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얼마 뒤.
“<식스 타임>에 참가하는 프로그램, 영화 제작사 명단을 모두 전해 받았어.”
차동석이 그리 말하며 유진에게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미리 프린트해둔 <식스 타임> 참여 명단.
유진은 그를 받아들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교양국
<인간동행> 팀
<오늘이 좋다!> 팀
드라마국
<솔잎청과점의 딸들> 팀
<체이서 – 더 헌터> 팀
<과장님이 미쳤어요!> 팀
예능국
금요예능 <오디오 스타> 팀
토요예능 <토크쇼 골드킹> 팀
일요예능 <사사건건> 팀
영화
<오늘의 운세> 팀
<기억의 저편> 팀
<리얼리스트> 팀
한국대학교 졸업작품 <제로백> 팀
한국대학교 졸업작품 <어느 날 우리는> 팀
한국대학교 졸업작품 <스마트 좀비> 팀]
“음?”
그중에서 눈에 띄는 것.
그건 바로 한국대학교 영화과 졸업작품으로 참여한 세 팀이었다.
“사장님. 이건 뭐예요?”
“아아. 그거? 전에 만난 유용주 작가 있지? 아무래도 학교 후배들 방송 좀 태워주려는 모양이야.”
물론 그것도 있지만.
어느 정도는 구색 맞추기일 것이다.
‘대학생이랑 경매는 정말 안 어울리는데. 그럼 그냥 리액션 용인가?’
자본이 빵빵한 방송국 프로그램, 영화사와 달리.
대학생들이 돈을 얼마나 쓸 수 있겠는가?
‘대충 그림을 한 번 예상해보자면.’
특유의 경매 초반 호기롭게 덤벼들지만.
곧 다른 참가자들의 물량공세에 화들짝 놀라고.
결국엔 그 이후론 리액션 셔틀이 될 것이다.
‘큰 금액이 나올 때마다 대학생들의 생생한 리액션을 써먹기 좋을 테니까.’
물론 대학생들 입장에서도 나쁠 게 없다.
졸작을 홍보할 절호의 기회기도 하고.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서 인맥을 쌓을 수도 있으니.
‘그래, 그 졸작이 그냥 평범한 영화였다면 말이야.’
“사장님. 저 이 예능 하고 싶어요!”
“그래. 기 빨리는 토크 예능도 아니고, 6시간 정도야 뭐 부담 없으니까. 이참에 너한테 얼마까지 쓰는지 궁금하긴 하네. 이야, 네 6시간을 위해 다들 얼마를 부르려나?”
<데드맨>과 라앺으로 폭등한 유진의 가치.
차동석은 그 수치를 정확히 확인해보고 싶은 눈치였다.
그러나 정작 유진이 노리는 쪽은.
대학생들의 졸업작품 쪽이었다.
주승아 감독과 고전영화로 이야기꽃을 피울 정도의 유진이지만.
대학교 졸업작품까지 일일이 꿰고 있진 않다.
실제로 <제로백>과 <어느 날 우리는>도 처음 들어보는 작품.
그러나 <스마트 좀비>라는 작품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간 칸국제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학생경쟁부문)에서 성과를 거둔 작품이 더러 있다. 대한민국 최초로 수상의 영광을 안은 건 한국대학교······졸업작품······<스마트 좀비>가······]
<스마트 좀비>는 칸국제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수상작.
즉 학생경쟁부문에서 성과를 거두는 영화다.
그러나.
유진이 보기에 이 작품은 더 좋은 평가를 받아 마땅했다.
굳이 시네파운데이션이라는 틀에 묶여있지 않아도 될 정도.
‘조금만 손을 대면, 분명 더 날아오를 수 있는 작품이지.’
곧 유진의 머릿속에 청사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
MBS 예능국 회의실.
“박유진이 오케이 했습니다!”
휴대전화를 쥐고 있던 유용주가 기쁨에 차 말했다.
그러자 뒤편에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섰다.
예능PD 나훤이었다.
“그게 진짜야?”
“네. 소속사 사장님이 직접 말씀해주셨어요. 곧 도장 찍으러 온다네요.”
“좋아. 좋았어!”
최근 항상 신경질적 모습만 보여주던 나훤.
오랜만에 손뼉까지 치며 기뻐했다.
“이번 기회로 별떠 시청률 제대로 재껴보자고.”
하지만 이 와중에도 김오태를 의식하고 있었다.
“용주야. <별을 보러 떠나요> 파일럿 시청률이 얼마였지?”
“제 기억으론 아마 12%? 그쯤이었던 거 같은데.”
“그래, 그럼 우리는 딱 15%만 찍자고.”
경쟁심으로 불꽃을 피우는 나훤.
아무튼.
이 소식을 들은 예능국 프로그램들도 모두 기뻐했다.
“나훤 그놈은 배배 꼬여가지고 어떻게 예능국에서 밥벌이 하냐?”
“그만큼 향상심이 있는 거니까요. 라이벌이 있다는 건 성장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는 거잖아? 좋게 생각하자고요.”
“라이벌이 라이벌다워야지. 나훤 그놈이 어딜 오태한테 비벼? 시청률 15% 한 번 못 넘어본 놈이.”
그런 와중 나훤을 까는 것도 잊지 않았고 말이다.
아무튼.
이로서 <식스타임>에 참가하는 프로그램과 연예인 명단이 모두 정해졌다.
자신의 6시간을 경매로 판매할 연예인 명단은 아래와 같다.
[아역배우 박유진
배우 이연화
개그맨 유조선
가수 리아
아이돌 가수 진휘
멀티 엔터테이너 정동구]
명단을 모두 확인한 뒤.
MBS 예능국 소속, <오디오 스타>의 작가인 조연지가 입을 열었다.
“박유진이 진짜 출연할 줄이야.”
유진을 제일 탐내는 건 토크쇼 예능들.
각종 행사에서 유진의 입담이야 보증되어 있었고.
그간의 필모그래피에 대해 썰만 풀어줘도 시청률은 보증될 터였다.
“너희도 박유진 노리는 거지?”
“저흰 1순위까진 아니에요. 어차피 좀 힘들 거 같아서. 차라리 안전빵으로 정동구나 유조선을 건질 생각이죠.”
그리 대답하는 건 <토크쇼 골드킹>의 작가인 한리나.
두 팀 모두 이번 <식스 타임>에 참가하는 프로그램이다.
“근데 박유진 섭외말인데. 그냥 김오태PD님 통해서 부탁하면 안 되나? 용주 걔도 그 방법으로 박유진 섭외한 거잖아.”
“말이 쉽죠. 용주도 건너건너 김오태PD님 도움받은 건데 출연 답변받기까지 엄청 걸렸잖아요. 게다가 그거 소문 퍼지고, 죄다 김오태PD님 통해서 박유진 섭외해보려고 했대요.”
“그래서? 결과는?”
“실패죠, 뭐. 김오태PD님도 엄청 화냈대요. 괜히 자기만 곤란해졌다고. 박유진네 소속사 사장님이랑 호형호제하는 사이인데, 이번 일로 조금 서먹해졌다고요.”
즉.
이제 인맥을 통해 박유진을 낚아보려는 건 불가능하단 소리.
예능국이 이번 <식스 타임>에 올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래서, 얼마나 장전하셨어요?”
“에이. 곧 전쟁할 사이끼리 왜 이래. 총알수를 알려달라니. 그럼 너희부터 까보지 그래?”
“에이. 저희 시청률 아시잖아요. 떨어지는 돈도 얼마 없어요. 거긴 배정되는 예산 많잖아요. 그리고 저흰 박유진이 1순위 아니라니까요?”
“내숭은. 우리끼리 이러기야? 그리고, 우리는 많이 받는 만큼 많이 쓰잖니.”
한솥밥을 먹는 예능국이지만.
<식스 타임>에서 만큼은 서로 경쟁상대였다.
경매라는 건 엄연히 경쟁이니까.
하지만.
무조건 경쟁해야 할 이유도 없다.
“야, 야. 내가 우리 프로그램팀이랑도 엄청 상의하면서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은근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내는 조연지.
“사실 우리끼리 경쟁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어. 너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박유진 찔러는 볼 거잖아. 근데 우리가 그 난리 안 피워도, 어차피 영화 쪽에서 엄청 부를 거고.”
“드라마 쪽은 또 어떻고요. 제가 들었는데 <체이서> 팀이 이번에 총알 제대로 장전했대요.”
박유진을 반강제로 섭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경매의 열기는 안 봐도 과열될 게 뻔했다.
“괜히 치킨게임으로 갈 것 없다고. 우리 손을 잡자.”
그 말에 한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을 잡아요?”
“우리끼리 힘을 합치는 거야. 총알이 두 배면 타깃을 맞출 확률도 훨씬 늘어나겠지.”
“그럼 타깃을 맞추고 나면요?”
“응. 6시간이니까 3시간씩 나눠서 갖는거지. 박유진 배려한다고 휴식시간 주어진대도 팀당 2시간은 쓸 수 있고. 솔직히 토크쇼에서 2시간이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어? 어차피 박유진은 분량만 뽑아주면 되니까.”
솔깃한 제안이었다.
1순위가 아니라고 얘기했지만.
실은 골드킹 측도 내심 총알을 장전 중이었으니.
“좋은 거 같아요. 물론 PD님이랑 얘기를 먼저 나눠봐야겠지만요.”
“설마 거절하겠어?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예능국 식구끼리 뭉쳐야지. 경쟁해봤자 의만 상해. 안 그래?”
악수를 나누는 두 사람.
그렇게 얼마 뒤.
<식스 타임>을 대비한 토크쇼 연합군이 탄생했다.
*
3년 전부터 유진이 자주 찾는 ‘포멀’이라는 이름의 편집숍.
그곳은 유명 연예인만 받아주는 곳으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동석의 DV 엔터 시절 인맥으로 이용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역시 실장님한테 메이크업 받는 게 최고인 것 같아요.”
얼굴에 비친 제 얼굴을 보며 웃는 유진.
그러자 포멀의 실장, 솔미 실장이 웃으며 유진의 머리를 빗었다.
“이래뵈도 실장님, 이 업계에서 유명하단다. 근데 요즘은 왜 안 왔어?”
“촬영이 예쁘게 하고 갈 일이 없어서요.”
유진은 이곳에서 VIP 고객으로서 대우받고 있었다.
방문할 때마다 솔미 실장이 최우선적으로 붙을 정도.
“그런데 진짜 놀랍다.”
유진의 긴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솔미 실장이 중얼거렸다.
“네가 처음 머리 기른다는 말을 들었을 땐 뜯어말릴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이야. 넌 어쩜 긴 머리도 잘 어울리니?”
“헤어스타일의 완성은 얼굴이니까요!”
“하하. 난 이래서 유진이가 참 좋아. 겸손한 거 같으면서도 외모만큼은 자신감이 넘친단 말이지.”
<찬란>의 촬영이 끝날 때까진 긴 머리를 유지할 생각이었다.
언제 재촬영에 들어갈지 모르고.
머리카락이야 언제든 자를 수 있는 거니까.
만약 머리카락을 기르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면야 문제겠지만.
유진의 얼굴은 그조차도 자연스레 소화해냈다.
“근데 앞머리로 눈 가리면 변장 효과가 있을 줄 알았거든요? 전혀 없었어요. 앞머리만 내리고 친구들이랑 PC방 갔는데 사람들이 다 알아보는 거 있죠?”
“너 같은 얼굴은 대한민국에 한 명뿐이잖니. 우리 유진이는 알까 몰라. 전국의 누나들, 이모들이 물 떠놓고 역변 없이 크길 기도드린다는 걸.”
“헉. 얼른 그만두라고 해야겠네요. 그런 거 안 해도 전 역변 같은 거 없을 테니까요.”
유진은 자신 있었다.
한창 성장기인 유진은 나날이 미모에 물이 오르는 중이었으니.
오히려 회귀 전보다 더 잘생겨지는 중이었다.
당연하다.
더 좋은 곳에서, 좋은 것을 먹으며 행복하게 지내고 있으니.
‘웃는 게 최고의 보약이라던 어르신들 말씀이 맞다니까.’
제법 아재스러운 생각을 하는 와중, 메이크업이 끝났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예쁘게 하고 어디 가려고?”
“촬영이요. 오늘 좀 잘 보여야 하거든요.”
그 말에 솔미 실장이 호호 웃었다.
“우리 천만배우님이 잘 보여야 한다니. 얼마나 대단한 분들이 오시는 거야?”
“비밀이에요. 나중에 방송하면 알려드릴게요. 오늘도 감사합니다!”
그렇게 유진은 편집숍을 나와, 차동석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지금은 어디 가는 길인가요?”
그 옆에는 평소처럼 장은영이 붙어있었다.
다큐 촬영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유진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레 말했다.
“지금 MBS 방송국으로 가는 길이예요. <식스 타임>이라는 제목의 예능인데······. 아, 이거 언급해도 되죠?”
“네. <식스 타임>보다 우리 다큐 방영이 더 늦을 예정이라서요. 문제가 되어도 제가 편집하면 되니까요.”
“네. 아무튼, 제 6시간을 판매하러 가는 길이죠. 낙찰된 금액 모두 좋은 곳에 쓰인다고 해서, 기쁜 마음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간단한 인터뷰 형식으로 문답을 나누는 두 사람.
유진은 유진답게 성숙한 대답을 내놓았다.
잠시 후.
“박유진 배우에게 시간은 어떤 의미인가요?”
“시간이요?”
“네. 오늘 박유진 배우의 6시간을 경매에 내놓으러 가는 입장이잖아요.”
시간.
11살인 유진에겐 어려운 주제일 수도 있겠으나.
장은영은 망설이지 않고 질문했다.
분명 유진이라면 흥미로운 대답을 내놓으리라는 걸 알고 있으니.
“으음, 글쎄요.”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했다.
“종이 같아요.”
“종이요?”
“네. 종이라는 건 사람에 따라 쓸 수 있는 방법이 무궁무진하잖아요? 누군가는 그걸로 종이를 접어 학을 만들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거기에 글을 적을 수도 있죠.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요.”
유진은 헛된 세월을 보내다가.
시간을 거슬러 회귀,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지만.
그땐 단칸방에서 혼자 웅크리고 있었고.
지금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다른 거. 그게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유진이 열심히 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독특하고 재미있는 답변이네요.”
장은영이 만족한 듯 대답했다.
곧 유진은 MBS 내부에 위치한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실제 경매장을 본뜬 것 같은 배치가 반겨주었다.
“여기서 다 뵙네요. 반갑습니다. 다음에 같이 프로그램해야죠?”
“여기 제 명함입니다.”
“시나리오 보내고 싶었는데, 딱 맞는 배역이 마땅찮아서······차기작 땐 꼭 연락 드리겠습니다.”
이미 도착한 사람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교양국, 예능국, 드라마국, 거기에 영화사까지.
서로 인맥을 쌓기에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배우 박유진입니다!”
“오, 박유진 배우님!”
그곳에서 유진이 단숨에 주목을 받는 것도 당연한 일.
곧 사람들이 우르르 유진의 근처로 모여들었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말이다.
그들은 경쟁적으로 유진 측에 제 이름을 알리려 애썼다.
“반갑습니다. MBS에서 드라마 만들고 있는 신호국PD입니다. 지금 드라마 <체이서>를 만들고 있고요.”
현재 제법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국의 <체이서> 팀.
“아이, 참 예능도 좀 나와주세요! 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애교 섞인 푸념을 늘어놓는 예능국 작가, 조연지와 한리나.
영화 <오늘의 운세> 팀은 심지어.
“박유진 배우님. 오늘 반드시 낙찰받겠습니다.”
그런 선전포고를 날릴 정도였다.
“우와. 경매 시작도 전에 장난 아닌데?”
차동석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유진을 가지고 영화 쪽이며 방송국이며 안달이 나있으니, 사장으로서 기분 좋은 것도 당연.
“자, 누가 우리 배우님을 모셔가려나?”
그러나 차동석은 눈치채지 못했다.
유진이 어떤 생각으로 이번 <식스 타임>에 참가했는지 말이다.
‘난 팔러온 게 아니라, 선택하러 온 거니까.’
유진은 시간이라는 종이로 새로운 걸 만들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때.
“늦어서 죄송합니다!”
한국대학교 측 <스마트 좀비> 팀이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