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85화
"다행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유진.
"네? 방금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원작을 좋아한다고 했으니, 제가 생각했던 수진과는 이미지가 다른 모양이다.
“하하. 원작 팬분들도 수진 역엔 희망하는 캐스팅이 모두 다르더군요. 워낙 인기가 많아서 그런가 봅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넘기는 김경식.
그 이후로도 포르테와 유진 측은 한참이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 밑밥은 다 깐 것 같고.’
김경식은 슬슬 얘기를 꺼낼 타이밍을 찾았다.
“자, 그럼 서로간의 공감대도 어느 정도 형성된 것 같고. 이제 슬슬 구체적인 계약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합니다만.”
그런데.
“아. 그게. 오늘 아버지가 안 오셔서요. 그쵸, 사장님?”
유진이 불쑥 그런 대답을 내놓았다.
“어? 그렇지.”
미성년자의 계약을 위해선 부모님의 동의가 필수다.
그러나 오늘 박유진은 차동석과 단둘이 미팅에 참석했다.
‘뭐야. 애초에 계약서에 첫만남부터 도장 찍을 생각은 없었다는 건가?’
최대한 빨리 박유진의 출연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기사를 뿌릴 생각이었거늘.
당연히 스튜디오 포르테 측으로선 시간이 질질 끌리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럼, 다음에 만날 땐 정식으로 계약하는 걸로 알고 있어도 될까요?”
그래서 구두로라도 확답을 받아내려 했으나.
“으음, 죄송해요. 조금만 더 고민해볼게요.”
유진은 그리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PD님. 캐디님!”
예의를 갖춰 꾸벅 인사한 유진이지만.
곧 차동석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뭐지? 분위기 완전 좋았던 거 아니야?”
닭 쫓던 개가 된 심정.
김경식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오늘 한 말들을 복기해보았다.
“내가 뭐 잘못 말했나? 갑자기 왜 저래?”
“그나마 하나 꼽아보자면, 단서는 하나 뿐이죠. 서새아.”
“서새아?”
소은서 캐디가 머리 끝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네. 아까 서새아 아직 도장 안 찍었다니까 다행이다? 뭐 그런 식으로 얘기했잖아요. 그 이후로 갑자기 태도가 좀 변하고. 서새아가 수진으로 박히는 게 싫은 거 아닐까요?”
그 말에 김경식이 손톱을 물어뜯다 소리쳤다.
“아니, 그럼 서새아는 박유진 박히면 도장 찍는다고 하고. 박유진은 서새아가 하면 안 하겠다는 거야? 이게 뭔 상황인데, 대체?”
*
“괜찮겠어?”
돌아가는 길.
차동석이 유진을 향해 물었다.
“라앺 때문에 <패왕사신기>도 깐 거 아니었어?”
차동석의 말대로였다.
유진은 다른 작품들을 모두 까고 라앺을 기다렸다.
조건만 괜찮으면 곧장 도장을 찍을 생각도 있었고.
하지만 걸리는 사실이 있었다.
‘왜 수진 역에 서새아가?’
본래 자신이 알던 캐스팅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서새아? 좋다.
연기력 좋고, 비주얼도 도화지 같아서 무슨 역이든 잘 어울리고, 팬층도 두텁고.
아마 수진 역도 훌륭히 소화할 터.
‘하지만 오만하지.’
SNS 비공계 계정에서 작품을 욕보이고.
업계 관계자는 물론, 심지어 팬들까지 씹는 만행을 선보였다.
수십 년이 지나서도 ‘SNS로 나락간 최악의 연예인’ 부동의 1위로 꼽힐 정도.
‘회귀 전 라앺에서는 서새아는 수진 역을 맡지 않았어. 그럼 왜 갑자기?’
유진은 그 단서를 김경식의 말에서 찾았다.
서새아가 유진과 같이 하고 싶어한다고 했으니.
‘아무래도 내가 염라 역에 박히는 걸 보고, 서새아 쪽에서도 되는 각이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서새아 급의 배우가 제게 관심을 보이고, 같이 하고 싶어 한다.
본래라면 무척 기쁘고, 어떻게 활용할지 궁리했을 유진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불쾌할 뿐.
팬들도 존중 못하는 망나니와 누가 연기를 하고 싶겠나?
‘수진 역은 원래 주인공에게 돌려줘야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은 제거하고 가는 게 상책이다.
“출연 안 할 건 아니지? 그지?”
“네. 저 라앺 팬이니까요!”
차동석의 물음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진.
“근데, 곧바로 계약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그런 유진을 보며 차동석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호구>, 연극 <주변인> 등.
다소 네임밸류가 떨어지는 작품에 참여할 때도 주저없이 도장을 찍던 유진이다.
그런데 라앺의 팬이라면서, 곧장 계약할 필요는 없다니?
“그래. 알았다.”
하지만 차동석은 유진의 선택을 존중했다.
유진이 가벼운 변덕으로 이럴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라앺을 좋아하는 만큼, 라앺이 더 좋은 작품이 되면 좋겠거든요.”
힌트를 주듯, 유진은 그리 말했다.
‘그리고 좋은 작품이 되려면, 그 사람이 꼭 필요해. 그리고 그 사람에겐 라앺이 꼭 필요하지.’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린 유진.
곧 차동석을 향해 말했다.
“사장님. 권주 삼촌 소속사가 구구액터스, 맞죠?”
*
“불공평하네.”
<데드맨> 관련 영화 잡지 화보 및 인터뷰를 위해 모인 한권주와 나은주.
예전 같았다면 말 한 마디 제대로 나누지 않았을 두 사람이지만.
<데드맨>을 기점으로 어느 정도는 편한 사이가 되었다.
“뭐가?”
“우리는 그렇게 연습을 해서 무대에 올랐는데. 자기 혼자 날먹하고.”
“날먹?”
“그냥 유진이랑 듀엣 부르고 끝났잖아. 스포트라이트도 다 오빠한테 가고.”
팬미팅 종료 이후.
팬들의 후기로 인해 한권주가 게스트였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
연기 활동을 제외하면 얼굴을 잘 비추지 않는 한권주.
그런 그가 아역 배우의 팬미팅에 게스트로 참석해 노래까지 부르다니!
여러모로 놀라운 소식.
“기사까지 떴던데.”
[아역배우 박유진의 첫 팬미팅 성료······게스트 라인업 어마어마! “이거 진짜야?” 네티즌들 감탄!]
[한권주의 박유진 팬미팅 참여 소식에 한권주 팬들, “본인 팬미팅도 여태 한 적이 없는데” 믿을 수 없다는 반응!]
[배우 박유진 팬미팅에 총출동한 나은주, 고석태, 한권주······영화 <데드맨>, 개봉 전부터 훈훈한 케미 과시!]
[“데드맨 촬영장 분위기 최고다” 영화 커뮤니티에 나타났던 <데드맨> 스탭의 글, 재조명 받다!]
“유난들 떠는거지.”
한권주는 그리 넘겼지만.
사실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냉미남 전문 배우 한권주가 아역배우 팬미팅에 참여했다.
이 갭에 매력과 호감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았으니.
“근데 진짜 별일이잖아. 오빠가 그런 자리에까지 오고.”
“너도 마찬가지잖아.”
“내 넙튜브 안 보는 구나? 나 이제 이미지 변신 중이거든.”
그 말대로.
나은주는 최근 넙튜브를 통해 차가우면서도 은근 다정한 이미지를 구축 중이다.
그래서 요즘 팬들 사이에서의 나은주 별명이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다.
현실적이면서도 나름 속 깊은 이야기를 해주는 덕에.
구독자들을 상대로 한 상담 코너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나.
“그래서, 사인은 받았어?”
그 말에 흠칫 몸이 굳는 한권주.
“신경 꺼.”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 앞으로 대배우가 될 애의 사인을 미리 받은 건데.”
나은주의 특징이 또 나왔다.
농담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진지한 표정과 톤.
“부끄러운 거 아니야.”
한권주가 신경 쓰는 건 딱 하나 뿐이다.
유진의 사인이 필요한 이유가, 아들의 여친 때문이라는 사실.
그게 밝혀질까 봐서다.
“누님. 회사에서 연락왔슴다. 잠깐 괜찮으심까?”
“그래.”
잠시 자리를 비우는 나은주.
그 사이 한권주는 가방을 뒤져 파일을 꺼냈다.
그 안엔 아들에게 전해줄 유진의 사인이 들어있었다.
아들인 한혜성의 여자친구에게 전하는 사인이었고.
그리고 한 장 더 있었다.
[혜성이에게
너무 멋진 아빠를 둔 혜성아!
아빠랑 평생 행복하게 지내길!
고마워
-유진이가]
아들 한혜성의 여자친구가 아닌.
한혜성에게도 한 장 더 사인해준 유진.
“평생 행복하게.”
그 문구를 쓰다듬으며 한권주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제게 해준 사인도 아닌데 말이다.
“뭐야. 왜 소름 끼치게 웃고 있어?”
물론 나은주 덕에 곧장 웃음이 사라졌지만.
그때 한권주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유진아.”
“유진이야? 용건 끝나면 바꿔줘. 목소리 한 번 듣게.”
나은주가 말했다.
하지만 한권주는 나은주에게 전화를 바꿔주지 못했다.
"뭐? 유유연 연락처?"
뜻밖의 이름을 들었으니.
*
배우 전문 엔터 구구액터스.
사옥 안에 있는 팀장실.
의자에 앉아있는 똑단발의 여자는 배우2팀 팀장 고은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맞은편에 있는 사람은.
“팀장님. 진짜 안 왔어요?”
라앺 수진 역 원작팬들 추천률 3위.
최근 뜨고 있는 라이징 스타, 배우 유유연이었다.
그러나 라이징 스타라는 수식어에 어울리지 않게.
유유연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몇 번을 말하니, 유연아. 안 왔어.”
고은하가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자 유유연은 소파 위에서 무릎을 세웠다.
“진짜, 진짜 라앺은 꼭 하고 싶었는데.”
유유연은 '라앺'의 찐팬.
이미 원작 소설을 초판본에 애장판까지 구입하고 있었고.
당장 스토리나 명대사를 읊으라면 달달 뱉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네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저 그래도 수진 역으로 추천 많이 받았잖아요.”
라앺이 드라마화한다고 했을 때부터 욕심이 났다.
심지어 적지 않은 원작 팬들이 자신을 추천해주고 있었다.
잘만 하면 캐스팅 연락이 오지 않을까?
그 생각으로 차기작도 안 고르고 버티고 있는 유유연이다.
“그래. 꽤 많이 받았지. 강사랑과 서새아보단 덜 하지만.”
그러나 압도적인 지지는 아니었다.
확실히 강사랑과 서새아와 비교하면 밀리는 분위기.
꾸준한 활동을 가졌던 두 사람과는 달리, 유유연은 공백기가 다소 있었으니까.
그래서 더 애가 타고, 절박해졌다.
"근데 아직 수진 역 확정 난 거 아니잖아요. 그쵸? 팀장님.“
그러자 고은하 팀장이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하아, 그래. 소문대로라면 강사랑이 라앺 깐 건 확실해. 스케줄을 도저히 못 비운다던데."
“그럼 저한테도 기회가 올 수 있는 거잖아요.”
"이미 제작사 쪽에선 강사랑 다음에 서새아로 넘어갔대.”
“서새아 언니가 라앺을 받을 리 없어요. 판타지 로맨스, 이런 거 오글거려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번엔 욕심 좀 내는 것 같아. 들어온 거 안 까고 계속 협상 중이란 소리가 들렸으니까.”
고은하 팀장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유유연의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탔다.
희망고문을 당하는 느낌.
“유연아. 알잖아. 배우는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택받는 사람이라는 거.”
고은하가 일어서서 유유연의 어깨를 붙잡았다.
가볍게 격려하듯 힘을 주면서.
“저도 알아요. 저도 아는데······포기 못하겠어요.”
깊은 한숨을 내뱉는 유유연.
“팀장님도 알잖아요. 저 진짜 힘들 때 라앺 그거 보고 버텼어요.”
2년 전.
연기력과 외모 지적 등 각종 악플로 인해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던 유유연.
잠시 공백기를 가졌던 것도 그 이유 때문에서다.
드라마를 보는 것도, 영화를 보는 것도.
누군가의 연기를 보는 것조차 두렵고 무섭게만 느껴지던 시기.
다시 연기를 한다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저 진짜 라앺 아니었으면 연기도 다시 못했을 거 같아요.”
그러던 중.
당시 인터넷에서 한창 난리가 난 라앺을 접했다.
드라마나 영화는 아니니까 훨씬 편하게 접할 수 있었다.
매력적인 캐릭터, 위트있는 장면과 대사, 흡인력 있는 이야기들.
소설 속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졌고.
유유연이라는 배우에게 다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이 캐릭터를 연기한다면, 어떻게 할까?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다시금 연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꿈이 문턱까지 와있는 느낌인데.”
자신에게 큰 위로가 되어준 작품이 드라마화된다.
유유연은 그 작품에 참여해.
자신이 받은 위로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었다.
심지어 적지않은 팬들까지 자신을 원하고 있지 않은가.
“조금만 더······기다려보면 안될까요.”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고은하 역시 유유연을 나무랄 수 없었다.
라앺이 유유연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
"이건 분명히 알아둬. 그거 기다리면, 컨택 들어온 <패왕사신기>는 그냥 놓치는 거야.”
그러나 팀장으로서 현실적인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유유연은 최근 라이징 스타로 떠오르고 있는 상황이라 주가가 높았다.
그런 상황에서 무려 주인경이 원톱 주인공인 <패왕사신기>에서 캐스팅 제의가 온 것.
가능성이 낮은 라앺 쪽 컨택을 기다리느라 <패왕사신기>를 놓치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네. 알고 있어요. 생각 좀······해볼게요.”
유유연은 힘없이 팀장실을 빠져나왔다.
그냥 제작사에 무작정 찾아가 오디션이라도 보게 해달라 할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갑자기 걸려온 전화.
그런데 액정에 뜬 번호가 상당히 의외였다.
바로 같은 소속사, 한권주였던 것.
“안녕하세요, 한권주 선배님.”
유유연은 겨우 정신을 붙잡고서 전화를 받았다.
"네. 네. 아, 네? 박유진이요?"
그런데.
또 뜻밖의 이름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