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유진이 도착 이후.
더빙 작업은 불과 2시간만에 나머지 1시간 분량을 끝낼 수 있었다.
유진이 오기 전까지 지지부진했던 진행 상황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환골탈태.
“나도 사인해줘.”
“나도!”
거기다 녹음이 끝난 이후.
아역배우들은 유진에게 사인을 받으러 몰려들었다.
“내가 뭐라고. 그래도 고마워, 다들. 일단 한 줄로 서주면 좋겠어.”
다정하고도 자연스레 아이들을
그렇게 아역배우들은 한 줄로 서서 유진에게
유진은 그들 모두를 친절히 대해주었다.
“정말 고마워. 네 덕분이야. 너, 너 정말 잘 하더라.”
S 역할의 황지윤이 말했다.
“아냐. 네가 잘 한 거지.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이, 있잖아. 나 하, 한 번만 포옹해봐도 돼?”
“응? 그래. 얼마든지!”
유진은 거리낌 없이 황지윤에게 다가가 포옹해주었다.
그러자 황지윤은 곧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윽고 포옹을 풀자, 도망치듯 녹음실을 빠져나왔다.
“너같은 사람 보고 뭐라고 하지. 인터넷에서 본 거 같은데. 유죄인간이라고 하나?”
정기열의 말에 유진이 눈을 끔뻑였다.
“응? 내가 뭐?”
“아무것도 아니다.”
“왜. 너도 사인해줄까?”
“됐거든?”
그렇게 정기열이 돌아간 이후에도.
유진은 계속 녹음실에 남아있었다.
“나 종교 하나 만들려고. 유진교라고.”
저녁식사 이후.
이선화는 홍삼스틱을 쭉쭉 빨더니, 갑자기 그런 얘기를 꺼냈다.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난 갓유진 갓유진 하는 게 진짜 신이란 뜻인 줄 몰랐지. 그런데 오늘 드디어 그 뜻을 알았어. 감히 갓유진을 영접합니다. 공물로 사골곰탕을 바치겠습니다.”
허리를 깊이 숙이는 이선화.
그에 당황한 유진도 허리를 숙였다.
마치 맞절을 하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된 두 사람.
“이제 그만들 하시죠.”
곽용재가 태클을 걸고 서야 둘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근데 유진아. 오늘 노래 녹음까지 할 수 있겠어?”
“네, 물론이죠.”
오전 내내 이어진 장시간 녹음 탓에.
다른 아역배우들은 다 돌아갔다.
물론 정기열도 마찬가지.
이 상태에서 노래 녹음까지 했다간 정말 목이 가버릴지도 모른다.
유진을 제외하면 말이다.
“너도 오전에 촬영하다 온 거 아니야?”
“괜찮아요. 저 목관리 비법 제대로 배웠거든요.”
제 노래 스승인 유이치는 물론.
뮤지컬 배우 출신이자 라앺에서 저승사자 단 역을 맡은 정성진에게 여러 도움을 받았다.
때문에 발성은 물론 목 관리에도 많은 노하우를 터득했다.
“그리고 고생은 기열이가 제일 많이 했죠. 주인공이잖아요.”
유진이 조언해준 덕분일까.
정기열은 이후 제대로 날아다녔다.
확실히 그는 다른 것보다 목소리 연기에 재능을 갖고 있었으니.
‘제법 주인공다웠지, 기열이 녀석.’
주변과 호흡하며 극을 이끌어가는 정기열.
그 모습을 보니 뿌듯한 마음이 컸다.
회귀 전, 제게 웹드라마 주연을 밀어줬던 정기열이 아닌가.
그에게 진 마음의 빚.
그를 드디어 갚은 것만 같았다.
‘그래. 주인공은 그래야지.’
하지만.
조연도 조연으로서의 역할이 있다.
“멋지게 뒷받침해줘서 고마워. 너 진짜 Y 같더라. 우리 아기천사 솔이가 언제 이렇게 컸대?”
이선화가 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자 유진이 조금 얼굴을 붉혔다.
“으, 역시 이제 아기천사라는 말은 좀 오글거리는 거 같아요.”
“왜? 스윗터 보니까 팬들이 많이 부르던데. 아기천사, 갓기천사 이러면서.”
“팬들이 해주는 말은 고맙긴 한데, 그래도 좀 부끄러워서요.”
그러나 정작 유진은 몰랐다.
그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팬들이 더 환장한다는 사실을.
아무튼.
이선화의 말처럼 Y는 X의 성장을 뒷받침하는 캐릭터.
왜냐면 줄곧 타인에게 도움만 받던 X가.
Y의 숨겨진 아픔을 알고 처음으로 주도적 행동을 하니까.
그렇기에 유진은 적극적으로 주인공 X, 기열을 서포트했다.
얼마든지 튈 수 있었지만, 튀지 않고 억눌렀다.
‘그게 더빙이야. 화면 속 캐릭터, 그 이상의 연기를 해내면 오버일 뿐이지.’
하지만.
개봉 이후, Y가 어째서 고평가를 받고 인기를 끌었는가.
Y로 인해 X가 변화했듯, X로 인해 Y 역시 변화하기 때문이다.
어른스러워 보이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어른이 된다는 게 무엇인지, 동시에 어린이로서의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는 캐릭터.
“그럼 이제 노래 녹음 들어가도 될까요?”
“물론이죠, 아기천사님.”
“아, 쫌 그렇다니까요오.”
어쩐지 닭살이 돋는 걸 느끼며 후다닥 녹음실로 들어가는 유진.
그는 다시 캐릭터에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Y의 매력은 그 입체성에 있지. 이번 곡은 그 매력이 모두 드러나는 곡이야.’
배려와 기만.
성숙과 미성숙.
표면적 기쁨과 내면의 슬픔.
그 이중적 면모가 Y를 독특하게 만들어준다.
거기에 Y의 가정사적 불행이 더해져, 관객들로 하여금 연민을 자아내는 것.
‘그걸 드러내는 것이 바로 이 솔로곡.’
유진이 애초에 주인공 X 대신 Y를 탐냈던 이유.
Y의 솔로곡 ‘내 이야기’ 때문이다.
그 제목 그대로, Y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노래다.
‘그때만큼은 내가 그 장면을 지배해야 해.’
‘내 이야기’라는 곡을 통해 Y에게 주어진 약 4~5분의 시간.
그 시간만큼은 오로지 Y가 돋보이는 시간이다.
‘오디션 때 봤던 솔로곡이 그냥 커피라면, 이 곡은 에스프레소라고 할 수 있지.’
‘날아가’만큼 대중성 있는 킬링파트는 아니지만.
어린아이임에도 어른인 척했던 Y의 복잡한 속내가 모두 드러나는 드라마틱한 곡이다.
“그럼 시작할게요!”
모니터를 쓰며 반주를 듣기 시작하는 유진.
이제, Y가 빛날 시간이었다.
*
몇 주 후.
블루컬쳐 스튜디오로 찾아온 한 낯선 손님.
“반갑습니다.”
오자마자 인사성 바르게 꾸벅 고개를 숙이는 호리호리한 남자.
바로 유이치였다.
“애니메이션 감독 이선화입니다.”
“사운드 디렉터 곽용재입니다.”
두 사람의 인사에 유이치가 재차 고개를 숙였다.
“유진이 스승, 유이치입니다.”
그런데 자기소개가 제법 독특했다.
“네? 아. 네.”
보통은 빅터의 유이치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유진이 스승이라고 본인을 소개하다니.
어지간히 자랑스러운 건지 뭔지.
“들어오세요. 마실 것 좀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유이치는 그리 대답하며 손에 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어보였다.
“와.”
유이치가 녹음실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이선화와 곽용재는 유이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살면서 아이돌을 볼 일이 별로 없었으니.
“새삼 실물로 봐도 안 믿기네요.”
“그러게. 유이치가 우리 작품 OST를 불러주러 오다니 말이야.”
무려 아이돌 빅터다.
게다가 가창력으로 유명한 유이치가 불러주는 커버 OST라니.
몇 년 전에는 회사 접을 각오로 사비를 털어 <날개>를 제작했던 블루컬쳐 스튜디오.
어쩐지 감개가 무량해졌다.
물론 이번 일도 유진의 인맥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제가 부를 노래는 두 곡. 맞습니까?”
“네. X의 넘버 중 하나인 ‘나 홀로’, 그리고 Y의 넘버인 ‘내 이야기’입니다.”
녹음에 들어가기 전, 테이블에 모인 세 사람.
유이치는 재차 악보를 점검했다.
“두 곡을 불러주시겠다고 해서 놀랐어요. 감사드립니다.”
이선화가 말했다.
사실 유이치는 라는 작품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홍보를 위해 콜라보 형식으로 커버 OST를 발표하는 것일 뿐.
사실 주인공인 X의 곡 한 개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유이치 쪽에서 X는 물론, Y의 솔로곡까지 부르겠다고 나섰다.
일본어 버전까지 포함하면 총 4곡을 불러야하는 셈인데 말이다.
“유진이가 부른 노래, 저도 부르고 싶었거든요. 스승으로서 본보기가 되어야죠.”
유이치가 말했다.
“아, 네. 유진이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주셨다고 들었어요. 덕분에 저희 작품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스승으로서 당영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스승, 스승, 스승.
계속 스승 타령을 하는 유이치.
아무래도 유진의 스승으로 대접받는 것이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다.
‘하긴. 스윗터에서도 계속 태그로 언급할 정도니까.’
대강 유이치의 성향을 파악한 이선화.
“악보랑 가이드는 이미 메일로 전해드렸었죠, 아역배우들이 녹음한 버전도 한 번 들어보실래요?”
“물론입니다.”
먼저 정기열이 부른 X의 넘버, ‘나 홀로’가 재생되었다.
“좋네요.”
그를 다 들은 이후 유이치가 내린 단평이었다.
“정기열, 이 아이. 노래 잘하네요.”
음정도 정확하고,
물론 이미 블루컬쳐 스튜디오 쪽에서 후보정을 마친 상태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훌륭한 노래였다.
“그런데 창법? 노래하는 방식이 어쩐지 김주현 선배님을 닮았네요.”
“네. 정기열 배우는 김주현 씨의 아들이거든요.”
“헐!”
유이치의 입에서 날 것 그대로의 리액션이 튀어나왔다.
김주현이라는 이름에 유이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에게 있어 김주현은 까마득한 선배였으니.
“진짜요? 놀랐어요. 역시 재능이란 대단하네요.”
유이치는 정기열이 김주현의 아들이라는 걸 몰랐다.
그럼에도 역시 피는 속일 수 없는 모양.
“그럼 다음은 Y의 넘버입니다.”
그 다음.
유진이 소화한 Y의 넘버인 ‘내 이야기’다.
“기대가 큽니다. 유진이가 어떻게 불렀을지 궁금하네요.”
정기열에게서 김주현의 영향이 보였듯.
유이치는 유진의 노래에서 자신의 영향이 보이기를 기대했다.
‘그래. 내 성대모사도 잘하고, 나한테 배웠으니까. 분명 티가 날 거야.’
벌써부터 뿌듯함이 밀려드는 그때.
“이거 하나는 말씀드릴 수 있을 거 같네요.”
유진이 부른 ‘내 이야기’를 재생하기 전.
이선화 감독이 말했다.
“박유진이 박유진 했습니다.”
그 말 이후 곧장 재생되는 음악.
아무도 듣지 않아
내 이야기
부모님께 닿지 않아
내 이야기
유진이 내는 성숙한 Y의 목소리.
체념한 듯, 공허함이 듣는 이를 빨아들였다.
‘가이드랑 느낌이 달라.’
녹음 준비를 위해 가이드 버전을 몇 번이고 들었음에도.
유이치는 유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처음 들었을 때처럼 몰입감을 느꼈다.
부모님은 매번 물건을 집어던지며 싸워
그러면서 나에겐 착한 아이이길 바라지
그래서 난 웃는 법을 먼저 배웠네
그런데 이상하다
어떻게 우는 거였더라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이 앞에서 부부싸움을 하는 Y의 부모님.
그러면서도 정작 Y에겐 착한 아이이길 강요한다.
그 모순 때문에 Y 역시 이중성을 갖게 된 것이다.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TV에 나오는 영웅들처럼
나도 될 수 있을까
나도 그들처럼
누굴 구해줄 수는 없을까
하지만 난 착하지 않은걸
착한 아이라는 거
숨이 차고 겁이 나
착한 아이라는 거
가슴 아파 목이 타
Y가 제 감정을 솔직히 고백하는 순간.
유진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 극대화되기 시작했다.
‘날아가’에서도 사람들의 가슴을 웅장하게 만들었던.
배우로서 탁월하고도 풍부한 감정표현.
절정부로 치닫기까지의 감정의 빌드업이 촘촘하다.
거기에 유이치와의 레슨을 통해 보강된 음색, 정확한 음정, 파워까지.
그래서 더욱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이젠 말할래
내 이야기
이젠 너에게 닿을
내 이야기
나는 상처가 있어요
나는 아픔이 있어요
날 안아주세요
토닥여주세요
절정부, 확 터뜨릴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오히려 유진은 여기서 힘을 뺐다.
그렇기에 Y의 안타까움과 처절함이 더욱 사무치게 다가왔다.
누군가의 영향이 느껴지지 않는.
온전한 박유진의 노래였다.
제발 들어줘
이제는 닿고 싶은
내 이야기
그렇게 노래가 끝나고.
“······.”
유이치는 가만히 앉아있었다.
어떤 반응도 내보이지 않고서.
“저, 유이치 씨?”
그런 유이치를 조심스레 바라보는 이선화와 곽용재.
잠시 후.
“녹음 들어가죠.”
유이치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뭐라 감상이나 평가를 내릴 법도 한데.
유이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르고.
녹음을 끝마친 이후.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유이치는 조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일 지경.
그 모습을 이선화와 곽용재가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요?”
“글쎄. 우리가 뭐 잘못했나?”
돌아가는 길.
회사차량에 탑승한 유이치는 휴대폰을 꺼내더니 대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오 형.”
“어, 유이치? 뭔 일이냐?”
“그, 사자성어 뭐라고 하지?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나다고 할 때.”
“갑자기 뭔 소리야?”
“빨리. 급해.”
“갑자기 전화해선 뭔 소리래. 보통 청출어람이라고 하지.”
“응. 알았어. 고마워.”
“아니, 임마.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야? 리더 알기를 뭘로 아는 거야. 내가 무슨 메이버 지식인풋인줄 알아?”
재오가 뭐라고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하자.
유이치는 가차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곤 곧장 휴대폰으로 스윗터에 접속했다.
토독, 토독.
서툴게 눌리는 한국어 자판.
[유이치의 스윗 : 청출어람
이 말의 의미를 깨달아버렸다.
난 오늘 슬프다...
#이제하산해도좋다]
그날.
빅터 및 유이치의 팬들은 그 스윗의 의미를 해석하지 못해 난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