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드라마 <호구>의 촬영일.
이미 촬영은 시작되었고, 오늘은 2화 분량을 찍을 예정이다.
<호구>는 사전제작 드라마였기에 그리 급박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아직 방영 때까지 여유도 제법 있었고.
<호구>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자 SBW 쪽에서 여러모로 배려해준 덕분이다.
그 촬영장 구석.
이지혜가 휴대폰을 들고 통화 중이었다.
“너 예능 섭외 들어왔다. 김오태PD 예능이니까 반드시 해라. 알았냐? 부모님께는 잘 말씀드렸으니까.”
“네, 알겠어요.”
“그리고 슬슬 재계약 시즌인데. 조만간 얘기 좀 하자. 아, 그리고 얼마 전에 너희 부모님께 한우선물세트 보냈다.”
“네. 저 촬영 들어가야해요. 끊을게요.”
뚝.
나대준과의 통화를 끝낸 이지혜.
휴대폰을 덮으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재계약, 이라.”
아직 이지혜는 미성년자.
부모님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즉, 재계약 같은 민감한 사안에서 이지혜 본인보다.
이지혜의 부모님이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때문에 나대준 대표는 이지혜의 부모님에게만 온통 신경을 쏟았다.
이지혜는 최대한 굴려먹고.
부모님에겐 극진히 대접하는 전략을 취한 것.
‘마음 같아선 다른 소속사로 이적하고 싶어. 하지만.’
이지혜는 나대준의 회사에서만 줄곧 일해왔고, 다른 소속사는 경험해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새 출발에 대한 불안감도 적잖이 존재했다.
이를 상담할 사람도 마땅치 않았다.
가족들은 지금 이지혜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상황.
게다가 나대준에게 무척 호의적이다.
‘난 부모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해본 게 언제지.’
항상 스케줄에 치여사는 이지혜다.
집에 들어가면 잠만 자고 나온다.
가족들과 제대로 밥 한 끼 해본 게 언제일까.
‘그런 상황에서 엄마랑 여행 예능이라.’
어색함이 카메라에 티가 나진 않을까.
과연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아저씨! 저랑 가위바위보 해요. 음료수 내기!”
“싫어.”
“왜요?”
“내가 맨날 지니까.”
“에이, 이번엔 이길지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가위 바위 보는 완전 운인데!”
“흠. 듣고 보니 그렇긴 한데.”
“자, 안 내면 술래. 가위 바위 보!”
“아악! 내가 또 졌잖아!”
“와, 아저씨 가위바위보 진짜 못한다.”
소속사 사람과 함께 있었는데, 꽤 즐겁게 노는 모습.
누가 보면 그냥 삼촌과 조카가 노는 줄 알 것이다.
반면 이지혜의 매니저는?
현재 차에서 히터 틀고 자는 중이다.
‘저 아저씨는 검도연습 때조차 따라와 주던데. 아줌마도 가끔 따라나오시고.’
험상궂지만 의외로 방정맞고 감성적인 차동석.
냉정하게 중심을 잡아주는 장미소.
둘은 유진을 마치 조카 대하듯 편하게 대해줬다.
유진과 스스럼 없이 장난을 칠 정도.
‘나도 저런 소속사에 있었으면, 좀 더 행복했을까?’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어? 누나!”
이지혜를 발견한 유진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급하게 표정을 감추고 미소 짓는 이지혜.
“어, 안녕.”
“음? 누나 표정이 안 좋다. 무슨 일 있어요?”
‘얜 가끔 사람 감정을 귀신 같이 포착해낸다니까.’
뜨끔 했지만 곧 이지혜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아냐, 아무것도. 근데 <리플레이> 엄청 잘 나가더라? 축하해.”
“넵. 고마워요. 전 처음부터 잘 될 것 같았어요!”
정범의 학폭 논란이 사실로 밝혀진 뒤.
<짐승>은 바로 영화관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땅히 그를 대체할 영화가 없던 차에.
<리플레이>가 스크린 점유율을 확 높인 것.
덕분에 벌써 10만 관객을 돌파했다.
독립영화로서는 정말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너 <짐승> 캐스팅 제의 받았었다고 했지? 대단하네. 정범 감독님의 작품을 까다니.”
열이면 아홉은 정범의 작품에 참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진은 그를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그냥, 대본을 보니까 별로더라구요. 제목부터 별로잖아요. 짐승이라니.”
진짜 저런 이유로 거절한 걸까.
이지혜는 유진이라면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것보다 누나. 곧 촬영 들어간다니까, 우리 또 구호 해요.”
“그래, 그래.”
두 사람이 손을 모은 뒤.
유진이 아자아자를 외치면, 이지혜가 파이팅을 외치는 구호.
이제는 촬영 시작 전 하나의 의식이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부끄러워하던 이지혜도 완전히 적응한 모습.
그때.
“그거. 이 할애비도 해도 될까?”
갑자기 두 사람 앞에 나타난 사람.
바로 이순철이었다.
곧 촬영할 장면이 바로 이 세 사람이 한데 모이는 씬이었으니.
“서, 선생님?”
“나도 우리 주인공들한테서 기운 좀 얻어갈까 해. 주책 맞지만, 괜찮으려나?”
“네! 할아버지도 같이 해요! 자, 제 손등 위에 얹으세요.”
유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등을 내밀었다.
“허허허! 역시 유진이는 호쾌해서 좋구먼.”
유진의 손등 위에 손을 포개는 이순철.
곧 이지혜도 눈치를 보다가 손을 얹었다.
“아자아자!”
“파이팅!”
어느 때보다 힘찬 파이팅 소리.
촬영장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쪽을 흘끗거릴 정도였다.
덕분에 오랜만에 화끈거리는 이지혜의 얼굴.
“허허. 젊은 피를 수혈받은 기분이구먼! 더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순철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원로배우 이순철과 연기 호흡을 주고받을 생각에 긴장했던 이지혜였으나.
이 구호 덕분에 조금은 긴장이 풀린 느낌이었다.
“자, 그럼 촬영 갑니다! 씬넘버 21 준비해주세요!”
한 스태프가 소리쳤다.
*
아르바이트를 끝마치고 늦게 돌아온 주인하.
그녀의 손엔 검은색 비닐봉투가 들려있다.
“인후야. 누나 왔어. 오랜만에 인후가 좋아하는 붕어빵 사왔다? 식기 전에 얼른 먹자.”
그러나.
집에 있어야할 주인후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주인하가 알고 있는 주인후는 결코 혼자 밖으로 놀러나갈 아이가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인후야? 인후야!”
곧 패닉에 빠진 인하.
온 집안을 뒤져도 보이질 않자, 곧장 거리로 나온다.
꺼이꺼이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거리를 헤매는 주인하.
그 얼굴이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다.
“거, 학생! 무슨 일이야?”
그때.
주인하가 자주 가는 청과점 주인이 물었다.
“인후. 인후가, 제 동생이 안 보여요.”
“동생? 동생이라면 낮에 저기 있는 검도관으로 가던데?”
그 말을 듣고 실낱같은 희망이 생긴 주인하.
곧장 검도관으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그 얼굴엔 절박함과 다급함이 모두 묻어있었다.
“오, 드디어 등록하러 손님이 오신 건가?”
검도관 안에 있는 것은 오성태.
손님의 등장에 돈이 될까 기대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대뜸 멱살부터 잡는 주인하.
“당신 뭐야! 내 동생 어디있어. 어디있냐고!”
“너, 너는 뭐야! 갑자기 나타나서는.”
“내 동생 주인후 어디 있냐고, 이 납치범 새끼야!”
“나, 납치범? 허! 쯧. 어이가 없네. 내가 납치범이면, 네 동생은 도둑이야 도둑!”
“뭐가 어째?!”
두 사람이 당장이라도 맞붙을 것 같은 긴장감 속.
“어? 누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검도복을 입고, 목도를 든 주인후가 나타난 것.
“인후야!”
멱살을 풀고 곧장 주인후에게 다가간 주인하.
“괜찮아? 다친 곳은?”
“손에 굳은살이 배기고, 발바닥에 물집 좀 잡혔어. 근데 괜찮아! 재미있어!”
“얌마. 그게 다친 거냐? 수련 도중에 벌어지는 영광스런 흉터라고!”
“······뭐라고?”
그제야 자초지종을 듣게 된 주인하.
걱정이 가득하던 얼굴에서, 곧 화를 내기 시작한다.
“인후야. 누나가 뭐라고 했어. 낯선 아저씨 따라가지 말라고 했잖아.”
“이 아저씨 나쁜 사람 아니야.”
“그걸 어떻게 네가 어떻게 알아. 누나 말만 따르면 돼! 어른들은 다 나빠. 믿을 건 우리 둘 뿐이라고. 너마저 어떻게 되면, 누나는!”
“누나!”
그때.
주인하의 말을 자르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주인후.
“인후, 야?”
“이 아저씨, 나한테 공짜로 검도 가르쳐주고, 검도복이랑 목도도 줬어. 왜 누나는 맨날 사람들이 나쁘다고 해? 나쁜 사람들도 있지만, 착한 사람들도 있는데!”
여태 주인하에게 소리를 지르긴커녕.
화 한 번 내지 않았던 주인후다.
그런 동생의 변화에 주인하는 덜덜 떨었다.
“누나는 겁쟁이야!”
쿵쿵 소리를 내며 주인하에게서 멀어지는 주인후.
주인하가 주저앉으며 덜덜 떨고 있을 때.
“크흠!”
헛기침 소리를 내는 오성태.
“이제 알았냐? 난 납치범도 뭐도 아니라고, 쯧. 그냥 검도 가르쳐주는 노인네일 뿐이지.”
“당신이 인후를 저렇게 만든 거죠? 우리 착한 인후를!”
“허. 그럼 저 애는 원래 어땠나? 누나 말이라면 껌뻑 죽고, 누나의 말만 따르는 로봇 같은 아이였나?”
그러자 주인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쯧, 하고 혀를 차는 오성태.
“온 김에 한 번 보고 가라.”
“······뭘요?”
“네 동생이 검도하는 모습.”
오성태가 앞장 서서 걸어가자.
주인하는 겨우 일어서서 그 뒤를 따라갔다.
잠시 후.
검도관에 울리는 경쾌한 스탭 소리.
바로 주인후가 목도를 쥐고 훈련하는 모습이었다.
비록 아직 동작은 어설프지만.
주인후는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자신감을 뿜어내면서.
그러나 손에 힘이 풀린 것일까.
곧 실수로 목도를 놓치고 마는 주인후.
목도가 발목에 떨어진다.
“인후야······!”
“놔둬라.”
달려가려던 주인하를 막아서는 오성태.
그리고 잠시 후.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지만.
다시 일어서서 목도를 쥐는 주인후.
곧장 다시 수련에 매진한다.
“······.”
언제나 순진했던 동생의 변화에 마냥 놀라워하는 주인하.
그런 주인하를 보며, 오성태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디. 너도 한 번 배워볼테냐?”
“컷!”
윤진영PD의 외침으로.
<호구> 속 세 사람은 곧 현실로 돌아왔다.
“세 분 연기 정말 좋았습니다. 각자 바스트만 따로 따고 다음 씬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넵!”
꽤 순탄하게 흘러간 촬영.
이순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지혜를 바라보았다.
‘저 친구. 연기를 꽤 하는군. 다소 부자연스러움이 남아있지만, 풋풋한 느낌이라 캐릭터에 나름 잘 어울려. 감정의 폭발도 좋고. 어린 나이치곤 굉장하군.’
이순철은 이지혜에게 후한 점수를 매겼다.
고1이라는 나이를 감안했을 때.
이지혜가 방금 보여준 연기는 꽤 인상 깊었으니까.
‘앞으로가 기대되는 친구야. 그런데.’
곧 이순철의 시선이 이지혜에게서 유진으로 옮겨갔다.
이번에 이순철은 미소 짓지 않았다.
대신 그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방금 씬의 분량부터 흐름까지, 모두 주인하가 주도한다. 하지만 저 아이가 등장하는 순간 그 공기가 다소 뒤틀렸어.’
주인후의 등장은 주인하와 오성태, 두 사람 사이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주인하와 주인후, 두 사람의 갈등을 예고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주인후는 검도를 통해 점차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성장형 캐릭터. 그리고 오늘 유진이 보여준 주인후는, 확실히 1화와 미세한 차이가 있어. 좀 더 눈빛이 단단해지고 목소리가 분명해졌지. 이미 그 시점에서 주인하가 알고 있는 주인후가 아닌 거야. 아무 말 없이, 분위기로 누나와의 갈등을 예고하는 셈이지.’
그 별 것 아닌 차이가 결과적으로 장면의 긴장감을 바꾼다.
함께 연기 중인 상대 배우가 그 디테일을 캐치해낼 테고.
자연스레 그에 대한 리액션을 할 것이다.
그러면 또 유진이 그에 대한 리액션을 한다.
서로 감정으로 정교한 탑을 쌓는 것처럼.
치밀한 상호작용을 하는 셈.
‘그걸, 저 9살짜리가 주도했고.’
수십 년간 연기로 밥을 먹고 살았지만.
이순철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게다가 검도장면. 검도 장면은 그 아이를 위한 독무대 같았어. 말없이 목도를 휘두르는 것뿐인데도 엄청난 흡인력이 있다.’
서툴게 검도를 배운 아이의 움직임.
그와 동시에 처음으로 자기 적성을 찾은 듯.
검도를 하며 환희와 몰입감을 느끼는 주인후의 감정.
유진은 이 모든 것을 정확히 표현해냈다.
‘매주 5번씩 검도를 배우고 있다지. 그렇다면 검도 실력이 꽤나 늘었을 텐데. 결코 자신의 능력을 뽐내려 하지 않고, 캐릭터와 밸런스를 맞췄어.’
아역배우라는 틀에 가두기에 유진의 연기 디테일은 차원이 달랐다.
‘이 아이에겐 나중이 기대된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아.’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이순철의 시선을 느꼈는지.
큰 눈을 끔뻑이며 묻는 유진.
그 모습은 그저 평범한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허허! 아무것도 아니다, 욘석아.”
이순철은 웃으며 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 바로 지금 이 아이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게 행운일지도 모르겠군.’
*
그 시각 MBS 예능국 회의실.
“그럼 출연진은 대부분 세팅된 거지?”
김오태의 물음에 똥머리 작가 강주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박유진과 아버지, 이지혜와 어머니, 그리고 키즈모델 진태훈과 그 어머니. 이렇게 세 가족 다 출연도장 찍었어요.”
“쓰읍. 이제 여기에 메인 진행자 한 명 넣어야 하는데.”
아무리 여행을 가는 게 기획이라곤 해도, 명색이 예능 프로그램이다.
다큐가 되지 않으려면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상황을 정리해줄 진행자 한 명이 필요했다.
“무난하게 조현재 쓸까요? 요즘 진행 맡는 프로그램들 다 잘나가잖아요.”
“아니. 이런 포맷인데 전문MC를 쓰면 너무 좀 그렇잖아. 적당히 아이들하고 잘 어울리면서도 토크 잘 풀어낼 줄 알고, 신선한 인물이면 좋겠는데.”
“차라리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달라고 하세요.”
강주란의 핀잔에 김오태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에이, 좀 찾아봐! 예능 자주 뛰는 배우들이나 어린애들이랑 자주 엮이는 연예인 스캔 좀 해보고.”
그때 울리는 김오태의 휴대폰.
발신번호를 확인한 김오태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환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예, 김PD님. 오랜만입니다.”
“아니, 조실장님!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상대방은 바로 UB엔터테인먼트 소속인 조실장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수화기 너머 조실장의 목소리는 꽤 지쳐보였다.
“후우. 그게, 이번에 김PD님 파일럿 예능 하나 기획하신다고요.”
“와우. 거기까지 소문이 다 난 겁니까?”
“그냥, 어떤 놈 때문에 어찌저찌 알게 됐습니다.”
“허허. 역시 조실장님이십니다. 네, 실장님 말이 맞습니다.”
“거기에 아역배우 박유진이 참여하죠?”
설마 출연자 정보까지 새나갔다니.
역시 아이돌 빅터의 소속사답다고 해야할까.
순간 당황한 김오태였으나.
“거, 우리 재오가 거기 꼽사리 좀 끼고 싶답니다.”
“······네?”
이어지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