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야. 야, 이지혜!”
한창 졸고 있던 이지혜.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뭐해, 지금?”
그녀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사람.
금목걸이에 금시계를 찬 대표 나대준이다.
“정신 안 차려?”
“······죄송합니다.”
이곳은 이지혜의 소속사 사무실이었고.
대표와 면담이 있던 이지혜가 대기 도중 그만 잠들어버린 것.
“컨디션 관리 똑바로 안 해? 왜 그리 조는 건데?”
“스케줄이 너무 많아서요.”
“야. 내가 너때는 사흘을 꼴딱 밤새도 멀쩡했어. 이제야 고등학교 입학 앞둔 애가 그런 소리 말아라.”
컨디션 관리니 뭐니 하지만.
일을 줄여주겠다는 말은 결코 하지 않는 나대표.
“네. 알겠어요.”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이지혜였다.
“나가서 세수라도 하고 와. 중요한 얘기할 거니까.”
그렇게 말하며 쯧 혀를 차는 나대준.
이지혜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화장실로 향했다.
촤아-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
가볍게 세수를 한 뒤.
이지혜는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
분명 평소처럼 피곤에 찌든 얼굴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꽤 밝은 표정이었다.
‘역시 <날개> 덕분인가.’
그 생각에 피식 웃는 이지혜.
이지혜가 순간 잠들어버릴 정도로 피곤한 이유.
물론 스케줄 탓도 있긴 하지만.
실은 이지혜는 최근 <날개>에 홀딱 빠졌다.
스케줄이 끝난 뒤.
시간이 남으면 심야시간대에 <날개>를 보는 것.
그게 요즘 이지혜 삶의 낙이었다.
즉, 그녀도 <날개>의 N차 관람족이었던 것.
‘아무리 힘들어도, 몇 번을 봐도 지루하지 않아.’
죽을 것처럼 피곤한 날일수록.
이지혜는 <날개>를 보러 영화관에 향했다.
자신이 나온 작품도 그렇게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일종의 재충전 행위.
“그래서, 하실 말씀이 뭐예요?”
세수를 끝마친 뒤 돌아온 이지혜.
이제 얼굴에 졸음기가 싹 가신 모습이다.
“SBW에서 제의한 단막극 말이다.”
“저 그거 하기 싫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본격적인 얘기가 나오기도 전에.
먼저 칼같이 대답하는 이지혜.
그러자 나대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니까, 그걸 왜 하기 싫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나대준.
“주연에, 공중파에, 페이도 괜찮은데. 이걸 대체 왜 안한다는 거야?”
하지만 이지혜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나대준은 그런 이지혜를 보며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입봉PD? 공모전 당선작?
그런 건 나대준에게 별로 고려사항이 아니다.
그는 어떻게든 이지혜를 굴려 돈을 뽑아먹으려는 쪽.
무엇보다 이지혜는 이제 이름 좀 알렸을 뿐.
작품을 가려서 할 처지는 아니다.
그러니 나대준 입장에선 <호구>를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는 것.
물론 나대준의 생각일 뿐이다.
“그거 검도 관련 내용이라면서요? 미니시리즈 하나 때문에 검도를 배워요?”
요즘 체력적으로 지친 이지혜다.
그런 와중에 미니 시리즈 때문에 검도를 배우라고?
게다가 이지혜는 운동, 스포츠를 기피했다.
그런 쪽으론 영 젬병인 체질.
즉.
<호구>에 참여하라는 건 이지혜더러 그냥 쓰러지라고 강요하는 꼴.
“야. 네가 아무리 그래도 아역배우로 몇 년을 지냈는데. 견적 안 나와? 어차피 그런 거 다 대역 쓴다고. 네가 검도 배우고 자시고 할 게 없다니까?”
그 말에 이지혜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 인간은 연예인 소속사 대표라면서 저런 말이 나와?’
<호구>는 주 소재가 검도.
게다가 검도를 직접 하는 장면도 적지 않다.
배우가 검도를 능숙하게 하진 않아도.
적어도 기초를 배우고, 그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연기를 할 수 있지. 대본도 안 봤나?’
캐릭터에 대한 공감과 이해에서 연기가 시작된다.
그것이 바로 어렸을 때부터 형성된 이지혜의 연기관.
닳도록 일해 오면서도 지켜낸 신념이었다.
그러니 대역을 쓸 거면 애초에 참여할 생각이 없다.
그게 이지혜의 생각이었다.
“해.”
“안 할래요.”
하라고 압박하는 나대표와 안 하겠다고 버티는 이지혜.
계속 두 사람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렸다.
분위기가 과열되는 양상 속.
“그래서 박유진이 참여하면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툭.
이지혜가 타협안을 다시 꺼내놓았다.
“아역 투톱인 드라마를 누가 보겠어요? 거기에 소재가 검도라니. 엄청 마이너하단 건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왜 하필 박유진인데?”
“<호구>에 참여할 만한 아역 중에서, 걔가 제일 핫하잖아요. 걔 정도는 참여해야 화제성도 있겠죠? 드는 노력에 비해 시청률도, 주목도도 낮으면 손해 아닐까요?”
나대준이 아까 말한대로.
이지혜는 꼬마 시절부터 연예계에 있었다.
이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충분히 알고 있다는 얘기.
그런 관점에서 이지혜의 말도 타당했다.
“그리고 이미 PD쪽이랑 얘기하셨다면서요. 박유진 참여하면 저도 참여하는 걸로.”
“근데 여태 연락이 없었다고. 상식적으로 박유진이 참여하겠냐?”
“혹시 모르죠. 그리고 기다리고 있으면 다른 좋은 작품에서 대본을 보내올지도 모르잖아요.”
이렇게 말은 했지만.
이지혜는 박유진이 <호구>에 참여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날아가만 불러도 돈이 쏟아질 텐데. 굳이 이 타이밍에 손이 많이 가는 미니시리즈를 할 리가 없지.’
이지혜가 박유진을 직접 본 건 단 한 번뿐이었다.
함께 라디오를 했던 때.
그 이후로 어떤 교류도, 연락도 없었다.
하지만 이지혜에겐 그 누구보다 커다란 임팩트를 남겼다.
‘설마 그 애가 날아가를 불렀을 줄은 몰랐어.’
유진이 ‘날아가’를 라이브로 부른 것.
<박형광의 크레파스> 단 한 번뿐이었다.
이지혜는 그걸 직관한 몇 안 되는 사람인 셈.
‘박유진. 걔는 대체 뭘까?’
쳇바퀴 돌듯 일만 하는 일상 속의 쉼표였던 ‘날아가’.
그 쉼표를 제공해준 게 바로 유진이었다니!
‘공익광고 때는 아예 딴 사람이었지.’
<날개>를 보러갔다가 보게 된 아동학대 근절 공익광고.
그 광고 속 유진은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
소년미가 넘치는 <날개> 속 주인공 솔도 아니었고.
라디오 때 만난, 활기찬 어린애도 아니었다.
그저 상처받고 혼란스러워하는 어린아이가 있을 뿐.
또 드라마 <유별난 친구들>에선 의젓한 모습을 보여줬고.
이게 모두 1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대체 어떻게 그렇게 연기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어떻게 그리 밝게 웃을 수 있을까?
‘<호구>. 정말 하기 싫어. 하지만 그 애가 참여한다면.’
이지혜도 어쩌면 즐겁게 참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만약이지만.
“쯧. 하여튼 머리가 커져서 말만 번지르르 해졌군.”
이지혜가 이렇게까지 버틸 줄은 몰랐는지.
나대준은 팔짱을 끼며 혀를 찼다.
여태까지 고분고분 따랐던 이지혜였으니.
한살 더 먹었다고 반항한다 생각하는 모양.
우웅!
그때.
나대준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고.
“야. 여기서 잠깐 기다려. 얘기 안 끝났으니까.”
휴대폰을 들고 회의실을 나서는 나대준.
이지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이어폰을 만지작댔다.
‘그냥 <날개>나 보러가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네? 그게 정말입니까? 아,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네네, 그럼요. 예. 그럼 세부적인 얘기는 조만간 미팅을 통해서 하겠습니다. 예, 수고하십쇼. 예!”
문 너머로 얼핏 들려오는 목소리.
뭔가 일이 잘 진행되는 모양이다.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대준.
“이지혜. 너 박유진 참여하면 그 미니시리즈 한댔지?”
“네? 그랬죠.”
“박유진, 그거 참여하기로 했댄다.”
그렇게 말하는 나대준도.
제법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
며칠 후.
주역 매니지먼트의 사무실.
“좋네, 좋아.”
<호구> 대본을 다시 정독해본 유진.
그 얼굴엔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그만큼 <호구>의 대본은 유진의 마음에 쏙 들었다.
신인작가의 대본답게.
상업성이나 현실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자기 색이 뚝뚝 묻어나는 글.
요즘 트렌드에서 비껴간 따뜻한 글이었다.
‘무엇보다 아역 투톱이라는 게 마음에 들어.’
어린이 드라마가 아닌 이상.
아역이 주연으로 나서는 경우는 잘 없다.
그런데 심지어 아역 두 명을 투톱으로 내세우다니.
흥행성은 기대하기가 어렵다.
‘그 증거로, 내 기억 속에 이 작품은 꽤 희미해.’
유진도 모든 영화와 드라마를 기억하는 건 아니었다.
하물며 비교적 짧은 단막극과 미니시리즈는 더더욱.
다만.
<호구>에 대해 기억나는 평가가 딱 하나 있었으니.
‘착한 드라마. 그래, 그런 평가를 받았었지.’
드라마에게 ‘착하다’는 말은 그리 좋은 칭찬이 아니다.
내용 좋다고, 따뜻하다고 시청률이 잘 나오던가?
내용이 나빠도 시청률만 잘 나오면 되는 게 바로 드라마 아니던가.
‘그래. 시청률만 잘 나오면 돼.’
그래서 대본은 좋지만 유진도 망설였던 것.
하지만.
‘그 배우가 같이 한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때마침.
“방금 PD한테서 연락 왔다.”
차동석이 휴대폰을 들고 오며 말했다.
“이지혜 쪽에도 다시 확답을 받았대. 참여하는 걸로.”
“와, 진짜요?”
이지혜.
그 이름은 유진도 잘 알고 있다.
아역배우 특집으로 같이 섭외되지 않았나.
물론 미래를 알고 있는 유진으로서는.
‘청춘스타 이지혜.’
그 이름으로 더 익숙한 배우지만 말이다.
이지혜는 추후 스무 살 때.
영화 <클래식 기타>를 통해 풋풋한 멜로 연기로 인기를 끈다.
물론 지금 이지혜의 주가도 제법 높은 상태다.
유진과 아역배우 특집으로 묶일 정도니까.
“그런데 참 희한하네. 꼬맹이가 나오면 출연하겠다고 했다니.”
“<호구>에서 남동생 역 맡을 나이대의 아역들 중, 지금 유진이만큼 핫한 애 없으니까. 그러니까 보험장치가 필요했던 모양이지.”
차동석의 말에 장미소가 대답했다.
차동석의 말대로.
유진은 이지혜 쪽이 내걸었다던 그 조건을 듣고 합류를 결정했다.
라디오 때는 길게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러니 <호구>는 이지혜와의 친분을 쌓을 기회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유진과 이지혜의 화제성을 더한다면.
‘이 작품. 분명히 띄울 수 있어.’
그렇다면 굳이 이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다.
“그럼 우선 기사부터 쏴야겠네. 기사 뿌리는 건 PD랑 얘기했고, 이지혜 쪽이랑 조율해서 같이 기사내면 될 것 같다.”
“응. 그러자.”
대화가 끝난 뒤.
열심히 일하는 장미소를 빤히 바라보는 차동석.
그 시선을 느낀 장미소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의외네?”
“뭐가?”
“자기라면 이 작품 하는 거 말릴 줄 알았거든.”
입봉PD, 공모전 당선작, 미니시리즈, 아역 투톱.
손익계산이 칼같은 장미소라면 <호구>는 당연히 거르고 싶어지는 작품이다.
<날개> 참여 때도 난색을 표하지 않았던가.
“유진이의 선택이니까. 이제 믿기로 했어.”
장미소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뭐야. 낭만이니 뭐니, 그런 거 안 믿는다며? 그새 생각이 바뀌셨나?”
장미소를 놀릴 생각인지.
어깨를 콕콕 찌르며 장난스레 묻는 차동석.
하지만 장미소는 한없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결과가 말해주잖아? 그게 최고의 데이터지.”
*
송미연의 작업실.
그곳엔 숨 막히는 어색함이 감돌고 있었다.
잔뜩 움츠러들어 줄곧 눈치만 보는 민용석.
아무렇지 않게 커피만 마시고 있는 송미연.
“정말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침묵을 깬 건 민용석 쪽이었다.
“좋은 자리 마련해주신 덕분에 잘 풀린 것 같습니다.”
“나 이제 교수 아니야.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기껏 마음먹고 고개를 숙였는데.
쌀쌀맞은 대답이 돌아왔다.
“저, 그럼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마음대로 해요. 작가님 하든가요.”
‘역시 여전하시네, 저 성격은.’
하지만 어쩌겠는가?
민용석은 송미연에게 큰 빚을 진 셈이었다.
저런 말 백번은 들어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나한테 고마워할 거 없어요. 선택은 박유진 배우가 한 거예요. 난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대본 보여줬을 뿐이고.”
남은 커피를 모두 마신 뒤 말하는 송미연.
“민용석 씨 대본 좋아. 잘 썼어요. 박유진 배우가 보는 눈이 있거든. 작가로서 자부심을 가져요.”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예상 밖 칭찬을 들은 민용석.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민용석은 몰랐지만.
송미연이 <유별난 친구들>을 쓰게 된 이유.
바로 민용석이 제출한 기말과제의 영향이 있었다.
당시, 학기 내내 민용석의 작품을 비판했던 송미연이지만.
기말과제만큼은 송미연조차 인정할 정도로 재밌었다.
마침 그때 송미연은 줄곧 자극적 소재들을 사용하다 3작품 연속 말아먹은 상태였고.
어떻게든 탈출구를 찾고 있던 상태였다.
그런 와중 보게 된 민용석의 기말과제는 제법 흥미로웠고.
어쩌면 스타일을 바꿔보는 게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송미연이 <유별난 친구들>을 쓰기 시작한 것.
“물론 부족한 부분도 있고, 트렌드와 맞지도 않지만요.”
하지만.
송미연의 성격상 죽어도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이다.
그래서 괜히 툴툴거릴 수밖에.
“아,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민용석은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저, 교수님.”
“교수님이라고 하지 말라고.”
“아, 네. 작가님. 지나간 일이니까 여쭤보는 겁니다만.”
“뭐죠?”
“왜 저한테 D를 주신 거죠?”
민용석이 당시 제출했던 기말과제.
그게 바로 <호구>의 설정과 도입부였으니까.
저렇게 극찬을 해놓고 왜 C도 아니고 D를 줬단 말인가?
“그때 기말과제는 직접 제출하라고 했는데, 민용석 학생은 이메일로 제출했잖아요?”
그 말에 광속으로 표정이 굳는 민용석.
“그래서 답장까지 보냈는데. 프린트해서 마지막 수업날 나한테 직접 가져오라고. 아니면 점수를 줄 수가 없다고. 그런데 그날 안 나왔죠? 하다못해 우편으로 보낼 줄 알았는데.”
그 말대로.
당시 민용석은 송미연으로부터 답장을 받았지만 읽을 용기가 없었고.
마지막 수업 때 송미연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설마 기말과제 퀄리티 때문이 아니라.
과제 미제출로 처리되어 D를 받은 거라니.
“······정말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요. 다 지난 일이고, D 받으면 된 거지.”
얼굴이 빨개져 터질 것 같은 민용석.
그를 구원하듯, 윤진영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민용석은 휴대폰을 들고 후다닥 밖으로 나왔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겨우 식히면서.
“네, 네. PD님.”
“작가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네? 왜 그러세요?”
혼란이 가득한 윤진영의 목소리는.
“갑자기 이순철 선생님께 연락이 왔어요. 우리 작품 하겠다고요.”
사람이 너무 놀라면 머리가 새하얘진다고 하던가.
지금 민용석이 딱 그 상태였다.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린 민용석이 목소리를 높였다.
“네?! 그 원로배우 이순철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