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어? 유진아. 집에서 안 쉬어?”
주역 매니지먼트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유진을 보며 차동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근 유진의 스케줄은 잡아놓은 게 하나도 없으니까.
“집에 혼자 있으려니 심심해서요. 아, 맞다. 아빠 지금 편집하고 있죠?”
“어. 주말에도 나오시고, 아주 열정적이셔.”
최근 <연년생>이다, 넙튜브 컨텐츠다 뭐다.
여러모로 바빠진 박태종이다.
주말도 반납하고 편집 공부에 매진하는 상태.
“그럼 이따 아빠랑 같이 집에 갈래요.”
“그래, 알았다.”
곧 모니터를 바라보며 집중하는 차동석.
그를 빤히 바라보던 유진이 물었다.
“사장님은 안 쉬어요? 오늘 주말인데.”
텅 빈 사무실에 차동석만이 홀로 앉아있었다.
“쉴 수가 있나. 내가 한 아이의, 으힛. 아빠인데. 흐흐흐.”
차동석은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이 어지간히 기쁜 모양.
‘하긴, 평생소원이었을 테니까.’
장미소의 임신 사실을 공표한 이후.
차동석은 부쩍 야근이며 주말근무를 하는 날이 많았다.
“아무튼 무리하시면 안 돼요.”
“그래, 그래. 아, 맞다. 말하려고 했는데 이제야 생각났네. 조만간 우리 회사에 새로 합류할 사람이 있어.”
“어? 새로운 배우가 들어오나요?”
“아니. 코디 한 명 뽑았거든. 네 헤어, 메이크업 전반을 담당해주실 거야.”
“오!”
점점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유진이다.
이젠 언제, 어디서든 보여지는 것에 신경쓸 수밖에.
촬영이 있는 날이면 매번 편집숍에 가서 세팅을 해야했는데.
그 수고를 크게 덜 수 있을 터.
“스윗터에 올리고 있는 패션도 점점 주목도가 높아지고 있어. 이젠 옷도 허투루 못 입는다는 거지. 뭐만 하면 박유진룩, 박유진룩 하니까.”
부모 카페 회원들은 유진이 입은 옷이 어느 브랜드, 어느 상품인지 기어코 찾아냈다.
심지어 어느 곳에선 공동구매까지 진행했다고.
“새로 오신다는 코디분은 어떤 사람이에요?”
유진의 질문에 차동석이 으음, 하고 턱을 쓰다듬었다.
“일 잘할 것 같던데. 근데 이력이 조금 특이하더라.”
“특이해요? 왜요?”
“옛날에 음악을 했다나봐. 인디 쪽에선 나름 유명했던 모양인데.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두고 코디로 전향했대.”
음악을 하다 코디로 넘어오다니.
확실히 독특한 이력이었다.
‘뭐, 누가 됐든 일만 잘하면 됐지.’
유진은 차동석의 안목에 대한 믿음이 있었으니까.
차동석과의 대화가 끝난 이후, 자신의 애착소파에 누운 유진.
휴대폰을 꺼내 무언가를 검색했다.
<샤샤토끼>
그러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바로 로맨스 소설 카페에 올라온 추천글이었다.
[샤샤토끼 작가님의 <비밀과 거짓말> 추천합니다
추천글 - <비밀과 거짓말>, 묘한 매력이 있는 작품]
샤샤토끼의 가장 첫 번째 작품.
무료 연재 중이라 얼마든지 읽을 수 있었다.
‘어디 한 번 읽어볼까.’
1화부터 읽기 시작한 유진.
자신도 모르게 소설에 빨려들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봤을 땐 이미 다 읽은 후.
‘와. 새삼 놀랍네. 이게 진짜 10살짜리가 쓴 글이야?’
새삼 유신애의 재능에 감탄했다.
역시 <리플레이>의 감독, 최희숙의 딸다웠다.
‘근데 내가 알던 내용 하곤 좀 다른 것 같은데?’
본래 유진이 알고 있던 샤샤토끼의 <비밀과 거짓말>.
고딩 남녀가 사소한 비밀과 거짓말로 엮여 알콩달콩 연애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순수해보이는 남자주인공에게 실은 커다란 비밀이 있는 것 같은 서술이 나온다.
마치 매우 위험한 과거, 혹은 숨겨진 정체 등.
그로 인해 독자들이 긴장감을 가지고 계속 볼 수 있는 것.
즉.
‘로맨스에 미스테리함이 섞여있어.’
로맨스라는 장르에 미스테리 한 스푼을 섞은 느낌.
여러모로 유신애의 재능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어휘력의 한계인지 표현이 반복되는 부분도 많고.
오타나 개연성이 어색한 구석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로서의 재미가 아주 훌륭해.’
또한 감정과잉, 오글거림이 덜하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이는 샤샤토끼 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
덕분에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어 대중적으로 사랑을 받은 것이고.
그 특징이 첫 번째 작품에서부터 드러나고 있는 것.
‘그러니까 출판 계약 제의도 받은 거겠지.’
<비밀과 거짓말>을 업로드분 전부를 읽은 뒤.
유진은 차동석의 자리를 흘끗거렸다.
혼자 일을 하느라 여러모로 바빠보이는 모습.
‘저렇게 집중하고 있을 때 동석이 형은 좀 예민한 편인데. 흠, 그렇다면.’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동석의 옆으로 다가갔다.
“사장니임.”
애교를 부리는 유진의 목소리.
그러자 한창 집중하고 있던 차동석이 흠칫 놀라 유진을 바라보았다.
“뭐야, 갑자기? 아저씨 지금 바쁘다.”
“그냥요. 사장님이 너무 멋있어서요. 주말에도 나와서 일하시고. 저한테 도움도 많이 주시고.”
“으, 뭐야? 맨날 내장탕에 추어탕만 찾는 녀석이 애교는.”
유진과 알고 지낸지도 벌써 2년.
새삼 유진이 애교를 떤다고 마음이 동할 차동석이 아니다.
그러나 질색하는 것 같은 얼굴 속.
들썩이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는 없는 모양.
“사장님은 엄청 멋진 아빠가 되실 것 같아요. 아기한테도 엄청 잘 해주고.”
“응? 으흐흐. 당연하지. 내가 누구냐?”
아이 얘기를 하니 완전히 무장해제 되었다.
그걸 확신한 유진은 슬쩍 얘기를 꺼냈다.
“근데 있잖아요, 사장님. 혹시 출판사 쪽 잘 아세요?”
“출판사? 어느 쪽?”
“인터넷에서 연재하는 로맨스 소설이나, 그런 거 만드는 곳이요.”
“어어. 몇 명 알고 있긴 한데.”
“와. 어떻게 알고 지내요? 신기하다.”
“네가 물어놓고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전에 있던 회사에서 일할 때, 컨텐츠 제작 쪽이랑은 다 인연을 맺어뒀지. 출판미디어계도 포함.”
역시 인맥왕 차동석다웠다.
“그럼 출판사 하나만 어떤 곳인지 평판 좀 알아봐주실 수 있어요?”
“근데 갑자기 출판사는 왜? 무슨 일 있어?”
“제가 아는 사람이 출판 계약 제의를 받았다는데, 괜찮은 회사인지 궁금해서요.”
“어렵지 않지. 잠깐만 기다려.”
차동석은 하던 일도 멈추고 곧장 휴대폰 속 연락처를 뒤적였다.
딱 유진이 바라던 모습.
그리고 잠시 뒤.
전화를 끝마친 차동석은 아까와 달리 진지한 표정을 말했다.
“유진아. 그 아는 사람한테 바로 연락해.”
*
며칠 후.
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무슨 일 있어?”
유신애의 집에 놀러온 유진.
아무 말도 없는 유신애에게 먼저 물었다.
“<비밀과 거짓말>도 요즘 안 올라오던데.”
그러자 유신애가 흠칫 놀랐다.
“그, 그걸 보고 있었어?”
“그럼요, 샤샤토끼 작가님. 저 작가님 팬이라니까요?”
유진이 장난스레 말했으나.
유신애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그러자 유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그거 때문이야? 출판 계약 때문에?”
유신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표정만으로도 대답이 되었다.
“거기 되게 안 좋은 출판사래. 완전 나쁜 사람들이랬어.”
유진이 차동석에게 부탁해 알아본 결과.
유신애에게 연락을 해온 출판사가 순 악질이었던 것.
인세 비율도 엉망에, 거의 날강도나 다름 없었다.
“응. 알아봐줘서 고마워.”
그걸 다행으로 여겨야하건만.
‘나도 작가 타이틀을 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진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유신애의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유신애가 글을 써온 건 꽤 오래 전부터다.
고작 10살 먹어놓고 오래 전이라고 하면 이상하겠으나.
유치원 시절부터 공책에 무언가 끄적이는 걸 좋아했으니.
그게 소설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입학 이후부터였다.
‘그땐 그냥 내 낙서나 다름없었어.’
이걸 누군가한테 보여준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유신애가 구축한 건 ‘샤샤토끼’라는 이름의 또 다른 세상일 뿐.
그러나.
‘나도 저렇게 되고 싶어.’
유진을 만나고서부터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서 자신의 연기를 보여주는 유진처럼.
유신애 역시 자신의 공책 속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로 인해 탄생한 것이 <비밀과 거짓말>이라는 소설이다.
남자주인공이 순박하고 순진한 성격이라는 것은 <호구>에서.
그러면서도 실은 미스테리한 무언가가 있다는 설정은 <주변인>에서 영감을 받았다.
즉, 캐릭터의 모티브가 모두 유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남주 댕댕이 같다가도 싸해질 때 존무 ㄷㄷ
이 글 되게 묘함...로맨스 읽는데 등골이 싸늘해지는 경험은 처음 ㅋㅋ
비밀거짓 남주 매력 쩔어...고딩주제에 날 설레게 하다니 ㅋㅋ]
그 두 가지를 적절히 섞은 덕분에.
독자들도 남주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인정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유진이 배우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것처럼.
자신도 진짜 ‘작가’가 되는 상상을 했다.
어머니인 최희숙에게도 자랑스러운 딸이 될 수 있고.
‘그래서 일부러 엄마랑 상의 안 하고 유진이한테 먼저 물어봤던 건데.’
어머니 최희숙에게 짠, 하고 보여줄 생각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작가가 되었다고.
하지만 얼마 전.
유진에게 온 연락은.
‘신애야. 거기랑은 계약하면 안 될 것 같아. 우리 사장님한테 물어봤는데, 안 좋은 출판사라고 하더라.’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그런 계약을 피한 것 자체가 좋은 일이지만.
유신애도 아직 10살의 어린아이.
“이제 책상 앞에 앉아도, 아무런 생각이 안 나.”
유신애가 힘없이 말했다.
그걸 보면서도 유진은 아무런 위로도 해주지 않았다.
그냥 자기 휴대폰만 할 뿐.
그러다가.
“아, 음. 흠.”
갑자기 목을 풀기시작하더니.
“미안해. 매점 갔는데 불벅 다 떨어졌대.”
뜬금없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너 주려고 사오려 했는데. 아, 담 넘어서 학교 밖 매점 다녀올까? 아, 이거 오버한 거야? 미안.”
“뭐, 뭐, 뭐하는 거야?”
유신애는 유진이 뭘 말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왜냐면 그건 자신이 쓴 <비밀과 거짓말> 속 남주의 대사니까.
“응? 왜 그래 신애야?”
“가, 갑자기 뭘 읽고 있는거야. 유진아!”
“아니, 그냥. 네 소설 읽다가 대사가 좋길래. 만약 네 소설이 영화화 된다면 어떨까, 하고 상상해봤지.”
“시, 싫어. 하지 마. 부끄럽단 말야.”
유신애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자기 소설을 누군가 소리내어 읽는 것.
작가에겐 그만한 고문이 없으니.
“자자. 날 믿어 봐. 내가 맛깔나게 살려줄게.”
그러나 유진은 제멋대로였다.
유진이 대사를 읊기 시작하자 귀를 틀어막은 유신애.
창피함과 부끄러움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곧 틀어막은 틈 사이로 유진의 목소리를 들으니.
‘어? 마치 진짜 캐릭터가 말하는 것 같아.’
이 캐릭터는 이렇게 말할 것 같아.
그리 생각하며 썼던 대사들이 그대로 재현되는 기분이었다.
“미아안. 내가 잘못했어. 안 그럴게. 응? 용서해주라아.”
여주에게 항상 져주는 남주.
그 순진함과 귀여움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기분.
물론 유진의 목소리는 어린 남자아이의 것.
소설 속 남자주인공과는 나잇대가 맞지 않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애당초 유진이 맡은 배역에서 영감을 받은 캐릭터다.
유진은 자신의 방식대로, 유신애의 남주를 표현해냈다.
그러면서도.
“저기말이야. 아까 그거, 못 봤지?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탓일걸?”
무언가 비밀이 있는 것 같을 땐 낮아지고 은밀해지는 목소리.
‘캐릭터가 살아있는 것 같아.’
그러자.
유신애는 처음으로 <비밀과 거짓말>을 구상하던 때의 감정이 떠올랐다.
캐릭터와 스토리를 구상하며 두근거려했던 그 순간.
그걸 유진이 눈앞에서 재현해주는 느낌.
“자, 샤샤토끼 작가님. 느낌이 어때요?”
“여, 연기 잘하시네요. 박유진 배우님.”
“고마워. 대사가 좋아서 그래. 완전 입에 쫙쫙 달라붙어. 찹쌀떡처럼 쫀득쫀득해.”
유진의 칭찬에 유신애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럼 저 이 작품에 캐스팅 된 건가요, 작가님?”
유진이 장난스레 묻자 유신애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캐, 캐스팅은 무슨. 내 소설이 뭐라고······.”
“라앺 못봤어? 요즘 소설이 드라마화하면 완전 인기 짱이야! 그리고 내가 봤을 때, 이 소설 잘 될 것 같아. 독자분들도 엄청 좋아하고. 자, 봐.”
유진은 그리 말하며 휴대폰을 유신애에게 내밀었다.
최근 <비밀과 거짓말>이 업로드 되지 않은 터라.
최신화에는 왜 올라오지 않느냐는 독자들의 애정 어린 성토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유신애는 계약이 파투난 것에만 신경 쓰느라 정작 독자들의 반응을 보지 못했던 것.
“아······.”
“너 햇님달님 알지? 호랑이가 썩은 동앗줄을 잡았더니 그대로 떨어져버리잖아. 성급하게 굴지 말고 기다리다보면, 더 잘 되는 경우가 있더라고.”
유진은 그리 말하며 유신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니까, 음. 힘내! 신애야. 더 잘 될 테니까. 나만 믿어. 잘 안 되면 우리 소속사 찾아와서 따져. 그럼 사장님이 보상해줄 거야.”
말도 안 되는 유진의 주저리주저리.
그러자 유신애가 웃음을 터뜨렸다.
“응. 알았어. 망하면 꼭 찾아갈게.”
유진히 전해준 캐릭터가 눈앞에서 살아숨쉬는 듯한 느낌.
자신의 글을 좋아해주는 독자들의 목소리.
그 경험은 유신애의 의욕을 펌프질 하기에 충분했다.
“대신, 잘 되면 나 주인공으로 써주기야. 알았지?”
유진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
얼마 뒤.
유진은 차 안에서 유신애의 전화를 받았다.
“응. 거기라면 괜찮을 거야. 거봐. 더 좋은 기회가 올 거라고 했지? 응. 응. 어머니한테 잘 말씀드려. 응. 내 안부도 전해주고. 응, 안녕!”
뚝.
유진이 전화를 끊었다.
그날 이후 유신애는 연재를 재개했고.
이후 대형 출판사로부터 다시 계약제의를 받았다고 전했다.
이 이후는 유신애와 그녀의 어머니 최희숙의 몫.
‘그렇게 말해뒀으니, 나중에 영화화 되면 날 주인공에 써주겠지?’
회귀 전 <비밀과 거짓말>은 출간 이후 몇 년 뒤에 영화화된다.
딱 유진이 고등학생쯤 됐을 때였을 것이다.
‘그나저나 그 캐릭터, 진짜 나랑 잘 맞는 것 같던데. 설마 날 생각하고 쓴 건 아니겠지?’
그런 느낌은 들었으나.
설마, 하며 넘겨버리는 유진이었다.
“뭐야뭐야. 여자친구야? 여자애 목소리가 들리던데?”
그때, 운전대를 잡은 고석태가 장난끼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유진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친구예요.”
“애한테 이상한 말 하지마, 오빠.”
고석태에게 핀잔을 주는 나은주.
오늘 모임은 일명 당구장 파티.
<데드맨> 촬영 이후 놀러가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였다.
“왜. 요즘 애들 연애 일찍일찍 하던데. 게다가 뭐 연애가 나쁜 건가? 그렇지 유진아?”
“저 바빠요, 석태 삼촌. 연애할 시간 없어요.”
“와, 10살짜리가 저런 말을 하네.”
“운전이나 똑바로 해, 오빠. 권주 오빠 지금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대.”
잠시 후.
“안녕.”
차가 멈춰선 뒤, 한권주가 올라탔다.
앞서 스케줄이 있던 탓에 일찍 합류하지 못했고.
일행들이 픽업하러 온 것.
그런데 비어있는 조수석이 아니라, 뒷좌석 문을 여는 한권주.
뒷좌석엔 이미 나은주와 유진이 타고 있는 상황이었다.
“얌마. 뒷좌석 말고 조수석에 타! 왜 거기로 가냐?”
고석태가 소리쳤다.
한권주는 대답 대신 계속 유진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유진 옆에서 가고 싶은 모양.
“괜찮아요. 뒷좌석도 넓으니까요. 얼른 타세요, 권주 삼촌.”
한권주는 사양하지 않고 뒷좌석에 탔다.
“아, 저번에 감사했습니다. 권주 삼촌!”
“별 거 아니었는데, 뭐.”
“뭐야. 둘이서 뭐 했어?”
“유연 누나한테 연락할 일이 있었는데, 권주 삼촌이 도와주셨거든요.”
“아아, 그거. 근데 유진아. 그 독후감 컨텐츠 할 때 왜 누나가 아니라 유유연한테 부탁한 거야?”
“누나 바쁜 거 아니까요.”
“질투하지 마.”
“아니거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뒷좌석 세 사람.
“나 왕따시키는 거지? 나쁜 놈들.”
쓸쓸히 비어버린 조수석을 보며 고석태가 눈물을 삼켰다.
“근데 너 왜 엠더넷에서 나오냐? 너 뭐 엠더넷에서 새 프로그램 하냐?”
고석태가 묻자 한권주가 짧게 대답했다.
“아니. 그냥 미팅.”
“이야, 이젠 가수까지 하시려고? 아주 재능부자시네요, 한권주 씨.”
“시끄러. 소속사에서 제발 미팅만 나가보라고 해서 온 거니까.”
“무슨 프로였는데?”
“응원송 프로젝트인가. 뭐 노래 만들고, 그런 프로그램. 네티즌 추천에 내 이름이 있었다네.”
“그래서 그냥 까고 나온 거야?”
“어. 너희들도 추천률 꽤 높았다던데. 그쪽에서 추천할 만한 배우 없냐고 하더라.”
“아이고, 우리 권주 친구 없어서 추천할 사람도 없을 텐데.”
한권주가 고석태를 무섭게 노려보았고.
고석태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너 그냥 나왔을 거 아니야. 추천 안 하고.”
“아니, 했어.”
“뭐야, 누군데?”
“얘.”
한권주가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한 쪽으로 쏠렸다.
“엥? 저요?”
바로 유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