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씹어먹는 천재배우님-61화 (61/237)

61화

유진의 넙튜브 채널에 업로드 될 웹드라마.

<연년생>의 첫 촬영날.

촬영장소는 바로 차동석과 장미소의 집.

달리 장소를 헌팅할 곳도 없고.

어차피 대단한 세트장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 내린 결정이었다.

“와, 집이 엄청 깨끗하네요.”

집으로 들어오며 유진이 감탄했다.

인테리어가 좋고, 집안이 깨끗해서인지 꽤 넓어보였다.

“시, 실례하겠습니다.”

“두 분 다 엄청 바쁘실 텐데. 대단하네요.”

신현중과 송호철 역시 감탄을 터뜨렸다.

그러자 차동석의 어깨가 한껏 올라갔다.

“그럼, 당연하지.”

사실은 요즘 집에 잘 들어가지도 못해 개판 5분 전이었으나.

웹드라마 촬영으로 쓴다는 의견이 나오자마자 급하게 청소했다.

덕분에 소파나 침대 밑.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 옷가지 따위가 잔뜩 쏠려있다는 것은 비밀이었다.

“크흠.”

냉철한 장미소도 이 순간만큼은 찔리는지.

아무도 모르는데 괜히 멋쩍게 헛기침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박태종과 김상헌이 새로 산 카메라와 장비를 들고 왔다.

“이야. 이렇게 좋은 카메라는 처음 써보네요. 상헌 씨랑 기능들 하나하나 파헤쳐보는 게 어찌나 재밌던지.”

눈을 빛내는 박태종.

배달일을 그만둔 뒤, 오랜만에 잡은 카메라가 그의 열정을 돋구는 모양이다.

물론 드라마나 영화에서 쓰는 전문적 장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들이 다룰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최선, 최고의 장비였다.

그만큼 주역 매니지먼트가 웹드라마에 진심이라는 뜻.

“잘 될까?”

제 집에서 벌어지는 촬영이라 참관하기로 한 장미소.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여태 성공사례가 극히 적은 장르인데. 그나마 기업들이 홍보하듯 몇 번 만든 게 다잖아.”

“다른 연예인들도 넙튜브에 뛰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만의 독자적인 컨텐츠가 필요해.”

다른 채널에서는 볼 수 없는.

박유진 채널만이 가지고 있는 아이덴티티.

차동석은 그것이 바로 웹드라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력까치 확충해가며 도전하는 것.

“또, 컨텐츠가 확장되면 얼마든지 게스트 출연도 가능하니까.”

여러 작품을 거치며 유진의 배우 인맥도 늘어났다.

그런 인맥들이 웹드라마에 출연해준다면 관심도도 더 높아질 것.

지금, 여기 있는 김선미처럼.

두 사람의 시선이 김선미 쪽으로 향했다.

“근데 저 친구, 아까부터 표정이 엄청 안 좋네.”

어머니가 이리저리 달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여전히 표정이 조금 어두웠다.

어딘지 조금 삐친 것 같은 얼굴.

“연기 경험이 얼마 없어서 긴장한 건가?”

“그럴 수도 있고. 아무래도 촬영현장치곤 좀 허접하잖아. 얼마 전에 찍은 빅터 뮤비랑 비교하면 촬영현장이 천지차이겠지.”

키즈모델로 활동하다가, ‘첫사랑’ 뮤비가 첫 연기 도전이었던 김선미다.

영화 촬영을 방불케했던 그 현장과 비교하면.

지금 웹드라마 촬영은 다소 기대 이하일 것.

그러나 두 사람의 생각과는 달리.

김선미는 촬영현장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아니, 불만이 있다면 대본 쪽이겠지.

‘설마 이런 내용일 줄이야.’

촬영장에 오는 길 내내.

김선미는 툭 튀어나온 입술을 집어넣기 어려웠다.

유진의 상대역이라기에 당연히 멜로인 줄 알았다.

그런데 설마 남매역할일 줄이야.

그것도 서로를 골탕 먹이려 애쓰는, 연년생 현실 남매 말이다.

‘이런 연기는 난생 처음 해보는데.’

키즈모델이 코믹 연기를 할 일은 없으니까.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내가 왜 무턱대고 하겠다고 해서는!’

김선미가 자신의 성급함을 자책하며 입술을 오물거리고 있을 때.

“왜 그래, 선미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하고 쏘아붙이고 싶은 심정이지만.

유진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스타를 마주한 팬의 심정이었으니까.

“그, 그냥.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돼서.”

“걱정하지 마! 우리 뮤직비디오 촬영했던 때처럼만 하면 돼. 너 그때 연기 처음이었는데도 엄청 잘했잖아.”

“나, 잘했어?”

“응. 너 그래서 인터넷에서 엄청 유명해졌잖아.”

유진의 칭찬에 김선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머릿속에선 벌써 자신이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미래 모습이 펼쳐질 정도.

“우리 집 구경 좀 할래? 앞으로 가끔 촬영하러 올텐데, 미리 봐두면 좋을 것 같아.”

“음. 그래, 그러지 뭐.”

유진의 제안에 김선미는 고민하는 척하다 대답했다.

그렇게 딱 달라붙어 차동석의 집을 구경하는 두 사람.

물론 뭐 특별한 게 나오진 않았지만.

유진 덕분에 김선미는 꿀꿀했던 기분을 지울 수 있었다.

“자, 그럼 슬슬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김상헌이 말했다.

그제야 카메라 앞으로 오는 두 사람.

“다들 대본은 숙지했지?”

1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시작하는 단계답게, 두 남매가 어떤 캐릭터인지 소개하는 편.

첫 번째 씬은 리모컨을 가져다주느냐 마느냐로 싸우는 에피소드.

두 번째 씬은 누나인 시윤이 먹으려던 케이크를 시우가 먹어버려 싸운다는 에피소드.

사소하고 코믹한 내용이면서도.

1살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양보를 강요 당하는 연년생 누나의 설움을 담아내는 내용이었다.

“연기라고 생각하기보단, 서로 진짜 누나랑 남동생 대하 듯 해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가볍게 한 번 찍어보죠.”

김상헌이 말했다.

연출은 편집을 맡을 김상헌의 몫이었으니.

촬영 직전, 김선미는 유진을 흘끗 바라보았다.

‘솔직히 박유진이면 무슨 짓을 해도 얄밉지 않을 거 같은데.’

김선미는 저도 모르게 유진의 팬이 된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유진과 티격태격하는 남매 연기라니.

과연 연기에 몰입할 수 있겠느냐 하는 걱정이 생겨난 것.

그러나.

그 걱정은 얼마 가지 않았다.

“그럼 시, 작!”

*

부모님이 잠시 비운 상황.

방 안에 혼자 있는 시윤.

학교 숙제를 열심히 풀며 집중하고 있다.

“누나, 누나아. 누나!”

그런 와중.

방문 너머, 거실에서 들려오는 동생 시우의 목소리.

“누나 지금 바빠!”

시윤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누나. 누나! 누나아.”

그러거나 말거나.

하염없이 누나를 부르는

“아아! 누나아. 나 아파. 으, 아. 배가 터질 거 같아. 누나. 누나아!”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급박한 목소리.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걱정이 치솟는 시윤.

황급히 거실로 뛰어간다.

“무슨 일인데?”

“나 리모컨 좀 갖다 줘.”

아프다고 할 때는 언제고.

태연하게 발랑 배를 까고서 누워있는 시우.

바로 앞 테이블에 있는 리모컨을 가리키고 있다.

“넌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시윤이 씩씩대며 물어도, 시우는 그저 천하태평이다.

“아 왜에. 좀 갖다줘. 나 지금 바쁘단 말야.”

“뭐하느라 바쁜데?”

“지금 쪼로로 보느라 바쁘지. 눈을 뗄 수가 없단 말이야.”

“너 알아서 해.”

“아, 거기 있으면 나보다 가깝잖아. 얼르은.”

어느 한쪽이 포기하고 조금만 몸을 움직이면 되는데.

네가 가져가라, 누나가 좀 갖다줘라로 한참을 싸운다.

“숙제도 안 하고 TV나 보고! 너 엄마한테 다 이른다?”

“그럼 난 누나가 몰래 빅터 앨범 산 거 이를 거야!”

“야! 너 말 다했어?”

사소한 문제로 시작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싸우는 연년생 남매들.

부모님이 돌아올 때까지 둘은 아득바득 싸운다.

“엄마, 쟤 숙제 안 하고 TV만 봐요!”

“에베베! 누나는 엄마 몰래 빅터 앨범 샀대요!”

그리곤 결국 둘 다 사이좋게 혼나는 엔딩.

이어지는 다음 에피소드.

어느 날, 기분 좋게 숙제를 끝마친 시윤.

어제 용돈으로 산 딸기 케이크를 먹으려 냉장고를 연다.

“어?”

그런데.

냉장고 안에 있어야할 케이크가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그런 와중, 쓰레기통에 있는 케이크 포장지.

이 말인 즉슨, 누군가 몰래 자신의 케이크를 먹었다는 증거.

“야, 너 내 케이크 먹었지!”

범인은 한 사람 밖에 없을 터였다.

바로 자신의 동생 시우.

“응? 무슨 케이크?”

“내가 사놓은 딸기케이크. 네가 먹었잖아.”

“안 먹었는데?”

“그럼 그 입술에 묻은 생크림은 뭔데?”

“헉!”

그러자 슥슥 제 입가를 문지르는 시우.

하지만 시우의 입가는 원래부터 깨끗했다.

유도신문에 걸려든 것.

“뻥인데. 역시 너였어! 야! 남의 걸 왜 멋대로 먹어?”

“에잉. 난 몰랐지.”

“당장 물어내. 물어내라고!”

“아, 그럼 누나 꺼라고 써놓든가.”

애교도 통하지 않자.

배째라는 식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시우.

“엄마! 아빠! 얘가 내 케이크 훔쳐먹었어!”

결국 부모님한테 이르지만.

‘동생이니까 양보해줘야지’라는 답변만 들을 뿐이었다.

“맨날 나보고 양보하래! 그 케이크 내 거야. 내 용돈으로 산 거! 내가 먹으려고 했다고!”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기분.

그 어린 마음에 서러움이 북받친다.

누나 동생이라지만 고작 한 살 차이.

그것이 연년생 동생을 둔 형제자매의 상처이자 고충이었다.

울컥해 방문을 닫고 침대에 이불을 뒤집어쓰는 시윤.

곧 서럽게 훌쩍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잠시 후.

스윽.

시윤의 방안으로 들어오는 인기척.

“나가. 다 나가. 혼자 있고 싶어. 나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시윤.

곧 인기척은 빠르게 사라져버린다.

시윤은 슬쩍 눈치를 보다가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딸기 케이크를 발견한다.

[누나 미안해 – 시우가]

덤으로 붙어있는 쪽지.

시윤은 곧 감동받고는 씨익 미소를 짓는다.

매일 사소한 것으로 싸움이 붙고.

마치 서로가 원수인 것처럼 대하지만.

결국 서로를 챙기는 것은 친구처럼 지내는 한 살 터울 형제자매.

그게 바로 연년생 아닌가.

“미안한 줄은 아네.”

아닌 척하지만, 스르륵 화가 풀리는 시윤.

“기분이다.”

동생을 위해 제 저금통을 털어 케이크를 하나 더 사오려 했는데.

“어?”

저금통에 있어야 할 돈이 사라지고 없었다.

사실 시우가 누나 저금통에서 몰래 돈을 빼다가 케이크를 산 것.

“야, 너 어디 있어! 당장 나와!”

시윤의 사자후가 집안을 가득 메우고.

“아, 왜! 누나가 먹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사왔는데!”

시우는 도망다니며 키득키득 웃는다.

*

“오케이, 좋았습니다! 첫 번째 슛 치고는 굉장히 좋은데요?”

김상헌의 사인이 떨어지고.

현실과 웹드라마가 분리된다.

그러나 정작 연기자인 김선미는 아직도 그 여운에 빠져 있었다.

물론.

‘첫사랑’ 뮤비 때 빠졌던 여운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지만.

‘와, 진짜 얄미워 죽겠어.’

연기다.

분명 연기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김선미는 속에서 치솟는 짜증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당장 시우, 아니 유진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

‘아니. 뮤비 때 그 잘생긴 애랑, 저 짜증나는 애가 어떻게 동일인물인데!’

유진이 얼굴을 갈아끼우는 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이 될 정도였다.

물론 그 덕분에 김선미도 쉽게 감정이입해 연기를 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아픈 척 연기하는 것도 그렇고, 특히 그 배 까놓고 벅벅 긁으면서 리모컨 타령하는 거! 진짜 꼴불견이었어.’

유진과 멜로 연기를 하며 단단히 쓰였던 콩깍지.

그게 단번에 벗겨질 정도로 짜증이 치미는 연기력이었다.

“선미야! 너 완전 누나 같았어. 음, 근데 조금만 더 심드렁하게 봐주면 좋을 것 같아.”

연기에 대한 조언을 위해 다가오는 유진.

그러나 씩씩대는 김선미를 보며 흠칫 놀랐다.

“서, 선미야? 왜 그러는데?”

“너 사실 외계인이지. 막 얼굴 바꾸고, 변장하는! 영화에 나오는 그런 외계인!”

“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도 그럴게.

빅터 뮤비 때의 유진, 백룡영화제 때의 유진, 화보집 속 유진, 방금 봤던 유진.

김선미에겐 모두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으니까.

*

잠시 후, 더 좋은 장면을 뽑기 위한 재촬영을 끝낸 뒤.

어른들은 저도 모르게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 어린아이가 보여주는 코믹 연기가 발군이었으니까.

“이야, 대단하네요. 저 진짜 웃음소리 참느라 혼났습니다.”

“연기 중 가장 어려운 게 코믹 연기라고 하는데, 어색함도 과장된 면도 없어요!”

특히 유진의 연기를 처음으로 직관한 신현중과 손호철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박유진 배우가 이끄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냥 제가 상상한 시우, 그 자체였어요!”

“처음엔 김선미 배우가 좀 어색한 느낌이었는데, 재촬영 이후엔 확실히 감을 잡은 것 같더라고요.”

사실 여태 유진의 필모그래피는 독특한 캐릭터가 많았다.

의젓한 키즈모델, 연쇄살인마 아역, 과할 정도로 순진한 아이.

의외로 평범한 아역의 모습은 없었던 것.

때문에 신현중과 손호철은 오히려 유진이 자연스러운 연기에 약하지 않을까 우려했으나.

유진은 훌륭한 생활연기를 보여주었다.

사실 회귀 전부터 유진의 강점은 자연스러운 연기였으니.

“아니, 뒤로 갈수록 진짜 말려야하는 거 아닌가 싶더라니까요? 저게 연기인지 리얼인지 순간 저도 헷갈려가지고. 근데 또 리모컨 가지고 싸우는 게 웃겨서 계속 보게 되더라고요. 리얼하면서도 재미 포인트가 톡톡 살아있는 대본입니다. 역시 송미연 작가님!”

“그걸 박유진 배우님과 김선미 배우님이 기가 막히게 살려주셨어요! 특히 박유진 배우님의 시우는 되게 얄미운데 그러면서 또 귀여운 매력도 있더라고요. 특히 시우가 칭얼댈 때 특히 애교가 넘치던데! 저 심장 녹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캐릭터가 너무 비호감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귀여움도 더했다.

칭얼대면서도 자연스럽게 애교를 녹여내어 귀여움을 살렸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유진이의 본모습이 혹시 저런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요.”

박태종도 거들었다.

집에서 유진은 집안일도 척척 도와주고, 투정 부리는 일도 거의 없는 착한 아들이었다.

그걸 아는 박태종도 순간 헷갈릴 만큼, 유진의 연기가 리얼했다는 뜻.

“김칫국 마시는 것 같지만, 박유진 배우님의 넙튜브 채널. 훨씬 더 잘 될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수준 낮은 대본과 발연기로 팀 해체의 아픔을 겪었던 두 사람.

웹드라마에 대한 꿈과 열정이 주역 매니지먼트에서 부활했다.

그 때문인지 신현중과 손호철은 감격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까 진짜 남매 같네요.”

작업물 검토를 위해 김상헌 포함, 세 사람을 먼저 보낸 뒤.

멀리서 놀고 있는 유진과 김선미를 보며 중얼거리는 차동석.

“우리 집에서 저러고 있으니, 진짜 아들이랑 딸을 가진 기분이에요.”

웹드라마 촬영을 위해서긴 했지만.

비슷한 또래의 아이 두 명이 총총 집안을 걸어 다니고 있다.

그 모습에 차동석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진짜 내 꿈이 저거였는데.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오순도순 사는 거.”

차동석이 장미소에게 슬쩍 말했다.

“그래. 신혼 때 오빠가 자주 얘기했었지.”

“진짜 애 있으면 좋겠다. 그지?”

오랜만에 자녀 계획 얘기를 꺼내는 차동석.

“여보. 우리 회사도 조금 안정됐고, 지혜까지 영입했잖아. 슬슬 좀 생각해봐도 되지 않을까?”

사무를 맡아줄 인력도 충원했고, 체계도 정비했다.

물론 여러 스타를 거느린 다른 기획사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수준이지만.

그래도 월세도 못 내서 걱정하던 때를 생각하자면 훨씬 나았다.

“아직은 멀었지. 이제야 회사가 성장해나가는 와중이잖아. 게다가 애 낳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마냥 낭만적인 일이 아니잖아. 내가 한 생명을 탄생해,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거기에 육아에 들어가는 돈과 시간을 생각해야지. 아이 낳는 것도 현실이니까.”

잔뜩 들뜬 차동석과 달리.

역시 냉정한 장미소였다.

“그렇죠, 아버님?”

그에 동의를 구하듯, 장미소가 박태종을 향해 말했다.

“물론 실장님 말씀도 맞습니다. 하지만 전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아니, 유진이 덕분에 오히려 힘이 났죠. 진짜로요. 우리 유진이는 갓난아기 때부터 잘 울지도 않고, 뭐든 일찍 배웠고 속을 썩인 적도 한 번도 없고요..”

팔불출처럼 제 아들 자랑을 늘어놓는 박태종.

유진의 어릴 적을 생각하는지.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제일 힘들었던 건, 유진이가 아닌 스스로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내가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걱정도 많았으니까요. 여전히 제가 아빠 노릇을 잘 하고 있는 건지, 우리 유진이에게 짐만 되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고개를 돌려 유진을 바라보는 박태종.

그의 눈에 여러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자랑스러움과 미안함, 고마움과 안타까움 등.

“하지만 유진이가 주는 행복에 비하면 너무도 사소합니다. 과거로 몇 번이고 다시 돌아간대도 전 유진이를 낳고 싶습니다. 유진이가 없었다면 저는······대체 어떻게 살아갔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를 키우며 힘들고 고통스러운 건 참아낼 수 있지만, 아이가 주는 행복은 다른 걸로 대체할 수 없더라고요.”

그러나 결국엔 ‘아빠미소’를 짓게 되는 박태종이다.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쓸데없는 줄줄이······.”

“아닙니다. 아버님과 유진이가 서로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저희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차동석이 아이를 원하는 이유에는 유진과 박태종의 영향도 컸다.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매번 부러웠으니까.

“알았어, 자기야. 자기 말대로 쉽게 결정할 문제 아니니까. 이 얘기는 당분간 안 꺼내고······.”

“그래, 알았어.”

그런데.

갑자기 장미소의 태도가 달라졌다.

“응? 자기야. 방금 뭐라고 했어?”

“한 번 고민은 해본다고.”

“뭐, 뭘 고민해본다는 거야?”

그러자 장미소는 왜 자꾸 되묻느냐 따지는 것처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입꼬리가 들썩거리기 시작하는 차동석.

“고마워! 고마워, 자기야!”

“한 번 고민해보겠다고 한 거야. 뭘 자꾸 그래······어? 뭐하는 거야?”

장미소를 번쩍 안아들고서 빙글빙글 도는 차동석.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신혼 때를 떠올리는 박태종이었다.

“사장님! 실장님!”

그때.

멀리서 휴대폰을 들고 달려오는 유진.

그러자 어른들은 순간 민망해져 얼굴이 붉어졌다.

차동석은 황급히 장미소를 내려놓고, 아무 일 없는 척하기 시작했다.

“그, 그래. 유진아, 무슨 일이야?”

“저 방금 연락 왔어요.”

“연락? 누구한테?”

“권성택 감독님한테서 왔어요.”

유진은 휴대폰을 열고 다시금 내용을 확인했다.

“음, 그러니까. <데드맨> 촬영 들어가기 전에 단합대회를 한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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