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
그로부터 며칠 뒤.
유진에게 협찬하는 걸 철회했던 유키즈 측.
“하.”
그들은 인터넷을 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자신들의 선택이 불러온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니까.
[박유진이 SNS에서 홍보한 샤흐멍 패딩, 관심 집중!]
유진에게 협찬 제안을 했다가 철회했는데.
경쟁사 제품을 홍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대박까지 터뜨렸으니.
그것도 SNS에 사진 한 번 올린 것으로 말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유키즈 마케팅팀은 윗선에게 아주 무참히 깨졌다.
“부장님이 그렇게 언성 높이는 거 5년 만에 봤습니다.”
“웃기는 일이지. 그렇게 보수적으로 굴었던 게 윗사람들 아니었나?”
“아니, 우리라고 알았겠냐고. 설마 SNS에 사진 한 번 올리는 걸로 이 정도 파급력이 있을지!”
직원 중 한 명이 씩씩대며 스윗터를 켰다.
그리고 박유진이 벨레 샤흐멍 패딩을 입고 찍은 사진을 재차 확인했다.
“게다가 SNS에 사진 올리는데 뭐가 이리 고퀄리티야?”
결코 휴대폰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아니었다.
마치 인디 패션 잡지라도 보는 느낌.
“RT 1만 돌파에, 하트는 5만······허, 진짜. 무슨 패딩 하나 입은 사진이 이렇게 난리냐고.”
스윗터 내에서 화제가 되자, 기자들도 그걸 덥석 물었고.
곧 기사화하며 더욱 불을 붙였다.
이윽고 샤흐멍 패딩은 ‘박유진 패딩’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마치 점점 눈덩이가 불어나는 것처럼.
SNS 게시글 하나가 점점 그 화제성을 키워나간 것.
“그 패딩 품절이지?”
“네. 심지어 대체제를 찾는 고객들이 벨레의 중저가 라인업으로 눈을 돌리거나, 아예 코트나 니트처럼 다른 제품군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즉, 샤흐멍 패딩 하나만 난리가 난 게 아니다.
벨레의 고급 라인업은 물론.
전체적으로 판매량이 유의미한 변화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는 벨레.
[벨레 고객 감사 세일! 온라인 한정 최대 40% 할인 행사!]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젓는 중이었다.
덕분에 벨레가 한 때 실시간 검색어에 등장하기도.
이 사태가 유키즈 입장에서 무엇보다 뼈아픈 것은.
[계속 유키즈 옷만 사입혔는데 벨레도 괜찮네요
그니까요 오히려 유키즈보다 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이번에 할인도 해줘서
울 아들이 박유진 패딩 넘 예쁘다는데... 사주고 싶어도 팔아야 말이죠 ㅠㅠ 어디 비슷한 거 없을까요?
ㄴ 벨레에 있는 패딩들 살펴보시면 싸고 예쁜 거 많아요
원래 센스 있는 엄마들은 벨레 많이 입혔죠~ㅎㅎ
유진이 팬이라 그런가... 확실히 유진이가 입으니까 더 고급져보이고 그러는 것 같아요
ㄴ 요즘 엄마들 중에 유진이 팬 아닌 사람 없을걸요? 얼마나 귀여워요~ ㅎㅎ
ㄴ 워너비 아들상이죠 정말 울 아들램도 저렇게만 커줬으면 ㅠㅠ]
부모들이 주로 모이는 커뮤니티.
그곳에서 벨레의 이미지가 확 바뀐 게 컸다.
두 회사의 제품 품질은 비슷하다.
다만 업계 1위라는 타이틀 덕에 유키즈가 더 유명하고 고급지다는 인상이 있었다.
자식들에게 더 좋은 걸 입혀주고 싶은 부모들로선 당연히 1위 업체를 선호할 수밖에.
소위 말하는 메이커, 브랜드 파워였다.
하지만 유진으로 인해 촉발된 품절 대란.
그로 인해 인지도와 위상이 상승해버린 것이다.
[빅터 재오도 예쁘다 칭찬한 샤흐멍 패딩, 심지어 품절대란까지?]
[벨레 측 “폭발적 관심 감사······재입고 신속히 논의 중”]
심지어 스윗터 내에서 재오가 그 패딩을 예쁘다고 칭찬했다.
무려 팔로워만 300만이 넘는 그 재오가 말이다.
[나도 입고 싶은데 아동복이네
ㄹㅇ 패딩 예쁘게 뽑아놓고 왜 성인용은 안 파냐고 ㅋㅋ
나 150cm 완전 난쟁이인데 빅사이즈로 사면 박유진 패딩 입을 수 있을까? ㅠㅠ
183/90인데 샤흐멍 패딩 입기 가능?
ㄴ 형님...형님은 가서 갑옷이나 입으십쇼]
심지어 아이가 없는 성인들까지 관심을 보였다.
당연히 유키즈 측으로선 배가 아프다 못해 찢어질 것만 같다.
“다음엔 무조건 협찬 넣는 걸로 합시다.”
“아니. 그냥 광고모델로 채용합시다. 독점으로 몇 년 묶고 싶을 정도네요.”
유키즈 쪽으로선 뒤늦게 유진을 잡을 구상을 짜기 시작했다.
*
며칠 후 주말.
영화 <데드맨> 촬영장에는 웬 낯선 트럭 한 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앞에 스태프와 배우들이 웅성대며 모여있었다.
평범한 트럭도 아닌, 소위 말하는 커피차.
커피차 옆에 설치된 입간판에는 유진의 사진과 함께 짧은 문구가 적혀있었다.
[배우 박유진과 영화 데드맨의 흥행을 응원합니다! -재오가]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뒤늦게 도착한 나은주.
떨떠름한 얼굴로 촬영장을 살피던 그녀는 곧 유진을 발견했다.
“은주 누나! 안녕하세요.”
해맑게 인사하는 유진.
유진의 손에는 유자차 한 잔이 들려있었다.
“저게 뭐야?”
“재오 형이 보내준 커피차에요.”
“커피차?”
“이야. 대박이지?”
그때 끼어드는 고석태.
그의 손에도 커피 한 잔이 들려있었다.
“설마 빅터가 사주는 커피를 먹게 될 줄은 몰랐다. 가문의 영광이야.”
“그럼 커피잔 집에 들고 가시는 거예요? 신줏단지처럼 잘 모셔주세요. 제가 재오 형한테 말해줄게요.”
“오, 진짜 그럴까? 나쁘지 않은 생각인데.”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유진과 고석태.
유진은 곧 고개를 돌려 나은주에게 말했다.
“재오 형한테 제가 하는 연극 티켓 구해줬거든요.”
“그거 전석매진 아니야? 암표까지 돌아다닌다던데.”
연극제에 참가하는 연극들은 상업적이지 않다.
평론가나 관계자들의 눈에 띄어, 창작지원금을 따내기 위함.
이 때문에 대중들에겐 어렵거나, 지루한 연극을 한다는 인상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매진되기는커녕, 초대석으로 자리를 채우는 경우도 빈번.
그러나 지금 <주변인>은 표를 팔고 싶어도 좌석이 없는 상황.
심지어 웃돈을 주고 표를 구하려는 사람들과, 그를 등쳐먹으려는 암표상까지 등장했다.
그것도 소극장 연극에서 말이다.
“관계자를 위한 초대석은 한 두 자리 있어서요. 근데 재오 형이 지금 아시아 투어 중이라 못 온다고 하네요.”
“와. 그게 미안하다고 커피차를 보낸 거야? 대박이네, 진짜.”
나은주를 대신해 감탄을 내뱉는 고석태.
“그런데 왜 연극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한테 보내준 거야?”
“사실 연극 연습할 때도 보내줬어요. 며칠 전에요.”
“그럼 커피차를 두 번 보낸 거야?”
“네. 제자로서 스승님의 첫 연극 무대를 못 보는 게 너무 안타깝다고 했어요.”
유진의 대답에 이번엔 고석태마저 할 말을 잃었다.
빅터가 작년에 ‘첫사랑’으로 컴백한 뒤, 새로운 컨셉으로 어마어마한 성과를 냈다.
이로 인해 국내 활동이 끝나자마자 쉴틈없이 아시아 투어를 도는 상황.
재오로선 연극을 보러오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바쁜 와중에 커피차를 두 번이나 보낸 것이다.
“이야. 진짜 스케일이 큰 친구네.”
나은주와 고석태가 허허 웃는 와중.
“잘 마실게.”
어느 새 소리소문 없이 다가온 한권주.
커피를 들고선 유진을 향해 말했다.
“재오 형이 쏘는 거니까요. 재오 형한테 전해드릴게요! 아, 맞다. 권주 삼촌.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뭔데.”
“삼촌도 스윗터 하세요?”
“유진아. 저 삼촌은 그런 거 할 사람이 아니야.”
한권주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고석태가 대신 대답했다.
“내가 아무리 하자고 꼬셔도 안 한다? 하긴, 저렇게 요즘 자기 아들이랑 놀기 바쁜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랑 소통을 하겠냐.”
“시끄러. 근데 그건 왜?”
“음, 그냥요. 갑자기 궁금해서요.”
유진이 대뜸 물어본 이유.
자신의 팔로워 중에 한권주라는 이름의 유저가 있었기 때문.
그런데 그 계정은 팔로우는 유진 한 명에, 팔로워는 0명이었다.
사진도 올라온 스윗도 하나도 없다.
‘하긴. 권주 삼촌이 SNS를 할 리도 없고. 그냥 동명이인이겠지?’
그렇게 궁금증을 넘겨버린 뒤.
유진은 스마트폰으로 커피차에서 인증샷을 찍은 뒤.
곧장 스윗터에 업로드했다.
[박유진의 스윗 : 재오 형이 보내준 커피차!
커피를 못 마시는 저를 위해 코코아와 유자차도 있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재오 형! 아시아 투어 힘내세요 ᕦ(ò_óˇ)ᕤ]
알뜰하게 스윗터를 이용하는 유진.
재오로선 또 훈훈한 미담을 추가하는 셈이고.
유진은 재오의 화제성을 통해 이름과 얼굴 한 번 더 알렸으니.
“근데 연극연습 때 보내준 커피차는 왜 스윗터에 안 올렸던데?”
유진과 맞팔 중인 고석태가 물었다.
“극단 사람들이 더는 이목을 끌고 싶지 않다고 하셔서요. 안 그래도 지금 난리거든요.”
즉, 극단 ‘등불’이 감당할 만한 일이 아닌 것.
개막을 앞에 두고 정신 없는 와중이라 더더욱 힘에 부쳤을 것이다.
“후아. 곧 연극 개막이라 떨려요.”
새삼 긴장한 것처럼 유진이 숨을 고르자.
“넌 잘 할 거야, 유진아.”
“무대를 그냥 즐겨! 넌 난놈이야. 그냥 다 뒤집어 엎으라고!”
“잘 해라.”
세 사람이 제각기 다른 말로 격려를 보냈다.
“자, 이제 우리 당구장 동맹들. 다음엔 어디로 놀러가볼까?”
“영화 촬영 중인데 어딜 놀러가.”
“권주 이 답답아. 촬영 끝나고 말하는 거지.”
“당구장 동맹이 뭐야?”
“은주 너는 몰라도 돼.”
“누나, 당구 잘 쳐요? 다음에 2대 2로 당구쳐도 재밌겠다.”
“야, 유진아! 그걸 말하면 어떡하냐? 우리 비밀 동맹이었잖아.”
“어? 그랬어요? 처음 알았네. 다음엔 볼링 칠까요?”
이후 자연스럽게 얘기를 주고 받는 네 사람.
그 모습을 스태프들이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야. 지금 한권주, 나은주, 고석태가 모여서 대화를 나누는 거야?”
고석태야 그렇다 쳐도.
한권주와 나은주는 과묵하고 차가운 이미지로 유명했다.
현장에서도 주로 혼자 있는 편.
그런 두 사람이 무리지어 대화하고 있는 장면은 보기 드문 광경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중심에는.
“유진이 때문이지 뭐. 단합대회 때부터 그랬잖아.”
“인간자석이지, 자석. 사람을 끌어들여. 쟤는.”
유진이 있었다.
*
“개막이 코앞인데 뭘 또 오셨어요.”
하진무의 병실.
하진무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연극연출가 신대종이 손을 휘휘 저었다.
“설마 병문안 올 시간조차 없으려고.”
곧 하진무의 옆에 자리잡고 앉는 신대종.
그 얼굴을 보며 하진무가 말했다.
“이러다 저랑 같은 병실 쓰시겠는데요. 얼굴이 많이 초췌해지셨네.”
개막을 코앞에 두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지.
신대종은 살도 제법 빠지고 피곤한 얼굴이었다.
“그럴 일 없으니까 얼른 낫기나 하라고.”
그러나 그 눈빛만큼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전석매진 축하드려요. 오랜만인 것 같은데.”
“요즘 SNS인지 뭐시긴지가 무섭긴 해. 연극도 매진시키고.”
유진이 올렸던 샤흐멍 패딩 홍보 스윗.
거기에 유진이 연극 연습을 간다고 적어놓은 덕분인지.
연극 <주변인>은 재차 화제가 되었다.
덕분에 얼마 없던 좌석마저 싹 매진된 상황.
매일 극단으로 추가 좌석 없느냔 전화가 걸려올 정도다.
“연습은 좀 어떠세요?”
“내가 극단에서 연출가로 있으면서, 이런 연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 배우들이 막 손들고 아이디어 제시하고, 의견 대립해서 다투고. 아주 죽을 맛이야.”
신대종은 힘든 걸 토로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웃고 있었다.
“상상이나 해봤어? 우리 극단에서 배우들이 이렇게 자유롭게 의견 내는 거.”
보통 극단이 오래 되거나, 연출가의 파워가 무척 센 곳은 관계가 수직적이기 마련.
참여 배우들이 의견을 내기보단 연출가, 혹은 발언권이 강한 사람이 모든 방향을 주도하기 마련이다.
바로 극단 ‘등불’도 얼마 전까진 그랬다.
오랫동안 극단에 몸담은 배우들이 주도해 극의 방향성을 이끌어갔으니.
“이것 참. 그거 다 정리하고 다듬느라 애 좀 썼다고. 개막을 앞에 두고 연극에 참 여러 개가 추가됐지.”
“다 유진이 아이디어인가요?”
“처음엔 그랬는데, 이젠 아니야. 다른 배우들 아이디어가 더 많아. 박유진 그 애가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많이 내니까 그에 자극을 받았나봐.”
극단 외부인에다, 나이도 어린아이가 여러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그게 받아들여지자 평소 침묵하던 젊은 배우들도 의견을 내기 시작한 것.
“물론 개막이 얼마 남지 않아서 자잘한 디테일에 대한 의견이 많긴 한데······이것만으로도 난 엄청난 변화라고 봐.”
극단이 변화하기 위해 시작했던 연극 <주변인>.
극 뿐만 아니라, 극단 ‘등불’도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했다.
“라이센스극도 아니고 우리가 만드는 창작극인데. 우리 극단이 참 너무······옛날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던 건 아닐까, 싶어. 배우는 연기하는 기계가 아니고, 또 한 명의 예술가고 창작가니까.”
조용히 신대종을 바라보고 있던 하진무.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불안하진 않으세요? 결말도 바뀌고, 극이 올라갈 때까지 수정도 많았던 셈인데.”
“불안하지. 하지만, 연극하는 사람들이 언제 편한 길만 갔나?”
불어오기 시작한 변화의 바람.
그게 촛불을 꺼뜨릴 위험한 바람인지.
혹은 불을 지펴줄 바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난 이 불안 속에 앞으로 우리 극단이 만들어갈 작품들이 기대되기 시작했어.”
신대종의 말에 하진무는 2년 전을 떠올렸다.
영화 <리플레이>에서 갑작스레 바뀐 대본의 방향성.
아역분량의 추가 및 아역 중심의 연출.
그에 대해 갖고 있던 자신의 불만과 불안.
그걸 단번에 해소해준 사람도, 다름 아닌 박유진 아니었던가.
하진무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어째서 대타로 유진의 이름을 가장 먼저 떠올렸는지.
“이번 연극, 분명 잘 될 겁니다.”
그리고 이제.
막이 오를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