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씹어먹는 천재배우님-55화 (55/237)

55화

똑똑.

이순철이 누군가의 집에 노크 했다.

초인종을 누를 수 있음에도 굳이.

잠시 후.

집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며, 곧 문이 열렸다.

“······선생님.”

안에서 나온 사람은 바로 진승우.

초인종을 눌렀다면 그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순철의 노크 소리를 알고 있기에 맞이하러 나온 것.

“들어오세요.”

진승우의 집 안은 꽤 난장판이었다.

빈 맥주캔이 굴러다니고, 마른 안주와 뜯긴 과자 봉지가 여럿.

“연락을 주셨으면 집을 좀 치워놨을 텐데요.”

“웬일로 집에 있구나.”

이순철은 개의치 않는 듯 소파를 슥슥 털어낸 뒤 앉았다.

“네가 자주 간다는 펍이나 클럽에 연락해봤는데, 요 며칠 통 가지 않았다는 얘길 들었다.”

“예, 뭐. 그렇습니다.”

“혼자 술 마시면 맛이 없다고 하더니. 무슨 술을 이리 많이 마셨냐.”

다른 사람이 드나든 흔적은 없다.

다소 퀭한 진승우의 얼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오디션 이후 혼자 틀어박혀 술을 마신 모양.

“그냥. 뭔가 혼자 마시고 싶은 기분이네요.”

머쓱한지 진승우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래, 그랬겠지.”

잠시 둘 사이에 감도는 침묵.

평소라면 이순철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었을 진승우지만.

어쩐지 고개를 숙이고선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무슨 죄인이라도 된 것마냥.

“쪽팔리냐?”

이순철이 넌지시 한 마디를 꺼냈다.

그러자 진승우가 헛웃음을 지었다.

“쪽팔릴 게 뭐가 있겠습니까? 아직 오디션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닌데.”

“거짓말 하지 마. 눈치 챘을 거 아니냐.”

이순철은 진승우를 제치고, 유진이 뽑힐 것이라 예상하고 있는 것.

아니, 예상을 뛰어넘어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그 아이를 많이 아끼시는군요, 선생님.”

“아낄 수밖에 없지. 누구라도 그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거다.”

그리 말하며 껄껄 웃는 이순철.

반면 진승우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굳어있었다.

“윤빈 역할 오디션 연기를 보지 않았어도 눈치 챘겠지? 그 아이가 영서를 윤빈 역할과 함께 엮어 표현했다는 걸.”

그러자 진승우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제 연기가 아닌 유진의 연기를 칭찬하는 이순철을 힐난하는 것처럼.

“권성택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오신 건가요?”

“아니. 오디션 이후론 그 친구와 말 한 마디 섞지 않았어.”

“그런데 어떻게 그리 확신하시는 거죠?”

“물론 네 연기도 훌륭했지. 대중성이 있으면서도, 디테일을 쌓아 강렬한 캐릭터를 구축해냈으니까. 그러나 그 아이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해석과 연기를 보여주었어. 그건 대체가 불가능하지.”

배우의 오리지널리티.

진승우가 유진을 찾아갔을 때 시험했던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승우야. 진짜 쪽팔려야할 건 9살짜리 아이에게 오디션에서 밀렸다는 사실이 아니라, 지금 네가 보여주고 있는 태도다.”

“예, 저도 압니다. 제가 지금 등신처럼 굴고 있다는 걸요. 그래서 더 짜증이 나는 거고요. 이런 상황에서도 그 아이 편만 드시는 선생님 덕분에 더 우울하고요.”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소리를 내뱉는 진승우.

만약 이순철이 아니었다면 이미 버럭 소리를 지르고도 남았을 터다.

그만큼 진승우의 심정도 복잡한 상황.

유진의 오디션 참여 사실을 알게 된 후 가졌던 호승심.

필모그래피를 훑으며 느꼈던 호기심과, 직접 찾아가 느꼈던 배우로서의 고양감.

결국 오디션 이후 패배를 직감하기까지.

자신의 모든 모습이 그저 추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승우야.”

이순철이 진승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오르는구나. 사실 그때, 나는 너에게 적지 않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저한테요?”

급격히 흔들리는 진승우의 눈동자.

이건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이야기였으니까.

“그저 망나니처럼 살아왔다는 녀석이 연기를 너무도 잘했으니까. 내가 노력한 시간에 비해, 네가 너무도 쉽게 성취를 이루는 것 같아 보였지.”

진승우에게 있어 이순철은 연기를 알려준 스승님이었고.

완전히 비뚤어질 수도 있었던 삶을 교정해준 은인이었다.

그저 완전무결하게만 보였던 이순철이,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었다니.

“내 자리를 위협할 것 같은 너의 존재가 달갑지 않은 때도 있었지. 그래서 칭찬을 아끼고 괜히 더 모질게 가르쳤던 부분도 있었을 거다. 배우들이란 항상 경쟁을 뚫고 배역을 차지해야 하니까. ”

곧 진승우의 어깨를 붙잡은 이순철.

“하지만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지. 영원한 건 없어. 시대는 변하고, 가만히 앉아있으면 뒤처진다. 네게 이번 오디션은 신호탄일 뿐이야. 내가 늙고 네가 중년이 되어가듯. 유진이도 머지 않아 어른이 되겠지. 그만큼 유진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많아지고, 네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줄어들 거다.”

그러니 지금 이 시간을 헛되이 낭비한다면.

“그 아이는 절대 멈추지 않아. 그 누구보다 빨리 앞질러 달려갈 거다. 이대로 흥청망청 네 배우 인생을 낭비할 거냐? 아니면 털고 일어나서 나아갈 거냐?”

이순철은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순철은 서 있고, 진승우는 앉아있었다.

“마음껏 쪽팔려해라. 나도 여태 쪽팔려서 너한테 말하지 않았던 거니까. 그리고 밥 좀 먹어라. 하다 못해 안주라도 제대로 된 거로 먹어.”

과자와 마른 안주를 들추던 이순철이 혀를 쯧쯧 찼다.

“선택은 네 몫이다. 그럼 난 간다.”

그리 말하며 진승우의 집을 나서는 이순철.

홀로 남은 진승우는 이순철이 했던 말을 곱씹어볼 뿐이었다.

*

“이야, 정말 고마워요. 이지혜 배우님.”

<별을 보러 떠나요>가 정식 런칭이 결정된 이후.

김오태는 이지혜와 출연 계약 관련 미팅을 갖는 중이었다.

“재오 씨도 빅터 컴백으로 빠지고, 유진이도 참여를 안 해서 여러모로 곤란하던 참이었거든요. 그래도 이지혜 배우가 함께 해줘서 한시름 덜었어요.”

분명 재오와 유진의 불참은 김오태 입장에서 매우 아쉬울 일이다.

하지만.

<별을 보러 떠나요>가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기록적 시청률을 기록한 이유.

거기엔 분명 이지혜의 지분도 있었다.

솔직한 자기고백을 통해 연예계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으니.

“제가 더 감사드리죠. 이 프로그램 덕분에 저도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동석이 형 회사로 들어갔죠? 늦었지만 축하해요. 동석이 형이 진짜 아역배우들한테 애정이 많아서 잘 해줄 거예요. 그치, 형?”

“그래, 그래.”

김오태의 칭찬에 어깨가 올라간 차동석.

아직 이지혜의 매니저를 구하기 전이라 이번만 차동석이 따라왔다.

마침 오늘은 유진의 스케줄이 없기도 했고.

“잘 알면 계약서 좀 빠방하게 써라. 우리 이지혜 배우가 망하려던 네 프로 살려낸 거니까.”

“하하! 암요, 암요. 우리 동석이 형 말이 맞지.”

그리 말하며 김오태는 계약서를 내밀었다.

내용을 꼼꼼히 검토해보는 차동석.

아무리 김오태와 친분이 있다고 해도, 허투루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정규라서 그런가? 파일럿 출연 때보다 아역보호 조항이 훨씬 늘어났는데.”

그런데 계약서는 딱히 건드릴 곳이 없었다.

금액도 금액이고, 세부조항도 여러모로 이지혜를 배려하고 있었다.

“정규냐 파일럿이냐 문제는 아니고. 요즘 정치권도 나선 덕분에 방송가에서 미성년자들 함부로 굴렸다간 바로 모가지야. 아직도 대형기획사들 털리는 거 봐. 그래서 아역 배려하는 조항이 상당히 많아졌어.”

김오태의 말에 차동석은 자랑스럽다는 듯 이지혜를 바라보았다.

“이야. 다 네가 해낸 것들이야. 정말 고생 많았어.”

“아뇨. 저보단 유진이의 공이 커요.”

유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아이가 용기와 위로를 전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자신은 계속 속에서부터 곪아가다, 언젠가 터져버렸으리라.

“유진이가 빠져서 아쉽긴 하지만, 그만큼 열심히 하겠습니다!”

제법 활기차게 대답하는 이지혜.

<별을 보러 떠나요> 촬영 때 보였던 어색함과 달리.

지금은 무척 의욕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미팅을 끝마치고 돌아가는 길.

차 안에서 이지혜가 말을 꺼냈다.

“저, 사장님.”

“왜?”

“혹시 제 앞으로 들어온 대본 있어요? 아. 휴식기 선언해서 없으려나.”

“음. 찔러보기 식인지, 몇 개 들어온 게 있긴 해.”

“그럼 그것들 저 좀 보여주실 수 있나요?”

그 말에 백미러를 흘끗거리는 차동석.

“그거야 어렵지 않은데.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원래는 짧게는 반년, 길게는 1년은 쉴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생각을 좀 바꿔야하나 싶어요.”

즉, 복귀 시기를 앞당기겠다는 것.

차동석이 침음을 흘리다 곧 조심스레 말했다.

“강박을 가질 필요 없어. 너 정도 배우면 휴식기 가져도 금방 복귀할 수 있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만들 거고.”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이지혜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갔다.

항상 일을 굴리기 바빴던 나대준과는 천지차이였으니.

새삼 자신이 좋은 곳을 선택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죠. 막상 쉬니까 연기가 하고 싶어져요.”

<호구> 때 유진과 내내 촬영하며 느꼈다.

아직 자신은 유진에 비해 한참 부족하다고.

거기다 유진은 거장 권성택 감독의 작품에 오디션까지 보고 왔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상황.

‘그래. 난 쉬러 온 게 아니라, 그 아이처럼 행복하게 연기하고 싶어서 온 거니까.’

그러나 이지혜는 조바심 대신 동기부여를 느꼈고.

질투 대신 고마움을 느꼈다.

유진이 연기했던 <날개>를 통해 자신이 큰 위안을 얻었듯.

제 연기를 본 누군가도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

이지혜에게 생긴 새로운 목표였다.

“우리 소속사 신조 알아? 배우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한다. 네가 그렇다면 말릴 생각은 전혀 없어. 다만 무리하지는 마.”

차동석의 말에 이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그 아이의 뒷모습만 쫓아가도 길을 잃진 않을 것 같아요.”

*

한편.

주역 매니지먼트 사무실.

“하아. 살 떨리네.”

박태종이 천장을 바라보며 그게 숨을 내쉬었다.

“초조해하지 마요, 아빠. 딱새우깡 먹을래요?”

그런 박태종에 비해.

유진은 한가로이 과자를 먹고 있었다.

오디션을 본 건 유진인데.

정작 박태종이 벌벌 떨고 있는 상황.

“유진아. 긴장 안 돼? 그래도 권성택 감독님 작품인데.”

권성택은 박태종이 학창 시절부터 유명했던 감독이다.

영화 문외한인 박태종이지만 그 위상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감독의 영화에 유진이 캐스팅될 수 있다니, 여러모로 긴장되는 모양.

“긴장한다고 결과가 달라지거나 하진 않으니까요. 전 후회없이 연기했는 걸요.”

딱새우깡을 우적우적 먹으며 말하는 유진.

영서 역할만큼은 유진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다.

‘아역이 아니라 성인인 배우들과 경쟁한 거고, 진승우의 연기도 원래보다 강렬해졌으니까.’

아무래도 유진에게 자극받은 것인지.

회귀 전 유진이 봤던 <데드맨>보다 진승우의 연기가 강렬해졌다.

오디션 단계에서도 이 정도라면, 크랭크인 이후엔 더 무서운 연기력을 보여줄 것.

‘결국 권성택 감독님의 판단에 달린 거겠지.’

하지만.

만약 권성택이 자신을 선택한다면.

‘여러모로 나는 새로운 기록을 쓰게 되겠지.’

“진짜 강철멘탈이네요, 박유진 배우는. 이런 면모도 넙튜브를 통해 보여주면 꽤 반응이 좋을 것 같은데.”

그런 유진을 보며 김상헌은 넙튜브 각을 고심하고 있었다.

“후. 그래, 유진아. 네 말이 맞다. 머리를 비우자. 머리를 비우자.”

박태종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곤 인터넷을 열어 뉴스 기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빅터 신곡 ‘첫사랑’, 뮤직비디오 티저 공개! 재오&박유진 콤비, 벌써부터 비주얼 폭발!]

결국 또 유진의 기사.

[와 분위기 봐 벌써 미쳤다

진짜 유재콤비 사랑해 ㅠㅠㅠ 너희 평생 콤비해줘...

확실히 둘이 뭔가 느낌이 비슷해 ㅋㅋ 물론 유진이가 더 잘생김

ㄴ ㅇㅈ 재오도 잘생이긴 한데 역시 박유진한텐 못비빔ㅋㅋ

역변만 하지 말아다오 유진아...누나가 매일 물떠놓고 기도 중이다

우리 재오 오빠 연기력 더 좋아진거봐 ㅠㅠㅠㅠ 이게 스승님 파워인가?]

앨범 발매와 뮤직비디오가 정식 공개는 내일.

시계를 확인한 박태종은 또 다시 덜덜 떨기 시작했다.

“아으. 미치겠네!”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오디션 결과.

거기에 다가오는 빅터 뮤직비디오 공개일.

느리게 가는 시간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아버님. 유진이잖아요.”

장미소가 박태종에게 녹차를 건네주며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실장님.”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고 녹차를 마시려던 순간.

♪~ ♬~

갑자기 울리기 시작하는 사무실 전화기.

그러자 사무실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네. 주역 매니지먼트입니다.”

전화를 받은 장미소.

그녀 역시 조금 긴장한 모습이었다.

“유진아. 권성택 감독님이셔.”

장미소의 말에 소파에서 일어나는 유진.

잔뜩 얼어붙은 아빠를 토닥여준 뒤.

유진은 총총 전화기 앞으로 걸어갔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유진입니다!”

그 첫마디 이후.

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권성택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그럴수록 사무실 사람들은 애가 타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넵! 감사합니다, 감독님!”

딸각.

수화기를 내려놓은 유진.

뒤돌아서며 크게 동그라미를 그려보였다.

“제가 뽑혔대요!”

그 말에.

일순간 환희로 가득차는 주역 매니지먼트.

“흐엉헝······잘 했어, 유진아. 정말 잘했어. 흐윽!”

“와, 박유진 배우. 또 새로운 역사를 쓰네요.”

언제나 그렇듯 눈물을 터뜨리는 박태종.

그리고 순수하게 감탄하는 김상헌.

그런 와중.

“유진아. 권성택 감독님이 너한테 무슨 역할을 맡긴 거야? 윤빈? 아니면 영서?”

유일하게 차분함을 유지 중인 장미소가 유진에게 물었다.

“둘 다요!”

그러나.

“윤빈이랑 영서, 두 가지 역할 모두 맡아줄 수 있겠냐고 하셨어요.”

그 대답을 듣자 장미소조차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권영택 감독의 작품 사상 최초로 1인 2역의 캐스팅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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