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바쁘신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전 홍보팀 팀장 박수완입니다."
벨레 측과의 협찬 관련 미팅 자리가 마련되었고.
유진은 연극 <주변인>의 연습이 끝나자마자 약속 장소로 향했다.
실제 회사 분위기와, 협찬 받을 제품을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이번에 런칭한 고급 라인업 제품군입니다. 이중에서 원하시는 옷을 하나 골라주시면, 그 제품을 비롯, 그와 어울릴만한 코디까지 짠 후 모두 협찬해드릴 생각입니다.”
박수완이 직원을 시켜 옷을 가져왔다.
니트, 후드티, 코트 등.
겨울 시즌을 노리고 나온 제품들이었다.
유진과 함께 제품들을 살펴보던 차동석.
택을 확인하던 도중 가격대를 보고선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고급 브랜드라고 해서 비싸겠구나,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비쌀 줄은 몰랐습니다. 애들은 빨리 자라서 오래 입지도 못할 텐데.”
그러자 계약을 위해 동행한 박태종이 대답했다.
“아이한텐 좋은 것만 입혀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니까요. 아무래도 고급 라인업이라고 하면 우선 눈이 갈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곧 박태종의 눈가가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마음은 좋은 걸 해주고 싶어도, 정작 돈이 없어서 비싼 것 한 번 입혀주질 못했네요. 이런 옷들을 지나칠 때마다 어찌나 마음이 아팠는지······그런데 이젠 유진이 스스로의 힘으로 협찬까지 받고. 흑, 흐윽!”
“에? 저. 그, 무슨 일 있으십니까?”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리는 박태종을 보고 당황하는 박수완이었으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늘상 있는 일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차동석은 익숙한 듯 대신 설명해주며, 박태종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전 이거요.”
그러는 와중.
유진이 고른 것은 패딩이었다.
"역시 안목이 좋으시군요. 보온성은 물론 멋까지 챙긴 샤흐멍 패딩입니다. 최고급 오리털 패딩이라 가벼우면서도 따뜻하고, 감각적인 투톤 디자인으로 뻔하지 않은 인상을 주죠. 박유진 배우의 뛰어난 비주얼과 잘 어울릴 거라 생각합니다."
세일즈맨처럼 막힘없이 설명하는 박수완.
“자, 한 번 입어보시죠.”
유진은 그 권유에 패딩을 한 번 입어보았다.
그러자 박수완은 물론, 주위에서 오 하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어때, 유진아?”
"음, 가볍고 따뜻해서 좋은 것 같아요. 전 마음에 드는데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이리저리 움직여보는 유진.
곧 박수완을 향해 말했다.
“어때요. 잘 어울리나요?”
“물론이죠!”
그건 비지니스맨으로서 빈 말이 아니었다.
이미 저 샤흐멍 패딩을 걸친 아이들을 숱하게 봐온 박수완이지만.
유진이 걸치니 유독 더 예뻐 보인다고 해야 할까.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더니. 역시 그 진리는 남녀노소 통용된다니까.’
10살이 된 유진은 데뷔 때와 비교하면 젖살이 꽤 줄었다.
덕분에 이제 귀여움보단 잘생겼다는 느낌이 확 드는 비주얼.
거기에 샤흐멍 패딩을 걸치니, 활동적이고 스타일리쉬한 느낌이 확 들었다.
‘작년에 계약한 아역 전속모델보다 훨씬 나은 느낌이 들 정도야.’
아무리 생각해도 아쉬웠다.
TV 프로그램, 하다 못 해 박유진의 넙튜브 채널에서 이 모습이 공유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샤흐멍 패딩을 중심으로 코디를 짜는 것까지 끝마친 뒤.
벨레와 유진 측은 곧장 협상으로 들어갔다.
“벨레 측에서 여러모로 저희 사정을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협찬비 쪽을 조금 조정했으면 합니다.“
“조정이요?”
"저희가 최초로 제안한 협찬비는 방송 출연을 전제로 한 것이라서요.”
즉, 협찬비를 좀 내리겠다는 뜻이다.
협찬 제품을 노출하는 통로가 SNS인 것치곤, 최초 협찬비가 너무 과한 액수라는 것.
“아아.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차동석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벨레의 제품이 박유진 배우에게 들어온 첫 협찬이라, 저희 쪽에도 의미가 깊습니다. 그런데 팀장님. 팀장님도 충분히 아시겠지만, 저희 박유진 배우는 아역배우로서 최상급의 인지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만큼의 대우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협상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차동석.
유진의 영향력을 생각했을 땐 원안대로 받아야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하지만 아직 SNS 계정도 개설하지 않은 상태 아닌지요. 게다가 SNS로 협찬 홍보를 한다는 건 전례가 없던 일입니다. 저희 벨레 측으로선 홍보효과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생각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SNS 개설 직후가 대중들의 관심도는 가장 높은 시기입니다. 그때 협찬해주신 패딩을 노출하면 가장 확실한 홍보가 될 겁니다.”
서로의 입장이 입장이다 보니, 둘은 한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분위기가 다소 과열될 수 있는 상황.
"저, 질문 있는데요."
그때.
둘 사이에 유진이 끼어들었다.
"SNS 팔로워가 넙튜브 구독자랑 똑같은 거죠? 혹시 홍보할 때 SNS 팔로워가 몇 명 정도 되면 좋을 것 같으세요?"
유진의 개입으로 인해 분위기가 다소 풀어졌다.
비즈니스적 협상이긴 하지만, 엄연히 어린애를 앞에 두고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
박수완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크흠. 말씀하신대로 박유진 배우님의 인지도는 최상이니까요. 저희 측으로선 못해도 10만은 되어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유진은 작년부터 넙튜브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쌓인 구독자가 이제 15만을 넘긴 상황.
넙튜브 구독과 SNS 팔로우가 다른 영역이라곤 하나, 10만이란 숫자는 결코 적은 게 아니었다.
"그럼 그 두 배, 20만명으로 만들게요! 그럼 될까요?”
그런데.
당당하게 그 두 배를 장담하는 유진.
“유, 유진아.”
그러자 박태종은 물론 차동석까지 당황했다.
아직 계정도 만들지 않은 상태인데, 팔로워 숫자를 어떻게 장담한단 말인가?
"걱정 마세요. 절 도와줄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것도 꽤 많이.
*
“아아, 진짜 부럽다.”
김선미의 사촌 언니.
김현서가 김선미를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유진이랑 달달한 뮤직비디오도 찍어. 이젠 웹드라마로 남매 연기까지 해. 네가 대박유진 최고 아웃풋이다.”
유진의 팬인 김현서가 보기에.
김선미는 그야말로 팬으로서 누릴 수 있는 걸 다 누리고 있는 셈이니.
심지어 김현서는 찍덕이 아닌가.
마음 같아선 김선미의 보호자인 척하며 유진의 사진 좀 찍고 싶은 지경이다.
“야, 선미야. 유진이 실제로 만나서 대화해보면 어때? 어떤 느낌이야?”
김선미는 사촌언니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선 대답했다.
“모르겠어.”
“뭔 소리야, 그게?”
“말 그대로. 그냥 모르겠어. 평소에는 엄청 활기차고 친절한데, 연기할 때는 완전 다른 사람인 것 같고. 진짜 동생 연기할 때는 한 대 쥐어박고 싶다니까?”
그 세상 순수한 눈빛을 뿜어내던 멋진 남자애와.
짜증을 유발하는 동생이 동일인물이라니!
매번 촬영을 하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야. 근데 너는 언니가 말하면 좀 얼굴을 봐라. 아주 휴대폰 속으로 빨려들어가겠어.”
“대답해주고 있잖아.”
“에휴. 이모가 너 스마트폰 사준다고 했을 때 말렸어야 했는데.”
김현서는 고개를 내밀어 김선미의 휴대폰을 훔쳐봤다.
“또 스윗터야? 너 그러다 중독된다?”
“저리 가! 그리고 일하는 거거든? 엄마가 스윗터로 이미지 관리하랬어. 인맥도 넓히고.”
최근 김선미는 SNS, 스윗터에 푹 빠졌다.
얼마 전에 스마트폰을 새로 구입한 뒤로 시작했다.
여러 사람과 인터넷 공간에서 교류하고, 일상을 공유하는 건 상상 이상의 재미를 선사해줬다.
게다가 이번 <연년생>으로 팬들도 많이 늘었고.
자신을 좋아해주는 팬들의 메시지를 찾는 건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아휴. 유진이는 SNS 안하려나.”
김현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유진이는 넙튜브 하잖아.”
“에이. 넙튜브랑은 다르지. 그리고 웹드라마 들어간 이후로 넙튜브 업로드 주기가 길어졌단 말이야.”
웹드라마는 분명 호평도 많이 받고, 유입도 많이 이끌었으나.
유진의 일상이나 작품 연습 영상을 좋아하던 팬들은 아쉬움을 표했다.
유진과의 소통이 비교적 줄어든 느낌이랄까.
“몰라. SNS 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때.
김선미의 휴대폰에 걸려온 전화.
유진이었다.
“뭐야, 뭐야! 너 유진이 전화번호도 알아? 대박!”
유진의 이름을 보자마자 흥분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김현서.
“웹드라마 촬영하니까 당연히 알지.”
김선미는 아닌 척하지만 으스대는 표정이었다.
곧 김선미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전화를 받았다.
“크흠! 여보세요?”
“안녕, 선미야! 혹시 전화 괜찮아.”
“어, 음. 좀 바쁜데, 그래도 시간 있어.”
“고마워. 그럼 얼른 물어보고 끊을게.”
“어, 얼른 끊을 필요는 없는데.”
“음? 아무튼! 실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너 혹시 유키즈랑 벨레라는 브랜드 알아?”
“당연히 알지.”
키즈모델로 활동 중인 김선미다.
국내 아동복 대표 브랜드인 둘을 모를 리가 없었다.
“두 브랜드 중에 어느 곳이 더 좋아?”
“더 좋은 곳? 아무래도 유키즈 쪽이 조금 더 유명하긴 하지.”
“그럼 벨레는?”
“거기도 괜찮아. 사실 둘이 별 차이도 없거든. 개인적으론 입어봤을 때 벨레 옷이 더 좋은 것 같아.”
“아하. 혹시 벨레 말이야. 거기 뭐 나쁜 소문 같은 거 없어?”
“음? 그런 건 들어본 적 없는데. 벨레 말고 유키즈 사람들이 좀 제멋대로란 얘기를 들은 적이 있긴 해.”
키즈모델로 일하다보니.
업계 어른들이 얘기하는 걸 자주 듣게 되는 김선미다.
“오, 그래? 정말 고마워!”
“어, 응. 근데 무슨 일로······.”
“너 지금 많이 바쁘댔지? 시간 잡아먹어서 미안해. 얼른 끊을게!”
“아니. 난 지금 괜찮······.”
“그럼 다음에 봐, 선미야! 아, 맞다. 혹시 스윗터 하면 나랑 나중에 맞팔하자! 알았지?”
“잠깐······.”
뚝.
김선미가 붙잡기도 전에 먼저 전화를 끊어버리는 유진.
그러자 김선미는 휴대폰을 노려보며 분노했다.
“아으, 씨! 얘는 갈수록 웹드라마 캐릭터랑 똑같아지는 것 같아.”
“왜, 왜, 왜? 무슨 일인데? 어?”
김현서가 뭐라고 하든.
김선미는 <연년생> 속 시윤에 빙의해 씩씩댈 뿐이었다.
*
미팅 후 며칠 뒤.
주역 매니지먼트 사무실.
“우리가 사용할 SNS는 스윗터로 정했어.”
SNS 담당은 전직 홍보팀이었던 장미소가 맡기로 했다.
유진이 초안을 작성하면, 장미소에게 검토를 맡는 식.
“스윗터에서 첫 스윗 올리면, 곧장 기사 나갈 거야. 우리 스윗터 시작했다고. 그럼 그걸 기반으로 최대한 팔로워 끌어모으고, 며칠 뒤에 벨레 협찬 상품 착용한 사진 업로드하는 식으로.”
“넵. 알겠습니다!”
두 브랜드의 미래에 대해 알고 있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회귀 전 유진은 아동복 브랜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앞으로 두 회사가 어떻게 될지는 미지의 영역.
‘선미 말대로라면 유키즈는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안 좋은 얘기가 나오는 것 같으니까, 차라리 잘됐어.’
결국 벨레 쪽에서 협찬비를 깎지 않았다.
그쪽에서도 유진을 믿고 투자해준 것.
‘그럼 투자해준 만큼 결과를 내줘야지.’
지금은 협찬이지만.
홍보만 충분히 해낸다면, 추후 전속모델로 활동할 가능성도 열리는 셈이니까.
협상 국면에서도 훨씬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터이고.
마침 SNS를 시작하려던 시기.
그에 맞춰 협찬 제의가 온 건 여러모로 적절했다.
유진의 영향력을 확인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
“넙튜브로도 홍보를 하면 좋은데, 지금 상헌 씨도 그렇고 다른 직원들도 웹드라마 편집에 심혈을 기울이는 중이라서.”
장미소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넙튜브는 지금 유진 쪽이 쓸 수 있는 최고의 홍보수단이었으니까.
“그래도 팬카페에도 홍보하면 팔로워는 금세 늘어날 거야.”
하지만 유진은 이미 대안을 세워놓은 상태.
“걱정 마세요, 팀장님. 제가 버스터 콜을 날릴게요!”
“버스터 콜? 그게 뭐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장미소에게 씨익 미소지은 뒤.
유진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재오가 사준 휴대폰에서 갈아탄 뒤 장만한 새 스마트폰이었다.
[저 이번에 스윗터 시작했어요!
혹시 스윗터 하시는 분 있으면 친추나 RT 부탁드려요 ㅎㅎㅎ
같이 놀아요!]
유진은 위와 같은 문자메시지를 작성한 후.
수신자 명단에 제 연락처에 있는 유명인들을 모조리 추가했다.
한 명을 빼고.
꾹!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이게 바로 버스터 콜이지.’
인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아닌가.
그 직후, 유진은 아까 단체 메시지에서 제외된 한 명에게 따로 문자를 보냈다.
[재오 형!
저 이번에 스윗터 시작하는데 ㅎㅎ
형도 스윗터 하죠?]
바로 유진의 치트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