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며칠 뒤.
[발신자 : 송미연 작가님
알았어요. 곧 갈게요.]
“작가님이 오케이 해주셨어요!”
“허. 또 일이 커지네. 웹드라마 대본을 송미연 작가님이 써주시다니.”
차동석이 헛웃음을 지었다.
화보집 건도 그렇고, 일을 추진하기 시작하면 브레이크가 고장 나는 느낌.
“그런데 괜찮을까. 아무리 송미연 작가님이라도 웹드라마 문법에는 익숙지 않으실 것 같은데. 상헌 씨 생각은 어때?”
조용히 편집하고 있던 김상헌이 의자를 돌리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콘텐츠에 맞는 기획이 먼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편이 작가님께 부담도 덜 할 거 같고요.”
“역시 그렇지? 상헌 씨가 웹드라마 쪽은 잘 알지 않아? 제작도 해봤고.”
“저도 편집으로만 참여했던 거라서······아. 그때 같이 일했던 친구들이 있긴 합니다.”
“친구들? 그런데 그때 그 웹드라마, 폭삭 망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말씀드렸듯 대본이 개판이었지, 기획 자체는 괜찮았습니다. 웹드라마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나고, 어떤 콘텐츠라도 분석하는 능력이 꽤 좋습니다. 그래서인지 웹드라마 팀이었지만 타 부서에도 자주 찾았고요.”
본래 말이 별로 없고.
그만큼 남에 대한 평가를 잘 내리지 않는 김상헌.
그런 그가 사람을 추천한다는 건 분명 드문 일이었다.
“2년 전쯤이었나. ‘3분 독서’ 콘텐츠 기획한 것도 그 친구들입니다.”
“3분 만에 책 내용 요약해주는 그거요? 인터넷에서 엄청 유행했던 그거?”
“네. 아무래도 회사에서 실적 가로채기를 당한 것 같지만요.”
콘텐츠 기획 성공 사례도 있고.
김상헌의 보증도 있으니, 차동석으로서도 호기심이 생겼다.
“그럼 일단 연락 한 번 넣어주실래요? 만나볼 테니까.”
*
교대역 근처에 위치한 공유오피스.
주로 5인 이하의 소규모 창업자들이 이용하는 공간이다.
그만큼 풋풋한 패기, 꿈과 열정이 가득한 공간이어야 할 텐데.
“으아아.”
2인실.
책상 두 개와 의자 두 개가 달랑 있는 그곳에서.
신현중과 손호철, 두 남자가 나무늘보처럼 늘어져 있었다.
“여기도 오늘로 마지막이네.”
갈색 머리의 신현중이 중얼거렸고.
“그러네. 월세 내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처음 알았다. 부모님한테 효도해야겠어.”
키가 작은 손호철이 힘없이 맞장구쳤다.
“지금 생각해보니 뭔 말도 안 되는 짓이었나, 싶다. 그냥 그 회사 나왔을 때 깔끔히 접었어야 했는데.”
두 사람은 회사에서 처음 만난 동갑내기였다.
둘이 다녔던 곳은 여러 영상 컨텐츠를 제작하는 미디어 회사.
그중에서도 새로 신설된 웹드라마 팀이었다.
신현중과 손호철은 기획팀이었다.
스토리텔링이 있는 뮤직비디오 및 UCC를 참고하고 분석한 후.
어떻게 하면 5~10분 안에 임팩트 있는 초단편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지, 그 기획을 짜는 역할.
“그만큼 탐나는 아이템이었잖아. 웹드라마라는 거.”
이따금 홍보용으로 웹드라마를 만드는 회사는 있어도.
이렇게 팀까지 꾸려 본격적으로 만드는 곳은 없었다.
그렇게 새로운 미디어에 대한 기대감으로 입사한 두 사람이다.
“아이템이 좋으면 뭐하냐. 회사가 그 모양 그 꼴이었는데.”
막상 입사해보니 그곳은 지옥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어마어마한 갑질과 열정페이를 강요당했다.
일 떠넘기기, 책임 전가하기, 계획 없는 일처리.
그야말로 주먹구구식 회사 운영.
“거기 팀장이 사장 조카랬나? 작가도 팀장 인맥이었지?”
“어. 완전 가족회사였지.”
심지어 제작도 그리 순탄하지가 않았다.
팀장이 든든한 뒷배가 있는지, 순 제멋대로였다.
그렇게 제작한 웹드라마가 잘 굴러갈 리 만무했다.
[인터넷에서 드라마 연재한대서 기대했는데; 애들 장난인줄
오피스 드라마라는 아이디어는 참 좋았는데...아쉽네여
이거 대본 누가 씀? 회사생활 해본 거 맞아? 어느 부장이 저렇게 얘기해
돈 참 쉽게 버네 ㅋㅋ 내일 나 대신 출근시키고싶다
무슨 쌍팔년도인줄; 배우는 발연기에 대사는 어후 ㅋㅋ 오글거려 죽겠네
ㄴ 쌍팔년도 무시하지 마셈 ㅡㅡ
판권만 팔고 새 제작사에서 리메이크하는 게 나을 듯ㅋㅋ]
눈물이 앞을 가리는 조회수, 악평뿐인 댓글창.
그 와중 신현중과 손호철이 짜낸 기획. 자체는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그 기획을 소화해낼 대본이 너무도 부실했다.
주연도 하필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신인 아이돌이었고.
결국엔 1년 후, 사장은 웹드라마 사업을 접고 팀을 해체했다.
“그냥 웹드라마라는 걸 포기했어야 해. 수익모델이 딱히 없잖아.”
“아냐 진짜, 진짜 이거 잘 될 아이템이라고. 요즘 연예인들이 넙튜브 하려고 난리잖아. 그만큼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컨텐츠를 보는 시간이 늘어날 거라니까?”
최근 범람하기 시작한 연예인들의 넙튜브 도전 러쉬.
빅터의 ‘첫사랑’ 등 스토리텔링이 들어간 뮤직비디오에 대한 관심 증가 등.
점점 인터넷에서만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컨텐츠가 확대되고 있다.
“진짜 지금이 절호의 기회인데.”
한 번 제대로 만들어 성공하면 자리 잡을 수 있다.
신현중에겐 그런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팀 해체 후.
회사를 나와 손호철과 함께 웹드라마에 다시 도전해보려 했다.
하지만, 고작 두 사람이서 컨텐츠를 만드는 건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기회면 뭐하냐. 우리한테 인맥이 있냐, 돈이 있냐? 맨날 기획만 짜고 정작 대본을 써줄 작가랑 대본을 소화할 배우가 없는데.”
밑천 없는 두 사람이 컨텐츠를 만들기 위해선 필요조건이 있다.
인기 있는 배우를 쓰거나.
아니면 아주 재미있는 대본이 있거나.
그러나 첫 번째는 고사하고 두 번째도 여의치 않았다.
지금 두 사람은 공유 오피스 월세 내기도 빠듯했으니까.
“너 이거 접으면 뭐 할 거냐?”
신현중의 물음에 손호철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답했다.
“몰라. 알바라도 해야지 뭐. 결과물이 없으니 경력으로 써먹을 수도 없고. 다시 취업하자니 또 그 회사 꼴일까 봐 겁나고. 아, 진짜. 그나마 상헌이 형이 있을 때 어떻게든 쇼부 봐야 했는데.”
김상헌.
전 회사에 있을 때 함께 일했던 프리랜서였다.
다소 음침한 사람이었으나, 편집 능력이 무척 좋아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솔직히 상헌이 형이 그 회사랑 일한 것도 말이 안 돼. 그렇게 스펙 쩌는 사람이 왜 그 회사랑 일을 한 건지.”
“그 형은 재밌을 거 같으면 눈 돌아가서 누구보다 열심히 하잖아. 에휴. 나도 어디 가서 노가다라도 뛰어야 하나.”
웹드라마에 대한 아쉬움이 남지만.
현실적 여건으로 정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
두 사람은 책상 위에 엎어져 침음만 흘려댔다.
그러다 잠시 후.
“뭐야. 어디서 진동 소리 들리지 않냐?”
“그러네? 뭐야. 내 전화인가?”
“너 휴대폰 아직도 살아있냐? 난 정지당했는데.”
“나도 미납요금 장난 아니야. 며칠 뒤에 끊길걸?”
좀비처럼 느릿하게 일어난 신현중.
곧 제 휴대폰에 뜬 번호를 보고 흠칫 놀랐다.
“어? 상헌이 형인데?”
“응? 너 상헌이 형이랑 연락하고 지냈냐?”
“아니. 그 형 계약 끝난 이후론 한 번도 없었어.”
무슨 일이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받는 신현중.
“어. 상헌이 형.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무슨 일이에요? 형이 전화를 해주시고. 웹드라마요? 아뇨. 요즘은 못 하고 있죠. 아시잖아요. 그 팀 해체된 거. 저랑 호철이 그 회사 나왔어요. 지금은 거의 반백수죠 뭐.”
그렇게 김상헌과 서로 근황을 주고받던 신현중.
곧 그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박유진 배우요? 그 아역배우? 네. 알죠. 요즘 걔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네. 네. 네? 어디요?”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형이 거기 왜 있어요?”
*
잠시 후.
“사, 상헌이 형. 이게 대체······.”
주역 매니지먼트 사무실에 도착한 신현중과 손호철.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들의 눈앞에 배우 박유진.
그리고 작가 송미연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전화로 말했잖아. 나 여기서 일한다고.”
김상헌은 태연히 대답했다.
“그, 그런데 웹드라마 얘기는 대체 뭐예요? 그걸 만든다고요? 이 회사에서?”
“응. 박유진 배우 넙튜브 채널에 업로드할 용도로. 그런데 아무래도 웹드라마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이 없어서. 너희 도움을 좀 빌리고 싶어서 전화했던 거야.”
그 말에 신현중과 손호철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러 현실적 요건으로 제작 시도조차 못 했던 두 사람.
그런데 회사 차원에서 웹드라마를 제작한단다.
심지어 배우는 요즘 가장 핫한 박유진.
거기에 대본을 써줄 작가는 무려 송미연이다.
“미쳤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고질적 문제점.
그게 단숨에 해결되는 순간이었으니.
“김상헌 씨가 두 분을 추천해주셨습니다. 다소 생소한 장르인 웹드라마에 대한 이해가 남다르시다고요.”
차동석이 말했다.
같이 일해본 뒤 첫 회 반응이 괜찮으면, 아예 김상헌처럼 계약을 맺을 용의도 있었다.
즉 두 사람에겐 재취업의 기회가 찾아온 셈.
“목숨 걸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뭐든 시켜만 주십쇼!”
포기하려 했던 상황에서 주어진 천금 같은 기회.
당연히 두 사람은 열의를 불태우며 수락했다.
“잘됐네요. 그럼 곧장 기획 회의에 들어가죠. 피차 바쁜 사람들일 테니까.”
그리 말한 뒤 테이블로 걸어가는 송미연.
그 뒷모습을 보던 신현중이 김상헌에게 속닥대며 물었다.
“그, 그런데 상헌이 형. 송미연 작가님은 대체 어떻게 섭외하신 거예요?”
주역 매니지먼트가 유진의 회사니 그렇다 쳐도.
송미연 작가는 대체 어떤 계기로 참여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유별난 친구들>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한 송미연이 참여하기엔.
박유진의 넙튜브 채널에 올라갈 웹드라마는 다소 과해보였으니.
“나도 몰라. 박유진 배우한테 물어봐.”
그러자 김상헌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곧 신현중과 손호철의 시선이 동시에 유진에게로 향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혹시 형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뭐라 물어보기도 전에 활기차게 인사하는 유진.
두 사람은 당황하며 대답했다.
“네? 아, 네. 그러세요. 배우님.”
“편하게 유진아, 하고 부르셔도 돼요!”
“아뇨, 저희들이 어찌······.”
극존칭을 사용하는 두 사람.
그들에게 박유진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요, 슈퍼스타였으니까.
“으음. 배우님은 좀 부담스러워요. 편하게 해주세요, 편하게!”
“하하하. 네, 노력해보겠습니다.”
벌벌 떨며 테이블로 걸어가는 두 사람.
테이블에 자리 잡은 것은 배우 박유진, 작가 송미연, 기획에 신현중과 손호철, 사장 차동석이었다.
“우선 저부터 말할게요! 저 코믹한 거 하고 싶어요!”
가장 먼저 빠르게 의견을 피력하는 유진.
그러자 차동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것 같습니다. 유진이는 아무래도 비주얼 때문에 귀엽고 예쁘거나, 다소 신비로운 쪽의 배역을 많이 소화했으니까요. 두 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차동석의 물음에 신현중이 대표로 대답했다.
“네, 저희도 동의합니다. 웹드라마는 짧고 간결하면서도 임팩트 있어야 하니까요. 어렵고 무거운 설정보단,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장르가 잘 맞을 것 같습니다.”
여러모로 코미디물은 적절한 선택이었다.
웹드라마라는 장르에 잘 맞고, 팬들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잘만 하면 비주얼로 인한 이미지 고정을 탈피할 수 있다는 장점까지.
무엇보다 유진이 원하고 있기도 했다는 게 중요했다.
“그러면서도 과하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너무 과하게 웃기려 하다 보면 오히려 역효과만 나고, 배우님 이미지에도 좋지 않으니까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웃음 포인트를 극적으로 살리는 건 어떨까요?”
“여기에 덧붙여, 제 생각엔 어린아이라는 배우님 특유의 장점은 살렸으면 합니다. 시트콤에 흔히 나오는 약간 코믹한 가족 느낌으로요. 하지만 웹드라마이니만큼 가족 전체를 다루기보단 형제자매, 부자지간, 혹은 삼촌과의 관계. 이렇게 1:1 관계로 만드는 게 효과적일 것 같아요.”
회의가 시작되자.
주도적으로 의견을 내기 시작하는 신형준과 손호철.
좀비처럼 책상에 엎드려 있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새로운 시작에 반짝거리는 두 눈동자.
“형들 의견 대박! 혼자 웃기는 건 엄청 힘드니까요. 다른 사람도 출연하면 저도 좋을 것 같아요.”
유진이 두 사람 말에 동의했다.
확실히 웹드라마 기획 쪽이라 그런지, 핵심을 딱 짚어줬으니까.
가족 시트콤의 느낌이라면 편안하면서도 공감 가는 웃음을 줄 수도 있고.
“하긴, 시작이 중요한 만큼 게스트가 있으면 좋지. 관심 끌기도 더 수월할 거고.”
유진의 말에 차동석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 사이 송미연은 의견을 내는 대신.
노트북을 꺼내 들고 의견들을 받아적고 있었다.
송미연이 주로 다루지 않았던 가족 코믹장르.
거기에 웹드라마라는 익숙지 않은 형식.
아무리 송미연이라도 난감할 수 있다.
“이렇게 의견이 모아졌는데, 작가님. 이런 기획으로 괜찮을까요?”
차동석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송미연은 타자 치는 것을 멈췄다.
“드라마는 주로 팀 작업으로 이뤄지죠. 거기서 드라마 작가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이 뭐일 것 같아요?”
대뜸 되묻는 송미연.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자 곧장 말을 이어갔다.
“첫째, 마감 시간 준수. 둘째, 요구하는 걸 써오는 능력. 난 그 두 능력 모두 갖췄고,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하루 뒤.
송미연은 뚝딱 시놉시스는 물론이요, 1화 대본을 완성해왔다.
[웹드라마 <연년생> 시놉시스]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
연년생 남매가 이런저런 사소한 일로 투닥거리는 이야기였다.
[캐릭터 이름 : 시윤
캐릭터 설명 : 시우의 누나.
1살 차이임에도 누나라는 이유로 뭐든 동생에게 양보하는 게 너무 싫다.
어떻게든 부모님의 눈을 피해 동생을 골탕 먹이려 하지만, 번번히 시우에게 당한다.
하지만 가끔씩 시우에게 한 방 먹이는 그 짜릿함이 너무 좋다.
때문에 시윤이는 오늘도 복수를 꿈꾼다.]
[캐릭터 이름 : 시우
캐릭터 설명 : 누나랑 1살 차이지만 엄연히 집안의 막내.
매번 막내라는 지위를 이용해 누나를 골려 먹고.
궁지에 몰릴 때면 부모님께 살인적 애교를 부려 벗어난다.
하지만 그것만 믿고 까불다가 오히려 된통 당할 때도 있다.
장난꾸러기면서도 결코 밉지 않은 캐릭터.]
송미연이 굳이 남매로 설정해 대본을 작성한 이유.
역시 제자의 작품인 <호구>의 영향이 컸다.
송미연이 보기에 유진은 <호구>에서처럼 누나를 둔 동생 포지션이 제일 잘 어울렸다.
다만 <호구>의 경우 단 6회의 미니시리즈라 그 매력을 모두 드러내기엔 너무 짧았다.
그래서 이번엔 아예 ‘남매’라는 케미 그 자체에 중점을 둬보자는 것이 송미연의 판단.
더불어 현실 남매의 모습을 그려내어, 마냥 귀엽고 흐뭇한 남동생 포지션에서 탈피.
유진에게서 코믹하고 얄미운 모습을 뽑아낼 생각이었다.
“우와. 엄청 재밌을 것 같아요!”
대본을 받아든 유진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캐릭터 설정도 귀엽고 직관적이고.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고, 편히 웃을 수 있는 소재였으니까.
“와. 역시 프로작가는 다르구나.”
“진짜. 와, 이런 작가 한 명만 있었어도······.”
신현중과 손호철도 감탄을 터뜨렸고.
“훌륭합니다, 작가님. 팬들이 엄청 좋아할 것 같습니다.”
차동석 또한 엄지를 치켜세웠다.
특히 시우는 여러모로 유진의 팬들이 좋아할 만한 캐릭터였다.
약삭빠른 모습부터 살인적인 애교.
거기에 예상치 못하게 누나한테 당해 울먹이는 모습까지 볼 수 있으니까.
“그럼요. 누가 쓴 건데.”
평온한 얼굴로 자화자찬하는 송미연.
그렇게 따로 손볼 곳 없이 대본이 확정되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
“그럼 이제 이 시윤 역할을 누구한테 맡기느냐가 남았네.”
같은 회사인 이지혜가 거론되었으나, 연년생이라는 설정상 비주얼적으로 불가능했다.
즉, 유진과 비슷한 또래의 아역배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
“선미는 어떨까요?”
유진이 번쩍 손을 들며 말했다.
“선미가 누구야?”
차동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저랑 같이 ‘첫사랑’ 뮤직비디오 찍은 여자애요! 저랑 나이도 비슷할 거예요.”
그러자 신현중과 손호철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 좋은 것 같아요. 박유진 배우님과 뮤비 출연 인연도 있잖아요.”
“뮤비로 유입된 해외팬들 사이에서도 유명해질 것 같고. 여러모로 스토리텔링할 재료가 많으니 관심 끌기도 좋을 것 같은데요?
‘첫사랑’ 뮤비에서 아이들의 풋풋한 첫사랑을 보여줬던 두 사람이.
코믹한 현실 남매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웹드라마 첫 스타트로 나쁘지 않습니다. 아니, 최고죠.”
차동석이 손가락을 퉁기며 동조했다.
*
키즈모델 김선미의 방.
그녀는 침대에 엎드려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그건 바로 유진의 화보집.
바로 오늘 도착한, 따끈따끈한 제품이었다.
“우와.”
화보집을 보며 감탄을 내뱉는 김선미.
신비로운 배경 속, 화관을 쓰고 있는 유진은 거의 요정으로 보일 지경이었으니까.
‘이런 컨셉을 소화하면서도 어색함이 전혀 없네.’
키즈모델로서의 분석이었다.
다소 과해 보이는 컨셉을 잡으면 붕 뜨거나 오그라들 수 있는데.
유진은 완벽히 컨셉에 녹아들어, 눈빛과 몸짓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일상적 화보도 잘 소화해내고.’
캐주얼한 차림새로 무해한 웃음을 짓는 사진.
그곳에선 신비한 존재가 아닌, 그저 한 명의 아이로서 가진 쾌활함을 표현해냈다.
그 순간순간을 감각적으로 잡아낸 작가의 솜씨도 돋보였고.
“얘 사실 외계인 아니야?”
김선미가 보기엔 그쪽이 더 현실성 있었다.
연기, 노래, 모델까지 다 잘하다니.
가끔 질투가 일 정도.
똑똑.
그때, 선미의 방에 울리는 노크 소리.
선미의 어머니였다.
“선미야. 에이전시에서 전화가 왔어.”
“저 지금 바빠요.”
한창 화보집을 보던 중이라 퉁명스레 대답하는 선미.
어머니는 문밖에서 말을 이어갔다.
“그럼 방 안에서 들어. 섭외가 들어왔대. 웹드······뭐였는데. 아무튼, 너랑 같이 뮤비 찍은 애 알지? 그 친구 상대역이라는데?”
그 말에 김선미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벌컥 문을 열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저 할래요!”
“응?”
“나 할래요! 섭외 들어온 거!”
“응? 무슨 역할인지 안 들어도 돼? 그 장르도 아직 못 들었는데.”
“응. 나 무조건 할 거예요!”
무슨 역할인지 듣지도 않고 수락해버린 김선미.
어머니가 흠칫 놀라 알았다고 대답하자,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흐흐흥. 흐흐흐흥.”
유진의 상대역 섭외라니!
그렇다면 당연히 뮤비 촬영 때처럼 멜로 연기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 그게 드라마든, 영화든 무슨 상관이랴?
“흐흐흐흥.”
김선미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자신이 어떤 내용의 대본에 섭외됐는지는 꿈에도 모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