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일본 스케줄을 마치고 대만으로 넘어간 재오.
콘서트를 끝마치고 한창 쉬고 있을 무렵.
유진으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재오 형
형 일본어 잘해요?]
재오는 곧장 답신을 보냈다.
[완전 잘하지
프리토킹도 가능함]
몇 년 전부터 아이돌 빅터에게 일본은 중요 시장이었다.
빅터 멤버 중 일본인도 있고, 일본어 앨범도 발매한 적이 있다.
일본어 구사는 모든 멤버에게 필수요소.
때문에 재오도 꽤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다.
[오오
그럼 일본어로도 연기할 수 있어요?]
일본어 연기라니.
‘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거지?’
문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재오.
‘아. 요즘 일본 진출 얘기 때문인가? 하지만 <환혹>을 까버렸잖아?’
유진이 그런 기대작을 거절한 이유가 궁금하긴 하지만.
재오는 굳이 나서서 캐물을 생각이 없었다.
‘혹시, <환혹> 캐스팅을 거절한 이유가 외국어 때문인가? 외국어로 연기하는 건 또 어려운 일일 테니까.’
여태 어떤 장르라도 훌륭한 연기력을 보여준 유진이지만.
언어도, 문화도 다른 외국은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게다가 아무리 잘나간다 해도, 유진도 결국 10살짜리 어린아이 아닌가?
'나도 처음 해외진출을 한다고 했을 땐 많이 불안했었지.'
혹시나 무언가 실수를 해서 웃음거리가 되진 않을까.
외국인들이 자신을 좋아해줄까.
여러모로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시아 투어까지 다니고 있지 않은가.
결국 직접 부딪쳐보는 것이 최선이다.
[노력하면 충분히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배우기 쉽거든 일본어는]
그리 답장을 보낸 재오.
유진이 원한다면, 시간 날 때 틈틈이 일본어 공부를 도와줄 생각도 있었다.
[오 잘됐당 ㅎㅎ
맞다 형
형이 연습하기 좋을 것 같은 대본을 구했는데
한 번 볼래요?]
일본어를 잘하는지 묻다가.
뜬금없이 대본을 보내주겠다니.
갑작스런 화제 전환에 얼떨떨해지긴 했으나.
재오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연기 얘기라면 언제, 어디서 해도 좋았으니.
[나야 좋지
대본 ㄱㄱ]
유진은 빠르게 대본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그 대본이 양이 꽤 많았다.
‘오늘 다 읽기는 힘들겠는데.’
콘서트를 끝마치고 체력이 방전된 재오였다.
그래서 일단 초반부만 살펴보려 했는데.
‘뭐야. 엄청 재미있잖아?’
저도 모르게 대본에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주인공의 주변인들이 실종되는 미스테리함.
누가 범인인지 예측할 수 없는 긴장감.
거기에 마지막 순간, 범인이라 확신했던 인물은 사실 범인이 아니었고.
결국 알 수 없는 소문으로 남는다는 강렬한 엔딩까지.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대본을 정독해버린 재오.
곧장 유진에게 문자로 물어보았다.
[유진아
이 작품 이름이 뭐야?]
대본을 보는 것만으로도 흡인력이 엄청나다.
만약 작품이 만들어지는 중이라면 꼭 참여하고 싶을 정도다.
[주변인 대본이에요
주인공 오디션 볼 때 썼던거래요]
“아하.”
아시아 투어에 참여하느라 연극 <주변인>을 보지 못한 재오 아니었던가.
그 내용이 매우 궁금했었는데.
대본을 보는 것만으로 <주변인>은 매우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내가 주인공이라면 어떻게 연기했을까.’
그리고 유진이 민주라는 인물을 어떻게 연기했을까.
그 모든 것들이 흥미롭고 흥분되는 상상이지만.
[대본 진짜 재밌다
연극 못 본 게 아쉬울 정도네]
재오가 보낸 답장처럼 뒤늦게 아쉬운 마음이 컸다.
자신이 참여하지 못할 것을 아니까.
연극 <주변인>은 이미 끝나지 않았는가.
[재오 형
실은 이건 비밀인데
이번에 일본에서 주변인 영화화 하거든요
저도 참여해요]
“잠깐, 뭐라고?”
유진의 문자를 보고.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혼잣말을 내뱉은 재오.
[형
저랑 작품 하나 같이 하실래요?]
*
인천공항 국제선.
<주변인>의 영화화 관련 계약을 끝맺고.
본격적 준비를 위해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가시는군요.”
"글쎄요. 이젠 여기가 제 고국으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일본어는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하하. 하긴, 꽤 오래 머무르시긴 했죠."
농담을 주고받는 두 사람.
“그런데 설마 감독님의 귀국길에, 박유진 배우가 그런 선물을 줄 거라곤 생각 못했습니다.”
유진이 오디션 기회를 달라고 한 배우.
그게 다름 아닌 빅터의 재오였던 것.
그건 진승호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제겐 선물이 아니라 수수께끼처럼 들렸습니다.”
아이자와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수수께끼?”
“저도 빅터의 재오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큰 사랑을 받는 아이돌이죠. 솔직히 재오가 참여만 해준다면, 당장 주인공으로 캐스팅하려는 곳이 넘쳐나겠지요.”
재오급의 인지도라면 어느 작품에라도 꽂을 수 있다.
“그러나 박유진 배우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오디션 기회를 줬으면 한다고.”
그런데 유진의 말대로라면.
재오가 기꺼이 이 <주변인>의 오디션을 볼 거란 소리다.
<주변인>은 엄청 유명한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것도 아니고.
<환혹>처럼 원작이 베스트셀러도 아닌데 말이다.
“재오 측과 교감이 된 이야기일까요?”
“영민한 배우입니다. 설마 아무 생각도 없이 그런 이야기를 했을 리가 없습니다.”
즉, 아이자와로서는 너무도 과분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아이자와 감독께선 빅터의 ‘첫사랑’ 뮤비를 보셨습니까?”
“네. 박유진 배우가 나온다고 해서 봤습니다. 그러나 <주변인>의 주인공을 맡기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이자와의 생각은 확고했다.
"재오는 광고와 뮤직비디오를 제외하면 연기를 보여준 적이 없지요. 만약 오디션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전 떨어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재오를 떨어뜨린다니.
누군가는 미친 짓이라고 할 것이다.
황금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격이니까.
그러나 애초에 흥행과 화제성에 매달렸다면.
아이자와 감독이 일본 영화계에서 비주류 취급을 당하지도 않았을 터다.
“아이자와 감독님이라면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사업가이긴 하지만.
진승호 역시 엄연히 독립영화 배급에 평생을 쏟아온 인물.
그런 아이자와의 생각과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박유진 배우도 재오에게 오디션 기회를 달라고 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감독님께서 직접 보고 판단하라고.”
“박유진 배우가 그 모든 걸 고려했단 말씀이십니까?”
“감독님의 팬이라고 했으니, 아마 감독님의 성향이나 가치관도 알고 있을지 모릅니다.”
진승호의 말에 아이자와는 정말 그럴 것 같다며 눈을 빛냈다.
그냥 꽂아달라고 부탁할 법도 한데 말이다.
"아무튼 재오는 박유진 배우의 추천이니 믿어봄직 하죠. 아무 생각 없이 친분으로 추천했을 것 같진 않습니다.“
진승호의 말에 아이자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이제 막 판권계약이 끝났을 뿐인데, 벌써 두근거리는군요!”
곧 시간이 다가왔다.
아이자와와 진승호, 두 사람은 무겁게 악수를 나누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곧 다시 만날 텐데요. 그리고, 아이자와 감독님께서 좋은 영화를 만들어주시면 그만입니다."
그렇게 아이자와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고.
그걸 빤히 바라보고 있는 진승호.
‘재밌겠네.’
자신만의 확고한 색을 가진 아이자와 감독.
거기에 재오가 예상보다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고.
유진과 재오라는 든든한 원투펀치가 생긴다면.
'<리플레이>를 뛰어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진승호는 우려보다 기대감이 앞서기 시작했다.
*
영화 <데드맨>의 촬영장.
모두가 숨을 죽인 채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
곧 만신창이인 윤재하가 터덜터덜 걸어온다.
옷은 곳곳이 찢기고 더러워졌다.
셔츠는 핏빛으로 흠뻑 젖은 상태.
조직 내부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다시금 와해되었고.
믿을만한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윤재하를 배신했다.
조직원들은 물론이고 경찰도 그를 쫓는 상황.
권력의 정점에 있던 윤재하가.
이젠 도망자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윽, 으윽."
다친 몸을 이끌고 힘겹게 집안으로 들어온 윤재하.
그러나 그를 반겨줄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아니.
"왔구나?"
한 명 있다.
바로 아들의 모습을 한 영서다.
"아, 아아."
우는 것인지, 기뻐하는 것인지.
이상한 신음을 내며 고개를 젓는 윤재하.
윤재하는 거의 기다시피하며 영서에게 다가갔다.
그런 윤재하를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내려다보고 있는 영서.
그 표정은 다정해보이기도 하고, 비정해보이기도 한다.
마침내 영서에게 도달한 윤재하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무너지듯 영서에게 기댔다.
"이젠 편히 쉬어."
그런 윤재하를 안아주며 다독이는 영서.
"잘 자. 좋은 꿈 꿔."
마치 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영서의 목소리.
윤재하는 영서의 품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빈아······."
그렇게 중얼거리는 윤재하.
한 시대를 호령했고.
전국 모든 조직을 흡수해 정점에 올랐던 그였으나.
결국 그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결말.
마지막엔 아들을 지키지 못한 한 명의 못난 아버지로.
곧 윤재하의 감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텅 빈 집 안.
윤재하는 그렇게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아들이 좋아하던 곰 인형을 껴안고서.
"······."
그의 초라한 죽음을 응시하는 카메라.
그렇게 숨 막히는 시간이 지나가고.
“오케이. 컷!”
권성택의 사인이 떨어지자.
“수고하셨습니다!!”
스태프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수개월 간 이어진 촬영.
그 끝을 알리는 사인이었으니까.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90도로 꾸벅 고개를 숙이는 유진.
"대박이었어, 유진아."
"진짜!"
그러자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였다.
스태프, 배우할 것 없이 유진에게 몰려들었으니.
10살짜리가 권성택 감독 작품에서 중책을 맡았고.
유일하게 1인 2역을 소화했다.
그 모든 것을 견뎌내고, 훌륭히 소화한 유진이 여러모로 귀엽고 대견할 터였다.
“······.”
그건 방금까지 호흡을 맞춘 한권주도 마찬가지.
다만 한권주는 유진을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남몰래 스윗터 계정까지 만든 한권주다.
유일하게 팔로우한 계정이 바로 유진의 것이었다.
그만큼 한권주는 유진에게 큰 애정을 품게 되었다.
전에는 유진을 통해 아들인 혜성을 떠올렸다면.
이젠 이따금 혜성을 보며 유진이 떠오를 정도였다.
그 소중한 아들과 다시 만나게 해준 사람.
그게 바로 유진이었으니.
‘게다가 연기력도 대단한 아이야.’
이번 <데드맨>에 참여하며.
한권주는 벽을 뛰어넘은 느낌이었다.
인물과의 완벽한 감정적 동화.
깊은 몰입감과 거기서 전해지는 카타르시스.
다른 배우들과 호흡도 좋았지만.
유진의 영서와 단독으로 붙는 장면에선 유독 몰입도가 높아졌다.
‘처음이네. 작품이 끝나는 게 아쉽다니.’
촬영 전, 모두에게 사랑받는 유진을 보는 것도.
촬영하며 유진과 호흡을 맞추는 것도.
모두 처음 느껴보는 즐거움이었다.
한 명의 아버지로서도, 배우로서도 더 나아지는 기분.
“권주 삼촌!”
한권주가 상념에 빠져있을 무렵.
유진이 먼저 한권주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오늘도 너무 재미있었어요. 삼촌이랑 같이 연기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요! 오늘 마지막 씬 연기 최고!”
친화력이 좋은 건지.
아니면 눈치가 좋은 건지.
단합대회부터 지금까지, 한권주에게 먼저 다가온 것은 유진 쪽이었다.
"그래. 너도 잘 했어.”
“헤헤. 감사합니다.”
잠시 고민하던 한권주.
곧 유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휴대폰 줘봐.”
“휴대폰이요?”
고개를 끄덕이는 한권주.
유진이 휴대폰을 내밀자, 곧 무언가를 입력했다.
그리곤 곧장 다시 돌려주었다.
“어? 이거.”
휴대폰을 확인한 유진이 한권주를 올려다보았다.
“내 전화번호야.”
아직까지 한권주의 연락처를 받지 못한 유진이다.
영화가 끝나고서야 한권주가 먼저 전화번호를 준 것.
“도움이 필요하거나, 무슨 일이 있을 때 연락해. 반드시 받을 테니까.”
아픈 아들의 연락을 받지 못해.
그것을 평생 죄책감으로 삼았던 한권주.
그가 하는 말이었기에, 유진은 그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넵! 꼭 연락할게요, 권주 삼촌!”
해맑게 웃는 유진.
한권주는 멈칫거리다 곧 유진 쪽으로 엉거주춤 손을 뻗었다.
머리를 쓰다듬고 싶지만, 차마 엄두가 나질 않았으니.
그런데.
“와. 삼촌 손 엄청 크네요?”
유진이 먼저 한권주의 손을 붙잡고는 조물댔다.
아무래도 한권주가 악수하려 내민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고맙다.”
“네? 뭐라고요?”
“아니. 아무것도.”
그러는 사이.
“내가 대신 말해줄게. 이 로봇같은 녀석이 너한테 고맙댄다, 유진아.”
고석태가 달려와 끼어들었다.
“시끄러. 난 감독님 좀 뵈러간다.”
민망한지 황급히 자리를 뜨는 한권주.
그 뒷모습을 고석태가 킬킬대며 바라보았다.
“저 녀석이 누구한테 고맙다고 하는 건 처음보네.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해. 친구인 나도 못 들어본 소리거든.”
“그럼 석태 삼촌한테만 자랑해야겠다. 저 부럽죠?”
“이 녀석이? 그래. 부럽다! 것보다 유진아. 지금 스윗터 들어가봐.”
“스윗터? 왜요?”
“네 팬들이 아주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더라고.”
팬들이?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차동석에게서 휴대폰을 받아 확인하는 유진.
[스윗터 화제의 검색어
1. #우리의_천사_박유진_데뷔2주년
2. #박유진_데뷔2주년_기부릴레이]
“기부 릴레이?”
유진의 눈이 동그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