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차동석이 거듭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아직 이사가 진행 중이라서, 짐정리가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역 매니지먼트 사무실은 마침내 고대하던 이사를 단행했다.
저번 사무실보다 확실히 넓어졌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는데.
이번에는 층 전체를 사용하며 훨씬 넓어졌기 때문이다.
"아뇨. 이사하셨다니 한 번 와보고 싶었거든요. 넓어보여서 좋네요.”
그리 대답하는 것은 바로 김선미와 동행한 어머니.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김선미는 어머니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매번 소파에서나 진행하던 미팅은 이제 끝.
오로지 미팅을 위한 미팅룸도 따로 생겼다.
현재 그들이 위치한 장소 역시 미팅룸.
물론 지금은 방 안에 테이블과 간이의자 뿐이 없지만 말이다.
“커피 드릴까요? 녹차랑 아이스티도 있습니다만.”
“아뇨, 괜찮습니다.”
장미소의 물음에 김선미의 어머니가 정중히 거절했다.
그 이후 잠시 감도는 침묵.
“크흠!”
헛기침을 한 차동석이 입을 열었다.
"김선미 양이 저희 회사와 계약하길 희망한다고 들었습니다. 선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사 성장을 위해 차동석과 장미소는 새로운 아역배우 후보군을 물색 중이었다.
그러나 그 후보군에 김선미는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선미는 키즈모델로 계속 활동하겠지.’
‘어. 애가 워낙 예쁘잖아. 그리고 연기랑 병행한다고 해도 기존 에이전시랑 재계약하지 않을까? 굳이 소속사 옮길 것 같진 않아.’
차동석과 장미소가 나눴던 대화.
김선미의 능력이나 잠재력과는 별개로.
김선미의 본업이 키즈모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에이전시와 계약했을 거라 생각하고, 애초에 탐을 내지 않았던 것.
그런데.
그 김선미가 스스로 주역 매니지먼트에 들어오길 희망하는 중이란다.
“저희 역시 김선미 양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 미래에도 그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돕고 싶습니다.”
주역 매니지먼트 입장에선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한 일.
그렇기에 차동석은 주저없이 어머니와의 미팅을 주선했다.
곧 차동석은 명함을 꺼내 김선미 어머니에게 정중히 건넸다.
"네. 선미의 의지가 무척 확고하더라고요. 그래서 먼저 회사 측과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이 회사가 어떤 곳인지, 어떤 비전이 있는지.”
명함을 받으며 김선미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물론 <연년생> 촬영 때 김선미의 어머니도 매번 동행했다.
때문에 차동석과 장미소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웹드라마 그 회사 소속이 된다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
어머니로서도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예. 무엇이든 괜찮습니다."
"저희 선미를, 유진이처럼 만들어주실 수 있나요?"
"죄송합니다. 그건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네?"
보통 기획사라면 각종 감언이설로 배우들을 유혹할 것이다.
그러나 차동석은 그런 무책임한 약속은 하지 않았다.
“박유진은 박유진입니다. 선미는 선미만의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김선미의 어머니는 그 대답 덕에 신뢰가 생겼다.
“아역배우로의 활동은 물론이고, 선미 양이 원한다면 키즈모델 활동도 전폭 지원할 것입니다.”
“이곳은 아역배우들만 키우는 곳이 아닌가요?”
“정확히는 아이들이 꿈을 펼치는 곳입니다. 저희는 다수의 아동복, 아동용품 업체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벨레, 아이러브유몰, 코코즈 등."
유진에게 협찬을 제안해온 업체들의 명단이었다.
차동석은 그를 인연삼아 자신의 인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멜랑꼴리 스튜디오의 포토그래퍼, 제이미 리는 저희 박유진 배우의 전담 사진작가입니다.”
그 말에 김선미 어머니의 얼굴이 단숨에 변했다.
“멜랑꼴리 스튜디오? 그게 정말인가요?”
“네. 박유진 배우의 화보집은 물론, 스윗터에 업로드된 사진 중 적지않은 수를 제이미가 찍었습니다.”
어머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2년 전, 박유진 배우가 데뷔하기도 전부터입니다. 매년 계약을 갱신하고 있습니다.”
키즈모델 딸을 둔 사람으로서 그 이름들을 모를 수가 없었다.
멜랑꼴리 스튜디오와 제이미 리.
아역배우, 키즈모델 할 것 없이 최상의 결과물을 낸다고 알려진 사진작가.
다만 상당히 높은 가격과 까칠한 성격 탓에 쉽지 않다는 평을 들어왔다.
그런 그가 박유진이 뜨기 전부터 사진을 전담했다니!
"어쩐지. 스윗터에 올라오기엔 퀄리티가 너무 훌륭하다고 생각했어요."
"원하신다면 지상파 예능 쪽으로 먼저 진출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최근 <별을 보러 떠나요>의 성공으로 어린아이들이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거기다 방송국에 인맥이 있는 차동석의 보조까지.
김오태PD와 차동석은 호형호제 하는 사이니까.
김선미가 원한다면 연기, 모델, 예능.
어느 쪽으로든 진출할 수 있다는 뜻이다.
“······.”
예상보다도 훨씬 괜찮은 조건.
이에 고민하며 차동석의 명함을 살피던 김선미의 어머니.
곧 무언가를 발견했다.
“DV 엔터에 계셨던 적이 있나요?”
바로 명함에 쓰여있는 차동석의 약력을 발견한 것.
‘前 DV 엔터테인먼트 아역팀 팀장’을 말이다.
“네. 몇년 전에 DV엔터 아역팀 팀장이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직접 회사를 이끌고 싶어 주역 매니지먼트를 세운 것이고요.”
사실 토사구팽 당한 것이지만.
차동석은 구차하게 그런 것을 설명하지 않았다.
“아아. 그러시구나.”
곧 김선미 어머니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김선미 어머니 역시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여태 김선미에게 컨택한 엔터, 기획사들의 정보를 찾아보았다.
어머니들의 커뮤니티, 그곳의 정보력은 무시할 게 못 되니까.
최근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몇년 전부터 DV 엔터 아역팀의 하향세가 가파르다는 소식을 들었다.
차동석이 말하는 퇴사 시점과 DV엔터 아역팀의 하향세.
그를 더하면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차동석이 DV 엔터 아역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고.
“선미야.”
곧 어머니는 김선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정말 여기서 활동하고 싶어?"
다그치거나 나무라는 어조가 아니었다.
그저 마지막으로 딸의 진심, 의지를 확인하는 과정.
“응.”
김선미는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혜 언니가 그랬어. 여기서라면 행복하게 연기할 수 있을 거라고."
그 증거로.
김선미가 가까이서 지켜본 유진은 누구보다 행복하게 연기하고 있었다.
물론 이지혜도 마찬가지고.
"그래."
김선미의 머리를 쓰다듬는 어머니.
DV 엔터 등 대형 기획사에서 제시한 조건은 분명 혹할만 했다.
“저희 선미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보다.
제 딸이 스스로 선택한 행복이 더 중요한 법.
곧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이는 어머니.
그러자 차동석과 장미소도 화들짝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맡겨주신만큼 성심성의껏 지원하겠습니다."
"선미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는, 그런 넓은 들판 같은 회사가 되겠습니다.”
각자의 각오를 밝히는 두 사람.
그렇게.
김선미가 주역 매니지먼트에 합류했다.
"우리 식구가 된 걸 환영한다, 선미야."
“그런데 유진이는요?”
휑한 사무실을 둘러보며 김선미가 아쉬움을 내비쳤다.
최근 유진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탓.
이따금 통화나 톡을 주고받긴 하지만
오랜만에 주역 매니지먼트에 왔으니 한 번 마주치기라도 할까 싶었는데.
"오디션 보러갔어."
"오디션이요?"
눈을 끔뻑이는 김선미.
잠시 후, 김선미의 어머니가 슬그머니 물었다.
"저기. 유진이 정도면 오디션 볼 필요는 없지 않나요?"
그 말이 맞았다.
지금도 유진의 앞으로 날아드는 대본은 적지 않으니까.
오히려 유진이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입장.
"네. 하지만 유진이가 좋아합니다. 오디션 보는 걸."
그러나 차동석이 아는 박유진은.
자신을 증명하는 걸 무엇보다 즐기는 아이였다.
*
오디션이 이뤄지는 곳.
장소는 블루컬쳐 스튜디오 측에서 대여한 녹음실이었다.
선유도역에 위치한, 건물 지하에 있는 녹음실로 각종 노래 녹음, 애니메이션 더빙 등이 이뤄지는 곳.
대기실에는 아역배우들과 그 부모님이 오디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목 캔디 먹을래?"
"아, 음. 크흠!"
"엄마. 나 쉬마려."
오디션을 앞둔 현장답게 긴장감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정기열도 마찬가지.
"으으."
파리해진 안색으로 대본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뭘 그리 떨어? 오디션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그런 정기열의 옆자리에 앉은 유진.
정기열에 비해 여유롭기 그지 없는 모습이었다.
"목은 좀 어때. 괜찮아?"
"문제 없어. 근데, 으."
"왜 그래? 배 아파?"
"으응."
"화장실 다녀와."
"이미 다녀왔어."
정기열 역시 아역배우로 몇 년간 활동해왔다.
오디션에는 제법 익숙한 입장.
그러나 이번엔 그 어느 때보다 떨고 있었다.
떨어지면 앞으로 성우 활동은 꿈도 못 꾼다.
어머니가 공언한 탓인지, 정기열은 심히 긴장한 모습이었다.
"넌 뭐 먹고 그렇게 팔팔하냐?"
정기열의 물음에 유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음? 난 원래 팔팔해."
"으, 재수없어."
"걱정한다고 결과가 달라지는 게 아니니까.”
넘치는 저 여유로움.
정기열은 그 근원을 알 것 같았다.
"너 진짜 재수없어."
"뭐가?"
"잘 하니까. 그리고 그걸 너도 알고 있지?"
유진의 도움으로 이비인후과를 다니며 목상태를 회복한 정기열.
이후 유진과 함께 더빙 연습에 돌입했다.
사실 첫 연습 때만해도, 다른 의미로 놀랐다.
Y라는 캐릭터와 유진의 음색이 잘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으니.
의외로 자신과 유진의 차이가 얼마 안 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회차를 거듭할수록 유진의 실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어디서 혼자 경험치 2배 이벤트라도 하고 온 것인지.
캐릭터 메이킹이며 대사의 강약조절, 거기에 음색까지.
'만약 쟤가 주인공 오디션을 봤으면, 분명 난 떨어졌겠지.'
정기열은 내심 확신했다.
그러나 그게 패배감이나 좌절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좋아하니까, 재미있으니까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뿐.
'그러려면, 이번 오디션에 꼭 붙어야해.'
정기열은 이번 기회가 더욱 간절해졌다.
기도하듯 두 손을 꽉 쥐었다.
"너도 잘하는데 왜."
유진의 화답에 정기열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너보단 못하잖아."
"뭐 어때? 우리가 같은 배역 보는 것도 아니고."
“으. 역시 너 재수없어. 나쁜놈.”
"당연한 거야. 난 2년 전에 이미 해봤지만, 넌 이제 처음이잖아. 더빙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우리 둘 다 붙으면 좋겠다. 넌 주인공하고, 난 조연하고. 되게 멋지겠다. 그치?”
그리 말하며 정기열의 어깨를 다독여주는 유진.
"내가 주인공인 널 멋지게 받쳐줄게."
그 모습이.
정기열의 눈에는 영락없이 속 Y로 보였다.
잠시 후.
"안녕하세요. 곽용재입니다."
귀가 큰 사운드 디자이너.
곽용재가 등장했다.
"그럼 잠시 출석을 확인하겠습니다. 이름을 부르면 손을 들며 네, 하고 대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먼저 김은호 배우님."
"네, 네!"
"나호산 배우님."
"네에!"
그렇게 쭉쭉 이어지던 출석체크.
"정기열 배우님."
"네."
정기열이 대답하자.
대기실에 작은 술렁거림이 퍼져갔다.
"정기열?"
"그 김주현 아들?"
"와. 이제 더빙까지 하는 거야?"
김주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부모들.
그들을 중심으로 쑥덕거림이 퍼져갔다.
작은 목소리였으나.
제 이름이 불리자 사람들이 웅성거린다는 걸 정기열이 모를 리가 없다.
그에 위축된 것인지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으나.
"걱정하지 마."
유진이 정기열의 어깨를 도로 펴주었다.
"블라인드 오디션이야. 심사하는 사람들은 너인지 몰라."
"알아. 굳이 뭘 또 말하냐?"
그리 툴툴대긴 했으나.
유진이 재차 상기시켜준 덕분에 정기열의 불안도 곧 가라앉았다.
잠시 후.
"박유진 배우님."
"넵!"
손을 번쩍 들며 대답하는 유진.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유진에게 쏠렸다.
"박유진?"
"진짜 그 박유진? <데드맨> 출연한 그?"
"라앺 촬영 중 아니야?"
"아니, 박유진이 무슨 오디션을 보러 와?"
정기열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웅성거림이었다.
그도 그럴게, 유진이 요즘 좀 핫해야지.
아무리 <날개> 이후 차기작이라고 해도.
설마 애니메이션 더빙 오디션을 보러 올거라 누가 상상하겠는가?
유진은 그런 웅성거림마저 즐기듯 은은하게 웃었다.
"네. 체크 완료했습니다. 모두 감사드립니다."
곽용재가 아역배우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말했다.
"블라인드 오디션의 진행방식은 간단합니다. 배정된 번호 순서대로 부스 안으로 들어와 마이크 앞에 섭니다. 그럼 화면의 안내에 따라 더빙 연기와 오디션 노래를 선보여주시면 됩니다.
오디션 참가자분들의 동선은 모두 가려져있고, 저희가 알고 있는 건 번호 뿐입니다. 그 외의 정보는 모두 차단됩니다.
만약 입장한 이후 인사를 하거나, 사적인 대화를 한다면 감점 혹은 즉각 탈락입니다. 화면의 안내에 따라서 연기와 노래만 보여주시면 됩니다. 부디 이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즉각 탈락.
그 말에 아역배우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기열아. 인사하지 말래. 알았지?"
"알았어. 절대 안 해. 죽어도 안 해.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해."
"오, 완전 비장한데?"
거의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있는 정기열.
유진은 그런 제 친구를 보며 피식 웃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 블라인드 오디션을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