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김오태PD가 전화를 받기 며칠 전.
“난 이제부터 꼬맹이를 박유진 님이라고 부르기로 했어.”
차동석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또 무슨 소리야?”
차동석의 헛소리에 익숙해진 장미소는 이제 눈길도 주지 않고 물었다.
“다른데도 아니고 빅터 뮤직 비디오까지 건질 줄은 몰랐어. 심지어 재오가 직접 제의했다니. 내가 그런 위인에게 꼬맹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오오, 박유진 님!”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그게 더 부끄러우니까. 그냥 이름이나 제대로 불러줘. 유진이도 이제 9살이니까, 언제까지 꼬맹이 꼬맹이 할 수는 없잖아.”
“알았어, 알았어. 하여튼 농담도 못 하겠다니까.”
장난스레 투덜댄 차동석은 곧 책상에서 이력서를 꺼냈다.
그리곤 장미소의 옆자리로 다가와 슬며시 내밀었다.
“근데 내가 말했던가? 넙튜브 편집자 뽑았다고.”
“아니? 말 안 했어. 결국엔 그 사람 쓰기로 한 거야?”
“응. 김상헌 이 사람 스펙이 너무 압도적이라서, 안 뽑을 수가 없더라고.”
결국 차동석은 그 너드 같은 남자, 김상헌을 택했다.
스펙도 스펙이고, 웹드라마 제작 경력이 있는 게 매우 끌렸다.
자체 컨텐츠를 만들 때 여러 도움을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쪽에서 요구사항이 있더라고.”
“요구사항? 뭔데? 연봉을 더 올려달래?”
“아니. 그건 상관없는데, 유진이 촬영 때마다 동행하고 싶다던데?”
그 말에 꿈틀거리는 장미소의 눈썹.
“진짜 특이하네. 보통은 영상만 받아서 편집하고 싶어 할 텐데. 현장에 동행을 하고 싶다고?”
“그러니까 말이야. 이미지만 봐서는 어디 틀어박혀서 편집만 할 거 같은데.”
흥미가 동했는지 김상헌의 이력서를 훑어보는 장미소.
그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뭐야. 사무실로 올 사람 있어?”
“아니? 없는데. 넙튜브 편집자 면접도 다 끝났고. 누구지?”
차동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저벅 걸어가 문을 열자 들어온 사람은.
“안녕하세요.”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사람.
다름 아닌 이지혜였다.
“어? 이지혜 배우. 무슨 일이에요?”
차동석이 흠칫 놀라 물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사무실로 찾아온 손님이 배우 이지혜였으니.
“혹시 유진이 보러 오신 건가요? 유진이는 지금 사무실에 없는데. 휴일이라 아버지랑 놀러갔거든요.”
“아뇨, 유진이 보러온 거 아니에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드릴 말씀이 있다니, 더더욱 미스테리였다.
이지혜가 직접 찾아와 할 말이 대체 뭐란 말인가.
“그, 일단 들어와요.”
이지혜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음료수를 하나 내밀었다.
이지혜는 감사를 표하면서도 음료수엔 손대지 않았다.
손끝이 창백한 것을 보니, 꽤 긴장하고 있는 모양.
“그래서. 무슨 일인가요?”
이지혜의 맞은편에 앉으며 차동석이 물었다.
“저, 불쑥 찾아와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정말 죄송스러운데요.”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망설이던 이지혜.
그러다 곧 침을 꿀꺽 삼키곤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저. 주역 매니지먼트에서 저를 받아주실 수 있나요?”
“예?”
예상치 못한 폭탄 발언.
별 관심이 없던 장미소도 흠칫 놀라 몸을 돌렸다.
“아니, 방금 뭐라고 하신 건가요? 우리 기획사로 들어오겠다고요? 이지혜 배우가?”
차동석이 되물었고.
이지혜는 대답 대신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여, 역시 안 될까요?”
“아, 으. 음? 아니, 그게. 허 참.”
“자세히 들어보고 싶은데요.”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차동석을 밀어내고.
장미소가 이지혜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이지혜 배우. 도무지 제 머리로는 이해가 안 가거든요.”
장미소가 다리를 꼬며 물었다.
물론 이지혜 정도 되는 원석이 와준다면 두 팔 벌려 환영이다.
“지금 이지혜 배우 정도라면 데려가려는 곳이 줄을 섰을 텐데. 왜 하필 우리죠?”
다만 그 저의가 궁금한 것.
지금 이지혜라면 대형 기획사에서도 탐을 내고 있을 터다.
그런데 그곳을 모두 거절하고 영세 기획사인 주역 매니지먼트로 온다?
상식적으론 납득하기 어려운 일.
분명 목적이 있다.
“······여기라면. 여기라면 행복하게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유진이처럼요.”
그 말에 짙게 배어나오는 회환, 그리고 진심.
차동석은 물론이고 장미소도 그를 느꼈다.
“전 소속사와의 계약은요?”
“재계약 제의는 거절했고, 공식적으로 계약기간은 어제까지였어요. 이제 완전히 종료됐죠.”
“거기서 나온 이유가 있어요? 데뷔 이후로 줄곧 거기서 활동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게, 실은.”
이지혜는 그간 있던 일에 대해 장미소에게 소상히 설명했다.
나대준 대표 밑에서 혹사당했던 것.
그리고 유진에게 위로받고, 가족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눈 것.
새 소속사로 주역 매니지먼트를 원하기까지, 전부 다.
“이야. 유진이 때문에 이 회사에 찾아오는 사람이 요즘 왜 이리 많아?”
차동석이 유진의 영향력에 새삼 감탄하고 있을 때.
“잘 알겠어요. 하지만 이건 분명히 해둘게요. 저흰 대형 기획사처럼 많은 지원을 해줄 수가 없어요. 그리고 영세한 곳이라 계약금도 못 줄 거예요. 그래도 정말 우리 회사랑 일할 거예요?”
“네.”
이미 마음을 정하고 온 듯.
곧장 대답하는 이지혜.
“그러면 안 돼요, 이지혜 배우.”
그러나 그 대답에 오히려 장미소가 화를 냈다.
“네?”
“전 소속사에서도 그 고생을 했다면서요. 그런데 만약 우리가 갑자기 나쁜 마음 먹으면 어쩌려고? 앞으로는 누굴 상대하든 자신의 가치와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해요. 알았어요?”
“네? 아, 네.”
계약금을 안 받겠다고 답했는데 오히려 혼나다니.
차가운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신경써주는 장미소였다.
혹여 이지혜가 또 나쁜 일을 겪지 않도록.
“계약금은 제대로 챙겨줄게요. 우리가 영세, 영세 타령을 했어도 배우 계약금도 못 줄 회사는 아니거든요. 그렇죠, 사장님?”
“그럼, 당연하지!”
호쾌하게 대답하는 차동석.
“계약에 대해선 나중에 부모님을 동석해 따로 얘기를 나누도록 하죠. 하지만 이 순간부터, 저는 이지혜 배우를 우리 주역 매니지먼트 소속이라 생각하고 대할 거예요.”
“아, 네. 감사합니다!”
일어나 깊이 허리를 숙이는 이지혜.
고개를 들자 진실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심하긴 일러요. 일단 문제가 있어요. 이지혜 배우의 전 소속사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아무래도 대표라는 인간이 쓰레기인 것 같은데, 그쪽에서 이지혜 배우를 상대로 언플을 시도할 확률이 높아요.”
“언플이요?”
“뭐 뜨더니 의리를 저버렸다, 배은망덕하다, 싸가지가 없다. 그런 식으로 기사를 흘리면서 이지혜 배우의 이미지에 타격을 주려 할 거예요. 대형 기획사로 가지 못하게. 가더라도 최대한 흠집을 내려고.”
이지혜의 입으로 전해들은 나대준 대표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인간이다.
재계약을 고민하는 자사 배우들에게 날리는 경고도 될 테니까.
“제,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될까요?”
“미안하지만 우린 그런 힘 있는 기획사가 아니에요. 소속 배우라곤 아역배우 하나뿐인 영세 기획사죠.”
무섭도록 잔인한 장미소의 말.
그러나 장미소는 그 말을 하며 미소 짓고 있었다.
“대신 우리가 잘 하는 게 있어요. 바로 가진 걸 활용하는 능력이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말했죠? 그렇게 언플을 시도하는 건, 대형기획사로 이적하는 걸 최대한 방해하기 위해서라고. 돈 때문에 의리를 저버렸다는 프레임을 씌우려고 말이죠. 그런데, 이지혜 배우가 이적하려는 곳이 대형 기획사는 아니잖아요?”
주역 매니지먼트는 아역배우 유진의 1인 기획사 같은 곳.
이지혜가 그런 곳으로 이적하는데 돈이나 명예를 쫓았다는 프레임을 건다?
누구도 동조하지 않을 것이다.
“저, 한 가지 아이디어가 있어요.”
그때.
갑자기 눈을 빛내며 말하는 이지혜.
“아이디어?”
“네. 저도 반격이라는 걸 해보고 싶거든요.”
가진 걸 활용하는 능력.
이지혜도 그 능력을 한 번 사용해볼 생각이었다.
*
‘설마 지혜 누나 쪽에서 주역 매니지먼트를 선택해줄 줄이야.’
차동석에게서 이지혜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유진.
그 소식엔 유진도 적잖이 놀랐다.
조만간 직접 이지혜를 설득할 생각이었으니까.
‘거기다 곧장 반격까지 계획하고 있다니. 확실히 마음을 먹은 모양이네.’
장미소와 이지혜가 어떤 계획을 짜고 있는지도 들은 유진.
[박유진&재오&이지혜의 미친 케미 예약! 김오태PD의 신작 파일럿 예능 <별을 보러 떠나요> 출격 준비 완료]
[아역배우 박유진, <별을 보러 떠나요>에서 ‘날아가’ 라이브로 불렀다?]
[그동안 감춰온 이지혜의 눈물······<별을 보러 떠나요> 예고편 공개 후 관심 집중!]
그를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는 중이었다.
상대방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그렇다면 쐐기를 박아줘야지.’
유진은 그 반격이 더 확실하게 먹히도록 무기를 벼려줄 생각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드라마 <호구>의 촬영일.
오늘은 유진과 이순철이 붙는 장면만 촬영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이순철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는 유진.
종일 호구를 쓰고 촬영했기에 유진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감사는 무슨. 고생은 네가 제일 많이 했는데.”
그런 유진이 기특하게 보이는지.
흐뭇한 미소와 함께 답하는 이순철.
그러나 곧 그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벌써 이 작품의 촬영도 얼마 안 남았구나. 작품이 끝나가길 아쉬워하는 건 참 오랜만이야.”
작품 자체에 대한 애정도 있지만.
아마 유진의 연기를 더 지켜보지 못한다는 아쉬움 때문일 터.
연기경력도 어마어마하고, 존경받는 원로배우라는 위치를 가진 이순철이다.
그런 그에게도 유진의 존재는 새로운 자극이었을 테니.
“걱정 마세요, 할아버지.”
그런 이순철을 위로하듯.
“작품이 끝나도 우린 계속 볼 거잖아요!”
유진은 해사하게 웃어주었다.
“허허! 그래, 그렇지. 그렇고말고. 이거 손주 하나가 더 생긴 기분이구만!”
그러자 이순철은 호탕하게 웃으며 유진을 끌어안았다.
유진이 땀범벅이라는 것도 잊은 채였다.
“아, 맞다. 할아버지. 저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음? 부탁? 그래. 어디 한번 말해봐라.”
“제가 전에 할아버지 손녀한테 음성 녹음해준 적 있잖아요. 그때 할아버지가 그랬죠? 이 은혜 꼭 갚겠다고.”
“그럼, 그랬지.”
“그거 갚아주셨으면 해서요!”
이순철은 가끔 유진이 내보이는 그 당돌함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배우라면 모름지기 당돌해야 한다는 것이 이순철의 가치관이었으니.
게다가 손녀가 유진의 음성 메시지 덕분에 얼마나 기뻐했던가?
“허허. 이 늙은이한테 얼마나 대단한 부탁을 하려고? 편하게 말해봐라.”
“인터뷰 하나만 해주세요.”
“인터뷰 말이냐?”
“그게, 저에 관한 인터뷰는 아니구요. 지혜 누나에 관한 인터뷰요!”
이지혜도 <호구>에 출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지혜에게 이순철은 너무 머나먼,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 이순철에게 상담이나 해결을 부탁을 한다는 건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유진이 나서기로 했다.
“네가 아니라 지혜를 말이냐? 어째서?”
“그게, 실은요 할아버지.”
유진은 주변 눈치를 보는 척하며 이순철의 귓가에 무어라 소근소근 말했다.
그러자.
“뭐?”
이순철의 얼굴이 삽시간으로 굳어갔다.
“그게 정말이냐?”
*
시간이 지나고.
<별을 보러 떠나요> 방영 다음날.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삐 소리 이후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니······]
“아오!”
나대준은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줄곧 이지혜와 그 부모님에게 전화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기껏 다 키워줬더니 이렇게 먹튀를 해?”
씩씩거리는 소리가 사무실에 울렸다.
계약 만료를 앞두고 온갖 방해공작과 회유책을 써보려 했으나.
이지혜의 결정은 바꿀 수 없었다.
계약 종료 이후엔 아예 이지혜의 행방조차 알 수 없게 되었고.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결정적으로 이지혜의 부모님 역시 잠적한 게 컸다.
사람을 보내 직접 집까지 찾아갔으나,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이지혜가 설마 가족들에게 말한 건가? 아냐. 그럴 성격이 못돼.”
나대준이 아는 이지혜는 제 속을 남에게 드러낼 줄 모른다.
그러면서도 책임감이 많아, 혹사당하면서도 뭐든 열심히 한다.
그래서 딱 나대준이 이용해먹기 좋았던 사람인 것.
“쯧, 아무튼 이지혜는 버려야겠네.”
하지만 나대준은 아주 크게 아쉬워하진 않았다.
계속 더 뽑아먹을 아역배우를 찾을 뿐.
부모들은 자식이 TV에 나와 아역배우로 활동한다면 그저 좋아한다.
거기에 살살 바람만 잡아주면 계약서 쓰는 건 어렵지 않은 일.
그 이후론 부모님들을 잘 구슬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려면 확실히 보여줘야지. 내 손에 들어온 이상, 다른 기획사로 가면 손해라는 걸.”
나대준이 계획하고 있는 언론플레이.
지금 이지혜는 주가가 상한가를 치는 중이다.
그런 와중 오래 머물렀던 중소 기획사를 떠나, 대형 기획사로 이적한다?
배신자, 배은망덕, 은혜도 모르는 애로 몰아갈 수 있다.
“가는 길에 똥물 한 번 제대로 튀겨주마.”
나대준은 이를 갈며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주소록에서 아는 기자의 전화번호를 찾아 곧장 전화를 걸었다.
“어, 이선호 기자님. 나요. 나대준. 기사 하나만 써줬으면 하는데.”
“마침 전화드리려 했습니다, 대표님. 지금 난리도 아니에요! 이번 이지혜 배우 혹사 논란에 대한 입장을 밝히시려는 겁니까?”
“뭐, 뭐요? 혹사 논란?”
“혹시 모르고 계신 겁니까? 지금 인터넷이 난리입니다!”
“자, 잠깐만 끊어요!”
인터넷이 난리라고?
나대준은 곧장 포털 사이트를 열었다.
[메이버 실시간 검색어
1. 별을 보러 떠나요
2. 이지혜 혹사
3. 이지혜 소속사
4. 이지혜 눈물
5. 박유진 이지혜
6. 별을 보러 떠나요 다시보기
7. 박유진 날아가
······]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거기다가.
[“아역배우 혹사시키는 기획사들, 모조리 뿌리 뽑아야······아동학대와 다를 것 없어” 원로배우 이순철의 격노!]
확인사살까지 들어왔다.
무려 원로배우 이순철이 이지혜를 지원 사격한 것.
[어쩌다 인터뷰까지 결심하게 됐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배우 이순철은 “박유진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 요즘 이지혜가 힘들어 한다더라. 그에 대한 상담을 내게 요청했고, 이지혜가 오랜 기간 동안 겪은 혹사에 대해 알게 되었다”라고 답했다. 이어 그는 “연예계에 40년 넘게 몸담았지만 이런 인간말종들은 처음 봤다. 어떻게 어린아이를 혹사시킬 수가 있나?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할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순철의 말대로.
나대준이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찾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