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엠더넷에서 시작한 <별의 노래> 프로젝트.
신건호 국장이 직접 개입하고 챙길 만큼.
엠더넷이 특별히 신경쓰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서바이벌 프로그램처럼 커다란 기대를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아이돌 에이에이와 최근 화제인 아역배우 박유진을 섭외하긴 했으나.
그건 폭망을 막기 위한 보험에 가까웠다.
노리는 건 어디까지나 이미지 쇄신.
그런데 프로젝트 자체가 망해버리면 무슨 효과가 있겠나?
전국민 응원송이라는 취지.
인디 음악계의 뉴페이스를 발굴하기 위한 노력.
엠더넷은 그런 점들을 노골적으로 부각하여 홍보했다.
[드디어 이놈들이 음악채널로서의 본분을 다하는구나
그래 오디션 프로그램 좀 버리고 이런 것 좀 만들어라
엠개넷이 웬일임? 사장이 바뀜?
ㄴ 무슨 국장이 바뀌었단 얘긴 들어본 듯]
드디어 엠더넷이 정신을 차렸다는 식의 우호적 여론도 없진 않았으나.
[응~ 바로 악편 갈겨버릴 거 다 알아~
이래놓고 나중에 또 통수 때리겠지ㅋㅋ
걍 생색내기 용 프로그램. 출연하는 연옌들만 불쌍!]
아직 엠더넷을 신뢰하지 않는 여론이 다수.
이 때문에 내부적으로도 시청률이 1%나 나오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훌륭하네요."
매번 고동수 앞에서 감자칩을 씹던 신건호.
이번만큼은 입도, 손도 감자칩을 찾지 않았다.
매우 단정한 모습으로 국장실에 앉아있었으니.
"매우 훌륭합니다. 고동수PD. 프로그램을 매우 잘 이끌어주셨군요."
"가, 감사합니다!"
신건호의 부름을 받고 온 고동수가 고개를 숙였다.
사실 그 자신도 조금 얼떨떨했다.
설마 자신의 프로그램이 이렇게나 잘 될 줄이야.
“시청률도 1회부터 계속 상승세고, 인터넷 언급량이 늘어난 건 더욱 크게 체감되고 있어요.”
“국장님께서 많은 도움을 주신 덕분입니다.”
초반에 <별의 노래>가 주목받은 이유는 가로수 밴드의 내분.
그 초반 어그로가 제대로 먹혀든 덕분이다.
그 소재 자체가 자극적이다보니.
엠더넷도 특유의 악편을 보여주기 보단 다큐처럼 있는 그대로를 방영했다.
덕분에 예능적 색채는 다소 옅은 게 흠이긴 하지만.
그거야 어차피 다른 팀들이 충분히 메꿔주고 있었다.
“도움은 무슨. 여러모로 예측할 수 없는 팀이었어요, 박유진 쪽은.”
허허 웃는 신건호.
무엇보다 대중들은 드라마에 매료되는 법.
때문에 제작진은 유진 팀을 적극 푸시했다.
“내심 걱정도 했어요. 너무 나가면 어쩌나 싶었죠.”
박유진 팀의 분위기가 너무 과열되면 개입할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이미지 쇄신용 프로그램에서 밴드가 해체되기라도 한다면?
엠더넷으로서도 말짱 도루묵이니까.
그런데.
“박유진이 완충제 역할을 정말 잘하더군요.”
“설마 거기서 레옹이 등장할 줄은 몰랐습니다. 레옹이 등장했을 때 순간 시청률은 5%까지 치솟았습니다."
“레옹을 섭외한 게 박유진 측 독단이었다죠?”
“네. 뮤지션을 섭외할 거라고 말은 했습니다만, 설마 그게 레옹일 줄이야.”
심지어 엠더넷 측에 협조를 구한 것도 아니다.
단독으로 레옹 급을 섭외했고.
그리 멋진 그림을 뽑아낸 것.
박유진 덕분에 뜻밖의 드라마가 완성된 셈이다.
"흠. 그런데 박유진 소속사가 어디죠?"
"주역 매니지먼트입니다."
"으음. 영세한 곳이라 네트워크도 없을 텐데. 대체 어떻게 한 걸까요?"
참으로 미스테리한 일이었다.
아무리 핫하다고 해도, 데뷔한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아역배우다.
배우 쪽 인맥이 제법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뮤지션 쪽에서도 이런 의외의 인맥이 있었을 줄이야.
아무튼 박유진 덕에.
[갈등, 화해, 성장. 엠더넷의 <별의 노래>, 모든 걸 다 잡았다]
[경쟁과 상처 대신, 대화와 배려······<별의 노래>가 던지는 묵직한 교훈]
시청률은 물론 대외적 평가까지 좋았으니.
<별의 노래> 기획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한권주 배우에게 감사라도 전해야겠네요."
한권주가 빠지며 유진을 추천해주었으니 말이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네요. 만약 한권주 배우가 그대로 픽스 되었다면 어땠을까요?”
“음. 글쎄요. 이미지로만 보자면······궁합은 최악이었을 것 같습니다.”
요즘 이미지가 바뀌었다곤 하나.
한권주는 냉정하다고 알려져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내분을 수습한 이후 나온 가로수 밴드의 음악은 호평 일색이었다.
아직 가삿말을 붙이지 않은 상태임에도 말이다.
[와 노래 뭐임??
짬짜면 먹는 기분ㅋㅋ
도중에 분위기 반전되는 거 완전 좋네 기타 리프 소리 ㅁㅊㄷ
바로 이런 거지! 신선함!]
인디밴드 발굴의 효능감까지 느끼는 중.
가로수 밴드가 가지고 있던 독특한 음악성.
그게 적절히 대중성을 갖추어가기 시작했고.
[얼른 음원발매 좀
젤 기대되는게 박유진네쪽임
박유진이 가사 쓴댔나?? 유치하지만 않으면 좋을듯]
이젠 정말 꽃을 피울 모양이다.
"이대로라면 음원 수익도 기대해볼 법하겠어요."
웃으며 말하는 신건호.
감자칩 같은 걸 먹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배부른 기분이었다.
*
가로수 밴드의 작업실 겸 집인 홍대 옥탑방.
최근엔 채지연이 본가로 돌아가는 통에 쓸쓸했던 곳이지만.
오랜만에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채지연이 옥탑방으로 돌아왔고.
유진이 손님으로 찾아온 덕분.
“그 항상 동행하시는 분은?”
“우리 사장님이요? 차에서 대기한다고 하셨어요. 사모님, 아니. 실장님이 임신 중이라 매번 영상통화 하면서 챙기시거든요.”
요즘 차동석은 매번 장미소의 몸상태를 체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정작 장미소 본인은 아무 문제 없이 잘만 일하고 있는데 말이다.
“아 그래? 나중에 출산하시면 말해줘. 선물이라도 보내드려야겠다.”
“곧 사무실도 옮기신대. 우리 나중에 한 번 찾아가자.”
“그것도 좋겠다. 아무튼, 우리 작업실에 어서 와. 좀 지저분하지? 미안해.”
태연하게 말하는 구은성.
아닌 게 아니라, 옥탑방은 정말 난장판이었다.
배달음식을 먹은 뒤의 용기며 과자봉지, 비닐봉투 등.
잡다한 쓰레기들이 무질서하게 널려있었으니.
“지연 누나 없다고 이렇게 된 거예요?”
유진의 질문에 대답한 건 채지연 쪽이었다.
“아니. 평소에도 이랬어.”
아무래도 두 사람 다 깔끔한 성격은 아닌 모양이다.
다만.
“헐. 나 없다고 밤새 술이라도 깠어? 이게 다 뭐야.”
굴러다니는 맥주캔과 소주병을 보며 채지연이 킥킥댔다.
“그런 거 아니거든.”
“뭐가 아니야? 평소 술도 잘 안 마시는 녀석이.”
“아니라니깐!”
얼굴이 빨개진 구은성과, 그런 구은성을 놀리며 좋아하는 채지연.
서로 다른 점이 있어도.
또 비슷한 부분이 있기에 함께 살아가는 것이리라.
“얼른 녹음이나 하자.”
사실 옥탑방이 아니라 전문 스튜디오를 이용하는 쪽이 더 좋을 터.
믹싱, 마스터링 모두 엠더넷 측에서 지원해준다고 했다.
하지만 이 팀은 옥탑방을 고집했다.
“우리 음악은 다 여기서 나왔으니까.”
사람이 바뀐다고 고향이 달라지지 않듯.
가로수 밴드의 음악이 조금 더 친숙하게 변했다고 해서 녹음장소까지 달라질 필요는 없는 모양.
“가이드는 다 따놨어. 유진아 어떻게 할래? 좀 쉴래? 아니면 곧바로 레코딩 들어갈까?”
“얼른 녹음하고 싶어요. 저 지금 딱 삘이 온 거 같거든요.”
뒤꿈치로 박자를 밟는 유진.
그걸 보며 구은성과 채지연이 피식 웃었다.
“자, 그럼 여기 앉아. 헤드폰 쓰고, 여기 마이크에 대고 부르면 돼.”
“잘해, 작사가님.”
채지연이 파이팅하라는 듯 주먹을 쥐었다.
<별의 노래>는 함께 응원송을 만드는 것이 취지.
가로수 밴드가 작곡을 했으니.
유진이 작사를 맡기로 한 것.
물론 첫 작사라 두 사람이 어느 정도 수정을 거치긴 했으나.
최대한 유진의 원안을 살리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넵! 잘 해보겠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하는 유진.
곧 헤드폰을 통해 가로수 밴드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구은성이 짜놓은 우울한 멜로디.
그 위에 덧입힌 유진의 가사들.
지하철에 올라타니
덜컹거리며 어디론가 실려가는 사람들
창밖은 보이지 않고
어디로 가는 걸까
다들 무엇을 생각할까
텅 빈 주머니를 뒤적여본다
구은성의 저음.
거기에 마이너한 코드가 깔리며 칙칙한 느낌을 더했다.
마치 월요일 출근길 아침처럼.
그러다.
곧 분위기가 전환되며 키치하고 밝아졌다.
마치 터널을 통과한 뒤 지상으로 올라와 햇빛이 드는 지하철의 느낌.
모두 품고 있는 가슴 속 씨앗
그 꿈들이 피어나지 못했어도
사라진 게 아니야
여전히 그 자리 그곳에서
산뜻한 채지연의 목소리가 흘러나온 뒤.
후렴 부분.
괜찮아
계속 바라봐
곧 때가 올 거야
나를 믿고 기다려줘 곧
너의 가슴 속에서 피어나
구은성의 음울한 감성과 채지연의 대중적 감수성.
거기에 유진의 천진하고 순수한 가사가 덧입혀졌다.
세 사람이 함께 만든 노래.
‘피어나’다.
“이야. 넌 어떻게 노래까지 잘하냐?”
최소한의 리테이크로 녹음을 끝낸 유진.
그런 유진을 향해 구은성이 감탄하며 말했다.
“형이 해준 가이드가 엄청 좋아서요. 그리고 잘하는 건 아니고, 그냥 열심히 불러요. 나중에 뮤지컬 할 수도 있으니깐.”
“이야. 준비성 좋네. 너 학교 공부도 다 예습하지?”
“아뇨? 예습, 복습 안 해도 다 100점이거든요.”
“우와. 뭔가 재수 없어.”
“아, 맞다. 그거 어떻게 됐어요?”
“그거라니?”
“OST요. 염라 전용 테마. 음악감독님이 의뢰하셨댔는데?”
그 말에 채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맞다. 연락받았어. 저번 방송 보고 연락 주셨다는데.”
“근데 시간이 엄청 촉박해. 3주 안에 곡을 만들어야 한다네. 그게 말이 되니?”
라앺의 촬영 및 방영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래서 안 하시려고요? 아쉽다.”
유진으로서도 기대가 됐다.
자신이 맡을 염라의 테마를 가로수 밴드가 만들어준다면 의미가 클 테니까.
“아니. 그깟 밤 몇 번 새면 되지, 그게 뭐 어려워?”
채지연이 쿨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진즉에 작업했으면 얼마나 좋아. 내가 OST 제의 왔을 땐 은성이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니까?”
“아니, 그때랑 지금은 다르지.”
“뭐가 다른데?”
구은성은 대답 대신 유진을 바라보았다.
<별의 노래> 시작 전.
그에게 있어 유진은 그냥 연기 잘하는 아역배우였을 뿐이다.
그러나 <별의 노래>를 촬영하며 갈등을 잘 중재해준 것도.
자신의 우상이었던 레옹 밴드를 만나게 해준 것도.
모두 유진 덕분이었다.
“걱정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만들 거니까.”
그게 바로 구은성이 이번에 느낀 것.
바로 책임감이니까.
“넵. 무리해서라도 만들어주세요!”
해사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유진.
그러자 두 사람이 빵 터졌다.
“이럴 땐 무리하지 말라고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아무튼.
가로수 밴드는 충실히 균형점을 찾아가고 있었다.
*
얼마 뒤.
“지니!”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 리딩 종료 이후.
유유연이 유진의 애칭을 부르며 다가왔다.
“오늘 리딩 좋았어.”
“누나도요. PD님도 되게 좋아하시는 것 같았어요.”
주연 배우들이 모두 모여 4화까지 리딩을 진행했다.
유진은 3화 끝에서야 등장하기 때문에 분량 자체는 많지 않았으나.
"근데 염라랑 유유연의 첫만남 장면 말인데. 이쪽을 좀 더 근엄하게 해보면 어떨까? 굳이 코믹하게 안 해도 상황 자체가 재밌어서. 오히려 무게를 잡을수록 더 재미있게 보일 거 같아."
"아하, 네. 안 그래도 그 장면은 여러 테이크 찍을 거 같더라고요. 누나 말대로 한 번 해볼게요."
드라마든 영화든 이런 방식은 흔하다.
다양한 테이크를 찍어놓고.
추후 편집할 때 가장 자연스럽고 어울리는 테이크를 픽하는 방식.
그러니 배우로선 여러 상황, 감정을 대비해놓는 것이 좋다.
“어때요?”
유유연의 주문대로 좀 더 무게감 있게 표현해본 유진.
"오, 역시. 완전 좋아! 역시 지니야. 척하면 척이구나?"
쌍따봉을 날리는 유유연.
그러자 유진도 유유연을 향해 맞따봉을 날려주었다.
유유연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기로 했으니.
실제로 이번 리딩에서도 유유연은 빠르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각 캐릭터의 대사가 대본 몇 페이지, 몇 번째 줄에 있는지조차 외워버렸으니.
“아, 맞다. 이번 <별의 노래> 잘 봤어.”
"어땠어요?"
"‘피어나’ 작사를 네가 했다며? 대박. 이러다 곧 음악가로 데뷔하는 거 아니야?"
"저 이미 음악가거든요? 이래 봬도 차트인 경력자니까."
이미 <날개> OST인 '날아가'로 돌풍을 일으킨 유진 아니었나.
“음원 발매된 게 어제지?”
“네. 방송 끝나자마자 바로 풀렸다고 했어요.”
“차트 몇 위인지 확인 안 했어?”
“라앺 리딩 준비하느라 깜빡했어요.”
유진에겐 어디까지나 연기가 일순위였으니.
“그럼 지금 확인해보자.”
유유연이 휴대폰을 꺼내 뮤직플랫폼 ‘망고’에 접속했다.
실시간 차트를 훑어보던 유유연.
그녀의 눈동자에 곧 놀라움이 깃들었다.
“오, 대박!”
“왜요? 왜요?”
“지금 ‘피어나’ 10위권이야!”
그리 말하며 유유연이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덕분에 유진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7위 – 피어나
아티스트 - 가로수(밴드), 박유진>
<8위 – Way To Go
아티스트 – 에이에이, 토미>
심지어 아이돌 에이에이의 팀보다도 한 단계 높았다.
<별의 노래>에서 가로수 밴드가 보여준 드라마.
그게 제대로 대중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모양.
‘잘됐네. 이걸로 두 사람도 앞으로의 음악성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됐을 거야.’
대중성과 가로수 밴드만의 음악성.
그 사이에서 고민하던 것에 대한 답을.
“이거 축하파티라도 해야겠는데? 뒤에 스케줄 있어? 없으면 같이 밥먹자. 누나가 맛있는 거 사줄게.”
“고맙습니다! 근데 어쩌죠? 저 바로 이동해야 해서요.”
“역시 잘 나가. 혹시 어디 가는지 알려줄 수 있어?”
유진이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말했다.
“<데드맨> 1000만 돌파 행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