험도 분명 존재한다.

아역시절의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그대로 가라앉은 배우들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유진은 한창 어리고 예쁠 나이.

그렇기에 그때 심어진 이미지도 오래 간다.

“<리플레이>도 개봉할 거고. 새로운 작품 들어가면 이미지 털어내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을 거야.”

“네. 저도 얼른 새 작품 하고 싶어요!”

확실히 주역 매니지먼트도, 유진도.

지금의 성공에 안주하고 있을 생각은 없다.

유진으로선 무엇보다 갈증이 생겼다.

몸을 써서 연기하고 싶다는 욕심.

‘<날개>도 좋긴 했지만, 역시 난 직접 몸을 움직여 연기하고 싶어.’

하루 만에 끝나는 더빙 작업은 유진에게 너무도 짧았다.

‘좀 더 긴 호흡으로, 상대 배우와 교감하면서 현장감을 느끼고 싶은데.’

장미소는 곧장 두툼한 종이뭉치들을 들고 왔다.

“그동안 우리 쪽으로 온 대본이야. 영화, 드라마.”

곧장 자리잡고 대본들을 검토하기 시작한 유진.

그러나.

“으음.”

이내 곧 유진이 침음을 흘렸다.

“왜. 마음에 드는 게 없어?”

“네에.”

대본 속 유진의 역할은 폭이 좁았다.

귀엽고 예쁜 아역.

혹은 음악과 관련된 내용.

이미지 고정을 피하려는 유진으로선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아, 맞다. 정범 쪽은 어떻게 됐으려나?”

퍼뜩 생각이 났는지, 혼자 중얼거리는 차동석.

“어. 듣기론 한창 촬영 중이고, 곧 끝나간다는데. 누가 캐스팅 됐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

장미소가 대답했다.

몇 달 전, 정범이 유진에게 제의한 영화 <짐승>.

결국 유진이 끝까지 거절했고.

정범 측도 더 질척이지 않았다.

‘분량이나 비중이 주연급이긴 했지만, 망할 게 뻔한 영화에 들어갈 수는 없지.’

“아무튼 좀 더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야. 아니면 그냥 오디션을 보러갈 수도 있고.”

장미소의 말대로.

유진은 좀 더 숙고하는 쪽으로 마음을 틀었다.

그때 울리는 휴대폰.

유진의 것이다.

“전화?”

“네. 송미연 작가님이에요.”

곧장 전화를 받은 유진.

“여보세요. 작가님?”

“오랜만이네요, 박유진 배우. 요즘 아주 잘 나가던데.”

“감사합니다!”

유진은 그 말을 하고 잠시 기다렸다.

재오와는 달리, 송미연과는 거의 연락을 주고 받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무슨 용건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혹시 작품 하나 할 생각 없어요? 미니시리즈 주연인데.”

그리고 유진의 예상이 적중했다.

다만.

‘잠깐. 주연? 나한테 주연을 맡긴다고?’

그 말은 예상 밖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시치미를 떼고 되물었다.

“어? 작가님 새로 작품 해요?”

“아니, 내 작품은 아니고.”

“어? 그럼 누구 작품인데요?”

더 오리무중이었다.

송미연이 다른 사람의 작품 때문에 유진에게 전화할 사람은 아닐 텐데.

“내 제자 작품이에요.”

*

“후우.”

SBW 미니시리즈 공모전 당선작가.

민용석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안색이 제법 창백했다.

“설마 진짜 해주실 줄은 몰랐는데.”

그가 향하는 곳.

바로 송미연 작가의 작업실이었다.

바로 아역배우 박유진과의 미팅 자리가 잡혔기 때문.

아쉽게도 윤진영PD는 함께 자리하지 못했다.

정식미팅이 아니기도 하고.

민용석만 오라는 게 송미연이 내건 조건이기도 했으니.

‘참 여전하신 분이라고 해야하나.’

민용석은 제 휴대폰을 꺼내 통화목록을 확인했다.

[송미연 교수님]

새삼 보이는 그 이름.

민용석은 곧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그는 대학교 문예창작과 재학 시절.

민용석은 송미연에게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TV드라마의 이해와 창작]

물론 송미연이 실패를 거듭하던 시절이었으나.

그래도 이름값이 있지 않은가.

그 송미연에게 드라마 창작을 배울 수 있다니!

드라마 작가 지망생이던 민용석은 매우 기대가 컸다.

그러나.

‘기본이 안 돼있네. 드라마 하고 싶은 거 맞아요? 소재 선정부터 잘못 됐네.’

송미연의 수업은 민용석과 전혀 맞질 않았다.

드라마는 사람사는 이야기를 다룬다고 생각하는 민용석.

때문에 다소 고리타분하지만, 사람냄새 나는.

그런 옛날 드라마들을 좋아했다.

‘드라마는 상업예술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봐야한다고. 그 때문에 트렌드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고리타분한 소재는 대체 뭐지?’

그와 정반대의 가치관을 가진 송미연.

현직 스타 작가로서 트렌드와 상업성에 민감한 것.

자극적이고 눈에 띄는 소재.

배신과 비밀이 난무하는 캐릭터들을 강조했다.

그 때문에 민용석에게 그 송미연의 수업은.

‘다시 써와요. 다른 소재로.’

아주 생살이 찢기는 고통이었다.

매번 써가는 과제물들이 혹평을 들었다.

그것도 소재, 캐릭터와 같은 근본적인 것들만.

그만큼 민용석과 송미연의 가치관은 괴리가 심했다.

힘들게 다시 써가도 퇴짜를 맞기 일쑤.

‘열심히는 하는데. 발전이 더디네요.’

그 말에 멘탈이 깨지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기말고사.

드라마 시놉시스와 2화 분량의 원고를 창작하라는 대체과제가 주어졌다.

지칠대로 지친 민용석은 결국 자신의 취향범벅인 이야기를 써냈고.

그걸 송미연의 메일로 송부했다.

그런데 감정이 올라온 탓에.

[이게 제 한계인 것 같습니다 교수님

전 발전이 없는 학생이라서요

그냥 평생 이렇게 쓰겠습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보낸 직후 미친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발송취소를 누르려 했는데.

송미연이 곧바로 메일을 읽은 탓에 불가능했다.

아무튼.

민용석이 송미연에게 보낸 작품.

그게 당선작 <호구>의 시작이었다.

‘그러고 나한테 D학점을 줬지.’

그 이후.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송미연을 잘근잘근 씹었던 민용석이다.

송미연이라는 이름을 볼 때마다 분노가 치밀 정도.

‘하지만 지금 내게 유일한 동앗줄이 송미연 교수님이야.’

배우 박유진과 컨택할 수 있는 유일한 연락처.

분명 드라마를 통해 같이 작업했다고 들었으니까.

솔직히 큰 기대는 없었다.

연락을 받고 욕이나 안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디 그 대본 한 번 보내줘요. 박유진 배우한테 수준낮은 작품 주려는 거면 내가 용납 못해.’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던 송미연이다.

예전과 달리 제법 독기가 빠진 모습.

게다가 대본을 꽤 좋게 봐준 것인지.

‘날짜랑 시간 보내줄테니 내 작업실로 와요. 박유진 배우와 미팅 자리 정도는 주선해줄 수 있을 것 같으니.’

박유진과의 미팅까지 잡아주었고.

그리하여 지금에 이른다.

‘이번 작품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어.’

천금같은 기회가 주어졌고.

이제 어떻게든 그걸 잡아야할 민용석이었다.

<호구>를 위해서라면 박유진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

그렇게 송미연의 작업실에 도착한 민용석.

분명 약속시간보다 30분은 일찍 왔거늘.

“안녕하세요! 아역배우 박유진입니다!”

어째서인지 박유진이 먼저 도착한 상태였다.

심지어 벌떡 일어나 제게 인사를 하기까지.

“어, 아, 으? 어, 아. 안녕하십니까. 민용석입니다!”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민용석.

“아. 왔어? 박유진 배우. 말했죠? 제가 말했던 제 제자. 민용석이예요.”

뒤늦게 나타난 송미연.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인사를 나눴다.

“패, 패, 팬입니다!”

너무 긴장해 덜덜 떠는 민용석에 비해.

“와, 진짜요? 대박. 형아팬은 귀한데. 감사합니다!”

여유롭게 대답하는 유진.

그리곤 재차 꾸벅 고개를 숙이기까지.

이에 민용석도 덩달아 폴더인사를 했다.

‘엄청 예의 바르네. 어린애라 요즘 떴다고 좀 으스댈 법도 한데.’

신인 작가에게 불과한 자신에게 이렇게 예를 갖추다니.

가정교육을 매우 잘 받은 모양.

‘그러면서도 태도는 엄청 여유로워. 오래 배우생활을 한 것처럼.’

그러면서 목소리나 몸짓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편안하다.

그 미묘한 조화 때문인지.

민용석의 눈엔 유진이 제법 신비롭게 보였다.

“보내주신 대본 다 읽었어요.”

자리에 앉자마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유진.

“네? 버, 벌써요?”

“박유진 배우가 보고 싶대서. 내가 보내줬어.”

송미연이 말했다.

민용석은 몸을 들썩이며 놀랐다.

‘근황 얘기로 시간 끌면서 생각 좀 정리하려고 했는데! 대체 어떻게 설득하지? 뭐라고 해야 참여해줄까? 진짜 그냥 울고불고 빌어야 하나?’

어떻게든 기회를 잡겠다던 열정에 비해.

민용석은 유진을 설득할 방법을 궁리해내지 못했다.

민용석도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사회초년생일 뿐이니.

오죽했으면 유진을 꼬시겠답시고 장난감을 사오려 했을까.

“저, 그게. 박유진 배우님이 참여해주시면, 이지혜 배우님도 참여하신다고 하던데······.”

결국 민용석이 내걸 수 있는 건.

이지혜 측이 내걸었던 조건뿐이다.

‘하지만 이지혜 하나 때문에 움직일 리가 없는데.’

이미 유명 감독, 작가들의 러브콜을 받았을 유진이다.

이지혜 하나 때문에 미니시리즈에 출연할 리가 없을 터.

“네, 좋아요!”

그런데.

“저 하고 싶어요, 이거!”

그런 민용석의 고민이 무색하게.

유진이 아주 시원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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