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그놈들은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돼요! 내쫓을 땐 언제고 우리 회사의 인재를 노려?”
차동석이 그리 분노하는 것도 당연하다.
DV 엔터.
차동석의 전 직장인 대형 엔터.
팀장으로서 그 개고생을 하고서 잘렸으니, 어찌 그곳을 좋아하겠나.
“뭐 정보가 새어나가진 않았겠지?”
“유진이랑 계약할 때를 생각해봐. 그게 새어나갈 구석이 있나. 그렇다고 유진이네 쪽이 흘렸을 리도 만무해. 그랬다면 소문이 돌았겠지.”
“캐내려다 정보가 없으니 포기한 건가? 흥. DV놈들 헛수고하네.”
차동석은 콧방귀를 뀌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몇 년이 지나도 대형기획사 놈들 양아치 짓은 여전하네.”
그러자 장미소가 차동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역 혹사 논란 때 DV도 털렸잖아. 계약 해지도 많이 당하고. 곧 해체된다는 소문이 있어.”
“내가 어떻게 일궈놓은 팀인데 그렇게 말아먹지? 심지어 애들까지 혹사시키고. 쓰레기 같은 놈들!”
차동석이 분개해 이를 갈았다.
이럴 때면 그의 험상 궂은 얼굴이 마치 조폭과 같은 포스를 풍겼다.
“그런 놈들이 백번 찔러봐라. 유진이가 거기로 넘어가나.”
그러나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무섭도록 싸늘한 장미소의 얼굴이었다.
“오빠. 어떻게 그렇게 자신해?”
“유진이가 설마 뭐 다른 곳 가겠어? 계약기간도 아직 남았는데.”
“계약기간이 끝나면?”
“끝나면? 당연히 재계약해야지. 우리 이제 이사도 할 거고. 사람도 많이 뽑았는데. 우리도 이제 어엿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단계잖아.”
이제 사무실 이사도 추진하고 있고.
앞으로 아역배우 영입도 점차 늘려갈 예정이었다.
이제 주역 매니지먼트도 덩치를 키워가는 과정.
비록 대형엔터와 비교하면 한참 모자르지만.
계속 성장해나가는 과정에 있다.
“냉정히 생각해봐. 그런다고 우리가 DV 같은 대형엔터랑 비빌 수 있는지.”
장미소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장해나가는 과정이라는 건.
아직 부족하다는 얘기와 똑같았다.
“만약에 계약기간 채우고 유진이가 떠나겠다고 하면 답이 없잖아.”
“떠나? 유진이가? 에이. 말도 안 돼.”
“유진이 지금 몸값 어마어마할 거야. 어쩌면 시장에서 평가하기론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겠지. 게다가 지금 그 아이는 갈수록 더 제 가치를 올려나가고 있어.”
데뷔 후 2년간.
유진은 그야말로 폭주기관차나 다름없었다.
장르와 규모에 상관없이 참여한 작품마다 큰 화제를 몰고 왔고.
스윗터와 넙튜브의 파급력으로 광고, 협찬까지 따냈다.
앞으로 유진의 몸값이 더 뛸 거라는 건 자명한 사실.
그건 그 누구보다 주역 매니지먼트 사람들이 제일 잘 알고 있다.
“에이. 유진이는 돈 신경 안 써. 그러니까 공모전 당선작 단막극, 연극도 하잖아.”
“오빠. 유진이의 꿈이 뭐랬지?”
“뭐? 꿈? 음. 집을 사는 거랬지, 아마.”
“그래.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계약금을 들이밀면, 유진이랑 아버님이 안 흔들리겠어?”
장미소의 현실적인 지적.
그게 차동석을 아프게 찔렀다.
혼자서 네트워크를 구축할 정도로 능력이 좋고, 호감을 사는 차동석이지만.
그게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할 때도 있다.
지금처럼 사람을 너무 믿는 구석이 있는 것.
엔터 업계에서 몇 년을 일했는데 말이다.
“돈 앞에 장사 없어. 2년 전 생각 안 나? 우리 배우들 다 뺏긴 거. 오빠랑 형, 동생 하던 인간들도 홀랑 날랐잖아.”
차동석이 DV 엔터에서 토사구팽 당하던 시절.
의리로 주역 매니지먼트와 계약했던 배우들이 몇 있다.
그러나 결국 그들도 의리를 저버리고 실리를 택했다.
배우 복지, 케어, 계약금······.
모두 대형엔터엔 상대가 안 되는 것이 사실.
“낭만 좋아, 오빠. 나도 지난 2년 동안 그게 뭔지 알았어. 하지만 계약서는 현실이잖아. 협상 때마다 악마처럼 구는 사람이 그걸 몰라?”
물론 유진이 나간다고 해도 이지혜가 있다.
그러나 이지혜 역시 유진을 보고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
그만큼.
무너져가던 주역 매니지먼트를 멱살 잡고 끌어올린 것은 유진의 개인기였다.
“이 기회에 일찌감치 유진이랑 재계약하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우를 해줘야 해. 안 그러면.”
DV엔터가 접근해오긴 했으나.
주역 매니지먼트의 적은 비단 DV엔터 뿐만이 아니었다.
박유진 정도면 아역팀이 없는 엔터에서도 군침을 흘릴 테니까.
“우리, 또 빼앗길 수도 있어.”
이번만큼은 뺏기면 안 된다.
장미소에게서 차원이 다른 절박함이 느껴졌다.
*
엠더넷 회사 복도.
<별의 노래> 기획PD인 고동수가 국장실에서 나오던 참이었다.
“어? 동수PD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동수가 고개를 돌렸다.
곧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한 고동수.
그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어? 주현 씨 아니야!”
“와. 이게 얼마만이예요?”
고동수는 상대방에게 다가가 악수를 나눴다.
그녀는 바로 김주현.
고동수와 몇 번 프로그램을 같이 한 적이 있는 배우 겸 가수다.
“잠깐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시간 괜찮으세요?”
“주현 씨가 마시자고 하면 없는 시간도 만들어야지.”
두 사람은 복도 끝에 있는 자판기로 걸어갔다.
커피 두 잔을 뽑은 고동수는 곧 종이컵을 김주현에게 내밀었다.
“회사 올 거였으면 연락하지 그랬어.”
“요즘 바쁘신데 방해할까봐 그랬죠.”
“방해는 무슨. 그런데 우리 회사엔 어쩐 일이야?”
“이번에 엠더넷에서 프로그램 하나 하거든요. 그거 미팅 때문에.”
“와. 지금 드라마 촬영하고 있는 도중 아니야? 얼마 전에는 싱글도 냈고. 진짜 바쁘게 사네.”
그 말에 김주현이 씨익 웃었다.
“자식 키우려면 열심히 벌어야죠.”
“하긴. 자식새끼가 최고의 원동력이지. 그래도 주현 씨 정도면 평생 놀고먹을 정도로 벌었잖아?”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니기는? 연기도 잘 해, 노래도 잘 해. 이번에 싱글도 차트인 했지? 진짜 대단하단 말이야.”
김주현.
연기와 노래 모두 만능이라 평가받는 멀티 엔터테이너.
특히 20대 때는 ‘남심폭격기’, ‘천재 아티스트’라 불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
결혼하고서 30대에 접어든 지금에는 인기가 조금 식긴 했으나.
그녀의 재능은 여전히 다양한 분야에서 발휘되는 중이다.
“PD님도 축하드려요. 이번에 기획하신 프로그램 대박 났다면서요? <별의 노래>.”
김주현의 축하에 고동수가 멋쩍은 듯 미소 지었다.
“하하. 고마워. 사실 내가 뭘 했다기 보단, 운이 좋았지. 국장님이 많이 도와주시고. 설마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어.”
“특히 가로수랑 박유진의 곡. 아직도 차트 상위권에 있던데요.”
김주현의 말대로.
[4위 - 꿈결엔
아티스트 – 김주현]
[5위 – 피어나
아티스트 – 가로수(밴드), 박유진]
‘피어나’는 아직도 음원차트 톱텐 안에 생존 중이다.
<별의 노래> 음원 중 유일하게 말이다.
평점도 매우 높고.
대중들의 감상평도 매우 호의적이었다.
[멜로디가 뻔하지 않고 훌륭함 ㅇㅇ
요즘 댄스곡, EDM 파티라 귀가 지쳤는데 제대로 힐링
가사가 너무 예쁨 ㅠㅠㅠ 모두 가슴 속에 씨앗 하나 가지고 있다니...
퇴근길에 이거 듣는데 진짜 울컥...
이 음악 덕분에 내일도 출근할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가로수 밴드와 박유진 배우님께 감사합니다.]
특히 직장인들의 심금을 울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응원송이라는 기획에 가장 잘 어울리는 팀이었고, 결과물이었다.
“박유진 섭외한 게 신의 한수였던 거 같아.”
박유진.
고동수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자 김주현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근데 그 음악이요. 그거 진짜 박유진이 쓴 거예요? 대필해준 거 아니고?”
“그럼. 당연히 박유진이 쓴 거지. 요즘 같은 때에 조작 같은 거 하면 바로 골로 가는데.”
“아아. 그렇구나. 와. 진짜 대단하네요. 이제 고작 10살인데.”
“그러네. 이야, 연기도 잘해 음원도 잘 나가. 완전 리틀 김주현 아니야?”
“하하. 저보다 훨씬 잘난 거죠. 그쪽은 벌써 천만영화 배우잖아요.”
그리 말하며 김주현은 종이컵에 남은 커피를 다 털어마셨다.
“아, 그러고 보니 주현 씨 아들도 올해 10살이던가?”
“네, 맞아요.”
“별일 없지? 잘 지내고?”
“하하. 맨날 엄마를 따라잡겠다고 난리예요. 귀여 워죽겠다니까요.”
“기특하네. 우리 딸은 이제 집에 가도 반겨주지도 않는데. 하긴 뭐. 주현 씨 아들이면 그 재능 다 물려받았을 거 아니야.”
“그러면 좋겠는데 말이죠.”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김주현.
쓰레기통에 종이컵을 던져넣었다.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았죠? 그럼 이제 전 가볼게요, 피디님.”
“붙잡기는. 주현 씨가 더 바쁠 텐데. 또 스케줄 있는 거 아니야?”
그 말에 김주현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제 아들 보러 가야죠,”
*
신국초등학교 4층 복도 끝.
통화 중이던 유진은 한권주의 말에 곧장 반문했다.
“그게 정말이에요?”
“그래. 정말이야.”
그 대답에 유진은 목덜미를 긁적였다.
한혜성의 일이 잘 풀려도 너무 잘 풀린 탓.
한혜성의 여친은 유진이 춤추는 모습을 보고 홀딱 깨버렸고.
그 직후 한혜성이 춤추는 모습을 보고 홀딱 반했단다.
‘이렇게 잘 풀릴 줄은 상상도 못했네. 역시 어린애들이라 그런가?’
유진이 노린 것은 한혜성이 자신감을 얻는 것 정도였다.
자신은 춤에 소질이 없고, 한혜성이 춤을 좋아한다고 했으니.
적어도 ‘내가 박유진보단 춤을 잘 춘다’는 자신감이라도 불어넣어주려 했던 것.
‘그 여친더러 강제로 나를 싫어하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설마 춤 한 번 췄다고 바로 유진을 손절해버릴 줄이야.
‘하긴. 8살이면 뭐든 빨리 좋아하고, 빨리 싫어하는 편이지.’
그래도.
유진의 마음 한편에 몰려오는 씁쓸함은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팬 하나를 잃은 건가 싶다.
“근데 삼촌. 제 춤이 그렇게 별로예요?”
“······.”
“말 안 해도 알겠네. 대답 고마워요.”
때론 침묵은 그 어떤 대답보다 효과적인 법이었다.
그래도 한혜성의 여친을 뺀 다른 사람들은 유진의 춤을 좋아했다.
갓 태어난 기린처럼 춤추는 모습이 귀엽다나 뭐라나.
“정말 고맙다.”
“아뇨. 넙튜브 컨텐츠 찍는 김에 겸사겸사 한 거니까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유진이 한혜성의 일로 이렇게까지 나선 이유가 있다.
유진이 누군가.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이면서.
동시에 빚이 있으면 반드시 받아내는 사람이다.
“삼촌. 삼촌 일본에서 작품한 적 있죠?”
“어. 몇 번 드라마에 출연했지.”
한권주가 출연한 대부분의 드라마는 일본에서 히트를 쳤다.
덕분에 일본에서 한권주는 ‘실장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중.
“그럼 일본어 잘하시겠다. 그죠?”
“어려서부터 쭉 공부했으니까.”
그 대답은 유진을 흡족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자신과 재오의 일본어 연기를 도와줄, 훌륭한 선생을 확보한 셈이니까.
유진에게 빚이 생긴 한권주는 결코 나중에 이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왜?”
그러나 그건 그때 가서 말할 일.
“음, 아니에요. 아무튼 잘 됐다, 잘 됐어! 저 학교라서 나중에 또 연락할게요 삼촌.”
뚝.
전화를 끊은 유진은 교실로 돌아갔다.
“왔다!”
“갓유진! 갓유진! 갓유진!”
그런데 유진이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그를 추앙하는 듯한 외침이 3학년 1반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신은 존재한다. 바로 내 눈 앞에.”
“아냐. 에이에이가 여신들이니까 유진이는 신의 사자인 거지.”
“뭐든 상관없어. 갓유진! 갓유진!”
“너 평생 미드해. 넌 신국초의 훼이커야!”
유진의 PC방 친구들이 온갖 호들갑을 떨어대고 있었으니.
이들이 이렇게 유진을 찬양하는 이유.
유진이 진짜로 에이에이의 사인을 구해다주었기 때문이다.
‘원래 진짜 받아다줄 생각은 없었는데.’
물론 재오 등의 인맥을 이용하면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만.
자신을 겜알못이라 놀리는 녀석들에게 뭐 그렇게까지.
그런데 <별의 노래> 촬영 도중.
유진은 에이에이와 만날 기회가 생겼다.
음악 예능이라면 빠질 수 없는 코너.
바로 중간점검 시간이 있었기 때문.
‘안녕하세요! 아역배우 박유진입니다. 팬인데 혹시 사인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 덕에 다른 팀이었던 유진도 아이돌 에이에이와 만날 수 있었고.
어렵지 않게 사인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것도 전 멤버들의 사인을.
'와. 와! 저희도 완전 팬이에요.'
'악수 한 번만 해도 돼요?'
'저도 해줘요!'
놀랍게도 에이에이 역시 유진의 팬이었다는 것.
덕분에 유진은 에이에이 멤버들에게 모두 사인을 해줘야만 했다.
서로 사인 5장씩을 주고 받았으니 나름 합리적(?) 교환이었다.
“나도 사인 받아다줘!”
“난 빅터! 유이치 오빠 꺼!”
냄새를 맡은 다른 아이들이 유진에게 몰려들려 할 때.
“어허! 무엄하다! 다들 물러서라!”
“박유진 전하와 얘기를 나누고 싶다면 나를 통해라.”
에이에이 사인으로 무장한 PC방 친구들.
하나같이 유진의 호위무사를 자처했다.
“이야. 너희 사극 연기 잘하는데?”
유진은 그 뒤에서 그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자, 모두 자리에 앉아요.”
물론 담임선생님이 등장하자 호위무사고 뭐고 없어졌지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아이들은 혹여 누군가 사인을 훔쳐가진 않을까.
각기 제 품에 꼬옥 안고 있었다.
‘귀엽다, 귀여워.’
그 모습을 보며 유진이 피식 웃고 있을 때.
“자, 여러분, 오늘 우리 3학년 1반에 새로운 친구가 왔어요.”
담임선생님이 손짓을 하자, 앞문이 열리고 누군가 걸어 들어왔다.
"새로운 전학생을 소개할게요. 자, 자기소개 해보렴.“
“안녕하세요. 정기열입니다.”
초등학교에서 전학생이 오는 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다만.
“엥?”
그 전학생이 아는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지는 법.
“헐. 쟤 걔 아니야?”
“왜? 뭔데?”
“너 몰라? 김주현 아들 말이야!”
“김주현? 그 예쁜 가수 언니?”
“바보야. 김주현은 배우거든?”
“네가 더 바보야. 그 사람 배우랑 가수 둘 다 해!”
톱스타 김주현의 아들.
동시에.
‘쟤가 왜 여기서 나와?’
회귀 전.
유진과 친구였던 녀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