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한편.
DV엔터 아역팀 팀장.
김병호는 지금 정기열의 어머니인 김주현과 마주하고 있었다.
바쁜 스케줄을 보내고 있는 김주현이 김병호와 미팅을 갖는 이유는 단 하나.
아들 정기열 때문.
"기열이가 목이 상했더라고요."
김주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 말에 김병호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뇨. 팀장님에게 뭐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놀라워서요. 제가 기열이에게 가장 먼저 가르친 게 자기관리거든요."
노래하고 연기해야할 사람에게 목 컨디션 관리는 필수.
특히 변성기조차 겪지 않은 어린아이일 때는 더욱 조심해야한다.
그때 무리를 했다간 평생 후유증을 겪을 수도 있으니.
이에 대해 김주현은 정기열에게 몇 번이나 당부했다.
다른 것보다 목관리 만큼은 철저히 가르쳤다.
동시에 덧붙인 말.
열심히 하되, 무리하지 말라.
"왜 그럴까요?"
"예?"
"기열이가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건 처음 봤어요."
"기열이는 뭐든 열심히 하지 않습니까."
“네. 열심히 하죠. 하지만 무리하진 않는 아이었어요. 그러는 건 처음 봤어요.”
김주현은 다소 혼란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본인이 욕심이 나나봅니다. 그 노력을 실사연기와 보컬 레슨에 더 썼으면 싶었는데."
저리 말하는 것은 부모로서의 욕심일 터.
제 기대만큼 해주지 못한 아이에 대한 아쉬움.
동시에 자신이 제대로 이끌어주지 못했느냐에 대한 성찰.
두 가지가 섞여 있는 모습이었다.
“기열이는 더빙이 즐거운 걸까요?”
더빙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다만 김주현이 아들에게 바라는 방향과 다를 뿐.
"그게 뭐든, 기열이는 잘 해낼 겁니다. 김주현 배우님 아드님이니까."
"글쎄요. 저는 기열이에게 성우에 대해, 더빙에 대해 가르쳐준 게 없거든요. 이번엔 모두 그 애가 선택한 거죠."
여지껏 자신이 제시한 길과 조금 다른 길로 걸어가려는 아들.
하루아침에 그를 인정하고, 밀어주기엔 김주현도 서툰 엄마였다.
“하하. 네, 그렇군요.”
뭐라 대답해줄 말이 없는 김병호.
그의 속만 타들어갈 뿐.
'확실히 정기열은 우리들의 기대를 벗어났어.'
천재, 재능러라고 불리는 김주현.
그 아들인 정기열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 재능과 핏줄을 이어받았다면 남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그래서 박유진과 접촉했을 때.
라이벌 의식이나 동기부여를 느끼며 더 발전하길 바랐다.
그런데 오히려 박유진과 접촉한 이후.
정기열은 더빙 쪽에 큰 흥미를 느끼며 그에 빠져든 모습이다.
'예상 밖이야. 하지만 그걸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어.'
분명 여지껏 정기열은 잘 해냈다.
다만 기대치에 미쳤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그와 별개로 아역배우에 대한 기준치 자체가 높아져버렸으니까.'
세상이 아역에게 기대하는 것.
박유진이 그걸 모조리 바꿔놨다.
아역 중에서 '뛰어나게 잘한다' 소리를 들으려 거든 박유진만큼 해야 하는 것.
평론가들은 대한민국 아역배우의 수준이 더 높아질 거다 뭐다 떠들어대지만.
'그게 말처럼 되겠어?'
박유진은 박유진이다.
김병호는 박유진이 주역 매니지먼트와 계약하기 전 행적에 대해 조사해봤다.
그러나 그 어떤 학원이나 아역배우 에이전시에서 활동한 기록이 없다.
데뷔 직후에 곧장 두각을 드러낸, 규격 외의 천재.
그게 바로 박유진이다.
'역시, 이제 남은 방법은 김선미 쪽인가.'
얼마 전.
김병호는 김선미의 계약이 종료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김선미는 계속 김병호 쪽에서 주시하고 있던 카드니까.
'공식적으로 출연한 곳은 뮤비와 웹드라마 뿐. TV로 나가면 훨씬 주목받을 수 있는 아이야.'
박유진을 잡지 못하는 지금 상황에선 최고의 카드라 여겼다.
'첫사랑' 뮤비와 웹드라마 <연년생>이 좀 흥했어야 말이지.
물론 모두 박유진과 엮였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으나.
김선미 본인의 재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겠지.
‘아마 그 <연년생>도 시즌제로 갈 모양이니까, 김선미만 잡으면 박유진과의 접점도 늘릴 수 있어.’
그렇다면 박유진의 계약기간도 알 수 있을 거고.
박유진의 계약 종료가 다가오면, 김선미를 미끼로 접촉해보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여러모로 이득밖에 없는 상황.
그러니 김선미에게 제법 파격적 조건을 제안한 상황이다.
"저. 팀장님."
"왜? 무슨 일인데?“
곧 팀원이 김병호에게 무언가를 소근댔다.
“거절했다고? 김선미가? 왜?”
"모르겠습니다. 다만 미팅까지 거절해버린 모양입니다."
김병호의 미간이 좁아졌다.
"간을 보는 건가. 아니면."
그 좋은 조건을 뻥 차버렸다니.
거기다 미팅까지 거절했다는 건, 이미 행선지가 정해졌다는 뜻.
다른 대형 엔터에서 손을 쓴 걸까.
김병호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팀장님. 뉴스 떴습니다.”
“뉴스요? 무슨 뉴스?”
[단독! 아역배우 박유진, 주역 매니지먼트와 재계약 체결!]
마무리 펀치가 들어왔다.
*
다시.
블라인드 오디션이 진행 중인 현장.
“으아!”
“엄마아아.”
"잘했어, 잘했어."
녹음실에서 나온 아이들의 표정이 하나 같이 밝진 않았다.
심지어 어머니를 붙잡고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는 아이도 있었다.
가 쉬운 작품은 아닐 뿐더러.
오디션이라는 긴장감 때문에 여러모로 부담이 됐던 모양.
“······.”
그들을 구경하던 정기열은 목이 바싹바싹 탔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차라리 빨리 해버리면 좋을 것을.
대기하는 시간이 더 지옥처럼 느껴질 정도.
“자. 너한테 선물을 줄게.”
그때.
같이 대기 중이던 유진이 가방을 뒤적였다.
"선물?"
“응. 이것만 있으면 너 합격할 거야.”
곧 유진이 가방에서 꺼낸 것은.
“고, 곰인형?”
바로 조그마한 곰인형.
설마 그런 게 나올 줄은 몰랐던 정기열은 무척 당황했다.
“뭐야, 이게 선물이야?”
“응,”
“필요 없어. 유치하게.”
질색하는 정기열이었으나.
유진은 재차 곰인형을 정기열의 품에 안겨주었다.
“아냐. 나 <데드맨> 오디션 볼 때 이거 덕분에 합격했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데드맨> 오디션 당시 유진은 이 곰인형을 캐릭터 메이킹에 사용했고.
그 이후 윤빈과 영서 역할, 1인2역에 합격했으니까.
“합격기원 부적, 뭐 그런 거랑 비슷한 거지.”
아니나 다를까.
평소라면 죽어도 안 믿었을 정기열이지만.
"그래, 뭐. 주니까 받는다."
<데드맨> 오디션 합격 소식을 듣자 결국 받아들였다.
결국 정기열도 10살짜리 어린아이니까.
"참가번호 008번."
"네, 네!"
마침내 이름이 불리자 벌떡 일어서는 정기열.
"잘하고 와."
유진이 주먹을 불끈 쥐며 응원했다.
정기열은 고개를 끄덕이며 스탭에게 다가갔다.
곧 스탭이 정기열의 품을 가리키며 물었다.
“손에 든 건 뭔가요?”
“아, 이거는.”
바로 유진이 준 곰인형.
공개되지 않은 작품의 오디션인 터라.
보안에 따라 어떤 전자기기의 반입도 불허다.
괜한 오해를 살까, 곰인형을 내려놓고 가려던 정기열.
그러나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들고 가면 안 되나요?”
“상관 없습니다.”
스탭이 대답했다.
전자기기도 아니고.
아무리 봐도 평범한 곰인형이었으니.
“그래도 한 번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잠시 줘볼래요?”
혹시 녹음기 같은 게 들어있진 않나.
스탭이 여러 가지로 체크를 마친 뒤.
"네. 이상 없네요. 여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스탭이 문을 열어주었다.
조심스레 안으로 발을 디디는 정기열.
블라인드 오디션이니만큼 제법 엄숙한 분위기일 거라 생각했다.
"......?"
그러나.
정기열이 생각했던 엄숙한 분위기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화살표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와! ^ㅁ^]
녹음실 안은 의외로 아기자기 예뻤다.
혹여 아역배우들이 블라인드 오디션에 겁을 먹지 않도록.
곳곳에 <날개> 속 캐릭터를 통해 동선 안내를 하고 있었으니.
블라인드 오디션이라는 특징.
컨트롤룸을 모두 가려놨기에 아역배우들이 겁을 먹을 수 있다.
그를 위한 배려라고 할 수 있겠다.
"후우."
곰인형을 들고 이런 알록달록한 장소를 거닐고 있자니.
오디션이 아니라 무슨 동화 속 세상에라도 온 기분이다.
정기열은 유진이 준 곰인형을 저도 모르게 확 끌어안았다.
잠시 후.
정기열은 오디션이 펼쳐질 스튜디오에 도착.
마이크와 모니터 앞에 섰다.
[안녕! 난 천사 솔이야. 만나서 반가워!]
심지어 모니터에 뜨는 화면마저도 어린이용 게임처럼 꾸며 놨다.
<날개> 속 주인공 솔을 이용해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으니.
[참가번호 004번 친구. 준비가 되면 모니터 밑 버튼을 눌러줘! 그럼 오디션 영상이 나올 거고, 거기에 맞춰서 연기를 보여주면 돼!]
곧 친절한 안내와 함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고.
모니터엔 익숙한
바로 참가자들에게 미리 제공되었던 오디션용 연습영상.
오디션 장면은 X의 고백 부분.
제 상처를 숨기며 살아왔으나.
비로소 친구들 앞에서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털어놓는다.
대사가 나오는 부분은 약 1분 뒤.
아역배우들에 대한 배려로, 대사를 치기 전 캐릭터에 몰입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후우."
그 시간 동안 심호흡을 내뱉으며 호흡을 가다듬는 정기열.
그런데, 막상 화면을 보고 나니.
'어, 어떻게 해야 하지?'
갑자기 정기열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타이밍이 언제였지? 어? 내가 어떻게 캐릭터를 표현하려고 했더라?‘
속절없이 시간은 흐르고.
정기열의 등줄기로 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정기열은 패닉에 빠진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난 왜 이리 한심하지? 분명 사람들이 실망할 거야. 엄마도. 이런 내가 아들이라 싫을 거야. 이번에 실패하면 더빙은 다신 못하게 될 텐데.’
곧 정기열은 습관처럼 자책을 시작했다.
제게 쏟아질 질책 어린 시선, 실망 섞인 눈빛이 떠올랐으니.
그러나 정기열이 슬쩍 고개를 들었을 때.
“······.”
정기열은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은 아무도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블라인드 테스트라 컨트롤룸과 통하는 창문을 가려놨으니.
이곳에는 그저 모니터와 마이크.
유진이 빌려준 곰 인형.
그리고 자신이 표현해야할 캐릭터, 모니터 속 X 뿐이다.
‘그래, X. 넌 참 분석하기 어려운 녀석이야. 분명 나와 다른 캐릭터고.’
일찍이 아버지를 잃은 X와 달리.
정기열은 어머니와 아버지, 둘 다 살아계신다.
그러나.
X가 아픔을 숨기며 살아가는 이유.
그 감성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그래. 누구한테도 상처에 대해 말한 적이 없어.’
제게 쏟아지는 어른들의, 엄마의 기대.
그에 짓눌리며 살아오면서, 한 번도 제대로 표출해본 적이 없다.
아들인 자신이 보기에도 너무 멋있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아들로서 잘해야한다는 건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으니.
그러니.
정기열은 이 순간, 이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이 불안과 두려움마저 연기에 담아내겠다고.
마이크 앞에서 다시 똑바로 자세를 잡은 정기열.
곧 눈으로는 유진이 건네준 곰인형을 흘끗거리기 시작했다.
“얘들아. 나 할 말이 있어.”
마치 그 곰인형에게 제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처럼.
그렇게 정기열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잠시 후.
“기, 기열아. 무슨 일이야?”
오디션을 끝마친 정기열은 여타 다른 참가자들과 달랐다.
마치 스포츠라도 하고 온 것처럼 흠뻑 땀에 젖었다.
그 대신.
무척이나 후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너 괜찮아?”
"자.“
정기열은 대답하는 대신.
“돌려줄게. 합격기원 부적. 잘 썼어.”
유진은 정기열과 달리 아직 뽀송뽀송한 곰인형을 다시 받아들었다.
"그래. 돌려줘서 고마워."
‘아무래도 기열이는 잘 해낸 것 같네.’
어릴 적부터 레슨을 받으며 자라왔기에 기본기가 탄탄한 정기열.
그런 정기열에게 약점이 있다면, 바로 연기든 노래든 기계적이라는 것이다.
배워온 대로, 관성대로만 소화하려고.
그러나 더빙만큼은 달랐다.
정기열은 목이 쉴 때까지 연습하고.
땀까지 줄줄 흘리며 오디션을 봤다.
아마 이번 오디션에 열과 성을 다해 쏟아냈으리라.
“참가번호 025번.”
“네.”
유진의 번호가 불렸다.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기 전.
“잘해라. 잘하는 놈아.”
땀을 식히고 있는 정기열이 유진을 향해 말했다.
유진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잘하고 올게.”
곧 유진도 <날개> 캐릭터를 이용해 꾸며놓은 동선을 발견했다.
그를 보며 그저 신기해하던 정기열과는 달리.
‘엄격하게 보는 오디션과 달리, 최대한 아이들을 배려하는 세팅이네.’
유진은 그를 분석하고 나섰다.
‘애당초 아역배우들에게만 캐스팅 콜을 한 거지. 어째서? 전문성우를 쓸 법도 한데,’
이걸 라는 작품의 특성과 연관지어 생각한다면.
'이선화 감독님이 필요로 하는 건 훌륭한 연기가 아니라는 거지. 어린아이의 감성, 그 자체가 필요한 거고.'
는 상처받은 아이들을 위한 영화.
아이들은 그 시절 자신만의 상처를 안고 살기 마련이다.
유진의 친구, 정기열만 해도 어머니의 이름값에 벌써부터 짓눌리고 있고.
유신애 역시 소심한 제 성격으로 힘들어했다.
김선미는 최근까지 제 진로에 대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다.
‘내 어린 시절도 그랬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좋지 않은 집안사정 때문에 소심하게 자랐어.’
아역배우들이 더빙을 해도 성우들보다 잘 해낼 수는 없다.
대신 무기로 삼을 수 있는 게 있다면, 그 감수성과 직관적 표현력일 터.
‘즉, 이번 오디션은 연기력보다 어린아이다운 감수성이 중요하다는 거겠네.’
마침 방식도 블라인드 오디션이 아닌가.
목소리에만 집중하면, 어떠한 편견도 없이 오롯이 그 목소리에 담긴 감성에 집중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두 분은 내 음색에 익숙하실 거야. 아마 내가 입을 떼면 곧장 눈치 챌지도 모르지.’
게다가 두 사람은 Y 역에 유진이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편견이 오디션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아무도 모르는 노릇.
‘그럼, 나인지 모르게 해줘야지.’
유이치에게 배운 수련의 성과.
유진은 그를 남김없이 보여줄 생각이었다.
편견을 부수는 것도 재밌지만.
아예 편견을 없애주는 건 또 다른 재미가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