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첫사랑’의 대성공 이후 아시아 투어까지 다녀온 빅터.
그 이후 휴식기를 가지며 각자 개인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당연히 멤버들끼리 모이는 것도 쉽지 않은 일.
그러나.
오늘따라 빅터 멤버들은 UB엔터 사옥에 와글와글 모여 있었다.
누가 모이라고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 이유는.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형들.”
바로 10살짜리 꼬맹이 때문.
유진이 연습실로 들어오자 빅터 멤버들은 유진에게 우르르 몰려갔다.
“이야, 오랜만이야.”
“천만배우다, 천만배우!”
“너 나중에 형 잊으면 안 된다? 알았지?”
인기절정의 아이돌 빅터.
그런 그들이 유진을 스타 대하듯 하고 있는 것.
“허.”
재오는 한발자국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멤버들이 저리 유난을 떠는 건 처음 봤으니.
“와. 형들도 다 <데드맨> 봤어요? 다들 바빴을텐데.”
“그게 말이야. 재오 형이 <데드맨> 보라고 어찌나 난리를 피웠는지.”
“근데 인정이야. 형이 난리피울 만했어. 진짜 쩔어줬다고.”
그 유난은 재오 때문이었다.
개봉 극초창기, 숙소를 탈출해 <데드맨>을 보고 온 재오.
그때의 충격이 워낙 컸는지, 그 이후 멤버들에게 틈만 나면 영업을 해댔으니.
그리고 그 영업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모두 입을 벌리고 <데드맨>을 즐기다 온 것.
“그 윤빈? 걔랑 영서. 생긴 건 똑같은데 전혀 다른 느낌이더라.”
“맞아.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으음, 설명하기 어려운데. 그냥 보여드릴게요. 윤빈은 이런 느낌이고.”
그러자 순간적으로 연기를 시작한 유진.
바로 윤빈에 빙의해,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아이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영서는 이런 느낌.”
윤빈과 모습은 똑같지만.
초점이 없는 눈동자, 단숨에 싸늘하고도 존재감 넘치는 영서를 보여주었다.
“와. 이게 바로 나오는 거야?”
“미쳤다 진짜······.”
빅터 멤버들이 감탄을 토해냈다.
“봐봐. 내 스승님이 이 정도라니까?”
재오는 자기가 더 뿌듯해하며 말했다.
아무튼.
빅터 멤버들의 환대 덕분에 재오와 유진은 뒤늦게 인사를 나눴다.
“어서와.”
“하이, 재오 형. 늦었지만 커피차 고마웠어요. 그리고 레옹 밴드랑 연락해준 것도요.”
“별 거 아니야. 하지만 형 연기 제대로 봐줘야해. 오디션 붙어야 하니까.”
“당근이죠. 전 빚지는 거 싫어해요.”
“근데 혹시 그 일본 감독님한테 연락 받은 거 있어?”
“얼마 전에요. 생각보다 준비가 오래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연극 <주변인>의 영화화 판권을 사간 일본인 감독 아이자와.
그는 각종 시퀀스와 미장센을 활용하는 걸 좋아했고.
그만큼 주도면밀하게 영화를 만들기로 유명하다.
판권을 사간 게 불과 몇 달 전이니 시간이 걸리는 것도 당연지사.
“그래서. 오늘 재오 형 연기 봐주고, 넌 노래 배우러 왔다고?”
장발에 금색으로 탈색한 것이 아이덴티티인 멤버.
민혁이 유진에게 물었다.
“네. 잘 부탁드려요, 형들!”
한 수 배운다는 느낌으로 예의바르게 허리를 숙이는 유진.
“그럼 재오 형 연기부터 먼저 봐줘. 나 곧 스케줄 가야하니까 그거만 보고 가게.”
“옳소! 옳소!”
빅터 멤버들이 모인 이유는 유진을 보기 위해서도 있지만.
재오의 연기를 구경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진과 재오가 주고받는 연기를 보고 싶은 것.
“그럼 바로 시작할까요, 재오 형?”
“음. 그럼 일본어로 할까?”
“일단 한국어로요. 여기 대본에 맞춰서 한 번 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그렇게 두 사람이 연기 준비에 드어가는 동안.
“아싸. 누가 팝콘 좀 가져와라.”
“이거 폰으로 찍어도 되나?”
“그래. 모니터용이지, 모니터용.”
빅터 멤버들은 우글거리며 관전 모드에 들어갔다.
“미안해. 저놈들이 쓸데없이 방해하네.”
멤버들 앞에서 연기한다는 게 조금 부끄러운지.
재오의 귀가 조금 빨개졌다.
“음? 아뇨. 오히려 더 좋죠. 연기는 원래 관객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러자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묻는 유진.
덕분에 재오는 한 방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형. 알죠? 연기할 땐 제 눈동자만 보면 돼요.”
“오케이.”
마음을 다잡은 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오가 보여줄 역할은 오디션에 응시할 역할이자, <주변인>의 주인공인 정호.
유진은 공연에서 맡았던 대로 민주 역할이다.
“그럼, 시작!”
*
정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그 얼굴은 겁에 질려있다.
“왜. 왜 대체 이런 일이······.”
최근 제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종, 살인사건들.
그에 대해 추적하고 있으나 점점 상황은 오리무중이 되어갈 뿐.
되레 언제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만 높아졌다.
“형.”
그때, 정호에게 한 가지 희망이 생겨났다.
바로 제 죽어버린 친구의 동생, 민주가 나타난 것.
“미, 민주야!”
황급히 달려가 민주를 껴안는 정호.
“너 괜찮아?”
“응. 나 괜찮아.”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너는 무사했구나.”
정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민주가 살아있다는 게 큰 위안이 되는 모양.
“형. 요즘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들었어.”
그러나.
정호의 품에 안긴 민주의 눈길은 싸늘하기 그지없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정호를 되레 증오하는 것처럼.
왜냐면 정호는 그 가벼운 입으로 제 형제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렸고.
그로 인해 가정이 파탄났으니까.
“형은 괜찮아?”
“어. 난 괜찮아.”
그래서일까.
“걱정 마, 민주야. 내가 반드시 범인을 붙잡고 말겠어.”
그러자 민주의 표정이 더더욱 싸늘해진다.
민주는 정호가 하는 말은 다 허풍이라고 믿으니까.
그 입으로 제 가족을 망가뜨렸으니까.
“정말?”
“그래. 약속할게.”
대화만 보면 서로를 걱정하며, 힘을 합치는 것으로 보이지만.
얼굴 표정, 몸짓을 보면 두 사람 사이의 엇갈림이 확실히 보였다.
“그리고 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건지 알아낼 거야.”
*
연기가 끝난 후.
짝짝짝-
빅터 멤버들이 두 사람에게 박수를 보냈다.
장난이 아닌, 진심으로 감탄한 얼굴들.
‘이게 그 발연기 재오라고?’
재오와 호흡을 맞춘 유진 역시 속으로 감탄했다.
공익광고에 출연했다가 로봇연기로 박제되고.
그 이후 평생 흑역사로 따라다녀 연기에는 얼씬도 안 했던 재오 아닌가.
‘기계 같던 감정도 한결 자연스러워졌고,’
두 사람이 주고받는 연기는, 상상 이상의 몰입감을 선사했다.
재오를 놀리려던 멤버들도 숨을 멈출 정도였다.
“후우. 어땠어?”
어찌나 몰입했는지, 땀까지 뻘뻘 흘리며 재오가 물었다.
그 얼굴에는 칭찬을 받고 싶다는 기대감.
그리고 지적을 받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공존하고 있었다.
“엄청 잘 하셨어요, 형.”
“아하하핫! 내가 좀 열심히 했지!”
“거기에 여유로움만 좀 더 첨가되면 금상첨화일 거 같은데.”
물론 좋아지긴 했지만, 재오의 연기에 부족함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직 재오의 연기는 상대방과 호흡한다기보단 제 할 것에만 집중하는 느낌.
자연스레 대사와 감정을 주고받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아, 씁. 그래? 혼자 연습해서 그런가.”
유진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재오.
유진은 곧장 칭찬모드에 들어갔다.
“근데 형, 캐릭터랑 엄청 잘 어울리는데요?”
재오의 최대 단점은 연기 열정이 과도해, 연기가 과해 보인다는 것.
그러나 정호라는 캐릭터가 처한 상황.
자신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거나 죽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라도 감정이 폭발할 수 있는 캐릭터.
이게 재오의 단점을 커버하고, 좋은 시너지를 내고 있었다.
“이 정도면 붙을 거 같아요.”
“진짜? 진짜지?”
“네. 물론 제 생각일 뿐이지만! 그리고 제가 특별한 지도 선생님을 섭외해놨으니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에 재오는 싱글벙글 웃었다.
유진은 물론이요, 오랜 시간 함께한 빅터 멤버들조차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이야. 재오 형 좋아 죽네, 아주.”
“연기자 다 됐다.”
“배우 재오! 멋지다잉!”
진담 반 장난 반으로 멤버들이 환호를 보냈고.
“시끄러, 이 자식들아.”
재오는 퉁명스레 화답했다.
“자. 그럼 이제 저 노래 좀 가르쳐주세요!”
유진은 곧장 본론에 들어갔다.
“뭐? 바로? 좀 쉬었다가 하지.”
“인생은 짧고,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아요.”
“······넌 평소에 대체 뭘 보는 거야? 그리고 너 이미 노래 잘하잖아?”
재오의 말에 금발머리 민혁이 끼어들었다.
“맞아. 재오 형보다 잘할 걸?”
“뭐 임마?”
“잘하진 않아요. 잘하는 척하는 거죠.”
유진은 겸손히 말했다.
스스로도 알고 있다.
자신의 노래는 기술적으로 훌륭하다기보다.
타고난 음색과 숙련된 발성 덕택에 진정성 있게 들리는 것.
<날개>의 하이라이트이자 성장서사를 녹여낸 노래 ‘날아가’.
이루지 못한 꿈을 가슴 속에 품고 사는 사람들을 향한 응원송 ‘피어나’.
모두 감성에 호소하는 노래들이다.
“근데 이번에는 좀 제대로 해야 할 거 같아서요.”
주인공인 X에 비해 의젓하고 성숙한 매력을 뽐내야할 Y.
거기다 후반부로 갈수록 내면의 깊은 상처도 드러내야 한다.
그 다층적인 모습을, 오로지 목소리와 노래로 표현해야하는 상황.
화면 속 캐릭터를 표현해야하는 애니메이션 더빙인만큼.
유진의 장기 중 하나인 서사 재창조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캐릭터 비틀기의 폭도 좁을 수밖에.
“흐음. 그럼 우선 어떤 노래인지 한 번 들어볼까?”
“네. 오디션곡이라 좀 짧아요.”
유진은 휴대폰에 담아온 오디션 곡을 들려주었다.
바로 Y가 X를 위로하며 불러주는 곡.
곡을 다 들은 이후.
“와. 진짜 신기한 곡이네. 박자도 독특하고.”
“그러게. 따뜻하면서도 무섭다고 해야 하나? 현악기 소리 넣은 게 제대로네.”
역시 프로 뮤지션들답게.
빅터 멤버들은 짧은 MR과 가사만으로도 곡의 정체성을 대강 파악해냈다.
해당 곡은 위로한다는 내용답게 분명 따뜻하고 희망찬 멜로디가 흐른다.
그러나 그 속에 섞인 현악기 소리가 어딘지 불길한 여운을 주고 있었다.
“뮤지컬 애니메이션 노래 맞아? 왜 이리 기묘한 느낌이지.”
“그게 매력인 작품이라서요. 개봉하면 보러 오세요.”
깨알같이 홍보하는 유진.
“그럼 어떻게 해줄까? 먼저 불러볼래? 그럼 그걸 토대로 피드백해줄게.”
“그것도 좋은데, 먼저 형들이 이 노래 부르는 걸 들어보고 싶어요.”
그리 말한 뒤, 유진의 눈동자가 누군가를 향해 움직였다.
“유이치 형.”
“응?”
“형이 한 번 불러주실래요?”
유진이 지목한 것은 목소리가 다소 하이톤에 고음부를 맡고 있는 멤버.
일본인 멤버인 유이치였다.
“하긴. 유이치가 그나마 톤이 높아서”
유이치는 유진이 가져온 악보를 한 번 스윽 훑어보더니 말했다.
“오케이. 그럼 유진아. 나중에 우리 엄마랑 통화나 한 번 해줘. 우리 엄마가 네 짝패거든.”
“짜, 짝패요?”
“짱팬이라고 말하려는 걸 거야. 가끔 쟤 한국어 패치에 오류 뜨거든.”
유이치는 오디션곡의 MR을 몇 번 듣더니.
곧 발바닥을 까딱이며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할 때 유이치의 한국말 발음은 문제가 없었다.
음정 하나하나도 정확히 짚고.
중간에 빠르게 대사처럼 다다다 내뱉는 부분도 무리 없이 처리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바로 목소리.
하이톤이던 유이치의 목소리가, 노래 도중에선 듣기 좋은 중저음으로 들렸다.
“이 정도 느낌이면 될까?”
노래를 끝낸 뒤 유이치가 물었다.
“네. 와, 유이치 형 잘 부른다!”
“유이치는 비주얼도 비주얼인데, 노래 실력으로 뽑혔거든.”
유진이 빅터 멤버를 칭찬해주자.
재오는 내심 기쁜지 입꼬리를 실룩였다.
“근데 유이치 형한테 저런 목소리도 있었어요?”
“그게 유이치의 매력 포인트거든. 톤 조절이 기가 막혀.”
그러자 유진은 유이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알아내려고 하는 사람처럼.
보통 무언가 궁금하다면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빠를 테지만.
“유이치 형. 한 번만 다시 불러주실래요?”
“한 번 더?”
“네.”
유진은 재차 유이치의 노래를 듣고자 할 뿐이었다.
“한 번만 더요.”
“죄송해요, 형. 한 번만 더요.”
“진짜 죄송한데, 한 번만 더요.”
계속 유이치에게 앵콜을 요청하는 유진.
“왜 저러지?”
“글쎄. 그냥 유이치 노래가 좋아서 그런가?”
“모르는 게 있으면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 텐데.”
재오를 포함한 빅터 멤버들은 그 의도를 모르고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진은 유이치가 곡을 소화하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한 음정, 한 호흡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렇게 유이치가 약 다섯 번 정도 불렀을 때.
“으흠.”
뭔가 알겠다는 듯, 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마워요, 유이치 형. 형 어머니랑 통화하고 필요하다면 셀카도 보내드릴게요!”
“레알로? 고마워. 엄마가 좋아하겠다.”
“레알로? 유이치 쟤 저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대.”
“형들. 이번엔 제가 한 번 불러볼게요.”
빅터 멤버들 앞에 나서는 유진.
민혁이 놀라서 물었다.
“뭐? 설명도 안 듣고?”
음악을 가르쳐달라고 해놓고, 정작 유진은 아직 그 어떤 조언도 듣지 않았으니까.
“네. 저는 직접 해보는 게 빠르더라고요.”
“하긴. 일단 유진이가 불러봐야 우리도 뭐라고 피드백을 해줄 거 아니야.”
재오의 말에 민혁도 납득했다.
잠시 후.
숨을 고르던 유진이 노래를 시작했다.
그런데.
“뭐야, 쟤.”
“흡수력이 엄청난데?”
그를 듣는 빅터 멤버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아니, 이건 흡수 수준이 아니라······거의 복사 아니야?”
유이치가 노래 부를 때의 자세, 행동, 표정,
심지어 창법까지.
유진이 그대로 흉내 내고 있었으니까.
마치 유이치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