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
팝콘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영화관.
“할아버지! 빨리! 빨리!”
총총 걸어다니는 5살짜리 여자아이와.
“허허. 욘석. 천천히 가라. 넘어질라.”
흰머리가 멋있게 잘 어울리는 할아버지 한 명.
둘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중이다.
“<날개> 티켓 두 장만 주십쇼.”
곧 티켓 발권이 끝났고.
입장을 기다리는 와중.
여자아이가 신이 나는지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진짜진짜 재밌겠다! 그치 할아버지?”
“우리 은지. 그렇게 보고 싶었으면서 어떻게 참았나?”
“할아버지랑 같이 보고 싶었단 말야.”
“허허. 이 할애비가 너 때문에 산다!”
호탕한 웃음을 흘리는 이 사람.
원로배우 이순철이다.
40년 넘게 배우 생활을 해온 배우.
독립과 상업, 무대와 미디어.
영역을 가리지 않고 활동해왔다.
무엇보다 별다른 논란 없이 활동을 계속하고 있고.
그에 대한 미담도
이순철을 존경하는 후배 배우들도 셀 수 없을 정도.
“여기 캐러멜 팝콘 하나만 부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귀여운 손녀를 둔 한 명의 할아버지일 뿐이다.
그의 소탈함은 이미 유명하다.
그 증거로 대놓고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지만.
이순철에게 아는 체하는 사람은 없다.
어차피 동네를 돌아다니다보면 이순철을 흔히 보니까.
“자. 이제 들어가자.”
극장에 입장한 이순철과 이은지.
“와, 사람 많다!”
이은지의 말대로 <날개>의 상영관엔 사람이 꽤 있었다.
개봉한지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말이다.
‘이 정도로 지속성이 있다는 건, 애니메이션이라고 무시할 게 아니군.’
손녀 때문에 보러온 것이긴 하지만.
<날개>라는 작품에 제법 흥미가 생기는 이순철이었다.
좌석에 앉은 후.
이은지에게 팝콘을 먹여주며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는데.
“음?”
한 광고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바로 아동학대 근절 캠페인 광고.
손녀를 많이 아끼는 이순철이니만큼.
자연스레 광고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호오.”
그러던 중.
그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번엔 할아버지가 아니라, 한 명의 배우로서.
눈에 띄는 연기자가 있었기 때문.
‘저 아이가 바로 박유진인 모양이군.’
인터넷을 잘 하지 않는 이순철조차.
박유진이란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다.
언론에서 핫한 아역배우를 띄워주기 위해 과장이 섞였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역의 연기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걸 활용할 줄 아는군.’
자신이 화면에 어떻게 나올지.
그리고 그 모습이 대중들에게 어떻게 다가가는지.
모두 다 알고 연기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덕분에 광고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저도 모르게 유진의 연기를 집중적으로 바라보게 된 이순철.
그러나 마지막까지.
그 아역의 연기는 일말의 실망감도 주지 않았다.
‘과연. 저 아이가 <날개>의 주인공 더빙도 맡았다지. 하지만 목소리 연기는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야.’
원로 배우들 중에선 라디오 드라마 녹음 경험자가 많다.
이순철도 그 중 한 명.
‘요즘은 개나 소나 더빙을 다 우습게 보고 있어. 목소리야말로 대중 연기의 근간인데 말이지.’
표정 연기만큼이나 중요한 게 바로 대사를 치는 능력이다.
그런데 기초라 할 수 있는 발성과 발음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기본기 부족.
물론 이순철은 어린아이에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댈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막상 영화가 시작되니.
‘허. 모자람이 없군. 내 예상보다 훨씬 잘해.’
이순철이 잣대를 들이댄다 하더라도.
목소리 연기가 상당한 수준.
‘어린아이라 변성이 쉽지 않았을 테지. 그걸 오히려 역으로 이용해 자신이 가진 소년의 목소리, 그 색채를 강화하는 쪽으로 표현했군. 그러면서도 발성은 탄탄하고 발음은 완벽해.’
또박또박 읽으려고 하면 발연기가 되고.
그렇다고 발음을 흐리면 전달력이 약해진다.
어린아이들이 연기를 할 때 흔히 갖는 딜레마.
그러나 유진은 성우처럼 탄탄한 기본기를 갖췄고.
거기에 변성기가 오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가 더해졌다.
‘더빙은 부족함도 흘러넘침도 없어야 해. 딱 화면 속 상황과 캐릭터에 맞는 연기가 필요하지. 이 아이의 목소리는 화면 속 캐릭터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고 소리가 잘 달라붙는군.’
화면을 넘어서는 연기를 하면 캐릭터 뒤 성우가 보이고.
화면보다 부족한 연기를 하면 캐릭터가 붕괴된다.
그러나 이 영화 속 아역배우의 더빙은 캐릭터를 완벽히 살려냈다.
거기에 훌륭한 노래까지.
‘궁금하군. 어떻게 저 나이에 저런 연기가 가능하지?’
결국 이순철은 목소리 연기였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할아버지와는 다르게.
“우와!”
손녀 이은지는 그저 즐기고 있을 따름이지만.
<날개>의 상영이 끝난 직후.
이은지는 할아버지의 옷소매를 죽죽 당겨대며 말했다.
“진짜진짜 재밌다. 그지, 할아버지?”
그러자 이순철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은지 덕분에 이 할애비도 좋은 구경 했구나.”
“근데 할아버지. 나 아이스크림 먹고시퍼!”
“그래, 알았다. 그런데 이건 너희 엄마한텐 비밀이야. 그랬다간 은지가 아니라 이 할애비가 혼나요.”
“응! 알아써!”
이순철은 이은지의 손을 붙잡고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갔다.
손녀가 아이스크림을 먹느라 여념이 없을 때.
이순철은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
“어어. 송작가. 날세.”
손녀를 대할 때와는 명백히 다른 목소리.
“거, 그때 자네가 들고 있던 대본. 그거 제목이 <호구> 맞지?”
동시에 이순철의 눈빛에 호기심이 돌았다.
“그 대본. 그 유진이란 애한테 보냈나?”
*
그렇게 미니시리즈 <호구>의 주연으로는 제일 핫한 아역배우 두 명.
유진과 이지혜가 확정되었고.
이에 <호구>에 눈길도 안 줬던 배우들이 슬슬 관심을 표명하는 중이다.
관심도가 달라지니 예산도 몇 배로 뛰었다.
캐스팅 문제로 난항을 겪은 게 불과 몇 주 전이었는데.
드라마 <호구>는 말 그대로 미운오리새끼에서 백조가 된 것.
그런데.
“이순철 선생님이라니.”
더 놀랄 일도 없다고 생각한 민용석이었으나.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등장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교수님?”
“작가님이라고 하랬죠. 아무튼, 박유진 배우에게 보내기 전에 제가 대본을 검토하고 있었고, 그때 곁에 계셨어요.”
“이, 이순철 선생님이랑 같이 계셨다고요?”
“네. 같이 작품한 뒤로 자주 뵙거든요.”
원로배우 이순철과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라니.
새삼 송미연이 얼마나 톱티어의 작가였나 새삼 깨달았다.
송미연이 한창 히트작을 뽑아내던 시절.
이순철이 송미연의 작품에 연달아 출연하기도 했으니.
자주 만난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다.
“그래서 박유진 배우에게 넘긴 거예요. 그 대본, 이순철 선생님도 높게 평가하셨거든요.”
“저, 정말인가요?”
이순철에게 인정받았다니!
민용석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덜덜 떨었다.
그만큼 이순철의 위상은 꽤 높았다.
그래서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 작품에 참여하신다니.”
“아직 확정은 아니에요. 선생님께서 미팅 자리 한 번 잡아달라고 하셔서 마련한 자리니까.”
그 말대로.
갑자기 이순철이 송미연에게 전화로 <호구>에 대한 얘기를 꺼냈고.
그로 인해 마련된 자리가 바로 지금이다.
“그런데 우리 꼬맹이는 왜 찾으시는 걸까요?”
그때 차동석이 끼어들었다.
이순철이 미팅 자리에 유진이 동석해줄 것을 요청했으니.
“선생님께서 매우 정중하게 부탁하셨어요. 아마 어린 후배에게 관심이 생기신 모양이죠.”
송미연의 대답.
아무튼 유진 쪽으로도 나쁠 건 없다.
이순철 급의 원로배우와 만날 기회가 어디 흔한가.
그를 따르는 후배들도 많은 만큼.
확실히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해, 꼬맹이. 알았지?”
그 때문에 한 번 더 주의를 주는 차동석.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넵! 그럴게요!”
유진은 평소처럼 편하게 대답할 뿐이다.
“거의 도착했다고 하시네요.”
이순철로부터 문자를 받은 송미연이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순철이 들어왔고.
일동 기립하여 그를 맞이했다.
“허허. 뭘 그리들 서 있어요? 늙은이 한 명 온 거 가지고.”
그 모습에 허허 웃는 이순철.
마치 동네 마실 나가듯.
편안한 옷차림이었다.
그러나 새하얀 머리카락과 주름.
선명한 눈동자가 범상치 않은 포스를 뿜어내는 중이다.
과연 원로배우.
“네가 박유진이구나.”
유진을 한눈에 알아본 이순철.
곧장 유진 쪽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이순철 선생님!”
평소처럼 꾸벅 인사하는 유진.
이순철을 앞에 두고도 긴장한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허허. 선생님은 무슨. 그냥 편하게 할아버지라고 불러라.”
“그래도 될까요?”
“그럼! 안 될 게 있나.”
“넵.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유진은 넉살 좋게 넙죽 받아들이곤 헤헤 미소지었다.
“허허허! 좋군, 좋아. 우리 손녀 때문인지 난 할아버지란 호칭이 마음에 들거든.”
그러자 이순철도 호탕하게 웃었다.
소문답게 권위의식이라곤 전혀 없는.
매우 소탈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만나러 와줘서 고맙다. 실은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서 말이다.”
“부탁이요?”
“혹시 사인 하나만 가능한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이순철이 유진에게 사인을 부탁한다니!
반대의 경우라면 몰라도 말이다.
“우리 손녀가 <날개>를 엄청 좋아해서 말이야. 너를 만난다고 하니 사인을 받아달라고 어찌나 졸라대는지.”
그제야 풀리는 의문.
다른 사람들이 이순철의 한 마디 한 마디에 휘둘리고 있을 때.
유진은 그저 편안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솔 목소리로 녹음도 해드릴 수 있어요! 음성 메시지!”
“오, 그게 정말이냐?”
“넵! 혹시 할아버지 휴대폰에 녹음기능 있나요?”
“하하! 이제 나보다 너를 더 좋아하겠는데? 긴장 좀 해야겠군. 그런데 녹음 기능? 요즘 휴대폰엔 그런 기능이 있나?”
그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
모두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유진은 이순철을 불편해할 수밖에 없다.
나이도 훨씬 많고, 경력은 비교도 안 된다.
아무래도 얼어붙기 마련.
하지만 오히려.
유진은 손쉽게 이순철의 호감을 사는 중이다.
바짝 달라붙어 이순철의 휴대폰을 이리저리 조작해보고 있으니.
“으음. 녹음 기능이 없나?”
“너도 기계 다루는 건 서툴러 보이는구나.”
“맞아요. 사실 저 기계치거든요.”
“뭐? 허허! 이 할애비도 그렇단다. 내 손녀가 나보다 컴퓨터를 잘 하거든. 이 할애비는 이메일보다 전화, 전화보다 편지가 익숙한 사람이니까.”
“할아버지도요? 저도요! 역시 디지털보단 아날로그인데!”
“으하하하! 내 손주뻘이 이런 말을 하다니. 고놈 참 재미있구만!”
유진과 대화할 때는 웃음이 멈추지 않는 이순철.
두 사람의 모습은 할아버지와 손주로 보일 정도다.
도무지 초면이라곤 상상하기 어려울 지경.
그러던 도중.
“유진이. 연기는 어디서 배웠나?”
유진을 바라보는 이순철.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과 이순철 특유의 눈빛.
웃고는 있지만 모든 걸 꿰뚫어볼 것 같은 모습이다.
“음, 비밀이에요!”
그래서일까.
유진은 능청스레 넘어가는 쪽을 택했고.
“허허! 하긴. 한창 비밀을 좋아할 나이지.”
이순철도 그냥 넘어갔다.
뭐든 꼬치꼬치 캐묻는 성격도 아니었으니.
이순철은 곧 벌떡 일어서서 민용석에게 말했다.
“아, 이런. 내가 손녀 때문에 정신이 팔려서 제대로 인사도 못드렸군. 송작가 옆에 계신 분. 저분이 작가님이신가?”
“네, 넵! 제가 <호구>를 쓴 민용석입니다.”
민용석이 잔뜩 얼어붙어 대답했다.
다가와 악수를 건네는 이순철.
“반가워요. 대본 잘 봤어요.”
자신보다 한참 어린 민용석에게도 존대를 하는 모습.
“가, 감사합니다!”
민용석은 황송해하며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이렇게 만나는 자리를 마련한 건 다름이 아니고. 오성태 역할을 맡고 싶은데. 이 늙은이에게 맡겨줄 생각이 있을까, 싶어서요.”
이순철은 재지 않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성태.
<호구>에 등장하는 조연으로.
주인공 남매에게 검도를 가르쳐주는 검도관의 늙은 관장이다.
“괜찮으시겠어요, 선생님?”
그때.
갑자기 송미연이 끼어들었다.
“뭐가?”
“솔직히 선생님이 맡기엔 너무 급이 안 맞는 배역이니까요.”
오성태는 주인공 남매를 제외하면 그나마 제일 분량이 많긴 하지만.
결국 조연인 건 마찬가지.
보통 신인 발굴을 위한 미니시리즈 공모전은 4부작 혹은 6부작을 받는다.
<호구>는 6부작의 미니시리즈.
이순철씩이나 되는 배우가 맡기엔 드라마도, 배역도 다소 부족해보인다.
“쯧쯧!”
하지만 오히려.
송미연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이순철.
“송작가, 자넨 그게 문제야. 예전부터 왜이리 급 나누기를 좋아하나?”
송미연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선생님께서 자꾸 그러시면 뒤따라가는 후배들도 부담을 느끼니까요. 이순철도 조연하는데 넌 왜 그러냐. 이순철도 미니시리즈 뛰는데 네가 왜 비싼 척이냐. 그런 말을 듣게 될 텐데요?”
“그건 그 녀석들이 알아서 할 문제지. 내가 하고 싶다는데, 다른 무얼 고려하나? 배역의 크고 작음은 별로 중요치 않아. 배우로서 끌리느냐, 마느냐가 중요하지.”
이순철이 줄곧 배우 생활을 할 수 있는 이유.
언제나 자신의 선택과 감을 믿는 것이다.
다른 조건들은 신경 쓰지 않으며, 묵묵히 자기가 택한 길을 걸어간다.
“뭐, 선생님께선 진심이시네요. 민용석 씨가 알아서 해요.”
이제 더 할 말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는 송미연.
“난 언제나 진심이야. 그러니 부탁해요. 이 작품, 내가 해도 되겠어요?”
“무, 물론입니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순철 선생님!”
다시 한 번 깊게 고개를 숙이는 민용석.
세부 계약은 추후 논의해야 하지만.
우선 이순철은 <호구>에 출연을 확정했다.
그렇게 모두가 돌아간 뒤.
이순철은 송미연과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 작가가 자네 제자라고? 훌륭한 제자를 뒀군. 청출어람이지.”
“민용석 씨 대본이 좋긴 하지만, 아직 절 뛰어넘으려면 한참 멀었어요.”
“허허허! 하긴, 송작가에게 자존심 빼면 시체지.”
이순철이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고.
그런 이순철을 빤히 바라보던 송미연이 물었다.
“역시 선생님께서도 그 아이를 눈여겨보시는 건가요?”
그 아이가 누구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이순철은 피식 웃었다.
“그래. 내가 작품할 때 또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누구와 연기를 나누느냐. 누구와 호흡하느냐니까.”
그렇게 말하며 이순철이 떠올린 건.
‘다음에 뵈어요, 이순철 할아버지!’
손을 흔들며 인사하던 유진의 모습이었다.
“궁금하거든. 그 아이가 과연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