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사무실로 출근한 차동석.
그를 반기는 것은 바로 아내 장미소였다.
“그러고보니 어떻게 됐어?”
“뭐가?”
“뭐긴. 유진이 재계약.”
장미소도 유진과의 재계약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상황.
유진이 이탈할 경우 대안도 없기에 천하의 장미소마저 초조해보였다.
“어떻게 됐을 거 같아?”
“쓸데없는 소리 말고 결과나 말해.”
“넵.”
차동석은 웃으며 계약서를 장미소에게 내밀었다.
바로 유진과 박태종의 도장이 찍힌 계약서를 말이다.
그러자 장미소의 얼굴에 보기 드문 해맑은 미소가 나타났다.
“잘 됐다. 잘 했어.”
담백하지만 진심이 담긴 칭찬.
그러자 차동석의 어깨가 으쓱거렸다.
“크흠. 그럼! 내가 누군데. 이 정도야 껌이지, 껌.”
그러나 장미소는 보고 말았다.
차동석이 정장 재킷을 벗는 순간, 셔츠 겨드랑이가 축축이 젖어있는 모습을.
지금 보여주는 당당한 태도와 달리 엄청 긴장했다는 증거.
하지만 오늘만큼은 모르는 척해주기로 했다.
“그래, 그래. 잘했어. 그런데 유진이가 바로 오케이 했어?”
“조금 망설이는 것 같기도 하더라.”
“역시. 금액이 좀 부족했으려나.”
아역배우에게 계약금을 억대로 주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유진의 가치는 앞으로도 계속 뛸 게 분명한 상황.
그걸 차동석도, 장미소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보기에 유진은 스스로의 가치를 잘 알고 있는 아이였다.
그걸 숨길 줄도 알고, 드러낼줄도 아는.
그런 유진이 이번 재계약에 밀당도 않고 바로 도장을 찍었다는 건.
“그래서, 유진이를 어떻게 꼬신 거야?”
분명 차동석이 무언가 한 수를 던졌을 것.
장미소는 그리 판단했다.
협상과 관련된 일에는 차동석에게 모두 일임하고 있으니.
“2년 내에 더 좋은 계약을 제시하겠다고 했지.”
뿌듯하게 대답하는 차동석.
그러자 장미소가 차동석의 등짝을 철썩철썩 때렸다.
“오빠!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얘기를 해?”
“아야, 아파!”
기획사로서는 한 번의 계약으로 배우를 최대한 오래 붙잡아놓길 원한다.
재계약할 때마다 협상이라는 번거로운 절차를 걸쳐야하고.
계약금 등 여러 지출이 발생하니까.
그런데 차동석은 굳이 유진에게 2년 뒤 더 좋은 계약을 공언한 것.
“하지만 자기야. 지난 2년을 떠올려봐. 그 어린애가 우리를 살려주다시피 했는데, 우리가 뒤처질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안 그래?”
장미소에게 등짝을 얻어맞으면서도.
차동석은 꿋꿋이 제 의견을 피력했다.
“만약 그때까지 우리가 유진이를 따라잡지 못하면, 유진이를 품을 그릇이 안 되는 거지.”
그 말을 듣고선 장미소도 반박하지 못했다.
주역 매니지먼트를 캐리한 건 유진이었으니까.
“오빠는 낭만적인 건지, 현실적인 건지 모르겠다.”
결국 장미소도 차동석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이미 계약서에 도장도 찍었고 말이다.
“근데 나 정장 입으니까 좀 멋있지 않아?”
“멋있기는. 겨드랑이나 말리고 와.”
“윽!”
“우리 더 열심히, 악착같이 일해야되네.”
그 10살짜리도 지금 쉼없이 활동 중인데.
어른들인 그들이 어떻게 쉬엄쉬엄 가겠나.
“자기는 평소대로 해. 내가 두 배로 열심히 할 테니까. 우리 아이를 위해서라도.”
장미소의 배를 조심스레 쓰다듬는 차동석.
그의 얼굴엔 의욕이 가득했다.
“사람도 많이 뽑았고. 이제 유진이를 서포트하는 건 기본이고, 이제 또 새로운 배우를 발굴해야지.”
2년 전에는 오디션 공고를 걸어도 아무도 보러오지 않았지만.
이제 주역 매니지먼트는 위상이 달라졌다.
‘아역배우 박유진을 키워낸 곳’이라는 타이틀은 다른 대형엔터와 견줄 수 있는 프리미엄이 될 터.
포스트 박유진을 원하는 아역배우들이 주역 매니지먼트에 문을 두드릴 것이다.
*
박태종과 함께 이지혜의 집으로 찾아온 유진.
집들이 선물로 가져온 휴지 따위를 건네며 물었다.
“혼자 살아도 괜찮아요?”
이지혜의 집.
혹사 사건이 터진 이후 본래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던 이지혜지만.
최근 복귀한 이후로는 다시 자취를 시작했다.
“괜찮아. 미소 이모······아니, 실장님이 여러모로 신경써주시고 계시거든.”
“실장님이요?”
이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냉철한 장미소도 이지혜는 줄곧 신경쓰였던 모양.
가끔 반찬거리를 주고 가거나, 자취에 필요한 물품들을 주고 간다고 한다.
사석에서 둘이 있을 땐 서로 이모와 조카처럼 챙긴다고.
“그런데 선미는요?”
“지금 내 방에 있어.”
유진이 이지혜의 집을 찾아온 이유.
바로 김선미의 가출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유진 입장에선 너무 뜬금없는 소식이라 그 전말이 궁금할 수밖에.
“갑자기 가출이라니. 무슨 일이래요?”
“사실 가출이라고 부르기도 뭐해. 오늘 아침에 나온 거거든.”
“에엥? 그럼 선미 어머니는요? 알고 계세요?”
“그냥 선미가 우리 집에 놀러온 걸로 알고 계실 거야.”
가출이라기에 이미 며칠 집에 안 들어간 줄 알았는데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니.
제법 소심한 반항이었다.
유진은 슬그머니 이지혜의 방으로 향했다.
침대 구석에 쭈그리고 앉은 김선미의 모습이 보였다.
“선미 하이! 여기서 뭐해?”
“······.”
뚱한 얼굴을 할 뿐.
대답하지 않는 김선미.
하지만 유진은 아무렇지 않은 척, 오히려 장난스레 물었다.
“너 가출했다며?”
“안 돌아갈 거니까, 가출 맞아.”
어린 나이의 아이들에게 가출은 일종의 로망이다.
그 나이대에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탈행위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
“집에 가기 싫어.”
“왜 집에 가기 싫은데?”
“몰라도 돼.”
툴툴대는 김선미였으나.
김선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유진은 계속 말을 걸었다.
“에이. 난 알고 싶은데. 좀 알려주라. 응?”
“아이. 넌 왜 자꾸 귀찮게 굴어?”
“네가 걱정되니까. 어머니도 너 걱정하실 거고.”
어머니, 걱정.
그 말을 듣고서야 김선미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곧 김선미가 무릎을 세우며 말했다.
“실은, 엄마가 반대해.”
“반대? 뭘?”
“······내가 너희 회사로 가는 거.”
“엥?”
김선미가 주역 매니지먼트에?
난생 처음 듣는 얘기에 유진은 고개를 돌려 이지혜를 바라보았다.
이지혜는 이미 알고 있었던 듯,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하긴.
웹드라마 <연년생>의 흥행으로 ‘배우 김선미’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첫사랑’ 뮤비에서부터 이름을 알렸고.
<연년생>으로 제법 괜찮은 연기력을 보여주었으니 당연한 처사.
“DV 엔터에서도 제안이 왔대.”
DV 엔터.
‘이상하게 요즘 저곳 이름을 많이 듣네.’
유진에겐 전 직장과도 같은 곳.
그래서일까, 썩 반가운 기분은 아니었다.
"더 좋은 곳으로 가서 꿈을 펼치면 된다고. 엄마는 나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고 하는데."
어머니로선 당연한 선택이었다.
주역 매니지먼트에 유진이 있다곤 하지만, 아직 소속배우라곤 2명 뿐인 조그마한 회사.
김주현 같은 스타가 소속된 DV 엔터와 같은 선상에 놓을 순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모르는 일이었지만.
최근 DV 엔터 아역팀 팀장, 김병호는 바짝 독이 오른 상태였다.
어떻게든 될성 부른 떡잎들을 DV 엔터 아역팀에 그러모을 생각.
당연히 조건도 좋을 수밖에.
“선미 넌 DV 엔터 가기 싫어? 거기 유명한 곳이라 잘 해줄텐데.”
키즈모델 에이전시와의 재계약, 혹은 유명 엔터와의 전속계약.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다.
그러나 김선미는 굳이 주역 매니지먼트를 고집하는 것.
‘DV 엔터가 싫은 게 아니라, 주역 매니지먼트로 가고 싶은 거라고.’
그렇게 말하려 했으나 김선미는 말을 삼켰다.
유진은 알지 못했으나.
김선미가 연기자를 꿈꾸게 된 이유.
그건 모두 박유진과 관련이 있었다.
빅터의 타이틀 발라드곡 '첫사랑' 뮤비에서 느꼈던 충격.
거기에 웹드라마 <연년생>에서 호흡을 맞춘 경험까지.
그러나 제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기엔 김선미는 부끄러움이 많았다.
“아무튼, 난 오늘 집에 안 들어갈 거야.”
홱 돌아서는 김선미.
‘흐음.’
확실히 유진이 보기에도 김선미는 될성 부른 떡잎.
제대로 연기를 배우지도 않았는데.
<연년생>에서 유진과 주고 받는 연기 케미가 꽤 좋았다.
‘팬미팅 때 무대에 섰는데도 꽤 대범하게 연기했고.’
굳이 DV 엔터를 마다하고 주역 매니지먼트에 와준다면.
여러모로 유진에게도 도움이 될 터였다.
시즌제로 제작될 <연년생>도 꽤 탄력을 받을 테고.
‘문제는 어머니네.’
나름 제딴에는 가출까지 감행할 정도로.
김선미는 확고하게 주역 매니지먼트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보호자인 어머니가 계속 반대한다면 진전이 없을 터.
“아빠.”
“응?”
“저 좀 도와주실래요? 선미를 집에 돌려보내려고요.”
아이들의 문제는 아이들끼리 해결하고.
어른들 문제는 어른들끼리 해결해야할 것이다.
*
며칠이 지난 후.
김선미의 집에서 멀지 않은 카페.
“오셨네요.”
“아, 안녕하세요.”
두 부모가 갑자기 만남을 갖게된 이유야 뻔하다.
당연히 자식 얘기 때문.
“요즘 선미는 어떤가요?”
“말도 마세요. 저번에 지혜 집에 다녀온 이후로 훨씬 완강해졌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주역 매니지먼트로 가고 싶다고. 안 그러면 가출을 할 거라는 둥, 그런 얘기만 한다니까요.”
결국 김선미는 하루가 지나지 않아 집으로 돌아갔다.
유진의 설득이 먹힌 모양.
그렇다고 해서 의지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강해지기까지.
그래서인지 김선미 어머니의 얼굴에도 근심이 가득했다.
“유진이 아버지라면 이런 문제에 대해 잘 알고 계실 것 같아서요.”
“하하. 저도 뭐 초짜인데요.”
“자꾸 물론 그 기획사가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선미도 유진이와 무척 친한 것 같고, 여러모로 편하겠죠. 하지만, 다른 대형 기획사에서도 좋은 조건을 많이 제시했어요.”
선미의 어머니라고 주역 매니지먼트가 싫겠나.
그저 아이가 더 이름값 있고, 안전한 곳에서 꿈을 키워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니면 여태껏 하던 것처럼 키즈모델 에이전시를 통해 활동하거나.
아이에 관해선 모험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이니까.
“지금 소속사를 선택한 건 제 아들, 유진이의 선택이었어요. 얼마 전엔 재계약도 했고요.”
“얼마든지 이적하실 수 있을 텐데.”
박태종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재계약 문제로 차동석과 미팅을 가질 때 얼핏 들었다.
유진의 계약에 대해 캐내고, 노리는 대형 엔터가 있다고.
분명 계약기간이 끝나고 FA로 풀렸다면.
박태종으로선 감히 상상도 못할 어마어마한 금액과 편의를 보장받았으리라.
“전 우리 유진이를 믿습니다.”
하지만 박태종은 그것들에 전혀 미련이 없었다.
“유진이의 일이니, 유진이가 선택할 일이죠.”
그것을 누려 마땅한 것은 자신이 아닌 유진이기에.
유진이 그것을 포기하겠다고 하면, 박태종은 기꺼이 존중할 뿐이었다.
“혹시라도 아이가 잘못된 선택을 하면 어쩌지. 그런 불안은 없으셨나요?”
“전 정말 부족한 아버지입니다. 아들에게 제대로 된 걸 해준 적이 없고, 오히려 유진이에게 더 많은 걸 받았죠. 그럼에도 유진이는 매번 제게 고맙다고 말해줍니다. 자기를 믿어줘서 고맙다고요.”
아들의 이야기를 할 때.
박태종의 입가엔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그 누구보다 뿌듯해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미소.
“물론 걱정하시는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가끔, 아이가 스스로의 문제에 대해 고민할 때. 그 선택이 다소 비합리적으로 보이더라도, 온전히 존중해주는 때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태종은 제 아들을 그저 어린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선택하고, 그 결과를 얻어내는.
자신보다도 훌륭한 어른이라고 여길 때도 있었다.
“아이가 혹여 잘못된 선택을 하면, 부모가 다시 바로 잡아주면 되니까요. 그 과정에서 아이들도 선택의 중요성과 책임감을 배우지 않을까요?”
물론.
제 아들 유진의 경우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박태종은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유진을 대신해 기꺼이 책임질 생각이었다.
“아, 제가 또 주제넘게. 죄송합니다.”
박태종이 허둥대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말씀 감사합니다, 유진 아버님.”
그러자 김선미의 어머니가 박태종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짧은 대화였으나, 아무래도 머릿속이 복잡해진 모양이었다.
*
며칠 후.
유진은 김선미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곧 엄마랑 사무실로 찾아가려고.”
“오. 잘 됐다. 그럼 이제 가출 안 하겠네?”
“야! 너 조용히 해!”
발끈하는 김선미와 장난스레 킬킬 웃는 유진.
그때 그 가출 아닌 가출이 김선미로서도 흑역사인 모양.
어쨌거나, 김선미는 다행히 어머니를 설득하는데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앞으론 차동석과 김선미가 해결해야할 문제.
‘동석이 형이 김선미를 놓칠 리가 없지. 아니, 오히려 애초에 탐내고 있었을 지도 몰라.’
차동석의 안목이라면 분명 그럴 터.
유진은 내심 확신하고 있었다.
“근데 너 밖이야? 차 소리가 들리는데.”
“응. 빅터 형들 만나러 왔거든.”
빅터.
그 얘기에 김선미의 목소리가 뒤집혔다.
“야, 잠깐만. 뭐라고? 빅터? 그럼 나 사인 좀······.”
뚝.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은 유진.
주말의 이른 아침.
유진이 찾아간 곳은 빅터의 소속사, UB엔터테인먼트 사옥 앞이었다.
“그럼 어디. 재오 형 연기가 얼마나 늘었나 좀 볼까.”
재오와는 서로 주고받을 것이 있으니까.
유진의 품 안에는 오디션곡 악보가 들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