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75화
150석 규모의 드림시어터.
평소에는 공연이 임박해도 한산한 곳이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줄이 뭐가 이렇게 길어?"
"얼른 티켓 받고 밥먹으러 가려 했는데."
연극 시작이 한참 남아있음에도 많은 사람이 모여 웅성대고 있는 것.
“등불에서 하는 연극은 믿고 보니까.”
“이번엔 좀 색다른 시도를 한 것 같아서 재밌을 거 같은데?”
연극 무대를 사랑하는 매니아들은 물론이요.
“극장 입구 근처에 유진이 굿즈 있던데?”
“응. 팬카페에서 준비한 거잖아. 나도 하나 챙겼어.”
그리고 유진의 팬카페에서 나온 사람들.
“예. 관객들 인터뷰 먼저 따고 있습니다. 네. 끝나고 연출이랑 배우들 인터뷰 한 다음 송고하겠습니다.”
심지어 표는 없으나, 취재를 위해 나온 몇몇 기자들까지.
여러 사람이 북적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얼굴이 한 명 있었는데.
"헐. 저 사람 최희숙 아니야?"
"최희숙이 누군데?"
"그 유진이 나온 <리플레이> 감독?"
"유진이 보러온 건가? 대박."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파문이 일듯 퍼져갔다.
<리플레이>로 꽤 많은 상을 탄 덕분인지, 얼굴이 많이 알려진 최희숙.
그녀가 제 딸을 데리고 연극 <주변인>을 관람하러 온 것.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쏠리자 유신애가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괜찮아, 신애야."
최희숙이 유신애를 토닥여주며 말했다.
유진이 재오에게 구해주었던 연극 티켓.
재오가 아시아 투어로 불참하며, 그게 최희숙과 유신애에게 돌아간 것이다.
티켓팅에 시도했다가 처참히 망한 유신애로선 기쁜 일이지만.
사람이 많은 곳에 오는 건 언제나 거북한 일이었다.
평소라면 소심한 유신애로선 집에 돌아가자고 졸랐을 것.
"······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유신애로서도 이미 각오하고 온 일.
바로 유진의 연기를 눈앞에서 직접 보기 위해서다.
“그래. 연극 보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그런 제 딸의 변화를 최희숙은 미안하면서도 흐뭇하게 지켜볼 뿐.
[박유진의 스윗 : 곧 연극 <주변인> 시작합니다!
엄청 떨려요 ㅠㅠ 하지만 실수 안 하고 잘 해내겠습니다!
봐주러 오신 관객분들 모두 사랑해요 >_<
#서울연극제 #주변인 #전석매진 #감동]
부디 잘 해내기를.
그렇게 잠시 후.
모든 관객의 입장이 마무리되고,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안녕하세요. 민주 역을 맡은 배우 박유진입니다.]
객석에 자리하니 유진이 녹음한 안내멘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늘 서울연극제 참가작, <주변인>을 보러 와주신 관객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원활한 공연 관람을 위해 휴대전화의 전원은 모두 꺼주시길 바랍니다. 약속이에요!]
이에 유진의 팬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연극이 시작한다는 것이 실감 되기 시작하는 모양.
그건 유신애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좋아하는 로맨스물이 아니야. 하지만.’
유진이 출연하는 연극.
그건 봐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곧 막이 올라갔다.
연극 초반.
무대 위에서 평범한 주인공 정호의 일상을 보여준다.
“그렇다니까? 이번에 기윤이 형 또 여친이랑 깨졌잖아! 내가 들어보니까 그 형 양다리였다는데? 그 형 완전 안 그렇게 생겨서는.”
겉으로 보기엔 말이 많고 쾌활한 정호.
남의 가십에 대해서 쉽게 떠드는 모습이 부각된다.
“적이 형이······죽었다고요? 수란 누나가 사라진지 얼마나 됐다고······.”
그러나.
점차 그들이 하나둘 사라지거나, 사고에 휘말려 죽게 되고.
그 진상을 추적하기 시작하는 정호.
동시에 아직 살아남은 주변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자신의 주변인물이 다시 피해자가 될 수 있으면서, 동시에 가장 의심이 가는 용의자들이니까.
그리고 그들 중엔.
“······민주에요. 민아 누나 동생.”
아직 어린 소년도 있었다.
곧 무대 위로 유진.
아니, 민주가 등장했다.
민주의 대사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극이 진행되어가며 보여주는 표정 연기와 행동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계속 정호의 주변을 돌며 노려보거나, 눈을 부라리는 등.
‘민주라는 애는 주인공을 엄청 싫어하는구나.’
유신애가 보기에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민주가 정호에 대한 어마어마한 증오심이 있다는 것.
극의 후반부.
모든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고.
점차 연극이 클라이맥스로 향해갈 때.
“저, 적이 형을 죽인 것도, 수란 누나를 사, 사, 사라지게 한 것도! 모두 제가 한 짓이라고요.”
갑작스러운 어린 민주의 폭로.
그러자 객석이 일순 술렁였다.
“형이. 우리 가족을 망가뜨렸잖아요. 형이 한 거짓말. 그것 때문에 우리 가족은 다 망가졌어. 다 형 때문에!”
민주가 내뿜는 혼란스러움, 치기 어린 말과 행동들.
그러나 곧 등장한 경찰에 의해 민주의 자백 아닌 자백은 속속들이 반박당하고.
“아냐. 아냐, 내가 범인이라고······.”
결국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는 민주.
그러자 큰 혼란에 빠진 정호가 민주에게로 다가갔다.
“그럼 대체 누군데. 누가 범인인 건데. 말 좀 해봐!”
정호가 민주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물었다.
그러자.
“푸흐, 푸하하. 푸하하하하하!”
갑자기 광소를 터뜨리는 민주.
무대 위의 정호도, 객석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가 그 웃음소리에 압도당했다.
“하하, 흐하······아직도 그런 얘기를 하는 거야? 어? 나도 몰라. 근데 이제 그게 뭐가 중요해.”
웃느라 힘이 빠진 민주의 목소리.
곧 민주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곧 소문이 날 텐데. 누가 범인인지.”
그 일갈과 함께 무대가 암전되었다.
무대에서 펼쳐진 혼란이 객석에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건 엄마의 손을 꽉 잡은 유신애에게도 마찬가지.
숨을 쉬는 것마저 잊어버릴 만큼의 몰입감이었다.
‘이건 대체······뭐지?’
*
“정말 멋진 공연이었습니다.”
연극 <주변인>의 첫 공연이 끝난 직후.
대학로 찜닭집에 자리잡은 위니필름 진승호와 일본인 감독 아이자와.
술을 곁들이지 않은 자리임에도.
아이자와는 크게 흥분한 모습이었다.
“뜻을 모르겠는 한국어도 더러 있었지만, 그래도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었습니다.”
일본 영화감독인 그가 한국에서 열린 서울연극제를 관람한 이유.
신작 준비를 위해 여러 영감을 받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박유진의 참여 소식이 가장 큰 지분을 차지했다.
“저도 아이자와 감독님 덕분에 좋은 경험했습니다.”
진승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아이자와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표를 얻어주신 것은 다 대표님 덕입니다.”
“아닙니다. 감독님이 말씀 안 해주셨다면, 전 연극을 볼 생각조차 못했겠죠.”
다양한 독립영화를 배급하는 진승호다.
독립영화에 출연하는 연극배우들도 많다보니 그쪽 인맥은 두텁다.
“<리플레이>를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진무 배우의 대타가 그 10살의 소년이라는 게 너무 흥미롭더군요. <리플레이> 때는 박유진이 하진무의 아역이었는데, 이젠 대타까지 한다니!”
열성적으로 <주변인>의 후기를 늘어놓는 아이자와.
“당연히 박유진이 맡은 민주, 그가 범인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가 스스로 범인이라 밝힐 때 객석에 일던 동요!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겁니다.”
“맞습니다. 이번 연극은 객석반응도 색다른 즐거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죠. 바로 민주의 논리가 반박당하며 범인의 정체는 오리무중이 되었습니다. 그 직후 무대가 암전되고, 주인공에게만 조명이 비춰지죠. 이후 주인공의 주변인들이 어둠 속에서 주인공을 둘러싸고 다시 소문을 생성하는 장면! 정말 상징적이고 예술적이었습니다.”
연극 <주변인>이 정말 감명깊었는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아이자와.
"이 연극, 분명 일본에서도 먹힐 것 같습니다. 영화로 만들어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추리와 미스테리를 사랑하는 일본 아닌가.
벌써 아이자와의 머릿속에선 연극 <주변인>을 영화화하면 어떻게 연출할지.
그에 대한 아이디어가 마구 샘솟는 중이었다.
“전해듣기로는, 말씀하신 부분들은 모두 박유진 배우의 아이디어라고 합니다.”
물을 한 잔 마신 뒤, 나지막이 말하는 진승호.
“예?”
“번개로 열린 오디션에 지원해, 자신만의 캐릭터 해석을 내놓았다고요. 그것도 개막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죠.”
이후 진승호는 연극 <주변인>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짤막하게 설명했다.
그 얘기를 눈을 빛내며 듣던 아이자와.
공교롭게도 아이자와가 흥미를 느꼈던 부분들이 대부분 유진의 아이디어로 탄생했다고 한다.
“그렇군요.”
아이자와의 얼굴에 흥분이 번져갔다.
마침내 자신이 찾던 배우를 발견했으니.
바로 경직된 업계에 변화를 일으켜줄, 신선한 인물 말이다.
“그런데 아이자와 감독님. 박유진 배우를 탐내고 계시는 거라면, 서두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진승호는 대답하기 전 찜닭을 한 점 먹었다.
곧 그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으음, 역시 이 집은 참 맛있군요. 아무튼. 제가 알기론 이미 일본에서도 박유진을 탐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반면 아이자와는 찜닭에 아직 손도 대지 못한 상태.
곧 아이자와가 눈동자를 크게 뜨며 물었다.
"일본에서 말입니까?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냥 관심이 많은 수준이었다고······."
"정식으로 일본에 수입된 드라마 <호구>가 큰 인기를 끈데다, 아이돌 빅터 뮤비까지. 거기에 아침바람 광고가 또 인기를 끈 모양입니다. 성아오츠카 본사가 일본에 있지 않습니까."
일본에서도 중년 여성층을 중심으로 유진의 인기가 심상치 않은 상황.
해외 이용자도 접근성이 좋은 넙튜브에 일상영상, 웹드라마를 업로드하는 것도 영향이 컸다.
"사업가로서 하나 조언하자면, 그 배우는 최대한 빨리 잡는 게 이득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점차 제 몸값을 배로 불려나갈 테니까요.”
진승호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
이틀간의 서울연극제에서 <주변인> 민주를 맡은 유진.
이틀차 공연도 무사히 마치고, 뒷풀이까지 신나게 즐겼다.
“진짜 재밌었다.”
유진은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커튼콜의 순간을 떠올렸다.
극이 끝나고 암전됐던 무대.
그 위로 배우들이 올라와 서로 손을 잡고 인사를 건네던 순간을.
빈 좌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객석.
거기다 모두 기립해 박수를 보내주고 있었다.
전석매진, 전석기립.
150석 소극장에서 벌어진 작은 기적이었다.
'이래서 무대 연기가 마약이라고 하는구나.‘
제게 쏟아지는 박수소리와 환호.
그를 만끽하는 커튼콜 시간은 정말 짜릿한 순간이었다.
무대에서 하는 연기는 즉각적인 반응이 온다.
마치 실시간으로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특히 소극장이기 때문에.
무대에 서면 관객의 얼굴을 모두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연기에 감탄하고.
이입하고.
넋을 놓는 사람들을.
’그 현장감은 잊을 수 없을 거 같아.‘
덕분에 유진 역시 흠뻑 빠져 연기할 수 있었다.
회귀 전에도 연극무대를 경험한 적은 있으나.
이 정도로 임팩트 있는 역할이 아닌, 단역 위주였으니까.
[아역배우 박유진의 색다른 변신! 그의 행보는 아역배우의 틀을 깨고 있다]
[배우 박유진, 성공적 연극 무대 데뷔! 대학로마저 접수하나?]
[스타일리시하면서도 상징적이다······연극 <주변인>이 보여준 가능성]
<주변인> 공연 이후 쏟아진 기사였다.
유진은 제 연기가 인정받은 것도 기뻤으나.
더 기쁜 것은, 결말이 달라진 <주변인>이란 연극 자체가 호평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원래 <주변인>하고는 여러모로 달라졌으니까.‘
새로 태어난 <주변인> 역시.
추후 20주년 공연까지 이어질 수 있는 동력을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영광스런 초연 배우이자, 민주라는 역할의 스테레오 타입은 내가 된 거고.’
회귀 전, 민주 역할 오디션에서 떨어졌던 유진.
그런 그가 이뤄낸 의미있는 성과였다.
삑삑삑삑-
그때.
도어록이 풀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곧장 소파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
"아빠! 어서 와요.”
“우리 유진이!”
얼싸안는 두 부자.
요즘 웹드라마 일로 바쁜 박태종이었다.
그러나 배달일을 할 때보다 훨씬 표정이 좋았다.
그야말로 적성에 맞는 일을 찾은 얼굴.
“아빠가 사무실에 갔다가 선물을 받아왔지!”
그런데 오늘따라 박태종의 얼굴이 밝아보였다.
“선물이요?”
박태종은 곧장 가방에서 종이뭉치를 꺼냈다.
유진은 그게 대본이라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
대본을 받아 든 유진은 곧장 제목부터 확인했다.
“이 대본은.”
<환혹>이라는 제목의 대본.
그 제목이 유진에게 꽤 익숙했다.
무척 유명한 작품이었으니까.
“요즘 서점에서 난리난 일본 소설! 그 소설이 영화화되는데, 우리 유진이한테까지 연락이 온 거야!”
박태종이 감격하며 말했다.
일본 작가의 작품으로, 높은 흡인력과 속도감 있는 전개로 호평을 받는 소설이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 1위를 달리는 작품.
바로 그 영화화 대본이 유진에게 넘어온 것.
즉, 일본 진출의 기회였다.
“이제 한국을 넘어서 일본에서까지 우리 아들이 인정받다니······여보! 흑, 흐윽!”
그러나 박태종과는 달리.
유진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기뻐하기보단 오히려 난감한 얼굴.
‘이게 나한테 넘어왔다고?’
그때 울리기 시작하는 휴대폰.
유진은 엉엉 우는 아버지를 토닥여주면서 발신자를 확인했다.
“음? 순철 할아버지?”
뜻밖의 인물이었다.
*
유진을 부른 사람.
그건 다름 아닌 원로배우 이순철이었다.
“연극 성공적으로 마친 걸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떨리진 않았고?”
“엄청 재밌었어요.”
“허허! 하긴. 네가 어디 가서 긴장할 사람은 아니지.”
호탕하게 웃는 이순철.
“너에게도 제안이 들어왔지? 영화 <환혹>에 대해서 말이야.”
그러자 유진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이 업계는 말하는 입보다 듣는 귀가 많은 곳이라서 말이다. 실은 나도 받았다. 그 작품 캐스팅 제안.”
<환혹>에는 재일 한국인 노인과 그 손자가 등장한다.
노인은 이순철에게, 손자는 유진에게 캐스팅 제의가 온 것.
즉, <호구>에 이어 두 사람이 다시 호흡을 맞출 기회다.
“너와 같이 이 작품을 하고 싶구나. 아직 어린 너에게도 모험이 되겠지만, 이제 늙은 내게도 큰 도전이지.”
원로배우로 활동해왔으나, 해외진출 경험은 없는 이순철.
그런 그가 이번 <환혹>을 계기로 일본진출을 타진하겠다는 것.
그걸 유진에게 함께 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유명 소설 원작.
캐스팅 단계에서부터 전폭적인 지원 약속.
거기에 혼자도 아니고, 이순철이라는 훌륭한 배우와 함께 참여한다.
일본 진출을 함에 있어,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을 터.
“죄송해요, 할아버지.”
그러나.
유진은 이순철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저 이 작품 못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