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잠시 후.
세트장에서의 촬영을 마치고, 저녁 무렵 다시 대학교로 돌아온 라앺 촬영팀.
아까 낮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표정들이 어두웠다.
“하아암.”
“아으, 진짜 졸리네요.”
“난 21시간째 깨어있으니까 졸리지도 않다, 야. 각성상태야.”
“대신 지금 잠들면 절대 못 일어날걸? 크크.”
농담 따먹기를 하며 버티고는 있지만,
그들의 얼굴엔 깊은 피곤이 배어있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낮씬 촬영 준비에 돌입해야했고.
그 이후로도 쉬지도 못하고 촬영, 이동, 촬영, 이동을 반복했다.
“아, 배고프다.”
“초코바 드실래요? 좀 남았을 텐데.”
“아니. 이제 초코바도 물린다. 어으! 뜨끈한 국밥이 그립네.”
“자기들만 힘든 거 아니니까 다들 으쌰으쌰합시다잉.”
끼니도 과자, 김밥 따위로 겨우 때운 상황.
“다들 조금만 힘냅시다.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PD인 김경식이 박수를 치며 스탭들을 격려했다.
“마지막까지 긴장 놓치지 말고. 여태까지 잘 했고 다 잘 뽑혔으니 이대로만 갑시다.”
후딱 찍고 집에 가자는 소리는 차마 나오지 않았다.
라앺이 좀 중요한 작품이어야 말이지.
영혼을 갈아서라도 최상의 결과물을 내야만 했다.
“후우.”
김경식은 껌을 질겅이며 정신을 다잡았다.
이런 상황에서 PD인 자신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
그 생각에 김경식은 더욱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촬영 분량이 많아서 그렇지, 촬영 자체는 매우 순조로워.’
피곤한 상태에서도 별다른 실수를 하지 않는 스탭들도 든든하지만..
무엇보다 주연인 유유연의 집중력이 매우 높다는 것이 호재였다.
“컷! 유연 씨 좋았어요. 이번에 같은 장면 풀샷으로 한 번만 더 딸게요.”
“네에!”
라앺 초반부는 수진의 일상에 포커스를 맞춘다.
거기다 수진은 제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캐릭터.
표정과 몸짓, 분위기만으로 수진이라는 불행한 캐릭터를 설명해내야 한다.
‘첫 촬영부터 싱크로율이 굉장히 높아.’
유유연은 NG도 잘 내지 않고, 집중력도 훌륭해 피드백 흡수도 빨랐다.
‘역시 유유연이 정답이었어.’
주연으로서 극을 이끌어가는 훌륭한 연기.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모습 없이 캐릭터에 완벽히 몰입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걸 돕고 있는 것은.
“누나! 연기 되게 좋았어요.”
바로 박유진이었다.
중간중간 유진이 유유연을 적절히 케어하고 있었으니.
“방금 좀 표정 이상하지 않았어? 여기선 좀 더 눈을 내리깔걸 그랬나.”
“아뇨. 그럼 너무 심각한 분위기였을 거예요. 제가 봤을 땐 지금이 딱 적당한 거 같은데.”
“그래?”
얼핏 보면 누나와 동생의 역할이 바뀐 것처럼 보일 정도.
앵글 안의 MVP가 유유연이라면.
앵글 밖의 MVP는 단연 박유진이었다.
‘유진이도 우리랑 하루종일 같이 있었는데도 전혀 피곤해보이질 않네.’
촬영 분량이 없음에도 혹독한 스케줄을 따라나선 유진.
김경식은 유진이 적당히 구경하다 빠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유진은 처음부터 끝까지 곁을 지켰다.
“유진아. 넌 안 피곤해?”
“괜찮아요. 전 젊잖아요!”
“10살짜리가 대체 저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드라마에서요.”
“드라마가 잘못했네. 역시 TV가 바보상자란 말이 딱 맞아.”
“드라마 찍고 있으면서 할 말이야 그게?”
저 귀여운 꼬맹이가 팀에 활력소를 톡톡히 하고 있었다.
그 존재만으로 촬영장을 상큼하게 만들어준다고 해야 할까.
주연인 유유연의 컨디션을 유지해주는 것은 물론이요.
중간중간 쉬는 시간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힘을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스탭들의 집중력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여러분! 제가 잠 깨는 비법 알려드릴까요?”
“뭔데?”
“과학책에서 봤는데요. 사람의 뇌라는 게요. 단어에 되게 민감하대요. 연상 작용이라고 하나? 그래서 잠이 안 올 때 자라를 세면 되게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자라가 잠을 자라, 이거에 연상 작용을 한다고.”
“호오. 그래서?”
“그러니까 참깨, 참깨, 참깨 하면 잠이 깨지 않을까요? 참깨, 참깨, 참깨, 잠깨, 잠깨, 잠깨라!”
“하하. 뭐야 그 아저씨나 쓸 것 같은 방법은?”
그러자 현직 아저씨인 음악감독이 발끈했다.
“아저씨도 저런 방법 안 써. 지금 아저씨 비하하는 거냐?”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러자 곧 웃음이 터져 나왔다.
10살짜리 귀여운 아역배우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축축 처질 법한 분위기를 기분 좋게 환기시켜준다고 해야할까.
무엇보다.
‘그래. 내 새끼들 먹여살리려면 일해야지.’
스탭 중 아이를 가진 부모들은 유진을 보며 새삼 깨달았다.
자신이 누굴 먹여 살려야 하는지 말이다.
예상치 못한 각성(?)의 효과.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어? 지금 유진이가 대화하고 있는 사람. 저거 누구야?”
“학교 관계자라던데요. 교무처 사람이랬나.”
“이야. 친화력 진짜 미쳤네.”
심지어 유진은 한국대학교 사람들과도 태연히 이야기를 나누고 친분을 쌓았다.
지금 가장 핫한 아역배우라는 이점을 유감없이 발휘.
누구하고도 쉽게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것.
덕분에 한국대학교 측과 라앺 스탭들 사이의 가교 역할도 충실히 해냈다.
“저 정도는 되어야 10살에 천만배우가 될 수 있는 건가.”
덕분에 예상한 것보다 쫙쫙 촬영 진도가 나갔고.
마침내 촬영은 클라이맥스만을 남겨두었다.
“자, 그럼 씬 넘버 19. 저승사자 단 첫 등장장면 촬영가겠습니다.”
고대하던 단의 등장장면.
이 장면만 찍으면 오늘 촬영은 종료다.
아침부터 빡세게 일한 스탭 및 배우들도 조금이지만 꿀 같은 휴식을 맛볼 터였다.
“승효야. 준비 됐냐?”
김경식의 말에 주승효FD가 덥수룩한 머리를 흩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옙.”
“들었지? 학교 측이랑 얘기해서 그나마 타협을 봤어. 그 경상관인가 하는 건물 뒤쪽 외부전등만 끄는 걸로.”
원래는 학교의 전등 전체가 꺼지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관리자도 없는 상황에서 그런 짓을 하는 건 무리수.
때문에 촬영장소 쪽에 별도로 설치된 조명만을 일시적으로 끄기로 했다.
나머지는 편집의 힘을 빌리면 되니까.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어. 들어가면 한 번 외부전등 껐다 켜봐. 그거 확인 끝나면 내가 전화할 테니까, 촬영 때는 신호 맞춰서 하면 되고. 알았지?”
“넵.”
힘없는 발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주승효.
그 모습을 보고 조연출이 우려 섞인 시선을 보냈다.
“근데 위험한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승효 저놈이 오늘 유난히 피곤해하던데. 관리자도 없어가지고 사고라도 나면 어쩌지.”
“어쩔 수 없어. 뭐 이러는 일이 하루 이틀인가.”
어디든 완벽하게 준비된 환경이란 없다.
게다가 이 방송 업계에선 시간이 곧 돈이다.
그 중요한 대본마저 쪽대본으로 나오니 말 다 했다.
촬영장에서 생기는 여러 트러블은 임기응변으로 대응할 수밖에.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해야지. 승효가 잘 하겠지 뭐.”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시간에 맞추는 것.
사람을 갈아가며 만드는 드라마 작업.
결국엔 각자가 알아서 실수 없이 처리하길 바랄 수밖에.
“자, 우리는 얼른 촬영 준비나 잘 하고. 앵글, 음향도 다시 체크 부탁해.”
곧 여러 각도에 위치한 카메라.
수진 역의 유유연이 앵글 안으로 들어가고.
저승사자 단 역할을 맡은 배우, 정성진도 자신이 등장할 위치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틱-
외부전등이 일시에 꺼졌다.
주승효가 작동에 성공한 모양.
“오케이. 그림 좋고.”
그런데 아까 약속했던 것과 달리.
외부전등이 다시 켜지질 않았다.
“승효 얘 뭐하고 있는 거야?”
김경식이 주승효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으나.
어째선지 받질 않았다.
“설마 무슨 일이라도 난 거 아닐까요?”
“에이, 설마.”
“누가 좀 가봐!”
곧 촬영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뭐야?”
“뭔 일 났대?”
낮보단 확실히 줄었으나.
아직도 촬영장을 기웃거리는 인파들이 제법 됐다.
스탭들의 웅성거림을 주워들은 탓에 그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퍼져가기 시작했다.
“아무나 가서 확인해봐.”
그때.
건물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기기 작동을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던 주승효.
그리고 분명 퇴근했을 터인 시설 관리자.
거기에 박유진이었다.
*
“감전사고요?”
그 말에 시설 관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위험했습니다. 그 외부전등 컨트롤 하는 장치를 오인하시고 잘못 누르실 뻔했어요.”
애당초 한국대학교 측 시설이 노후화 되어있는데다.
거기에 주승효가 피곤으로 잠시 정신줄을 놓아 오작동 직전까지 간 것.
주승효에게 쌓인 극도의 피로.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노후화된 스위치와 배선.
그 두 가지가 잘못된 시너지를 일으킬 뻔했다.
“야, 주승효! 정신 똑바로 안 차려?!”
김경식이 주승효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주승효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화가 차오른 김경식이 뭐라 더 소리지르려던 그때.
“근데 FD님. 머리 아픈 건 괜찮으세요? 점심때부터 계속 어지럽다고 하셨잖아요.”
갑자기 잠자코 있던 유진이 주승효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당황해하는 주승효.
“아, 아니. 그건.”
“뭐?”
유진의 말에 김경식은 주승효의 이마에 손을 뻗었다.
“야, 너 열이 펄펄 나잖아! 왜 얘기 안 했어?”
피로가 쌓인 탓인지 감기에 걸린 걸까.
주승효의 몸이 아주 불덩이였다.
이제 보니 얼굴 상태도 아주 말이 아니었고.
언제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
“죄송합니다. 다들 힘든 와중에 저까지 빠지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런데 주승효로선 폐를 안 끼치려고 책임감에 그랬단다.
이러니 김경식으로서도 화를 내기도 애매한 상황.
“저도 죄송합니다. 역시 제가 끝까지 자리했어야 했는데.”
거기에 관리자까지 사과하니 김경식은 몸둘 바를 몰랐다.
“아뇨. 아닙니다. 저희가 스케줄을 무리하게 잡은 탓이죠. 그런데 관리자님이 어쩐 일로······퇴근하신 거 아니었나요?”
“아, 그게. 우리 딸이 박유진 팬이라 사인이나 사진 한 장 받으려고요.”
퇴근은 못 참지만 딸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리턴할 수 있는.
그런 가정적 남자, 딸 바보인 모양이다.
“그런데 사인을 해준다고 해서 따라서 가봤더니, 기계를 만지고 계신 스탭 분을 발견한 겁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영 이상해보여서.”
여러 우연이 겹친 결과.
남들 눈에는 그리 보일 것이다.
‘시설관리자가 내 팬이라서 다행이었지.’
이 우연의 설계자.
유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유진이 학교 측 사람들과 계속 교감하던 것도 이런 이유다.
여차할 때 도움을 받기 위해서.
덕분에 시설 관리자 쪽과 연락이 닿을 수 있었던 것.
“감사합니다. 정말,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요.”
“아뇨. 감사는 박유진한테 해야죠. 연락을 안 받았다면 올 생각도 못했을 텐데.”
사고가 벌어졌다면 여러모로 큰일이었을 것이다.
주승효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은 물론이요.
비록 밤이 되었다곤 하지만 여전히 대학교에서 진행 중인 촬영.
구경 중인 인파가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감전 사고가 발생했다면?
‘드라마 시작도 전에 제대로 말아먹는 거지.’
연예뉴스란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각종 신문 1면에 났을 것이다.
초특급 기대작 라앺은 그야말로 초상집이 되었을 터.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이야기였다.
“근데 유진이 넌 거기 어떻게 간 거야?”
주승효가 있던 곳은 건물 지하.
어린아이가 우연히 들어갈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감전 사고가 터지는 미래를 알고 있어서요······라고 대답할 수는 없고.’
유진은 곧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고양이가 보여서 따라가다 보니, 거기로 들어갔어요. 혹시 고양이 못 보셨어요? 갈색털에 뚱뚱한 고양이였는데.”
천진하게 고양이를 찾는 체하는 유진.
그런 유진에게 어른들은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덕분에 살았어.”
“나도 고맙다. 정말 큰일이 날 뻔했는데.”
주승효로선 유진이 자신을 구해준 셈이고.
김경식으로선 작품에 큰 얼룩이 생길 뻔한 걸 피했다.
시설관리자로선 자신이 책임을 질 뻔한 일을 유진이 막아준 거고.
“고맙다. 유진아.”
고양이가 어쨌든.
사인을 받으려는 관리자를 왜 건물 안으로 불러들인 것인지, 그 이유가 어쨌든.
유진 덕분에 큰 사고를 막은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음,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유진은 뻔뻔하게 모르는 척 연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PD님. 촬영은 어떻게 하죠?”
주승효가 물었다.
당장 촬영에 들어가야 하는데 하필 기계가 저 모양이 됐으니.
“넌 일단 두통약이라도 먹고 쉬어라. 관리자님. 혹시 지금 외부전등 컨트롤러 상태가 어떻습니까?”
“이게 완전 나가버린 것 같아서······업체를 불러야 하는데, 시간도 시간이고 주말이라. 아마 꽤 걸릴 겁니다.”
시설관리자가 말했다.
김경식은 아랫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장면을 멋지게 뽑을 만한 장소는 외부 전등이 있는 곳뿐.
단의 등장장면을 빼곤 이미 한국대에서 모두 찍어놓은 상황.
하필 이 부분만 다른 곳에서 촬영하기엔 어색하다.
“그렇다고 단의 등장장면을 날릴 수도 없고.”
한국대학교 로케도 어렵게 따낸 것이다.
물론 사정을 설명하면 다시 내어주기야 하겠지만.
추가촬영을 위해 조율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학교 측 스케줄, 배우들 일정 등등.
“쓰읍. 뭣보다 시간이.”
시간이 금인 상황인데 시간이 없다.
김경식의 속이 타들어가는 것도 당연한 일.
여러 사정을 고려했을 때 오늘 내로 촬영을 끝마치는 것이 가장 베스트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대 안에서 어떻게든 마무리하는 것이 옳을 텐데.
“잠시 회의 좀 합시다.”
김경식 혼자서는 지혜를 짜낼 수가 없었다.
결국 조연출을 비롯, 각 감독들이 모여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그냥 연출을 바꾸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강의실 같은 곳에서 찍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강의실 대여는 또 다른 문제라, 학교 측 허가를 다시 받아야 한다는데요.”
“게다가 그림이 잘 뽑힐 거 같지도 않고요. 너무 밋밋하지 않나······.”
주연배우 유유연은 걱정스레 회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아. 지니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유유연은 그제야 옆을 돌아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옆에 있던 유진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응? 어디 갔지?”
유유연이 유진을 찾아낸 것은 바로 건물 뒤편.
외부전등이 나간 탓에 쓰지 못하게 된, 본래 촬영장소였다.
그런데 어두컴컴한 그곳에서 번쩍이는 빛이 하나 있었으니.
“누나!”
바로 휴대폰 플래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