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씹어먹는 천재배우님-86화 (86/237)

86화

“오늘 인터뷰 감사했습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노트북을 든 상대방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배우.

바로 서새아였다.

눈가 밑에 눈물점이 있는 것이 매력 포인트로 꼽힌다.

그러나 상대방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곧 표정이 싸늘하게 바뀌었다.

곧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에 향하는 서새아.

“끝났어?”

차에 올라타자마자 보조석에서 그녀를 반기는 사람.

서새아의 치프매니저, 포마드 머리를 한 팀장 오석훈이었다.

“어.”

서새아는 대충 대답하곤 곧장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스윗터에 접속해 열심히 자판을 눌러댔다.

[SSA의 비밀스윗 : 오늘 인터뷰 진짜 그지같네

질문 수준 개낮아 ㅋㅋ 진짜 ㅈㄹ났네

어휴 시간아까워]

계정명인 SSA.

바로 서새아가 만든 스윗터 뒷계정이었다.

그녀가 이런 계정을 만든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악플 때문.

처음에는 울분을 써내려가는 일기장처럼 썼다.

그러나 갈수록 그 의도가 변질되어갔다.

SNS는 분명 비밀 일기장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 비밀 일기장을 누군가에게 공유할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SH14의 답글 : ㅋㅋㅋ 요즘 인터뷰하는 것들 다 그럼

근데 팬싸가 더함ㅋㅋ

팬이란 것들이 맨날 똑같은 질문 똑같은 말만 하고

지겨워 죽겠어]

[SSA의 답글 : ㅋㅋㅋㅋ동감]

자신과 같이 뒷계정을 가지고 있는 연예인이 몇몇 있었고.

스윗터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비밀리에 뒷담화를 할 수 있게 된 것.

나의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

그리고 남의 비밀을 엿볼 수 있다는 것.

매우 중독성이 강했다.

유유연이 악플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 공백기를 가졌다면.

서새아는 그 울분을 뒷계정을 파, 남을 조롱하며 버텨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라이프? 뭐시기 거긴 어떻게 됐어?”

“아직이야.”

“아무런 썰도 없다고?”

“단 역할은? 얘기 없어? 한권주가 들어간다는 얘기가 있던데.”

한권주보다 나이가 적고 일면식도 없지만.

서새아는 스스럼없이 한권주를 이름으로 불렀다.

"아니. <데드맨> 개봉 전까진 푹 쉬기로 했대. 그 결정 안 바꾼다는데.“

“그래? 그럼 누가 들어오려나. 그럼 하이드인가, 그 캐릭터는?”

“하이드는 소문조차 안 돌고 있고. 아마 너 확정되면 주르륵 도장 찍을 걸? 원래 한 명이 도장 찍어야 나머지 배역들도 그거 따라 도장 찍곤 하니까.”

한 명이 도장을 찍으면, 그걸 믿고 연달아 출연을 확정짓곤 한다.

일종의 도미노 현상이라고 해야할까.

그러나 그 도미노의 첫 번째 순서는 서새아가 아니었다.

“그 전에 박유진 쪽이 먼저 도장을 찍어야지. 대체 왜 소식이 없어?”

“듣기로는 좀 사리는 모양이라던데.”

“사려? 왜?”

“미팅을 가지긴 가진 모양이던데, 딱히 도는 얘기가 없어.”

“뭐, 보나 마나 돈 문제겠지. 개런티 더 뜯어내려는 수작 아니겠어?”

서새아는 태연히 손거울로 얼굴을 확인하며 말했다.

"여론만 보면 박유진 아니면 대체제도 없고, 그 원작 팬들이 들고 일어날 기세던데. 그런 상황에서 최대한 뜯어내는 게 당연하지. 근데 거기도 독하네. 내가 박유진 출연하면 도장 찍겠다고 흘렸잖아? 그걸 제작사가 박유진에게 말 안 했을 리가 없거든.”

자신이 여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흘리면.

박유진 측에서 덥석 물고 쉽게 도장을 찍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도 박유진 쪽에서 간을 보고 있다면 개런티 문제밖에 없을 터.

그게 서새아의 판단이었다.

“뭐, 우리야 고맙지. 덩달아 우리도 좀 뜯어내기 수월하니까.”

박유진이 저렇게 질질 끌어주면 서새아 쪽은 고마울 뿐이다.

그를 빌미로 서새아도 덩달아 협상에서 재미를 볼 수 있으니까.

“근데 박유진이 빠져도 라앺은 그냥 하는 게 어때? 솔직히 화제성 하나는 끝내줄 거야.”

오석훈의 말에 서새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자 눈가 밑의 눈물점이 씰룩대며 움직였다.

“난 이런 오글거리는 거 싫다니까. 박유진 하나 보고 가는 거지. 걔 빠지면 의미 없어.”

“무슨 뜻이야?”

"재오 봐봐. 걔랑 엮여가지고 좋은 이미지는 혼자 다 빨아먹었지. 아니, 재오뿐인가? 나은주도 제대로 이미지 변신했고. 심지어 한권주까지, 팬미팅 한 번 참석했다고 제대로 득봤잖아."

어린아이와 친하고, 잘해준다.

이것만큼 간단하게 대중의 호감을 사는 방법이 또 있을까.

“게다가 걔 작품 들어간 것 중 여태 실패한 게 없어. 단 하나도.”

데뷔작인 케이블 드라마조차 놀라운 시청률을 찍었고.

이후 독립영화, 뮤지컬 애니메이션, 공모전 당선작 미니시리즈 등.

다소 마이너한 성향의 작품들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

그런 박유진이 라앺 같은 메이저에 출연한다면?

"게다가 올해 안으로 <데드맨>도 개봉할 거고. 제대로 꿀빨 수 있는 기회인데."

즉, 서새아에게 라앺은 매우 전략적 참여였다.

라앺이라는 판 위에서.

유진의 이미지와 화제성을 쪽쪽 빨아먹겠다는 것.

“그럼 계속 기다리려고? 박유진이 도장 찍을 때까지?”

“아니. 미끼를 던져봐야지.”

그리 말한 뒤 서새아는 다시 스윗터에 접속.

비밀계정을 로그아웃하고, 자신의 공식계정에 로그인했다.

[박유진의 스윗 :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아, 그리고 조만간 넙튜브에 새로운 컨텐츠 올라갈 예정입니당!

많은 사랑 부탁드려요 (*´∇`*)

#날씨짱좋음 #셀카 #넙튜브]

검색하자 보이는 박유진의 스윗.

올라온지 얼마 안 된 것이었다.

서새아는 거기에다 답글을 달기 시작했다.

[서새아의 답글 : 박유진 배우님~ 팬이에요~ ^^

우리 맞팔해요 ㅎㅎ]

서새아가 던진 미끼였다.

*

한편.

이 시각 유유연은.

“대체 뭐지.”

얼떨떨한 얼굴로 회사 사옥 미팅룸에 앉아있었다.

대뜸 소속사 선배인 한권주로부터 ‘박유진이 만나서 얘기하고 싶다더라’는 얘길 들었기 때문.

“왜 박유진 배우가 나를······.”

라앺 원작 팬들이 가상캐스팅을 할 때, 유진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으니.

원작 소설 속 염라에 대한 묘사.

평상시에는 매우 귀여운 남자아이의 외형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위엄을 드러낼 때는 싸하고 카리스마가 넘친다.

저승에서 왕으로 군림할 때.

그리고 지상에서 귀여운 허당일 때의 모습.

그러면서도 주연 3인방에게 적절히 조언과 도움을 주는 모습까지.

모두 박유진이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보여준 모습들이다.

그러니 원작팬들이 염라 역에 박유진을 그렇게 밀어대는 것.

“진짜 잘 어울리긴 할 거야.”

그리고 그건 유유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염라는 박유진 밖에 없다고 여기는 중.

그래서 더욱 이 만남이 믿기지 않았다.

잠시 후.

미팅룸의 문이 열리고.

“안녕하세요, 배우 박유진입니다!”

유진이 특유의 90도 인사와 함께 등장했다.

유유연도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와. 진짜 박유진 배우님이네.”

“넵. 가짜 아니고 진짜입니다!”

넉살 좋게 받아친 유진.

“사장님! 저 유유연 배우님이랑 단둘이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죠?”

“그래. 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차동석이 자리를 비워주고.

미팅룸에는 두 사람만이 자리했다.

“갑자기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권주 삼촌이라면 유유연 배우님 번호를 알고 있을 것 같아서, 권주 삼촌한테 부탁한 거예요.”

그리 말하며 유진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 아뇨. 와. 궈, 권주 삼촌이라니.”

몇 년째 같은 소속사인 자신도 선배님이라 부르는데.

그런 한권주를 유진이 삼촌이라 부르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다름이 아니라, 유유연 배우님께 부탁을 하나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부탁이라는 단어에 유유연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일면식도 없는 제게 박유진이 부탁이라니?

“부탁이요? 어떤 부탁을?”

“네. 제가 이번에 넙튜브에 콘텐츠를 올릴 거거든요. ‘박유진의 독후감’이라고, 새로운 코너예요. 거기 게스트로 배우님을 초대하고 싶어서요.”

그리 말하며 종이 한 장을 내미는 유진.

“이건 책 목록이에요.”

독서 컨텐츠를 왜 하필 자신에게 부탁하는 걸까.

유유연은 의아해하며 종이에 적힌 글자를 훑었다.

그런데.

그중에 유독 눈에 띄는 제목이 있었으니.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

“라앺?”

유유연의 목소리가 절로 커졌다.

“호, 혹시. 박유진 배우도 라앺 읽어봤어요?”

“그럼요! 저 완전 팬이거든요. 얼마 전에 나온 양장본도 샀어요. 소장용으로.”

“헐, 대박!”

유진의 대답에 유유연이 입까지 틀어막으며 놀라워했다.

염라 캐스팅 0순위로 꼽히는 박유진이 아닌가.

그런 유진이 라앺의 팬이었다니!

“그런데 왜 저한테 연락을.”

“저 혼자 떠드는 것보단 게스트가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그런데 유유연 배우님이 어마어마한 라앺 팬이라면서요?”

그 말에 유유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되게 유명하시던데요? 라앺 찐팬이시라고. 권주 삼촌도 알고 있던데?”

“한권주 선배님이요?”

유유연 본인은 몰랐으나.

이미 구구액터스 사람들에게 그녀는 ‘라앺 덕후’로 알려진 상태였다.

유유연과 별달리 접점이 없는 한권주조차 알고 있을 정도로.

“그래서 권주 삼촌한테 부탁해서 연락드린 거예요. 라앺으로 이야기 나누면 되게 재밌을 것 같아서요. 어떠세요?”

그렇게 티나게 덕질을 한 건가?

일면식조차 없는 박유진이 알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 사실이 제법 부끄러운 유유연이었으나.

“저 할게요!”

대답은 꽤 시원하게 나왔다.

아니, 오히려 유유연의 눈빛엔 기대감이 서려있었다.

이미 제 이미지는 라앺 덕후로 굳어진 것 같으니까.

이제 망설일 것도 없어진 것.

“정말요?”

“네! 당장이라도 찍고 싶어요. 와, 박유진 배우가 라앺 팬이었다니! 그럼 양장본에 수록된 새 외전도 읽었겠네요?”

“물론이죠! 그것도 엄청 재밌었어요. 영생을 살아온 하이드의 과거사가 궁금했는데, 그걸 딱 풀어주시더라고요.”

“와, 와! 진짜요! 저도 그랬어요!”

처음에 긴장하던 모습은 어디가고.

목소리가 떨릴 정도로 크게 흥분한 유유연.

“하이드가 수진이한테 권하는 영생이 처음에는 축복처럼 여겨졌는데, 하이드의 과거사를 보고 나니까 마냥 그런 거 같지 않잖아요. 영생하는 뱀파이어로서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적도 많고. 그 외전을 읽고 나니까 수진이에게 영생을 주겠다는 모습이 마냥 가벼워 보이지 않고, 혼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으로 읽히기도 하고요. 그 복잡미묘함이 하이드의 매력을 한층 더 이끌어 내는 듯한······.”

봇물이 터진 것처럼 줄줄 말하기 시작했으나.

곧 흠칫 놀라 제 입을 틀어막았다.

“미, 미안해요. 제가 너무 흥분해서 떠들었죠?”

유유연은 라앺 얘기만 나오면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친구들과 만나도 ‘넌 매번 라앺 얘기만 하냐’며 핀잔을 주기 일쑤였으니.

“아뇨. 듣기만 해도 재밌어요. 저도 배우님 생각이랑 비슷하면서, 또 차이가 있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런 걸 공유하는 게 컨텐츠를 즐기는 묘미잖아요.”

그런데 유진은 해맑게 웃어주었다.

“유유연 배우님한테 부탁하길 잘했다! 컨텐츠 완전 잘 뽑힐 것 같아요.”

그러자 유유연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져갔다.

온라인이 아니라.

오프라인에서 좋아하는 작품 얘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기회라니.

설마 그걸 박유진이 제공해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근데 유유연 배우님이 수진 역할 맡으면 좋을 거 같은데. 엄청 잘 어울려요."

"정말요? 진짜로요?“

“네! 그럼요.”

유유연은 유진의 말이 기쁘면서 동시에 슬펐다.

유진이야 염라로 들어가겠지만.

자신이 수진 역을 맡을 가능성은 이제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니까.

“저도 정말 하고 싶어요. 수진 역할. 그런데 저한테 기회가 안 올 것 같아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유유연.

“그거야 아직 모르는 거죠!”

그러자 유진이 파이팅을 하듯,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말했다.

“포기하지 말아요. 기회가 올지도 모르잖아요?”

*

유유연과 대화를 나누며.

유진은 조금 그리운 기분에 젖어갔다.

젊은 유유연의 얼굴을 볼 때마다.

중년의 유유연의 얼굴이 아른거릴 정도.

‘야, 지니야.’

‘제 이름은 박유진입니다, 유유연 선배님.’

‘아이, 애칭이지. 애칭. 유진이 빨리 발음해봐. 유진이, 유진이, 유지니, 유지니, 지니. 그러니까 지니지.’

‘아, 넵······그렇군요.’

‘암튼 지니야. 이 누나가 말이야! 어! 예전에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라는 작품에서 주인공을 맡았단 말씀이야. 일명 라앺!’

‘드, 듣고 있습니다, 선배님. 그거 되게 여러 번 말씀하시네요.’

회귀 전의 기억.

50이 다 되어가는 유유연은 구구액터스에서 DV엔터로 이적했다.

덕분에 유진과는 같은 기획사 선후배 사이가 된 것.

사실 같은 기획사라도 얼굴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유유연은 예외였다.

‘오, 우리 지니. 연기 잘하던데?’

두 사람이 같은 작품에 출연한 적이 있으니까.

유유연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에 유진이 일회성 엑스트라로 참여한 것.

하지만 임팩트도, 분량도 많지 않아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유유연이 먼저 다가와 유진을 칭찬해준 것.

당시 유진에게 큰 위로였다.

‘가, 감사합니다. 선배님.’

‘진즉에 살 좀 빼고 관리하면 좋았을 텐데. 늦지 않았어. 이제부터라도 준비해! 내가 봤을 땐 넌 대기만성형이야. 이제 곧 터진다?’

30 중반을 넘어서도 비중 없는 조연을 전전하는 유진을 무시할 법도 하지만.

유유연은 편견 없이 유진을 대해 주었다.

‘그리고 이제 그냥 누나라고 불러. 같은 소속사 식구끼리 무슨 선배님이야, 선배님은.’

‘제, 제가 어떻게 선배님을 누나라고 부르겠습니까.’

‘진짜 고지식하네. 이 바닥에선 부드러워야 오래 간다. 알았어?’

‘네, 선배님.’

‘아이고.’

물론 끝까지 누나라 부르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따금 친누나처럼 의지했던 것도 사실이다.

매번 주연 오디션에서 좌절하는 유진을, 유유연이 먼저 나서서 독려해주곤 했으니.

‘하아. 한창 라앺 찍을 때. 그때의 나는 한창 예쁘고 귀여웠는데.’

쫑파티처럼 술이 들어갈 때마다 라앺 얘기를 꺼냈던 게 문제지만.

‘지, 지금도 아름다우십니다만.’

‘이게 자꾸 까불어.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할래?’

‘······죄송합니다.’

‘이게 진짜! 그럴 땐 진짜라고 말해줘야지!’

‘지, 진짜 죄송합니다.’

‘푸흡, 아하하! 진짜 재밌네, 얘. 놀리는 재미가 있어. 서른 넘게 먹은 애가 왜이리 귀엽니?’

철썩, 유진의 등짝을 때리던 손길이 꽤 매웠다.

그때 유진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아직 유진이 소심한 성격이었을 때니까.

‘그, 근데 선배님. 몇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 작품을 기억하시네요.’

‘당연하지. 그 작품이 내 인생을 바꿔줬는데.’

‘하긴. 그 작품으로 엄청 성공하셨으니까요.’

유유연은 라앺을 기점으로 인기가 폭발적으로 성장.

매번 디테일한 캐릭터 해석을 보여줘 ‘캐해장인’이라는 타이틀까지 얻는다.

‘성공이라고 표현하기도 부족해. 그 작품은 나한텐 구원이었어.’

유유연은 매우 단호히 말했다.

‘누나 말 잘 들어, 유진아. 인생에는 놓쳐선 안 될 기회가 찾아와. 성공이니 뭐니, 그런 건 부차적 문제고. 그냥 인생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꿔줄, 그런 기회 말이야. 내겐 라앺이 그거였어. 그 작품이 나를 살린 거야.’

진지한 표정으로 당부하는 유유연.

그때 유진은 처음으로 알았다.

어떤 배우의 연기가 작품의 격을 높이고,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것처럼.

어떤 작품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걸.

‘그런 기회가 온다는 건 본인만 알아. 그때 남들이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마. 기회가 오면 잡아! 어떻게든 네 것으로 만들라고. 그러려면 준비가 되어있어야 해. 그런 운명 같은 순간이 언제 올지 모르니까.’

유유연이 라앺으로 대박이 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작품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깊었고.

그를 온전히 연기로 표현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유유연 자신의 말대로, 기회를 잡아낼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

그리고 그런 유유연의 해석과 연기는 라앺 흥행의 1등 공신이었다.

‘그런 유유연을 두고, 서새아를 주인공에 꽂아 넣게 놔둘 수는 없지.’

하지만 유진이 캐스팅에 관여하는 건 무리였다.

아무리 원작팬들이 유진을 염라에 강력히 희망한다고 해도.

서새아 급이나 되는 배우를, 아역배우가 멋대로 밀어내기는 불가능한 일.

‘그래. 내가 서새아를 어찌할 수는 없어.’

그렇다면 유진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바로 유유연을 저 높이 올려주는 것이다.

“오늘 즐거웠어요, 유연 누나!”

이야기가 끝나고.

이제 서로 누나 동생 하는 사이가 된 두 사람.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 할 때.

"잘 가, 지니!”

“어? 네? 방금 뭐라고······.”

“이제부터 네 별명이야. 내 애칭! 유진이, 유지니, 지니! 어때. 완전 찰떡이지?”

그 말을 듣고 유진은 조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유유연이 당황해 입가를 가렸다.

“미, 미안해. 혹시 마음에 안 들어?”

잠시 후.

곧 유진이 소리 내어 웃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아뇨. 완전 마음에 드는데요? 지니!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아요.”

뭐가 그리 그리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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