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씹어먹는 천재배우님-97화 (97/237)

97화

며칠 후.

"이제보니 우리 딸, 진짜 얼굴이 반쪽이 됐네."

채지연은 제 얼굴을 감싸는 어머니의 손길에 어색하게 웃었다.

"대체 거기서 얼마나 고생을 한 거야? 은성이가 너 제대로 안 먹인 건 아니고?"

"하하. 아니야, 엄마. 나 많이 먹었어. 오히려 살쪘는데?"

"얘가 거짓말은. 기다려. 금방 밥 차려줄 테니까."

5년만에 돌아온 딸이 금의환향했다고 생각한 모양.

얼마 전 발매한 노래는 꾸준히 차트에 있었고.

심지어 이번엔 TV에 나온다고 하지 않나?

“집에 오니 좋다.”

채지연이 새삼 집을 둘러보며 말했다.

돌아온 지는 제법 됐지만, 아직도 괜히 어색한 느낌이었다.

옥탑방에서 보낸 세월이 좀 길었어야지.

“자. 얼른 와서 밥 먹어.”

"와. 진수성찬이네.“

갈비찜에 오징어젓갈, 얼큰한 된장찌개에 각종 나물무침 등.

오랜만의 집밥에 채지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난 5년을 매번 컵라면, 컵밥 등으로 때웠으니.

"많이 먹어. 부족하면 말해. 더 줄 테니까. 알았지?"

상냥한 어머니의 목소리.

그야말로 밥이 술술 넘어갔다.

"아, 맞다. 이번에 엄마 친구들이랑 상가를 걷는데, 네 노래가 나오더라."

“진짜?”

"그래서 자랑했지. 이거 우리 딸 목소리다, 하고."

"뭘 또 자랑을 해."

"얘는. 뭐 부끄러운 일이니? 성공한 거지. 친구들이 사인 좀 받아달래."

얼굴을 붉히며 퉁명스레 대꾸하는 채지연이었으나.

어머니 덕분에 어깨가 펴지고,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래. 이게 맞아.'

동시에 확신도 얻었다.

지난 5년 동안은 가족들에게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때로는 걱정, 때로는 안타까움.

음악이니 뭐니 관두고 기술이나 배워라.

명절 때라도 얼굴 좀 비춰라.

미래를 생각하면 시간을 날릴 수는 없지 않느냐.

그런 소리를 심심찮게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채지연은 어머니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었다.

'언제까지고 옥탑방에서 우울한 노래만 부르고 있을 순 없어.'

채지연은 성공으로 인한 효능감을 맛보고 있었다.

소소하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인생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이번에 은성이 좀 데리고 오지 그랬어. 얼굴 못 본 지가 한참 됐는데. 걔도 좀 그렇다. 남의 딸을 몇 년간 데려갔으면 이럴 때 얼굴이라도 비춰야지.”

구은성 얘기가 나오자 채지연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었다.

“아아. 응. 미안. 나중에 데려올게.”

곧 밥그릇을 비운 채지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먹었어, 엄마. 나 방에 들어가서 일 좀 할게.”

“좀 쉬지. 무슨 일을 또 해?”

“음악 작업해야 하거든.”

“그래. 힘내고.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알았지?”

그렇게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채지연.

구석에는 어린날, 혼자 방 안에서 음악을 할 때 쓰던 장비들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가성비 좋은 중고 키보드와 마이크.

관리를 하나도 하지 않아 줄이 모두 녹슨 기타 등.

‘여기서 뮤지션으로서의 꿈을 키워나갔지.’

반면 방 오른쪽에는 새로 구입한 장비들을 세팅해놓았다.

나름 방음부스도 설치했고 말이다.

최근 돈을 좀 벌었고.

홍대 옥탑방에 돌아갈 일도 없을 테니 아예 새로 구입한 것.

‘예전 같았다면 이렇게 비싼 장비를 사는 거, 상상도 못 했겠지.’

장비들을 하나둘 살펴보던 채지연.

그녀는 얼마 전 있던 일을 떠올렸다.

‘음. 둘 다 아닌 것 같은데요?’

사전미팅 날.

첨예하게 의견이 갈린 가로수 밴드에게, 유진은 그리 말했다.

‘아. 당연히 저는 누나랑 형보단 음악을 몰라서 뭐라고 하긴 좀 그런데. 죄송해요.’

‘아냐. 너도 같이 음악을 만드는 거니까. 네 의견도 중요하지.’

‘맞아. 가감없이 말해줘.’

제시된 두 가지 선택지를 모두 거절한 유진.

구은성과 채지연은 적잖이 당황하긴 했지만, 티내지 않으려 애썼다.

‘으음. 그런데 오늘 사전미팅날 맞죠?’

유진은 그리 말하며 큰 눈망울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시작부터 왜 이러느냐고 묻는 것처럼.

‘벌써 다 정해놓을 필요는 없을 거 같아요. 여름방학 생활계획표 짜는 거랑 똑같아요. 괜히 미리 써봤자 결국엔 못 지키더라고요.’

이상한 논리였지만.

어쩐지 두 사람은 유진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엠더넷 측에서 보여준 기획서에 의하면.

<별의 노래>는 최소 6회 방영될 예정이다.

아직 이들이 촬영해야 할 분량은 많다는 것.

‘하지만 방향성 정도는 정해두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물론.

유진의 말 한마디에 고집을 버릴 거였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겠지만.

‘아. 이건 어떨까요?’

그때.

유진이 낸 아이디어 하나.

‘두 분이 각자 음악을 한 번 만들어보는 거예요. 둘 다 들어본 이후에, 그때 가서 또 얘기를 나눠보는 거죠. 저도 제가 아는 뮤지션 분들한테 부탁해서 두 분 음악에 대해 물어보려고요!’

그 중재안 아닌 중재안이 수용되었고.

구은성과 채지연은 서로의 아이디어를 토대로 음악을 만들어, 유진에게 전송하기로 했다.

이건 유진을 설득하기 위함도 있지만.

궁극적으론 구은성에게 들려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방송에 나가니까 시청자들도 분명 듣게 될 테고, 이에 대한 피드백이 올 거야. 그럼 어느 쪽 의견에 따를 건지 확실히 결정지을 수 있을 거야.’

그러기 위해선 더 대중적인 것.

더 알기 쉽고, 듣자마자 '와 좋다'라고 느낄 수 있을 만한 곡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렇게 곡 작업에 돌입하는 채지연.

그러나 마음처럼 쉽게 작업이 이뤄지진 않았다.

‘음악을 만들 땐, 항상 은성이랑 얘기를 나누며 만들었으니까.’

채지연은 구석에 쏠린 제 옛 장비들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비록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몇 시간이고 열정적으로 음악을 만들던 때가 떠올랐다.

홍대 옥탑방에서 구은성과 열심히 음악얘기를 하며 한 곡 한 곡 만들던 것도.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없는 걸까.’

어린 날과는 달라진 모습이 낯설 뿐이었다.

*

신국초등학교에서 제법 거리가 있는 건건PC방.

근처에 학교도 없고.

기껏해야 동네 주민들 중 아저씨나 대학생들이 자주 들리는 곳이다.

평소라면 PC방 치곤 조용할 그곳에.

그 구석자리를 점거한 다섯 명의 초등학생이 있었으니.

“야, 유진아! 갱 간다니까 왜 호응을 안 해!”

“아, 박유진 진짜 개트롤!”

“너 때문에 한타 개망했잖아!”

바로 유진의 반 친구들이었다.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유진을 탓하고 있었다.

유진은 벙거지 모자, 뿔테 안경, 마스크 등.

최대한 위장(?)을 한 상태.

덕분에 아직까지 들킨 적은 없다.

게다가 PC방이라는 장소가 어디인가.

결국 자기 게임하기 바쁘다.

“아오, 이게 몇 연패야.”

잠시 후.

<패배>라는 글자가 다섯 개의 PC에 동시에 출력되었다.

“그냥 유진이 쟤 탑 시키지 마.”

“그래. 야, 유진아. 차라리 서폿 가라니까! 왜 허구언날 탑만 가?”

“리얼! 맨날 솔킬만 따이면서!”

그러자 유진이 매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자고로 탑 라이너란 물러섬이 없어야 하는 법이야.”

그러자 어마어마한 역풍이 불었다.

“게임도 제일 못하는 놈이 멋은 다 부리네.”

“네 팬카페에 글 쓸 거야. 너 탑신병자라고!”

친구들이 뭐라고 떠들건 말건.

유진은 곧 키득대며 웃을 뿐이었다.

라앺 촬영이 시작되기 전.

친구들과 마음 편히 놀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으니.

그렇게 유진에 대한 민심이 흉흉해져 갈 무렵.

“아아. 난 친구들을 생각해서 사이다랑 불벅 쫙 돌리려고 했는데.”

“야, 탑라이너가 그럴 수도 있지!”

“리얼. 원래 맞으면서 크는 법이랬어.”

“맞아. 야박하게 그러지 마라!”

“게임이 승패가 뭐가 중요하냐! 중요한 건 우리가 협동했다는 사실이지!”

순식간에 태세전환을 완료한 친구들.

이렇듯 유진은 재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한 달에 몇만 원 정도의 용돈을 받으며 생활하는 아이들과 달리.

유진이 쓸 수 있는 돈은 차원이 달랐으니까.

‘물론 버릇 나빠질 수 있으니 자주 쓸만한 방법은 아니지만.’

아이들에게 PC방비 내주고, 군것질거리 사주는 거야 유진에게 일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너무 사줘서 호구 취급당하는 건 방지해야 했다.

“오, 유진아. 너 뭐냐? 엠더넷에 나와?”

다음 게임으로 넘어가기 전.

심심했는지 한 친구가 유진의 이름을 메이버에 검색한 모양.

“오, 진짜?”

“야. 이 프로그램 에이에이 나온대!”

“헐! 헐! 헐! 리얼?”

사실 지금 유진은 아이돌 에이에이고 자시고.

가로수 밴드 문제에 낀 상황이다.

‘이대로 가면 그 둘이 갈라서는 건 시간문제야.’

본래대로라면 그 밴드가 해체하건 말건 상관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그 밴드의 음악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이미 <별의 노래>에서 파트너로 묶인 상황.

만약 <별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해체되기라도 하면.

같이 엮여있는 유진에게 어떤 평가가 내려질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당연히 음원 성적도 안 좋을 게 뻔하고.

‘당장 해체하는 건 막아야 해.’

그러기 위해선.

두 사람의 의견차를 좁힐 필요가 있었다.

“얘들아. 내가 문제 하나 낼게.”

“에이에이! 에이에이! 에이에이!”

“쉿. 너네 사인 안 받아다준다?”

“죄송합니다, 형님.”

“형님이 뭐냐. 박유진 대통령님이 네 친구냐?”

“다들 조용!”

합죽이가 된 친구들.

모두의 시선이 유진에게로 쏠렸다.

‘제발 사인 좀 구해다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

“자, 하나 물어볼게. 너희들도 인정하다시피, 나는 서포터를 그나마 제일 잘하잖아. 그래서 너희들은 내가 서포터를 하길 원해. 하지만 난 탑 라인에 서는 걸 좋아하고.”

그 눈빛들을 피해.

유진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지.”

“잘하는 것, 혹은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이 갈릴 때. 너희들이라면 어떻게 할래?”

그 말에 친구들은 깊게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나라면 잘하는 거 할래. 그래야 칭찬받으니까.”

“난 하고 싶은 거. 인생 한 번인데 하고 싶은 거 해야지! 우리 아빠가 누누이 말하는 거거든.”

“근데 보통 잘하면 재밌어지지 않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여러모로 갈렸다.

이렇듯 여러모로 쉽사리 결론 내릴 수 없는 문제.

그러나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은 하게 되는 고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착각한다.

꼭 그 둘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한다고 말이다.

“그럼 유진이 넌 어떤데?”

“나 말이야? 바로 중간을 택하는 거지. 그러니까 이번 판 난 미드 갈게.”

“뭐래, 이 또라이가!”

“미드 가고 싶단 얘기 하려고 지금까지 헛소리를 늘어놓은 거야?”

“탑도 개못하는데 무슨 미드 타령이야! 봇으로 내려가, 임마.”

그러나.

유진은 재력과 에이에이 사인을 제물로 바쳐 미드 탈환에 성공했다.

‘그래. 굳이 하나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

예술성과 대중성은 양립 불가능한 게 아니다.

타협이라는 선택지가 존재하니까.

“아, 맞다, 얘들아. 이것 좀 들어주라.”

갑자기 유진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이건 또 뭔데?”

“음악.”

“음악인거 누가 몰라? 무슨 음악이냐고.”

유진의 휴대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구은성과 채지연이 보내온 음악이었다.

*

얼마 뒤, 엠더넷.

“사전미팅은 어땠어요?”

매콤한 맛 감자칩을 먹는지.

손가락과 입가가 새빨개진 신건호 국장이 물었다.

보통 국장이 신규 프로그램에 이 정도로 프로그램에 관심을 보이는 건 드문 일.

그만큼 이미지 변신을 위해 엠더넷에서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였다.

“여러모로 그림이 재미있었습니다.”

기획을 맡은 고동수가 굽신거리며 대답했다.

“에이에이랑 인디 싱어송라이터 토미 조합. 국장님의 말씀대로 여기는 걸그룹한테 둘러쌓인 숫기 없는 남자 컨셉이 단번에 잡혔습니다. 역시 국장님의 안목과 센스! 대단하십니다.”

“흐음. 오디오가 비거나 그러진 않았죠?”

“초반엔 다소 어색했습니다만, 에이에이 멤버들이 다 예능짬밥이 있어서 그런지 잘 채워줍니다. 토미의 리액션도 좋고요.”

“그거 다행이네요. 안 그러면 아이돌 쓰는 의미가 없지.”

와그작!

신건호가 감자칩을 씹어먹는 소리가 생생히 울렸다.

“또, 국장님의 혜안대로 개그맨 씨 조동연 씨와 5인조 밴드 백합여관 쪽은 매우 시너지가 좋습니다. 백합여관 멤버들의 입담이 하나같이 좋아서, 예능 분량을 쭉쭉 뽑아낼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음원은요?”

“사전미팅 단계라 아직 아이디어 수준입니다만, 아무래도 중장년층을 겨냥한 트로트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 같습니다.”

“흐음. 음원 쪽도 다양한 세대를 아우를 수 있겠군요. 훌륭해요.”

“이게 모두 국장님의 안목 덕분 아니겠습니까!”

티나게 아부 모드에 돌입한 고동수.

싫진 않은지 신건호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크흠! 그럼, 박유진과 가로수 밴드 쪽은요?”

“그게, 저희가 예상했던 것과는 좀 다른 그림이 나왔습니다.”

그 말에 감자칩을 씹던 입술이 옹졸해졌다.

신건호가 최초 그렸던 그림.

연인 사이인 가로수 밴드에, 어린 유진이 끼어 3인 가족과 같은 훈훈함을 연출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그림이라?”

“예.”

사전미팅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고동수가 상세히 털어놓았다.

그러자.

“하하! 그렇게 노골적으로 나와주면 우리야 고맙죠.”

신건호가 호탕하게 웃었다.

“이런 현실적인 그림! 얼마나 좋아요? 게다가 요즘 차트인한 인디밴드가 그런 식으로 내홍을 겪고 있다니.”

대중들이 가장 좋아하는 게 바로 싸움 구경 아닌가.

결국 시청률이 돈이 되는 세상.

다소 심심한 아이템이라 걱정이 많았는데.

덕분에 화제성도 확실히 챙길 수 있을 터.

“내분이 발생한 밴드, 거기에 박유진이 절묘하게 중재자 포지션을 잡고 있는 것도 참 흥미롭네요.”

거기에다 유진이 제안한 두 사람의 음악 비교.

이건 이 둘의 대립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요소가 될 터였다.

최초 그림과는 달라졌지만.

오히려 더 흥미로운 상황이 만들어진 셈.

“좋아요. 초반용 어그로는 이 팀으로 가는 게 좋겠어요.”

신건호 국장이 감자칩 봉지를 구기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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