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141화
개강 시즌이 지난 한국대학교.
방학 때와 달리, 캠퍼스에 사람이 넘쳐났다.
“대학교는 낭만! 낭만하면 역시 밴드! 밴드부 블랙호라이즌에서 신입회원을 모집 중입니다!”
“다이어트 하고 싶은 분! 체력 좀 딸린다 하시는 분! 그냥 지나가시는 분들! 검도부 한 번 와보세요! 완전 재밌다니깐.”
특히 동아리들이 일찌감치 신입생들을 상대로 홍보에 열중이었다.
그런데.
그런 동아리들의 노력히 무색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도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헐.”
“저기, 저 사람들 좀 봐.”
동아리를 모집 중인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여성 2인조였다.
“TV 나온 사람들 맞지? <식스 타임>인가?”
“맞아. 우리 학교 선배라더니 진짜였네?”
“영화찍는댔는데. 스마트 점프? 맞나?”
“<스마트 좀비>였을 걸?”
“헐. 박유진한테 500만원 베팅한 그 사람들?”
“와. 우리 학교라고 들었는데 진짜였구나.”
제게 쏟아지는 시선들.
이새아는 그를 마음껏 즐겼고, 김도희는 부끄러워했다.
“야. 얼른 들어가자.”
“왜? 사람들한테 인사 좀 하지.”
“얼른!”
김도희는 이새아를 끌고선 후다닥 빈 강의실로 들어갔다.
개강 이후라 이젠 과방엔 발도 못 들인다.
본의 아니게 학교 내에서 슈퍼스타가 되어버렸거든.
“진짜 무섭네. TV 한 번 타니까 무슨 유명인사라도 된 거 같아.”
“어휴, 그니까. 나도 톡 한 50명한테서 받은 듯? 심지어 초등학교 때 동창도 나한테 전화했다니까? 너 영화 만드냐고.”
TV의 위력은 굉장했다.
방송분에서 두 사람의 분량이 의외로 많았다.
편집된 부분이 거의 없을 정도.
게다가.
[스타 시간 경매 예능, <식스 타임> 시청률 17% 돌파!]
[경매의 긴장감, 나눔의 취지 모두 잡았다! <식스 타임> 호평 속 정규편성 논의 중!]
<식스 타임>이 예상 밖 히트를 쳤다.
스타의 시간을 경매한다는 흥미로운 포맷.
거기에 라앺으로 한창 난리난 박유진이 나오니 화제성까지 챙긴 것.
덕분에 <스마트 좀비> 팀으로 참여한 두 사람의 얼굴 역시 유명해졌다.
“역시 그게 컸지? 내가 박유진한테 500 부른 거.”
게다가 경매 당시 이새아의 돌발행동이 여러모로 화제가 되었다.
‘박유진에게 500을 태운 애들’로 각인된 모양.
덕분에 학교 내에선 두 사람이 어마어마한 부자다.
취미로 영화 만든다.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한다.
“차라리 진짜 부자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그거 작년 내내 알바해서 모은 돈인데.”
“그러게 왜 그런 짓을 했어?”
“그 얘기만 몇 번째야. 그냥 박유진 잡고 싶어서 그랬다, 뭐! 그리고 결과적으로 잘 된 거잖아? 덕분에 박유진이랑 인연도 생기고, 출연 약속까지 해줬는데.”
“으으, 그렇긴 해. 사실 지금도 안 믿겨.”
“그런데 대체 뭘까? 박유진이 캐스팅 추천이라니.”
경매 이후.
갑자기 자신들을 찾아온 박유진이 내건 조건.
영화에 출연할 테니, 캐스팅 추천을 하게 해달라.
“갑자기 막 라앺 사람들 캐스팅 하는 거 아니야? 유유연, 정성진. 이런 사람들.”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 사람들이 미쳤다고 대학생 졸업작품을 찍겠냐?”
“그럼 자기 아는 사람 꽂아주려는 건가?”
“박유진 소속사에 있는 거 배우 세 명이 끝이잖아. 이지혜, 그리고 김선미? 맞나? 아무튼 두 사람 다 <스마트 좀비>에서 맡을 역할이 딱히 없는데.”
박유진이 왜 그런 조건을 내걸었는지도.
그리고 누굴 추천할 지도.
두 사람은 도무지 유추해낼 수 없었다.
“근데 우리 영화가 대박날 거긴 한 가봐. 박유진이 참여하는 건 여태 하나도 빠짐없이 히트쳤잖아.”
이새아가 눈을 빛내며 말했으나.
김도희는 어딘지 뚱한 얼굴이었다.
자신들의 영화가 어디 영화관에서 상영될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어디 군소영화제에 출품이나 할 텐데, 히트라니.
‘박유진. 그 애는 대체 뭘 보고 우리 영화에 출연하겠다고 나선 걸까?’
작품이 마음에 든다고 해도.
이런 대학생 작품에 출연해봐야 이득이라곤 도무지 없을 텐데.
그래도 솔직히 말하자면.
“뭐, 기분이 좋긴 해.”
박유진의 작품 보는 눈은 매우 뛰어나다고 정평이 나 있으니까.
졸업까지 유예해가며 짜낸 아이디어, <스마트 좀비>가 인정을 받은 기분이었다.
“어? 박유진 번호다!”
갑자기 이새아가 소리쳤다.
저번 만남 이후 양측은 번호를 교환했기에 가능한 일.
김도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새아는 목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박유진 배우님?”
급하게 쓰게 된 존칭.
그런데.
“네? 아이, 박유진 배우님. 장난치지 마세요.”
이새아는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껄껄 웃었다.
그러다 곧 얼굴이 점점 경악으로 물들어갔는데.
“정말, 정말이에요? 네? 아, 네. 뭐, 음. 일단 상의해보고 다시 연락을······네네. 네에.”
전화가 끊어진 뒤 멍하니 서 있는 이새아.
김도희는 그 어깨를 붙잡아 흔들며 물었다.
“야. 뭘 들은 거야. 박유진이 뭐라고 했는데?”
그러자 이새아는 혼이 나간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아니. 도희야. 내가 방금 뭘 들은 건지 잘 모르겠는데······.”
“어. 뭘 들었는데. 그대로 읊어봐.”
“박유진 배우가 추천하는 캐스팅 명단이 한권주, 나은주, 고석태 배우라는데?”
그러자 김도희 역시 영혼이 가출했다.
*
얼마 뒤.
“오, 송작가. 어쩐 일이야?”
원로배우 이순철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유진의 데뷔작, <유별난 친구들>의 작가 송미연.
그녀가 걸어온 전화였다.
“잘 지내셨죠, 선생님?”
“나야 뭐 좋지. 송작가는? 요즘 자네 제자랑 대본 쓴다고 들었는데.”
“네, 뭐. 매일이 전쟁이죠.”
드라이하게 안부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어차피 두 사람은 이미 술친구라고 할 만큼 막역한 사이였으니.
“소식 들었어요. 축하드려요. 선생님을 위한 영화라니, 대단하네요.”
“고마워. 송작가에게 은퇴 고민을 털어놓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말씀드렸잖아요. 선생님은 아직 은퇴하시기엔 정정하다고.”
“허허허. 그런 모양이야. 요즘 아주 힘이 넘치는 기분이거든.”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보네요?”
“음? 어떻게 알았어?”
“선생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가득 느껴져서요. 이렇게까지 기분 좋아보이시는 건 처음 봐서요.”
“그래? 자네가 듣기에 그렇단 말이지.”
이순철은 그 뒤로도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자네, 언제 그런 적이 있지? 어떤 장르의 글이든, 그 첫 문장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첫 문장이 좋은 글은 이미 반쯤 성공한 거라고.”
“네? 네. 그런 적이 있죠.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긴 왜 꺼내세요?”
“지금 내 기분이 딱 그래. 얼마 전에 첫 촬영을 마쳤는데, 벌써 영화의 반은 완성된 것 같단 말이지.”
“놀랍네요. 선생님께서 그렇게 자신의 연기에 만족하실 줄은.”
“아니, 첫 촬영을 한 건 내가 아니야.”
“네?”
허허허!
이순철이 소리내어 웃었다.
“아무튼, 그런 게 있어.”
“선생님께서 제게도 비밀로 하시다니. 별일이네요.”
“곧 송작가도 알게 될 거야. 그런데 송작가는 기분이 안 좋아보이는구만.”
그 말대로.
송미연의 목소리는 아까부터 조금 가라앉아있었다.
언짢음이 느껴지는 목소리.
“그냥, 요즘 인터넷을 보는데 어이가 없어서요. 연예란에 나오는 뉴스들 보셨어요?”
“거긴 영화 쪽 얘기잖아. 드라마 작가인 자네가 왜 그리 신경을 써?”
최근 연예계를 달구고 있는 뉴스 중 하나.
그건 바로 백룡영화제에 ‘아역스타상’ 신설 여부다.
현재 백룡영화제를 비롯, 다수의 영화제엔 따로 아역스타상이 없다.
그나마 아역배우 활용도가 높은 지상파 연기대상 쪽에나 있을 뿐.
그런데 느닷없이 왜 이런 얘기가 나오고 있는가?
[최근 아역배우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최근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최근 초등학생들이 뽑은 장래희망 중 ‘배우’가 처음으로 순위권에 들었다. 아역배우 에이전시, 학원은 지금 최고의 성수기를 맞고 있다. 이런 흐름에 맞춰 영화제에 아역부문을 따로 신설, 성인배우들과 똑같이 조주연상을 수상하는 것은 어떨까.]
어느 정도인고 하니, 이런 칼럼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유진의 성공 이후.
아역배우 자체를 달리 보는 시각이 늘어났다.
지켜줘야 하는 역할, 귀여움 담당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행동하며, 당당히 주조연으로서 임팩트를 줄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긴 것.
영화제에서 아역부문 신설은 아역들의 노력을 치하하고.
수상을 통해 강력한 동기부여를 줄 수 있을 터.
찬성론자들은 그리 말하고 있다.
하지만.
“웃기고 자빠졌네. 이거 제가 배배 꼬인 건가요?”
송미연이 보기엔 아니었다.
분명 취지는 좋지만, 적어도 지금 타이밍에 거론되는 건 의도가 불순했다.
지금 11살인 유진은 남우조연상의 강력한 수상자로 거론되는 상황 아닌가.
그런데 갑자기 아역 부문을 신설한다니.
“아무리 봐도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같은 심보로 보이는데.”
유진이 백룡을 먹은 뒤 이런 얘기가 나왔다면 모를까.
어떻게든 유진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다분해보였다.
“유진이 때문인가? 자네가 다른 사람을 위해 그리 화를 내다니. 흔치 않은 일인데? 천상천하 유아독존. 제 잘난 맛에 사는 송미연 작가 아니었나?”
송미연도 딱히 아니라곤 부정하지 못했다.
곧 이순철이 허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역시 송작가도 그 아이를 많이 아끼는군. 하긴, 자네가 결혼했으면 유진이가 아들뻘이니 그럴 법도 한가?”
“이상한 말씀 마세요. 저는 박유진 배우를 아이가 아닌, 한 명의 훌륭한 배우로서 대우하고 있는 것뿐이니까요.”
“허허. 알겠네. 내 사과할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순철은 이미 알고 있었다.
송미연이 은근 유진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축하할 일이 있을 때마다 계속 명품을 선물한다는 걸.
“비단 그 아이뿐만이 아니에요. 아역배우, 그 말이 지금은 일종의 프레임처럼 작동하고 있잖아요.”
아역배우.
어린아이.
그 단어들로 자꾸 성장을 막는 느낌.
“걱정 말라고, 송작가. 자네가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야.”
“왜죠? 혹시 선생님께서 나서실 생각인가요?”
이순철은 아역배우 혹사사건 때도 나서서 목소리를 낸 적이 있다.
‘충무로의 왕’이라 불리는 그가 직접 나선다면.
이런 음습한 견제구도 줄어들지 모르는 일.
“송작가. 혹시 어린아이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준 적이 있나?”
그런데 이순철은 제법 뜬금없는 얘기를 꺼냈다.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아이가 자라면, 보조 바퀴 없이 두 발 자전거를 타야 할 때가 오지. 그때 어른들이 해줄 수 있는 게 뭐겠나?”
그러나 이순철이 이유 없이 아무 말이나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송미연은 진지하게 고민하다 대답했다.
“아이가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도와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역할 정도겠네요.”
“그래. 결국 두려움을 이겨내고, 페달을 밟으며 나아가야 하는 건 어린아이지. 어른들이 대신 페달을 밟아줄 순 없는 노릇이니.”
그제야 송미연은 이순철이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눈치챘다.
“어른들의 역할이란 그런 거야. 아이가 다치지 않게 뒤에서 밀어주는 것. 계속 지켜봐 주는 것.”
이순철이 허허 웃었다.
“이 늙은이가 해줄 수 있는 건, 판을 깔아주는 정도겠지. 그리고.”
“그리고요?”
“아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나뿐이겠나.”
송미연은 곧 이순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눈치챘다.
*
‘이거 또 그림이 재미있네.’
그간 숱하게 다큐를 찍어온 장은영이지만.
이만큼 촬영이 재미있던 적이 있나 싶었다.
‘용주에게 소개시켜주길 잘했네. 새로운 그림이 뽑혔어.’
장은영은 이번 <식스 타임> 녹화에도 동행.
그 비하인드를 착실히 카메라에 담았다.
<식스 타임>은 시청률 17%를 기록했고.
박유진의 6시간이 1000만원에 팔렸다는 건 여러모로 큰 화제였다.
‘거기다가 경매가 끝난 뒤 대학생들 상대로 재능기부라.’
그야말로 행보 하나하나가 눈길을 끈다.
일반적인 배우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들.
‘다큐를 의식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야. 박유진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행보를 했으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다큐를 의식한다기보다, 오히려 다큐를 이용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스마트 좀비> 캐스팅 비하인드가 담긴 장은영의 다큐가 방영된다면.
이 대학교 졸업작품은 더 화제가 될 테니까.
‘아무튼 이번 다큐, 제대로 히트칠 것 같은데.’
다큐PD로서 장은영의 예감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창 분위기가 좋던 와중인데.
“더럽고 치사한 놈들.”
주역 매니지먼트의 사무실 안.
여전히 다큐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평소 훈훈한 분위기와는 달리, 지금은 무슨 현장 고발 다큐처럼 변모되고 있었다.
“양심이 있어봐라.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인터넷 여론을 한창 뒤지던 차동석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으니.
“저, 사장님. 그래도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데 그런 말씀은 좀······.”
눈치를 보던 직원 중 한 명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자 차동석이 버럭 대답했다.
“찍으라고 해! 아니, 오히려 내보내 달라고 부탁해야겠네. 장은영PD님, 이거 꼭 내보내주세요.”
차동석이 이토록 분개하는 이유.
최근 유진을 상대로 벌어지고 있는 언플들 때문이다.
아이, 아역배우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쓰는 프레임 말이다.
“아역부문 신설? 부담감? 에라이, 내가 가서 확 다 엎어버리던가 해야지!”
이런 어이없는 언플에 차동석이 분개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는 반평생을 아역배우와 함께 보낸 사람.
아역배우의 보호와 권리를 위해 행동하다 짤리기까지 했으니.
‘하긴. 어른들의 더러운 농간에 아이가 피해를 본다니.’
장은영마저 어이가 없고 치가 떨릴 정도.
그런데.
어른들이 화를 내고 있는 와중에도 박유진은 평온했다.
딱히 백룡을 의식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사장님. 전 괜찮아요.”
“그래도 유진아······!”
“화낸다고 달라질 일도 아닌 걸요.”
확고한 유진의 대답.
차동석도 알고 있다.
여기서 자기가 화내봤자 분위기만 나쁘게 만들 거라는 걸.
하지만 이 어린아이가 감내해야할 부당함에 치가 떨렸다.
“아휴. 미안하다, 유진아. 사장님이 다 미안해.”
이게 다 자신이 힘없는 탓이라 느꼈는지.
차동석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유진이 차동석의 손을 토닥였다.
“사장님이 왜 미안해요? 아직 아무 일도 안 벌어졌는데요.”
오히려 박유진이 차동석을 위로하는 그림.
‘이게 영세 기획사의 한계인가.’
그를 보며 장은영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안타깝지만 이 또한 현실.
장은영이 해결해줄 수도 없는 문제다.
다큐멘터리는 개입하는 게 아니라 지켜보는 것에 목적이 있으니.
‘하지만 제대로 담아내서 여과없이 방영해야지.’
그 또한 다큐멘터리의 본분이니까.
“박유진 배우는 화나지 않아요?”
장은영의 물음에 유진이 대답했다.
“저도 사람인데요. 당연히 화가 나죠.”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박유진은 어째선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통화로 스트레스를 풀어요.”
“통화?”
“네. 아는 사람들한테 전화해서 막 고민을 털어놓거든요.”
“아아. 친구들한테?”
“아뇨. 제 또래 친구들은 아무래도 연예인이 아니다보니까, 이런 말은 잘 못해요. 주로 같이 작품했던 형, 누나, 삼촌, 이모들한테 얘기해요.”
대화로 스트레스를 푼다니.
‘어린애치곤 제법 어른스런 스트레스 해소법이네.’
그때까지만 해도 장은영은 그리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후.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하진무, “박유진은 백룡영화제에서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대학로와 충무로를 오가며 입지를 다진 연기꼰대 하진무의 인터뷰가 공개된 것.
그 내용 또한 놀라웠는데.
그가 공개적으로 유진의 수상에 대해 지지 의사를 밝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하진무는 과거 박유진에게 <주변인> 대타를 부탁한 빚이 있었지? 거기다 꼰대라 불릴 정도니, 옳지 못한 일엔 목소리를 낸다 해도 이상할 게 없어.’
장은영은 그리 분석했다.
하지만 그는 시작이었을 뿐.
[배우 정성진 “백룡영화제 남우조연상 예측? 박유진이 받을 듯······<데드맨> 정말 인상깊었다”]
같이 라앺에서 호흡을 맞췄던 정성진.
그가 그런 인터뷰를 내놓은 것.
‘아니. 정성진은 박유진이랑 같이 백룡 남우조연상 후보로 거론되는 상황이잖아? 그런데 여기서 박유진을 띄워준다고?’
심지어는.
[“아역상 신설? 좋다. 그러나 박유진은 제외다. 박유진은 성인배우들과 견주어야 하는 레벨이다” 직구 인터뷰 화제!]
과거 유진과 <데드맨> 속 영서 역할을 놓고 오디션에서 경쟁했던 배우.
진승우까지 공개적으로 나섰다.
여태 유진에게 도움을 받고.
함께 호흡을 맞췄던 사람들.
그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화룡점정으로.
[단독! <찬란> 속 이순철의 아역, 박유진이 맡았다]
[충무로의 과거와 미래, 영화 <찬란>에서 교차된다!]
<찬란> 캐스팅 기사까지 떴다.
“와. 이게 다 무슨 일이래요?”
박유진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놀라워하고 있었다.
마치 이런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는 것처럼.
‘정말 몰랐을까?’
며칠 전 보였던 관조적 태도.
그건 장은영이 보기에도 제법 이상했다.
마치 모든 일이 해결되리란 걸 알고 있던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설마, 전화로 스트레스를 푼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유진에겐 이미 든든한 인맥들이 존재한다.
그의 전화 한 통에 기꺼이 움직일 만큼 말이다.
“음? 왜 그러세요? 아. 음료수 사왔는데, 하나 드실래요?”
환히 웃으며 장은영에게 음료수를 건네는 유진.
그런 유진을 제 프레임 안에 담으며.
장은영은 생각했다.
‘배우 박유진의 가장 걸출한 재능은······적을 만들지 않는다는 걸지도 몰라.’
이 정글 같은 연예계에서.
그건 정말 엄청난 능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