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유이치."
"응?"
아이돌 빅터의 일본인 멤버.
유이치는 고개를 들어 재오를 바라보았다.
휴식하는 도중, 갑자기 재오가 제 숙소에 들이닥쳤으니.
"나 일본어 잘하지?"
갑자기 일본어로 말하는 재오.
그 모습에 유이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형. 갑자기 왜 일본어를 써? 아시아 투어 끝난지가 언젠데."
빅터는 평소에 무조건 한국말로 소통한다.
일본어를 쓰던 건 한창 일본 진출을 노리던 시기 뿐.
"됐고. 아무튼 나 일본어 잘하지?"
"응? 당연히 잘하지. 말할 때 고저나 악센트도 확실하고, 표현도 꽤 풍부해."
일본인인 유이치가 보기에도.
재오의 일본어는 매우 유창한 편이었다.
"이 정도면 나 일본 영화에 출연할 정도야?"
그 말에 유이치가 피식 웃었다.
"어, 음. 그걸 한국어로 근자감이라고 하던가? 근거 없는 자신감?"
"그 정도는 아니라는 뜻이야?"
"글쎄. 한 번 보여줄래? 형이 일본어로 연기하는 모습 나도 궁금한데."
"오케이. 잠깐만 기다려."
곧 가방을 뒤적이는 재오.
대본을 하나 꺼내들었다.
바로 유진이 준 <주변인> 대본을 일본어로 번역한 것.
"자, 그럼 시작한다."
재오가 일본어로 연기하기 시작하고.
잠시 후.
"음."
연기가 끝난 뒤.
유이치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 얼굴을 보고 재오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줘."
"그래. 잘한다곤 못하겠어. 너무 달달 외워서 하는 느낌이야."
"하아. 그래, 그렇겠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는 재오.
그 역시 스스로의 연기에 만족을 못했다는 뜻이다.
”연기를 배우는 입장인데 외국어로 한다니. 미친 짓이지.“
외국어로 하는 연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익숙지 않은 언어로 감정을 담아 연기해야하는 것이니까.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정말 발전했어. 예전엔 엉망이었잖아, 형."
위로인지 놀리는 건지.
유이치는 세상 순진무구한 얼굴로 재오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때 형 한자는커녕 히라가나도 제대로 못 외워서 조실장님한테 엄청 혼났잖아.”
“야.”
“그때에 비하면 정말 대단한 거지! 일본어 선생님이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했을 때도 형은 포기 안 했잖아. 기죽지 마."
"죽을래?"
재오가 으르렁대자 유이치는 곧장 빠졌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일본어로 연기하는 거야? 뭐 일본 영화에서 캐스팅이라도 들어온 거야?"
"비밀이야."
그리 말하며 다시 대본을 가방에 집어넣는 재오.
그걸 보며 이제 좀 쉬겠구나 싶어 늘어지려던 유이치였는데.
“야. 다시 한 번 해볼게. 이번엔 좀 디테일하게 집어주라.”
"근데 형도 진짜 대단하다. 안 피곤해?"
"피곤하기는."
"난 피곤한데. 내 방에서 좀 나가주라."
"어린 놈이 뭘 피곤해? 너한테 오케이 받기 전까진 안 끝낼 거야."
"아까 연기 좋았어. 완전 무대를 뒤집어놓으셨다!“
”얘가 이상한 거만 배워가지고. 진심을 담아서 보란 말이야, 좀.“
“아, 형. 나 피곤하다니까. 자꾸 그러면 형 몰래 <데드맨> 보러 갔다 온 거 조실장 형한테 말한다?”
그러자 흠칫 놀라는 재오.
다행히 재오가 몰래 <데드맨>을 보고 온 날,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바로 그날 숙소에 있던 유이치의 도움 덕분에.
재오의 동선과 알리바이를 거짓증언(?)해준 것.
조실장이 그나마 가장 신뢰하는 게 유이치다.
새하얀 얼굴과 다소 어눌한 한국말 때문에 다소 순진해보이니까.
“좀 쉬엄쉬엄해.”
“그걸 보고 어떻게 쉬엄쉬엄하냐.”
<데드맨> 관람 이후.
재오가 느낀 것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온 순간.
영화 전체를 세련되게 만드는 거장 권성택의 손길.
주조연 할 것 없이 뛰어난 연기력.
그리고.
‘유진이의 그 아우라.’
<리플레이>에서 유진이 보여준 폭력성, 폭발력과는 전혀 다른 결이었다.
‘싸늘함마저 다른 결로 보여줄 수 있다니. 완전 괴물이잖아.’
그리고 그 괴물과 함께 영화에 출연할 기회.
그게 바로 <주변인>이었다.
“아무튼, 이제 내 방에서 좀 나가줘. 책 좀 읽게.”
유이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책 한 권을 집어들었다.
“책? 채애액? 만화책도 별로 안 좋아하던 녀석이 갑자기 무슨 책을 읽어?”
고개를 내밀어 책 제목을 확인한 재오.
곧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뭐야, 그거.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
“응. 일본 투어 갔을 때 팬미팅에서 받았어. 마침 읽고 싶었던 건데, 일본어 번역판이 나왔더라고.”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라면, 유진이 참여사실이 크게 화제가 된 드라마 아닌가.
유진이 가는 곳마다 엄청난 화제몰이를 하고 있다.
즉.
‘역시. <주변인>은 놓칠 수 없어.’
재오로서도 연기자로서 놓칠 수 없는 기회.
“자. 유이치. 리더로서 자비를 베풀어주지. 오늘 밤 내내 내 상대역을 해라.”
“아니, 갑자기 왜 또······나 좀 쉬자, 형! 조실장 형 어디 있어? 조실장님! 조실장니이임!”
유이치의 외침이 허공에 흩어질 뿐이었다.
*
한편.
스튜디오 포르테의 사무실에선.
"<데드맨> 흥행 축하드립니다."
연출PD 김경식이 유진에게 축하를 건네고 있었다.
"연기 진짜 좋았어요. 이번에 벌써 800만 찍었죠? 어우. 이대로면 1000만 금방 찍겠는데.“
"헤헤. 감사합니다!"
어차피 유진이 생각하기에 <데드맨> 1000만은 기본이었다.
1000만에 공약을 내건 것도, 어차피 달성할 걸 알고 내건 것이다.
유진이 알고 있는, 회귀 전 <데드맨>의 최종관객수는 1054만이었으니.
‘문제는 1000만 이후.’
자신이 참여해 새로이 탄생한 <데드맨>이 그 기록을 깰 수 있을까.
‘이대로면 충분히 깰 것 같지만.’
무엇보다 흐뭇한 건, 유진의 출연료는 전액 러닝 개런티라는 점.
돈이 아주 ‘억’ 소리 나게 쏟아질 예정이었다.
“원작 팬들도 <데드맨>에서의 박유진 배우 모습을 좋아하고 있더라고요.”
김경식의 말대로.
<데드맨>에서 유진이 보여준 연기는 라앺 팬들에게도 꽤 화제가 되었다.
[데드맨 보고 오니까 더 확신했다. 박유진 염라는 진짜 찰떡 캐스팅임
ㄹㅇㄹㅇ 박유진 완전 귀엽게 생겨서 카리스마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워우..
싸함 완전 대박... 염라 본모습 보여줄때 완전 지릴듯 ㄷㄷ]
<데드맨> 속 영서가 보여주는 싸늘함, 비인간적으로 보이는 포스.
그게 염라와 꽤 겹치는 모양.
여러모로 팬들의 기대가 하늘을 뚫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 제가 더 열심히 해야겠네요!”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는 유진.
자만하기는커녕
PD로서는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정에 대해 공유해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김경식이 설명한 일정을 들은 차동석.
펜대를 굴리며 침음을 흘렸다.
"일정이 조금 빡빡하네요.“
그를 스캔하던 차동석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자 김경식이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네. MBS 쪽에서 최대한 빨리 방영하길 원하고 있어서요.”
유진이 <데드맨>으로 한창 화제몰이를 하고 있는 와중이니까.
라앺이 편성될 MBS 측에선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게다가 유진의 분량은 주연 4인방 중 하나.
염라는 어디든 꼭 끼는 마스코트 같은 존재라 분량도 많다.
앞으로 유진에게 고생길이 열렸다는 뜻이지만.
"재미있을 거 같아요. 얼른 촬영하면 좋겠다."
유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방긋 웃으며 기대감에 찬 모습.
‘이렇게 판타지 느낌이 강한 장르는 또 처음 해보는 거니까.’
그렇게 몇 가지 논의를 거쳐.
미팅이 종료된 이후.
“저, 박유진 배우.”
김경식의 목소리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유진을 붙았다.
“넵? 무슨 일이세요?”
“이번에 엠더넷 쪽에 프로그램 들어간다는 기사 봤습니다.”
“아, 네! 맞아요.”
가로수 밴드가 도장을 찍었다는 소식을 듣고.
유진도 조율 이후 출연을 확정지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엠더넷 측에서는 기사를 터뜨리기 시작했고.
[엠더넷의 새로운 프로젝트 <별의 노래>, 라인업 확정!]
[<데드맨> 이후 엠더넷 출연······배우 박유진, 예측할 수 없는 그의 행보!]
[“팬들이 추천해주신 만큼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겠다” 박유진의 성숙한 태도, 연예계의 귀감이 되다!]
<별을 보러 떠나요> 이후 유진이 참여하는 새로운 예능이니만큼.
그 주목도가 꽤 높은 상황.
“박유진 배우 파트너가 가로수 밴드라고 들었는데, 맞죠?”
"네, 맞아요."
“그게 실은 우리 쪽에서 OST를 맡아달라고 얘길 꺼냈는데, 가로수 밴드 측에서 답이 없어서요.”
"헉. 진짜요?"
유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말 그대로 금시초문이었기 때문.
“저희 음악감독이 엄청 욕심을 내고 있어요. 물론 저도 매우 탐이 나고. 개인적으로 작품 분위기랑 꽤 잘 어울릴 거라 생각해서요.”
“맞아요. 가로수 밴드 음악 엄청 좋죠.”
“그래서 말인데, 혹시 만나게 된다면 OST 관련해서 한번 말해줄 수 있을까요? 진짜 그냥 가볍게 한 번만요.”
혹여 유진이 부담처럼 느낄까.
김경식은 조심스레 물었다.
“넵넵! 그럴게요.”
특별히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유진은 흔쾌히 대답했다.
‘내 기억으론 라앺 OST에 가로수 밴드가 참여한 적은 없어. 그랬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지.’
OST는 유진이 개입한 적이 없다.
즉.
본래대로라면 가로수 밴드가 라앺 OST 제의를 거절했다는 얘기.
'왜 굳이 거절했지?'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라앺은 방영 전부터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드라마다.
이제 주목받기 시작한 인디밴드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일 터.
‘설마, 진짜 해체라도 하는 건가?’
유진은 차동석에게 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일단, 만나보는 수밖에 없겠어.’
*
며칠 후.
<별의 노래> 파트너끼리의 사전미팅이 있는 날.
구은성은 홍대역 2번 출구 근처에 서 있었다.
잠시 후.
그에게 다가오는 한 인기척.
“왔네.”
“어, 응.”
채지연이었다.
5년 넘게 사귄 연인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어색함의 극치.
몇 년간 떨어져 본 적이 없던 두 사람이건만.
며칠 떨어져 있었다는 이유로 시선조차 맞추지 못했다.
모든 게 새삼스레 느껴졌으니까.
“뭘 그렇게 꾸미고 왔어.”
채지연의 행색을 본 구은성이 툴툴대며 말했다.
“방송국 가는데, 그럼 꾸며야지. 넌 차림새가 그게 뭐야.”
“잘 보일 사람이 누구 있다고.”
풀메에 옷차림까지 매우 신경 쓴 채지연에 반해.
구은성은 평소처럼 청바지에 맨투맨을 걸쳤을 뿐.
역사 안으로 들어가는 길.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아주 사소한 얘기라도 하며, 계속 이야기꽃을 피웠을 두 사람이 말이다.
“그 박유진이라는 애, 라앺에도 출연한다더라.”
채지연이 넌지시 툭 던졌다.
“라앺?”
“내가 말했잖아. 전에 OST 제의 들어왔다고.”
"아. 그랬었나.“
“이젠 내가 했던 말도 기억 못하는구나.”
“그냥 까먹었을 뿐이야.”
서로 이렇게 툴툴댔었나.
그리 생각할 정도로 서로 날이 서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다른 사람이었나?’
어쩌면.
음악성이니 성공이니 하는 것들은 그저 변명에 불과하고.
서로에게 이런저런 불만이 쌓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프로그램이 끝나면 정말······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서로가 그렇게 직감하며 지하철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마디도 더 나누지 않고 엠더넷 측에서 잡아놓은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목재가 많이 배치되어, 따뜻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사전미팅 땐 따로 카메라맨이 안 붙고, 미팅룸에 미리 설치해둔 카메라만으로 촬영할 겁니다.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시면 됩니다.“
작가가 와서 말했다.
둘 사이에 침묵만이 감돌고 있을 때.
“안녕하세요. 아역배우 박유진입니다! 먼저 와계셨네요?”
문이 열렸다.
구은성과 채지연을 보자마자 꾸벅 고개를 숙이는 유진.
그야말로 예의가 몸에 밴 아이처럼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엉거주춤 일어서며 인사하는 두 사람.
유진은 먼저 살갑게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저 가로수 밴드 팬이에요! 이렇게 같이 작업하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저희도 <데드맨> 잘 봤어요. 엄청 인상적이었어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띄워주는 훈훈한 분위기.
“그리고 그, 500만 공약 라이브 방송 봤어요.”
그 말에 유진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대박! 아, 근데 부끄럽다. 저 그때 가로수 밴드 노래 불렀는데. 그것도 들으셨겠네요?”
“잘 부르시던데.”
“에이. 잘 부르긴요.”
구은성과 채지연은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가려 애썼으나 영 쉽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가 어색하다고 해서, 눈앞의 아이마저 불편하게 할 수 없으니.
그런데.
“아. 원래 ‘떨어지는 꽃잎들은’ 부르고 싶었는데.”
“어? 그 노래를 알아요?”
“그럼요! 제 최애앨범은 1집이에요. 그냥 쭉 듣는데 한 편의 스토리를 귀로 듣는 느낌?”
“와. 그걸 다 들었다고요? 나온 지 4년 넘었는데.”
“넵! ‘떨어지는 꽃잎들은’이 7번 트랙 이죠? 가장 좋아해요. 가사가 되게 음, 뭐랄까. 직접적이다? 직관적이다? 아무튼 곧장 이해가 돼서 좋았어요.”
“와, 와! 대박. 그걸 노리고 쓴 거였는데! 이렇게 말해준 건 박유진 배우가 처음이에요.”
4년간 빛을 보지 못했던 1집 앨범이다.
그런데 10살짜리 아역배우에게 인정받다니.
구은성, 채지연 모두 기쁘면서도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그 덕분에 대화 물꼬가 터졌고.
사석처럼 편안한 자리가 되어 얘기가 술술 나왔다.
“은성 형이랑 지연 누나 진짜 대단하다. 이런 음악을 어떻게 만든 거예요?”
“네가 더 대단하지. 이야. 10살에 지금 얼마나 잘 나가는 거야?”
“그니까. 너에 비하면 우리야 한참 모자르지.”
벌써 말을 놓고 형, 누나라 부를 정도.
그때.
똑똑-
창문을 노크하는 소리.
고개를 돌리니 창문 밖에서 작가진들이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다.
[슬슬 음악 얘기 좀 부탁드립니다]
촬영시간은 정해져있는데, 아무래도 잡담이 너무 길었던 모양이다.
“아, 제가 형, 누나 팬이라서 말이 너무 많았네요. 이러다가 음악 얘기 못할 뻔!”
유진은 매우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유진이 등장한 이후.
세 사람의 대화는 유진이 주도하는 모양새였다.
“음, 응원송이라고 해도 여러 주제가 있을 거 같은데. 구체적으로 응원할 대상을 정해보는 건 어떨까요? 수험생이라든지,”
“음. 그럼 직장인은 어때?”
“퇴근길에 들으면서 힐링할 수 있는 노래?”
“오, 그거 좋은 거 같아요. 저도 퇴근길에 제 영상 보는 게 낙이라는 댓글 보면 되게 뿌듯해지거든요.”
주제를 정하는 건 매우 순조로웠다.
문제는 바로 그 다음.
“오늘 하루 수고했다, 내일도 힘내자. 이런 멜로디면 어떨까 싶은데?”
그리 말하며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채지연.
듣기만 해도 흥이 날 거 같은 경쾌한 느낌이었다.
“그런 고정관념에 사로잡힐 필요 있나? 응원송이라고 해서 꼭 아자아자 파이팅, 이래야 하는 거 아니잖아.”
곧장 구은성이 반발했다.
“그럼 어떻게 하자고?”
“직장인들의 마음을 건드려야지. 지겨운 회사생활, 갑질하는 상사, 매번 지겨운 사내정치,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일상.”
구은성은 그리 말하더니 제 목소리로 낮게 저음을 깔아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채지연과는 정반대의 느낌.
“너 응원송이 뭔지 몰라?”
“그게 우리 가로수 밴드의 방식이었잖아. 음울하면서도 냉소적인 거. 우리식대로 만드는 건데 뭐가 나빠?”
“우리만 만드는 거 아니잖아. 유진이도 있어.”
“유진이도 우리 밴드의 음악성을 이해하고 있어. 망설일 이유가 있나?”
“이거 방송이야, 구은성. 대중들이 들을 응원송이라니까?”
“방송용 음악이 따로 있는 건가?”
구은성이 말하는 건 가로수 밴드의 음악을 살린, 음울하지만 메시지가 명확한 곡이었고.
채지연이 말하는 건 ‘너의 손을 잡고’와 같은 밝고 경쾌한, 누구나 흥얼거릴 수 있는 응원송.
마지막일지 모르는 공동작업.
그를 위해 <별의 노래> 참여를 결심한 것이지만.
두 사람은 다시 첨예하게 의견이 갈렸다.
아까 훈훈했던 분위기가 모두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
“저기.”
그때.
잠자코 있던 유진이 스윽 손을 들었다.
마치 수업 도중 발표를 하고 싶어하는 학생처럼.
“그래. 유진이 네 생각은 어때?”
“어느 쪽이 좋아보여?”
두 사람의 시선이 유진에게 쏠렸다.
과연 박유진은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
“음. 둘 다 안 끌려요.”
유진이 세상 순수한 얼굴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