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아까 전.
조연 캐릭터인 Z의 오디션이 끝나고, 잠시 찾아온 쉬는 시간.
이선화와 곽용재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아역배우들이 원래 이렇게 더빙을 잘 했나? 깜짝 놀랐네.”
이선화가 말했다.
그러자 곽용재가 허리를 부여잡고 신음하다 대답했다.
“으윽! 허리야. 그게, 요즘 엔터들은 곧잘 선생님을 붙여주니까요. 아마 성우들이나 전문 강사 불러다가 트레이닝을 시켰겠죠. 특히 <날개> 흥행 이후 아역 에이전시 쪽에서 더빙을 가르치는 곳이 많아졌대요.”
“와. 우리 덕분이라고? 뭔가 신기하네.”
“뭐, 휘즈니에서도 종종 아역배우를 기용하긴 하는데. 이렇게 OST까지 대박이 난 건 저희가 최초잖아요.”
그만큼.
<날개>가 아역배우 시장에 던진 메시지는 제법 컸다.
본래 아역배우 더빙 시장은 협소했다.
소년, 소녀 캐릭터라고 해도 전문성우들이 매우 잘 소화해냈으니.
아역배우들을 자주 기용하는 휘즈니 애니메이션도 더빙보단 자막판 인기가 압도적이고.
페이도 영화, 드라마, 모델 일에 비하면 기껏해야 용돈벌이 수준 밖에 안 되니까.
하지만.
<날개>는 그런 시장의 평가를 단번에 뒤집었다.
400만 관객 돌파, OST들의 차트인, 엄청난 판매량의 관련 굿즈들, 화제성까지.
잘만 하면 대박이 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진이가 최초라는 거겠지만.”
이선화가 정정했다.
이선화는 정말 진심으로, <날개>의 성공요인이 유진이 덕분이라 믿고 있었다.
“그럼 제2의 박유진을 노리고 다들 더빙을 열심히 배웠다는 거네.”
전체적으로 상향평준화 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그래. 다 잘하긴 하는데······.”
그런데 제법 뚱한 표정을 짓는 이선화.
습관처럼 홍삼캔디를 까서 입에 넣었다.
그를 보며 곽용재가 물었다.
“감독님. 뭐가 마음에 안 드세요?”
“그게. 다들 잘하긴 하는데, 좀 다들 인위적이라고 해야 하나.”
다 잘한다.
그런데 하나같이 다 비슷하게 잘 한다는 게 문제였다.
비슷한 발성, 비슷한 음색, 비슷한 느낌, 비슷한 감정.
마치 학원에서 알려준 방식을 그대로 써서 제출한 것처럼 말이다.
정답에 가장 가깝긴 하지만.
정작 정답 처리를 해주기엔 애매한 결과물들이다.
“이 작품에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닌데 말이지.”
오디션에 굳이 아역배우들을 기용한 이유.
물론 전작 <날개>에서 유진의 덕을 봤기 때문도 있지만.
이 작품만큼은 아이들의 진솔한 감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상처를 다룬 작품이니 만큼.
아이들의 입을 빌려 표현하고 싶었다.
즉, 그 나이 대에서만 내뿜을 수 있는 감성이 필요했다.
"이럴 거면 전문성우를 쓰는 게 나아."
이선화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애초에 어린아이만의 감성을 살릴 수 없다면, 굳이 아역배우 쪽을 고집할 필요는 없으니.
“더빙 오디션에서 너무 많은 걸 바라시는 것 같은데요. 결국 10살 내외의 애들이잖아요.”
오디션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거라곤 캐릭터 연기 몇 분과 지정곡 하나.
어린 아역배우들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은 그리 깊지 않을 터다.
“연기를 잘 하라는 게 아니잖아. 그런데 어린아이들한테 어린아이다운 걸 기대했을 뿐인데.”
기묘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는 이선화.
결국엔 곽용재도 어느 정도 그 의견에 동의하는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X 볼 때 참가번호 008번이었나. 그 친구는 꽤 좋았는데요.”
"어. 나도 체크해뒀어."
008번.
기본기인 발성과 발음도 훌륭하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정제되지 않은 감정 연기를 보여주었다.
“화면에 잘 붙진 않지만, 내가 딱 기대하던 연기였어.”
더빙 작업에서 흔히 표현하는 ‘화면에 붙는다’라는 말.
그건 캐릭터와 목소리가 얼마나 조화롭게 어우러지느냐를 의미한다.
그런 관점에서 008번의 연기는 조금 튀었다.
아마 더빙 연습 경력이 그리 길진 않을 터.
하지만.
오히려 날 것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 더 인상적이었다.
“아쉬운 점이 없진 않지만, 그 정도면 훌륭하지.”
기술은 배워서 보충할 수 있으나.
감정은 배워서 채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이번엔 Y 차례네요.“
“그러네. 오디션은 Y가 마지막이지?”
“네.”
Y의 오디션에 두 사람은 곧 기대감을 품기 시작하는 건 당연했다.
박유진이 참가하니까.
그러나 티를 내진 않았다.
엄연히 블라인드 오디션 아닌가.
그러나 Y 차례가 되어서도 달라진 건 없었다.
다들 똑같은 문제를 답습하고 있었으니까.
잘하지만 정작 진정성은 놓친 모습.
연기와 감성,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참가자는 아직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차라리 아까 008번처럼 감성에 집중해줬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이선화의 안타까움이 더 깊어져가고 있을 무렵.
“참가번호 025번 입장하고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Y의 목소리 연기 오디션 장면.
언제나 X에게 든든한 형 역할을 해주던 Y.
그런 Y의 다정함에 균열이 생기는 장면이다.
평소처럼 Y에게 의지하러 찾아온 X.
그러나 Y는 평소와 달리 여유가 없는 모습이다.
순간순간 짜증을 내다가 사과하기를 반복.
끝에 다다라선 결국 폭발하고 만다.
[아아. 너구나. 무슨 일이야?
아, 응. 힘들어서? 그렇구나. 그래, 힘들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내가 그리 말했었지.]
025번의 목소리를 들은 이선화는 깜짝 놀랐다.
다정하고 성숙한 듯하지만.
동시에 아직 여린 면이 남아있는 오묘한 보이스.
처음에는 그게 다소 낯설었다.
그러나.
그래서 이선화의 귀를 사로잡을 수 있었다.
[아아. 그랬구나. 응. 많이 힘들었겠네.]
거기에 목소리 톤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이 아이가 억지로 밝은 척을 하고 있다는 걸.
중간 중간 대사에 호흡을 섞어, 예민함과 피곤함을 표현해냈다.
[에이씨. 맨날 똑같네, 너는. 바보같이.
······어? 아, 미안해. 내가 미안해. 그냥 말이 헛나왔나봐.
잘못 말한 거야. 그래, 응 ?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준다고? 하아. 그럴 필요는 없어. 형도 다 알아들었으니까.
화낸 거 아니야. 응. 그런 거 아니야. 하아. 괜찮아.]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그 안에 배어있는 극도의 스트레스.
중간중간 섞여 나오는 짜증 섞인 한숨까지.
화가 난 와중, 어떻게든 형 노릇을 해보려는 어린아이의 모습.
그 감정이 리얼하게 전해졌다.
마치 Y라는 캐릭터가 살아숨쉬는 것처럼.
‘그리고 음색과 맞아떨어져, Y라는 캐릭터의 본모습을 정확히 표현해내고 있고.’
그 감정적 빌드업이 쭉 이어지는 것도 매끄럽다.
[아, 그만 좀 칭얼대! 짜증나 죽겠으니까!]
결국 Y가 폭발할 때.
그게 갑작스런 급발진이 아닌, 차곡차곡 쌓아올린 감정의 결과물이라는 게 납득이 갔다.
이선화가 요구하는 어린아이의 감성에 부합하면서.
더빙답게 캐릭터에 정확히 맞춘 음색과 호흡.
연기 기술과 소년의 감성.
그게 완벽히 조화를 이룬 느낌.
‘마치 X 오디션을 봤던 008번의 상위호환 같은 느낌이야. 그런데 이런 음색을 가진 애가 있던가?’
오디션 참가자를 추리는 과정에서.
이선화는 그들의 보이스 샘플을 질리도록 들었다.
아는 목소리가 나오면 반응하기 마련.
그런데.
지금 이 목소리는 이선화에게도, 곽용재에게도 제법 낯설게 들렸다.
[나도 힘들어.
미안한데, 나도 너무 힘들어.
그런데 이걸 누구한테 털어놔야 하지?]
025번은 마지막 한 문장까지 완벽히 뱉어냈다.
이선화는 하마터면 박수라도 보낼 뻔했다.
‘대체 누구지?’
이 정도로 해낼 수 있는 아역배우.
이선화는 단 한 명밖에 알지 못했다.
‘박유진? 그 아이인가?’
그러나.
이선화가 알고 있는 유진의 음색과는 결이 다른 느낌이었다.
‘유진이에게서 이런 느낌이? 말도 안 돼.’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오디션도 거치지 않고 유진에게 Y를 안겨주었을 것이다.
잘 하고 못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근본적으로 음색이 어울리지 않다고 판단한 것.
‘노래를 들으면 알 거야. 그 애의 음역대는 나랑 용재가 가장 정확히 알고 있으니까.’
다음 이어지는 오디션 지정곡.
더빙 연기에선 Y의 다층적 면모가 보여야한다면.
노래에선 다정하고 든든한 형으로서의 면모가 돋보여야 한다.
[예전부터 동생이 있으면 했지
이제부터 나를 형이라고 불러
울고 싶을 땐
나한테 기대
네가 넘어지면
다시 일으켜 세워줄게
네가 슬플 땐
내가 있는 힘껏 안아줄게]
그리고 025번의 노래를 듣는 순간.
이선화는 확신했다.
‘노래를 들어보니 알겠어. 유진이는 아니야.’
이 박자감, 그리고 화면에 착 달라붙는 음색.
모두 훌륭하다.
그러나 아무리 들어도 유진의 창법, 음색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선화의 기억 속, 소년미가 넘치던 <날개> 속 주인공 목소리.
그와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훨씬 성숙한 톤.
‘대체 누구지? 왜 처음 듣는 거 같지? 트로트 앨범을 낸 경력이 있는 장국민? 그 앤가? 아니면 뮤지컬 전문이라는 윤재림?'
그래서 더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이 025번이 누구든 간에.
만약 박유진이 아니라면.
‘이러다가 유진이가 떨어질 수도 있겠는데.’
박유진의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가 될 터다.
그러나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잘하는 사람이 뽑히는 게 오디션이니까.
[내가 너의 그늘이 되어줄게
내가 너를 꼭 안아줄게
나는 울창한 나무
울다 지쳐 힘이 들 때
나의 그늘 아래서 너는
가만히 쉬면 돼]
노래까지 완벽히 끝마친 025번.
곧 깔끔히 퇴장했다.
이선화는 그 얼굴이 궁금했으나 솟아오르는 호기심을 애써 죽였다.
“다음 참가자 들어오라고 해요.”
“025번 참가자가 마지막이었습니다.”
“네? 뭐라고요?”
“방금 그 참가자가 마지막이었습니다, 감독님.”
“······?”
진행 스탭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이선화.
“야. 용재야.”
“네.”
“혹시 참여명단 중 불참한 사람 있었어?”
“아뇨. 제가 출석체크 때 확인했습니다. 불참자는 없었습니다”
곽용재의 대답에 이선화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니, 그럼 대체 누가 유진이었던 거야?’
*
오디션이 끝난 이후.
얼마 뒤.
“우와.”
주역 매니지먼트 사무실에 도착한 유진.
그 자그마한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멋있다. 이게 우리 회사 사무실인 거죠?”
이사 및 짐정리, 가구 배치가 모두 끝나고.
비로소 온전히 사무실이 되었다.
“그럼. 우리 사무실이지.”
차동석이 흡족해하며 대답했다.
유진은 콧노래로 ‘러블리하우스’ BGM을 흥얼거렸다.
“사무실 바뀐 거 보니까. 갑자기 저 오디션 보러 갔을 때가 떠올라요.”
“그땐 참 사무실에 뭐가 없었는데. 그치?”
PC라곤 장미소와 차동석의 자리에 한 대 뿐이었고.
미팅도 바로 옆 소파에서 이뤄지던 그곳.
그러나 이젠 넙튜브 담당, 행정 담당 등 섹션이 나뉘었고.
사장실, 실장실, 미팅룸, 배우 휴게실 등.
방 자체도 많아졌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폐업을 고민하고 DV 엔터로 돌아갈까 고민하고 있던 차였는데.
설마 당돌하게 오디션을 보겠다며 찾아온 8살짜리 덕분에 인생이 달라질 줄은.
“전 이렇게 될 줄 알았는데.”
“뭐?”
“잘 될 거라고요. 저도, 주역 매니지먼트도요.”
씨익 웃으며 차동석을 올려다보는 유진.
처음 만났을 때보다 둘의 키 차이는 많이 줄었다.
유진이 단칸방에서 벗어나 이사한 것처럼.
월세에 허덕이던 주역 매니지먼트가 더 큰 곳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함께 성장하고 있는 것.
“다 우리 박. 유. 진. 배우님 덕분이지.”
차동석은 호탕하게 웃으며 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근데 선미 새 작품 들어간다면서요?”
“응. SBW 미니시리즈. <그날의 약속>이라는 제목이고.”
주역 매니지먼트에 합류한 직후.
김선미는 곧장 드라마 출연 도장부터 찍었다.
“선미는 주연 캐릭터 부부의 딸 역할이야. 맹랑하고 자존심 강한 역할.”
“와. 선미한테 딱이네요. 잘 어울리겠다.”
유진은 새삼 김선미가 배역을 잘 골랐다 싶었다.
첫 정극 도전인데, 이미지와도 잘 맞고.
주연 캐릭터 부부의 딸이니 만큼 분량도 적당할 터였다.
“그런데 넌 그 더빙 오디션 결과 나왔어?”
“아직이요. 그런데 맨날 기열이가 결과 나왔냐고 물어봐서 죽겠어요.”
이후 더빙 활동 여부가 달렸기 때문인지.
오디션 이후 정기열은 매일 합격 연락만을 기다렸다.
학교에서도 수업에 집중 못하고 계속 휴대폰만 흘끗댄다.
그러다 휴대폰을 강제로 압수당하기도.
그뿐만이 아니라.
유진에게도 매일 톡, 전화를 통해 연락이 왔냐 묻는 것은 덤.
“아. 정기열.”
아는 이름이 나오자 반응하는 차동석.
그를 눈치챈 유진이 슬쩍 물었다.
“사장님. DV엔터 시절에요. 왜 기열이 안 뽑으신 거예요?”
“어떻게 알았어?”
“기열이가 말해줬어요.”
“뭐야. 너희 그런 얘기도 해?”
“네. 저희 짱친 됐거든요.”
오디션이라는 큰 산을 함께 넘었기 때문일까.
그 이후, 정기열은 유진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덕분에 정기열은 이런저런 얘기를 유진에게 털어놓았다.
김주현의 아들이라는 이름값 때문에 뭐든 혼자 해내려던 정기열이다.
유진에게 의지하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라 할 수 있겠다.
“흐음.”
말할지 말지 고민하던 표정이던 차동석.
곧 턱을 쓰다듬으며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뭐랄까. 그 애가 행복해보이지 않았거든.”
“네?”
“유진아. 넌 연기가 재밌지?”
“네. 엄청 재밌어요. 세상에서 제일.”
“그래. 세상 천지에 재밌는 게 얼마나 많아. 그런데 그 조그마한 아이들이 연기하고, 노래하고, 모델하는 이유가 뭐겠어? 그걸 할 때 재밌고 행복하기 때문이지.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그때 기열이는 행복해보이지 않았어. 오히려 마치 숙제를 다 하고 검사를 받는 것 같은 표정이었지. 그 어린애가 스스로를 몰아세운다는 느낌이 들었어. 그런 기열이를 아역팀 팀장으로서 서포트하는 건 서로 괴롭다고 생각했고.”
‘역시 동석이 형의 안목은 정확하네.’
유진은 새삼 감탄했다.
차동석은 정기열이 어머니 때문에 연기하고, 노래했다는 사실을 모를 터.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정기열이 연기하고, 노래했던 건 일종의 자기증명의 방식이었을지도.
차동석은 그걸 본능적으로 눈치 챈 것이다.
“유진아. 이번에 오디션 때, 기열이 어때보였어?”
그 말에 유진은 오디션 때 정기열의 모습을 떠올렸다.
오디션을 끝낸 후, 땀에 흠뻑 젖어 나온 것.
그리고 그 후련해보였던 표정.
“행복해보였어요. 기열이 더빙하는 거 좋아하거든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유진의 대답에 차동석의 입가에 진실한 미소가 퍼져나갔다.
역시 아역배우의 행복을 1순위로 생각하는 사람다웠다.
“아. 이제 시간 됐네. 가자.”
“넵!”
곧 두 사람은 사무실을 나섰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바로 라앺 촬영장.
오늘은 염라의 첫 등장장면을 촬영하는 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