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씹어먹는 천재배우님-70화 (70/237)

70화

얼마 뒤.

<데드맨>의 첫 촬영현장.

독립영화인 <리플레이>와는 그 스케일이 달랐다.

장비는 물론이요 인원수부터 어마어마한 차이.

특히 주인공인 윤재하의 집은 아예 세트장을 새로 지었을 정도다.

많은 스태프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축문 제대로 한 거 맞지?"

"네. 몇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감독님이 직접 쓰셨으니 틀림없습니다."

"청주 어딨냐? 후딱 좀 와라!"

"지금 막내가 가지러 갔습니다!"

평소와는 조금 분위기가 달랐다.

그릇, 과일 따위를 열심히 나르고 있는 스태프들.

바로 촬영장 안에 상차림이 이뤄지고 있는 것.

바로 한국영화계만의 특징.

고사告祀를 지내기 위함이었다.

영화를 무사히 촬영하고, 흥행을 기원하는 일종의 행사.

마지막으로 돼지머리까지 세팅되자.

감독인 권성택이 대표로 제사상 앞에 섰다.

"영화 <데드맨> 가족은 한데 모여 만물을 두루 굽어살피시는 천지신명께 고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영화 <데드맨>을 위해 한자리에 모였으니, 함께하는 시간 내내 몸과 마음 그 어느 곳도 다치지 않게 해주옵시고······."

그 뒤에선 주요 배우와 스태프들이 모두 서 있었다.

그들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영화 <데드맨>의 흥행을 기원했다.

잠시 후.

고사가 끝난 뒤.

“자. 그럼 주인공인 한권주 배우가 나와서 한마디 하지.”

권성택이 말했다.

그러자 한권주는 옆쪽을 흘끗거리며 엉거주춤 앞으로 나왔다.

“어, 음. 이렇게 좋은 분들과 함께, 그. 영화를 찍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나은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권주 오빠 왜 저래? 안 어울리게 긴장한 것 같은데.”

그러자 옆에 있던 고석태가 답했다.

“오늘 촬영장에 아들이 왔거든. 혜성이.”

“뭐? 요즘 연락도 안 했다며.”

“그렇긴 한데, 유진이 덕에 어찌 잘 풀린 모양이야. 혜성이가 아빠 일하는 모습 보고 싶다고 해서 따라 나왔다는데.”

“유진이 덕?”

그 말에 유진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나은주.

하지만 유진은 나은주가 보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

한권주 쪽을 계속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튼, 끝까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한권주의 말이 끝난 직후 쏟아지는 박수.

하지만 권성택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주인공이 영 재미가 없구만. 그럼 다음. 10살이 된 유진이가 대표로 한마디 해보자.”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박유진! 박유진!'하고 연호했다.

그러자 유진이 씨익 웃으며 사람들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젠 10살이 된 유진.

비교적 자주 본 사람들이야 그 변화를 느끼기 어렵지만.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보기엔 또 키가 훌쩍 자란 느낌일 터였다.

"긴말하지 않을게요. 여러분! 제가 장담합니다! <데드맨> 천만영화 찍을 거예요!"

남들이 보기엔 어린애의 패기 넘치는 답변으로 보일 터.

아무튼 촬영장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뭐? 천만영화?"

"내가 들었어. 유진이가 흥한다고 하면 반드시 흥한다던데? 이번에도 믿어볼까!"

"크크. 그래, 유진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천만영화로 만들어야겠구만!”

여러모로 의욕이 들끓기 시작하는 현장 사람들.

다시 촬영을 위해 자신들의 위치로 돌아갔다.

“장면 59 촬영 스탠바이! 액션!”

촬영 시작 후.

한권주, 아니 윤재하는 황급히 제 서재로 들어섰다.

“상황은?”

뒤따라온 부하가 대답했다.

“백산파 떨거지들이 제대로 미쳤습니다. 인원은 얼마 안 되지만, 그만큼 기동전을 펼칠 모양입니다.”

조직 통합 과정에서 백산파의 반발세력을 제대로 억제하지 못했고.

놈들이 기습을 가해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선 윤재하의 집도 안전할 수 없는 상황.

“내 별장 알지. 내 가족들 다 거기로 옮겨.”

장소는 윤빈의 방.

문을 벌컥 열자 아직 잠들지 못한 윤빈이 침대에 앉아있다.

“아, 아빠. 무슨 일이에요?”

아빠와 함께 몰려온 양복 입은 아저씨들.

그에 지레 겁먹은 표정의 윤빈.

아빠가 선물해준 곰인형을 꼬옥 껴안고 있다.

“아저씨들은 누구예요?”

하지만 윤재하에겐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가라.”

“아빠. 어딜 가요? 싫어, 싫어요.”

“여긴 위험해.”

냉정하게 보이지만, 아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는 윤재하.

그런 윤재하의 속을 알 리 없는 윤빈은 울먹이며 애원한다.

“나 이제 혼자 있기 싫어. 나 안 갈래. 아빠, 싫어. 싫어요. 나 아빠랑 있을래.”

부하들이 애써 조심히 데려가려 하지만.

윤빈은 버티고 섰다.

“얼른 데려가.”

윤재하가 재촉하자.

윤빈을 힘으로 데리고 가는 부하들.

“아빠! 아빠아. 나 아빠랑 있을래요. 이거 놔. 아빠. 아빠!”

그 울부짖음은 처절하게 방을 울렸고.

윤빈이 껴안고 있던 곰인형이 툭 떨어지며 여운을 남겼다.

겨우 잔당들을 소탕하고 여유가 생긴 윤재하.

가장 먼저 자신의 아들을 찾았다.

“이제 빈이 데려와.”

“저, 보스. 방금 연락이 왔습니다. 도련님께서 별장으로 이동하는 도중 습격을 받아서······차가 폭발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얼어붙는 윤재하의 얼굴.

“······빈이는. 빈이는 살아있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부하.

그 모습을 보며 윤재하는 곧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제자리를 몇 번이고 맴돌았다.

“나가봐.”

혼자 남은 서재.

윤재하는 오열도 하지 않고.

절규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마치 죽은 사람처럼 몸에 힘이 축 빠져 허공을 응시할 뿐.

그 텅 빈 눈동자는 세상 모든 걸 잃은 듯 공허하게 보일 따름이었다.

“컷!”

권성택의 사인이 떨어졌다.

“연기 좋았다, 권주야.”

엄지를 치켜세우는 권성택.

아들을 잃고 싶지 않아 제 곁을 떠나보냈으나.

이젠 아들의 시체조차 찾지 못하는 상황.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을 터.

윤재하가 혼자 남은 시퀀스에선 한권주의 연기력이 제대로 발휘되었다.

회환과 슬픔이 제법 짙게 드러났으니.

‘한권주 배우의 연기력이 이 정도였나?’

한권주와 합을 맞춘 유진 역시 마찬가지.

진일보한 한권주의 연기력에 감탄했다.

절규하거나 오열하는 장면 하나 없음에도.

윤재하가 얼마나 심적으로 몰리는지 잘 드러났으니.

정신 못차리던 리딩 때와 비교하면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될 정도.

‘오히려 이번 경험이 연기적으로 큰 도움이 된 모양이야.’

아들과의 관계가 개선된 이후.

오히려 여태 아들과의 연락 문제로 힘들었던 경험이 자산이 된 셈이다.

‘좋아. 모든 게 잘 풀렸어.’

한권주는 아들이 직접 촬영장을 찾아올 정도로 관계가 개선되었고.

주인공으로서 중심을 잡아주며, 훌륭한 연기를 펼치는 중이었다.

유진이 우려하던 일들은 모두 해소된 셈.

‘그럼 이제 내 마음대로 날뛰어도 되겠네.’

이제 아역으로서의 역할은 끝났다.

유진은 거침없이 제 존재감을 드러낼 생각이었다.

곧 촬영할 장면.

그게 바로 영서의 첫 등장 장면이니.

*

사실 촬영 전.

한권주는 꽤 긴장했다.

아들인 한혜성이 촬영장에 온다는 사실 때문.

아들에게 제 연기를 보여주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혜성이 때문에 촬영에 집중 못하면 어쩌나 했는데.’

그러나 그건 기우였다.

오히려 아들 덕분에 극에 흠뻑 빠져들었다.

자신도 윤재하처럼 아들에게 무뚝뚝한 아빠였고.

자칫하면 영영 아들을 못볼 상황이었으니.

‘처음이었지. 연기를 하다 카타르시스를 느낀 건.’

자신이 극중 인물과 이토록 동화되어 연기를 한 건 처음이었다.

윤재하가 느끼고 있을 심정, 그 죄책감과 공허함.

모든 게 한권주의 가슴 속에서 끄집어올린 감정이었으니.

게다가 그 연기가 끝난 직후.

‘아빠는 이런 일을 하는구나. 엄청 멋있다!’

아들인 한혜성은 그렇게 말해주었다.

촬영 때문에 아픈 아들의 곁에 있어주지 못했던 한권주.

그 죄책감을 크게 덜어주는, 너무도 고마운 말이었다.

비록 과격한 장면이 많아, 이를 우려한 애엄마가 아들을 일찍 데리고 갔으나.

한권주는 이미 세상에 다신 없을 큰 행복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게 다 저 아이, 유진이 덕분이야.’

유진의 말이 모두 맞았다.

아들인 한혜성은 제 전화를 싫어하긴커녕, 기다리고 있었다며 좋아했다.

그리곤 아빠가 보고 싶다며 애교를 피웠고.

덕분에 고민과 걱정이 모두 씻겨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 거야. 반드시 갚을 거다.’

하지만 감사를 표하는 건 나중의 일.

우선 촬영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이제 윤빈의 파트가 모두 끝나고.

영서 분량을 촬영해야 하니까.

유진의 촬영일이 금~일로 제한되기 때문에, 한 번에 몰아서 찍어야만 했다.

“자! 다음 장면 71 갑니다!”

곧 사인이 떨어지고.

한권주는 다시금 윤재하에 빙의했다.

*

제 아들, 윤빈의 죽음 이후.

덤덤한 척 조직을 이끌고 있으나, 속이 썩어들어가는 윤재하.

불면의 밤을 술로 지새우고 있었다.

그날도 위스키를 마시며 아무 생각 없이 창문을 바라보던 윤재하.

그런데.

창문에 익숙하고 그리운 모습이 비친다.

“······!”

의자를 돌리니.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들.

곰인형을 껴안고 있는 윤빈이었다.

“······빈아. 빈이 너, 맞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제 아들을 향해 다가가는 윤재하.

그러나.

죽기 전 아들이 떨어뜨린 곰인형이 여전히 제 책상 위에 놓여져있는 것을 발견한다.

눈앞의 아들도 곰인형을 껴안고 있다.

바로 유진이 오디션에서 냈던 아이디어.

그게 그대로 영화에 반영된 것.

“너, 뭐야. 빈이 맞아? 응? 뭐라고 말 좀 해봐. 뭐야. 너 대체 뭐냐고!!”

술기운과 혼란이 겹쳐,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는 윤재하.

그러나 눈앞의 존재는 아무 미동도 없다.

아니. 도리어 미소를 지었다.

천진하지만.

그 누구보다 싸늘해 보이는 미소.

그리곤 이내 곧 표정을 싹 바꿨다.

부하들에게 끌려가기 전 윤빈이 그랬던 것처럼.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윤재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곤.

윤재하가 마지막으로 목격한 윤빈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 시작했다.

“······.”

그러자 연기를 하고 있는 한권주는 물론.

현장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자신이 했던 연기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다시 표현해내고 있어. 너무 똑같이 재현하니까 오히려······소름이 쫙 끼치고 무서울 지경이야.’

이제 곧 촬영을 앞두고 있는 나은주.

그녀는 알 수 없는 서늘함에 제 팔뚝을 쓰다듬었다.

이 무서움은 영서라는 존재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그를 연기하고 있는 유진에 대한 것일까.

“그만. 그만해, 제발······.”

트라우마를 호소하며 무너지는 윤재하.

“내가 누군지 정말 몰라?”

그런 그에게 곰인형을 들고 다가오는 영서.

그 얼굴 속엔 영악함과 장난스러움이 깃들어있었다.

지금 윤재하가 자신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

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표정.

“넌 내 이름을 알잖아.”

영락없는 어린아이 같지만.

싸늘한 느낌과 겹쳐지니, 오히려 초월자 같은 느낌이 들 정도.

마치 공포영화에서나 느껴볼 법한 기이한 감각이었다.

‘정말 무슨······뭐가 빙의된 것 같아.’

지켜보던 나은주는 유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트라우마에 괴로워하며 적극적 액션을 펼치고 있는 건 윤재하, 한권주 쪽이다.

오히려 영서, 유진은 정적인 움직임으로 상대방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

‘그런데도 존재감이 미쳤어.’

관념의 의인화인 존재이니만큼.

영서는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야 그 기이함과 사람 같지 않은 느낌이 제대로 살아날 테니까.

‘가뜩이나 오늘 권주 오빠의 연기력이 너무 좋아서 내심 걱정했는데.’

안 그래도 유진이 한권주에게 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나은주다.

그러나 유진은 마치 아까 윤빈 연기는 맛보기였다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다.

‘아까 석태 오빠가 그랬지. 권주 오빠가 아들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도와준 게 유진이었다고.’

나은주가 품고 있던 두 개의 우려.

아들 문제로 한권주가 촬영에 집중하지 못할까 하던 것.

영서 역할의 유진이 주인공 한권주에게 존재감에서 밀리지 않을까 하던 것.

그 우려 두 개 모두, 유진은 스스로 해결해버렸다.

‘이 아이, 상대방의 연기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면서도······거기에 맞춰서 자신의 존재감을 내뿜을 수 있는 건가?’

단순한 아역일 때는 한권주를 한껏 부각시켜주면서도.

영서 역할일 때는 한권주와 대등하게 존재감을 내뿜고 있다.

‘어쩌면 유진이는 최고의 조력자인 동시에 최고의 경쟁자가 될 거 같네.’

나은주의 안에서 ‘넙튜브 속 유진’보다 ‘배우 박유진’의 존재가 더 커져갔다.

*

촬영이 끝난 직후.

유진은 곧장 차동석의 차에 올라탔다.

“촬영 끝났어요!”

“헉!”

운전석의 차동석.

유진을 보고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 왜 그래요?”

“아, 아니. 그게, 그.”

땀까지 뻘뻘 흘리며 무서워하는 차동석.

그는 백미러를 흘끗거리며 말했다.

“아니. 그, 너 촬영하는 걸 보고 나니까. 갑자기 네 얼굴이 무섭게 보여서······.”

아무래도 유진의 영서 연기가 차동석에게도 인상적이었던 모양.

“에이. 그게 뭐예요.”

유진이 피식 웃자 차동석은 더 덜덜 떨었다.

“웃지 마! 너 이제 웃는 것도 무서워 보여.”

“음? 그럼 아빠처럼 울어야 하나.”

“유진아. 너 원래 사람 아니고 귀신이지? 그치? 귀신이 아니면 어떻게 그런 연기를 하냐?”

“저 사실 귀신 맞아요. 무명배우로 30년을 떠돌다 사고로 죽은 원혼이 어린아이의 몸에 빙의한 상태거든요. 제 정체를 알았으니, 사장님을 가만히 놔둘 수는······.”

“제발 그런 소리 좀 하지 마! 소름 돋으니까.”

차동석이 팔뚝을 쓸어내리며 질색했다.

그 모습을 보며 유진은 낄낄대고 웃었다.

그제야 머쓱해진 차동석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아, 아무튼. 촬영하느라 수고 많았어. 그리고 너 촬영하는 사이에 꽤 재미있는 제안이 왔어.”

“제안이요? 뭔데요?”

“한 번 맞춰봐. 감으로다가.”

제안이라.

유진은 침음을 흘리며 턱을 괴었다.

“음. 요즘 연극이랑 영화 하니까 새롭게 캐스팅이 왔을 거 같진 않고. 광고는 이미 아침바람 전속모델 하고 있는데······협찬? 뭐 그런 거라도 왔어요?”

그러자 겨우 진정했던 차동석의 눈동자가 커졌다.

“······너 진짜 귀신 맞지. 그치?”

“어? 진짜 협찬이에요?”

유진으로선 대충 찍은 것인데, 설마 맞을 줄이야.

차동석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안전벨트를 매며 말했다.

“으으 맞아. 협찬 제안 들어왔어. 그것도 두 군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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