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홍대 가로수 밴드의 옥탑방에서는.
“드디어 오케이야!”
메일함을 확인한 구은성이 탄성을 내질렀다.
[안녕하세요.
드라마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 음악감독 고윤입니다.
보내주신 수정본 잘 들었습니다.
더는 수정요청할 사항이 없습니다.
촉박한 시간 속에서도 좋은 음악을 만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차후 다시 전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때 못다한 회포를 풀면 좋겠습니다 ^^
-음악감독 고윤 드림.]
“진짜? 진짜지?”
그러자 옆에 있던 채지연도 만세를 불렀다.
서로 껴안으며 자축하는 두 사람.
그들의 PC에 보이는 파일명.
‘최종의최종의최종의진짜최종.WAV’였다.
“와. 이 음악감독이라는 사람 되게 빡세다.”
“수정 요청만 몇 번이 들어온 거냐고. 아으, 갑자기 졸리네.”
호기롭게 라앺 OST 작업을 받아들인 가로수 밴드지만.
이번 작업은 상상 이상으로 어려웠다.
음악감독과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 매우 험난했으니까.
[다 좋았습니다만 2분 10초경 이 부분은······]
[곡의 유기성을 생각했을 땐 이 악기 부분은 빼는 것이······]
기껏 피드백을 받아들여 수정본을 보낼 때마다 더 많은 수정사항이 도착했고.
구은성이 나서서 음악감독과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다행히 고윤은 가로수 밴드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해서 지킬 건 지키고, 덜어낼 건 덜어내고, 추가할 건 추가하고.
겨우겨우 이번 테마곡이 완성되었다.
“진짜 일정 빡셌다······죽는줄.”
“진짜로. 와, 일주일 동안은 잠도 제대로 못 잔 거 같아.”
“음악을 이렇게 만들어본 건 처음 아니야?”
인디밴드답게 가로수 밴드는 앨범을 내고 싶을 때 내고, 음악을 만들고 싶을 때 만들었다.
그러나 이번 작업은 처음으로 마감시간이라는 것이 생겼고.
워낙 시간이 촉박했기에 두 사람은 잠까지 줄여가며 작업에 매진해야 했다.
“그런데 그 음악감독님도 잠을안 자나봐. 새벽에 보내도 바로 확인하더라.”
“답장도 엄청 금방 오고. 드라마 쪽이 빡세다고 듣긴 했는데, 설마 그 정도일 줄이야.”
“이렇게 수정하고 나니까 뭔가 원안에서 엄청 많이 바뀐 거 같기도 하고.”
“말나온 김에, 우리 처음이랑 최종본 한 번 비교해볼까?”
“오, 재밌겠네. 한 번 틀어보자.”
그렇게 두 음악을 비교해본 두 사람.
사실 큰 줄기는 변하지 않았으나.
디테일적인 부분에선 여러 변화가 있었다.
“확실히 최종이 낫다.”
“······그렇지?”
“역시 음악감독 같은 자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봐.”
그래서일까.
느낌은 비슷해도, 확실히 마지막 수정본이 더 직관적이었다.
수정을 하지 않은 원안은 다소 불친절한 사운드로 이질감이 느껴졌다면.
다소 정리된 최종본은 듣는 것만으로도 ‘염라’라는 캐릭터가 어떤 느낌인지 전달해주었다.
“이런 게 레옹 분들이 말한 그거겠지. 누구한테 들려줘도 알기 쉽게 만들라고.”
음악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려고 만드는 것이다.
구은성의 우상, 레옹 밴드는 그리 말했다.
그리고 이번 OST 작업은 정확히 그 단계를 밟아나갔다.
“진짜 음악은 어려운 거네. 차트인 몇 번 했다고 나름 자신이 있었는데.”
장난스레 만든 ‘너의 손을 잡고’.
그리고 유진과 같이 만든 ‘피어나’.
두 노래의 차트인으로 나름 대중성에 감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OST 작업을 통해 다시금 깨달았다.
자신들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인지.
“그래도 대충 감이 잡히네.”
이제 어떻게 음악을 만들면 좋을지.
덕분에 구은성도 힌트를 얻은 기분이었다.
아직도 가로수 밴드만의 색깔과 대중성.
그 두 개를 합쳐가는 과정에 있다.
유진과 함께 만든 ‘피어나’가 성공하긴 했으나, 아직 배워가는 단계.
이번 OST 작업은 그 확실한 길잡이 역할을 해준 느낌이랄까.
“참여하길 잘했지?”
거보라는 듯.
웃으며 묻는 채지연의 말에 구은성은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뭐. 나쁘진 않네.”
협업의 과정.
<별의 노래>를 통해서 그들이 배워나간 가치였다.
앞으로 그들이 2인조 밴드로서 나아가야할 길이기도 하고 말이다.
“근데 되게 멋있겠다. 우리가 만든 음악이 깔리고, 유진이가 쫙 등장하는 거야.”
“그러네. 그것도 지상파 드라마에서!”
유진이 소화해낼 염라가 등장하는 순간.
가로수 밴드가 만들어낸 테마곡이 깔릴 것이다.
그 시너지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염라 테마곡의 제목은.
‘낮과 밤’이었다.
*
다음날, 한국대학교.
주말인지라 평일에 비해선 사람이 적었다.
그러나 주말이라고 놀러나온 동네 주민들.
그리고 동아리, 주말 강의 등으로 학교에 오는 몇몇 학생들이 있었다.
그런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카메라와 마이크를 비롯한 각종 방송장비.
그리고 어마어마한 인파였다.
“뭐야? 무슨 촬영 있나?”
“헉. 저거 유유연 아니야?”
“그럼 라앺? 라앺 촬영인가 봐!”
“미친! 한국대에서 찍는 거야?”
바로 드라마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의 촬영 때문.
원작의 이름값, 참여배우들의 싱크로율이 높아 방영 전부터 엄청난 기대를 받고 있는 작품이었다.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휴대폰을 꺼내들고 사진을 찍으려고 했으나.
“찍으시면 안 됩니다!”
“사진 지워주세요!”
현장 스태프들이 황급히 제지했다.
안 그래도 방영 전부터 관심이 많아 내부정부가 새어나가 몸살을 앓고 있다.
그 기대치만큼 부작용도 겪고 있는 것.
“모두 물러나주세요!”
그렇게 한국대학교 캠퍼스는 여러 사람들로 득실대는 가운데.
“후우.”
촬영지 안, 주연배우 유유연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첫 촬영이었는데.
분장팀에게 메이크업을 받는 그녀의 얼굴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왜 그래요, 유연 씨? 표정이 많이 안 좋네.”
분장팀 스탭이 물었다.
그러자 유유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긴장해서 그런가봐요.”
악플 때문에 잠시 휴식기를 가졌던 그녀가 아닌가.
아직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 환경은 다소 부담이 됐다.
첫 촬영이라는 기대감은 불안감과 압박감으로 변질되었고.
유유연의 텐션을 낮추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잘 해야해. 실수하면 사람들이 비웃을 거야. 이 작품만큼은 절대 욕먹이고 싶지 않아.’
“꺄아!”
그때.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등장한 존재가 있었으니.
“박유진이다!”
“미친, 미친, 미친!”
“뭐? 진짜? 어디?”
“왜? 박유진이 왜 와?”
“라앺에서 염라 맡았잖아!”
갑자기 나타난 박유진에 사람들이 모두 술렁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스탭들의 보호와 안내를 받으며 촬영장 안으로 들어오는 유진.
유진은 인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여유까지 선보였다.
그리곤 쏜살같이 유유연의 곁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누나!”
“으응, 안녕.”
“오, 뭐야. 뭔가 기운 없어보이는데요. 어제 전화할 때는 그렇게 신내더니?”
“그냥. 막상 촬영하려니 좀 긴장했나봐.”
“누나가 긴장을요?”
눈을 끔벅이며 되묻는 유진.
유진이 보기에 유유연은 항상 활기차고 재밌는 사람이었으니까.
“하하.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 몰라서 그런가?”
유유연이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러는 사이.
유유연의 말에서 힌트를 얻은 듯, 유진은 그제야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지니 너는 사람 많은 거 좋아해? 안 무서워?”
“연예인이니까요! 좋아하긴 하는데. 음, 역시 너무 많으면 좀 무섭기도 해요.”
“그런 것치곤 여유가 넘쳐보이는데?”
“그래요? 다행이다. 왜냐면 저한테 비장의 스킬이 있거든요.”
“비장의 스킬?”
그게 무엇일까 궁금해지는 건 당연한 일.
그런데.
“누나. 감자 좋아해요?”
유진이 꺼낸 건 다소 뜬금없는 얘기였다.
“엥? 감자? 뭐, 그냥그런데.”
“감자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그냥 아무 생각이 안 들지.”
“누나가 지금 감자밭에 있다면 어떨 거 같아요?”
“······아무 느낌도 안 들겠지?”
“잘 됐다. 그럼 제 비장의 스킬을 알려드릴게요. 저 얼굴들이 감자라고 생각해봐요.”
“뭐어?”
촬영장을 둘러싼 인파를 가리키며 말하는 유진.
그러자 의식의 흐름 때문인지.
유유연은 정말 그 얼굴들이 순간 감자로 보였다.
자신에게 비난을 쏟아내거나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냥 감자.
“아하하! 뭐야. 이 정도면 감자밭인데?”
어이가 없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론 정말로 웃기고.
그게 또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웃는 유유연.
“어때요? 비장의 스킬 맞죠?”
이상한 걸 전파해놓고 뿌듯해하는 유진을 보니 더더욱 웃겼다.
덕분에 긴장감 따위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하하! 역시 지니는 대단하네. 아주 좋은 스킬을 배웠어.”
“그럼요. 제가 또 유연 누나 공인 램프의 요정이잖아요.”
“뭐? 하하!”
유진의 말에 또다시 웃음을 터뜨리는 유유연.
“그래. 우리 지니는 만능인 거 같아. 내 소원은 뭐든 다 들어주네.”
이토록 쉽게 자신의 고민을 해결해주니까.
덕분에 다소 가라앉았던 텐션도 점차 돌아오기 시작했다.
“자, 그럼 감자밭에서 열심히 촬영해보자구요!”
*
잠시 후.
“오, 유진이!”
“안녕하세요 PD님!”
PD 김경식과 유진이 가볍게 악수를 나누었다.
미팅과 리딩을 거치며, 김경식도 유진을 편하게 부르기 시작했다.
초반 미팅 때 상전 모시듯 했던 걸 생각하면 격세지감.
“현장 분위기가 많이 어수선하지? 미안해. 야외촬영이라 어쩔 수가 없네.”
“아뇨, 괜찮아요. 스탭분들이 제일 고생이시죠.”
“하하, 진짜 말 예쁘게 잘 한단 말이야. 그래서 오늘은 왜 온 거야? 유연 씨 응원하러?”
“그것도 있고, 촬영 현장 분위기도 궁금하고, 형 누나들이 어떻게 연기하는지도 보고 싶고.”
“역시 성공하는 배우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
“그리고 대학교도 구경하고 싶어서요. 저 나중에 한국대학교 다닐 거거든요.”
“뭐? 하하! 하긴. 유진이 정도면 입학하고도 남겠지.”
유진을 바라보는 김경식의 눈빛에 흐뭇함이 가득했다.
본인 촬영날도 아닌데 찾아온 유진이 예뻐보일 수밖에 없는 것.
“한 잔씩 하세요.”
거기다 오늘 유진과 동행한 아버지.
박태종이 스태프들에게 에너지 드링크를 돌리고 있었다.
“아, 감사드립니다. 안 그래도 엄청 피곤했는데.”
빈말은 아니었는지.
김경식은 에너지 드링크를 받자마자 원샷을 때렸다.
“많이 피곤하세요?”
유진이 걱정스레 묻자 김경식이 피식 웃었다.
“만성피로는 드라마 업계의 패시브 스킬이니까. 감사합니다, 아버님. 덕분에 힘이 나네요.”
몰린 인파만 봐도 알 수 있듯.
라앺 드라마는 기대감이 여러모로 높은 상황이다.
김경식으로서도 부담감이 장난 아닐 터.
그러나 각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부담감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자, 그럼 씬 6 촬영 곧 들어갑니다! 다들 준비해주세요!”
그렇게 들어간 촬영.
유진은 스탭들에 섞여 그를 지켜보았다.
‘음, 유연 누나는 잘하고 있고.’
유유연은 수진에 빙의.
작품 초반 삶에 의지가 없는 20대 초반 여대생의 모습을 완벽히 보여주고 있었다.
표정은 공허하고, 걸음걸이에는 힘이 하나도 없다.
수업을 들을 때 필기를 하고 있으나 정작 집중은 못하는 모습.
그저 관성대로 살아가는 캐릭터를 잘 표현해주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감전사고 같은 게 일어날 만한 씬은 따로 없어 보여.’
초반부는 수진의 무미건조한 일상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위험한 장면을 촬영할 일은 없다.
‘역시 기우였나봐.’
하지만 헛걸음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일이 없어 다행이라 느껴질 뿐.
그때.
“피디님. 다녀왔습니다.”
“아, 승효. 다 어때? 배워왔어?”
“예. 잘 배웠습니다.”
“할만 해?”
“네, 뭐. 그럭저럭.”
유진의 귀에 들어온 대화.
바로 김경식과 FD 주승효였다.
“그런데 대학교 치고 시설이 영 구식이더라고요. 가보니까 먼지가 엄청 쌓였던데요.”
“어어. 들어보니까 그 건물만 좀 오래됐대. 리모델링하면서 한 번 싹 갈아엎을 거라더라. 아무튼 이따 밤씬 때 결국 네가 해줘야겠다. 계속 얘기는 해봤는데, 주말이라 시설관리자도 일찍 퇴근한다더라고.”
“네. 알겠습니다.”
‘밤씬? 밤씬 때 대학교에서 찍을만한 거라면.’
이미 라앺의 대본이 머릿속에 모두 저장되어 있는 유진.
차근차근 대본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그래, 그거야. 단의 등장장면. 분명 주위 조명이 모두 꺼지는 연출이 있지.’
촬영장비인 조명을 끄는 건 어렵지 않으나.
학교 측 조명을 끄는 건 시설관리자의 도움이 필요할 터였다.
‘그런데 시설관리자는 일찍 퇴근하고, 그걸 FD가 대신 처리한다라.’
유진의 머릿속으로 불길한 생각이 커져갈 무렵.
주승효는 자신도 모르게 긴 하품을 내뱉어버렸다.
“졸리냐?”
“아, 죄송합니다.”
“하긴, 촬영 전부터 많이 굴렀으니까. 그래도 정신 차리고. 가서 세수라도 하고 와. 유진이네 아버지께서 복카스 사오셨으니까 그거 먹고.”
“넵, 알겠습니다.”
잠시 후.
주승효가 세수를 마치고 젖은 얼굴로 돌아왔을 때.
그에게 복카스를 건네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수고 많으세요. 이거 드세요!”
바로 유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