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시간이 흘러.
유진이 12살이 되는 해.
유진은 주역 매니지먼트 사무실······이 아니라.
빅터의 소속사, UB 엔터테인먼트 사옥 속 빅터의 연습실에 들렀다.
“실례합니다아. 어, 권주 삼촌! 오랜만이에요.”
거기엔 또 낯선 손님.
배우 한권주가 와 있는 상태고.
“그러게. <스마트 좀비> 촬영 이후 처음인가.”
“그러게요. 아, 맞다. 저 한 살 더 먹었어요!”
“너만 먹은 것처럼 얘기하네. 삼촌도 한 살 더 먹었어.”
빅터가 쓰는 연습실인데, 어째서 다른 소속사인 두 사람이 여기 있는 것인가?
그 해답은 매우 간단했다.
“그래서. 어때요? 재오 형의 상태.”
“이 정도면 충분한 거 같아.”
그러자.
연습실 구석에 누워있던 트레이닝복 차림의 재오가 벌떡 일어났다.
“정말이죠? 정말 충분한 거 맞겠죠, 선생님?”
그러자 한권주가 곤란해하며 대답했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쓰지 말라고 했잖아.”
연극 <주변인>의 판권을 사들여 아이자와 감독 손에서 새로 탄생한 영화, <입김>.
그 오디션에 참여하는 재오를 위해 최근 특훈이 계속되었던 것.
몇 년 전 한류붐 때 한권주 역시 일본에서 연기 활동을 했으니까.
일본어 연기를 지도해주긴 최적의 배우였다.
“맞아. 스승님이라는 호칭은 나한테 써야지.”
오늘도 어김없이 등장한 유이치.
그의 역할은 역시나 재오의 일본어 스승이다.
한권주가 연기력을 중점으로 본다면, 유이치는 얼마나 자연스레 일본어를 구사하는지를 체크했다.
“자. 한 번 불러봐. 유이치 스승님.”
그러자 재오가 싱긋 웃으며 유이치를 바라보았다.
“우리 유이치. 진실의 방으로 가볼까?”
“죄송합니다, 리더님.”
그런 둘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한권주.
곧 유진을 향해 말했다.
“설마 네가 부탁한다던 게 이런 거였을 줄이야.”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삼촌!”
유진이 예전에 한권주 아들, 혜성이 문제를 해결하고 부탁했던 것.
바로 재오의 연기 트레이닝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원래는 제 연기를 부탁드리려고 한 건데.”
“유진이야 뭐 더 볼 것도 없이 잘하니까.”
한권주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유진의 연기는 자신이 평가할 레벨이 아니었다.
오히려 유진과 <데드맨>에서 호흡을 맞추며, 제 연기가 한 단계 진화한 기분이었으니.
“일본어 발음은 훌륭한데, 연기력이 조금 불안한 상태였어. 계속 일본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데 집중하다보니, 연기가 조금 인위적이었지.”
“맞습니다. 그래도 재오 형의 일본어 구사 레벨은 매우 높아졌어요.”
유진의 회귀 전, 재오는 공익광고 발연기로 박제당해 평생 흑역사로 남았다.
그를 감안하면 그야말로 환골탈태.
“그런데 지금은 꽤 괜찮아. 연기도, 일본어 발음도 훨씬 좋아졌으니까.”
“꽤 괜찮은 수준으론 안 됩니다, 선생님.”
재오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오디션에서 경쟁해야 할 배우들은 현지 일본 배우들이잖습니까. 그러니까 그들 수준은 되어야 합니다!”
이글거리는 재오의 눈빛.
“그러니까 연습, 연습만이 살 길입니다. 선생님! 저에게 좀 더 가르침을 주십시오!”
그를 보며 질린다는 듯, 한권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벌써 5시간째야. 목 좀 아껴. 쉬면서 생각도 좀 정리하고. 그리고 너 지금 잘 한다니까.”
“저 형은 원래 저래요.”
유이치는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연습, 연습, 연습. 연습. 벌레예요.”
“연습벌레라는 거죠? 그렇게 끊어 읽으면 재오 형이 벌레라는 것 같잖아요.”
“아무튼. 컴백무대 전날은 진짜 지옥이죠. 난 그때마다 일본에 있는 가족들이 그리워져요.”
한편 유진은 그런 재오에게서 제 예전 모습을 겹쳐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고 무작정 열심히 하던 시절이 있었으니.
또, 배우 생활을 하며 재오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도 많이 봤다.
‘요령 없는 우직함, 그저 될 때까지 계속하는 사람들. 그러다 언젠가 마모되어 이 판을 떠나지.’
그 우직함이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되곤 하지만.
그들은 기계가 아닌 사람이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절망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바닥에도 요령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
“재오 형.”
그래서.
유진은 그 요령을 알려주기로 했다.
재오가 마모되기를 바라지 않았으니까.
“무조건 일본사람처럼 할 필요는 없어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음, 예를 들면요. 아. 잠깐 귀 좀 빌려줄래요?”
유진은 재오에게 눈높이를 맞춰달라며 손짓했다.
곧 재오는 시키는 대로 무릎을 굽혔고.
소곤소곤.
유진이 귓가에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를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는 한권주와 유이치.
“뭘 하는 거지?”
“비법이라도 전수해주나 봐요. 그런 거 있잖아요. 무협 같은 곳을 보면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무공 같은 걸 물려주니까.”
“무공?”
“그럼요. 재오 형은 유진이의 오래된 제자니까요. 전 한 때 유진이의 스승이었고요.”
은근슬쩍 유진의 스승이었다는 사실을 어필하는 유이치.
그러나 한권주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잠시 후.
유진의 말이 끝난 뒤, 재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정말, 그렇게 해도 될까?”
“선택은 형이 하는 거니까요. 하지만 전 먹힐 거 같은데요?”
“유진아. 재오한테 뭐라고 한 거야?”
“그냥 팁을 좀 줬어요.”
“팁?”
“네. 일본 영화에 참여하는 한국배우. 이게 단점이 아니라, 특징이 될 수 있다고요.”
“오.”
그 말의 의미를 한권주가 눈치챘을 무렵.
우웅!
유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단발적 진동인 것을 보면 문자메시지나 톡인 모양.
유진은 휴대폰을 꺼내 내용을 확인했다.
-기열놈 : 야 ㅇㄷ
-박유진(나) : 나 지금 연습 중
-기열놈 : ?
-기열놈 : 무슨 연습
-박유진(나) : 안알랴줌 ㅋ
-기열놈 : ㅡㅡ
-기열놈 : 암튼 다음주 시간 언제 괜찮냐
-박유진(나) : 왜
-박유진(나) : 나랑 놀고 싶어?
-기열놈 : 아니 그게 아니고 이놈아
-기열놈 : 우리 영화 개봉하잖아.
개봉이 다가왔다.
*
현재 일본 연예계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름.
그는 바로 유이치다.
[한국 최고의 아이돌, 그 속에 속한 일본인 멤버!]
[유이치는 어떻게 K-POP 아이돌이 되었나? “그냥 하고 싶었다” 엉뚱 답변 화제!]
일본인으로, 혈혈단신 한국에 넘어가 연습생
최근엔 아시아를 넘어 북미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넙튜브 조회수가 심상치 않으니까.
[유이치가 부른 ‘내 이야기’, 오리콘 차트 5주 연속 1위!]
[‘내 이야기’의 히트 이유? 풍부한 감정, 색다른 음악, 유이치의 음색!]
유이치가 많이 언급되면 언급될수록.
연스럽게 소환되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빅터 유이치, 한국의 애니메이션 OST에 참여하게 된 사연은? “제자 때문이다” 유이치다운 이유!]
바로 유진이었다.
[빅터 재오의 연기 스승, 유이치의 노래 제자! 12살의 소년, 박유진은 누구인가?]
[유이치 성대모사 100% 재현 가능? 유이치와 박유진의 인연]
[“지금 박유진은 내 제자가 아니다. 이미 청출어람” 유이치의 4차원 인터뷰]
사실 일본에서도 박유진이란 이름은 낯설지 않았다.
이미 그 전부터 인기를 끌고 있었으니까.
[<호구>에선 중년층,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에선 젊은층까지······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청소년, 박유진!]
검도가 소재인 덕분에 일본에서도 인기를 끈 <호구>.
이 당시의 유진은 ‘역대급 아역 비주얼’이라 불리며 순진무구한 소년 연기를 펼쳤다.
그 덕분에 일본의 중장년층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이번엔 라앺으로 인해 젊은층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저승의 왕이자, 인간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허당.
이 양면적 모습이 컬트적 인기를 끈 것.
[최근 일본 어린아이들에게서 ‘염라 코스프레’가 인기!]
[한국 드라마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의 영향? 일본 내 어린이 정장 판매량 급증!]
[한국의 염라, 일본의 염마와 무슨 차이?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가 불러온 문화 공부 열풍]
[당시 11살 소년을 위해 다큐멘터리까지 제작······한국의 천재 소년, 일본까지 접수하는가?]
줄줄이 소개되는 유진의 이력.
[박유진, 최근 일본 팬사이트까지 설립! “출연작 모두 일본어 자막 제작 중”이라 밝혀]
[“제발 일본에 와주세요” 아역배우 박유진을 향한 일본 팬들의 뜨거운 구애!]
유진의 일본 내 팬덤.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며 팽창 중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애니메이션 종주국에 도전장을 내민 한국의 애니메이션······, 일본 개봉 1달 앞둬]
[, 일본 포털사이트 검색량 1위 달성! 흥행까지 무사히 이어질까?]
가 일본 내에서 엄청난 주목을 받는 것도 당연했다.
*
김포공항 안내데스크.
그곳에서 근무하는 여직원은 오랜 빅터의 팬이었다.
방금 점심을 먹을 때도 빅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정도.
“이번에 재오 오빠가 출연한 예능 완전 존잼이었어요!”
그렇게 점심시간을 끝마치고 교대한 뒤.
평범하게 일을 하는 와중이었다.
“실례합니다.”
안내데스크를 찾아온 건 선글라스를 쓴 한 중년 여성이었다.
입은 옷이며 악세서리까지.
제법 고급스러운 인상착의였다.
“묻고 싶은 것 있는데요.”
조금 서툰 한국어.
어눌한 발음까지.
‘뭐지. 일본에서 입국한 관광객인 거 같은데.’
직원은 곧장 웃으며 응대했다.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네. 이 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영화관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직원은 조금 당황했다.
보통 안내데스크를 찾아오면 안내 책자, 관광지가 소개 된 팸플릿 등을 요구하기 마련인데.
대뜸 영화관을 찾다니.
“영화관이라면, 근방 돗대몰 안에 돗대시네마라는 영화관이 있습니다만.”
그러자 중년 여성이 손목에 찬 시계를 흘끗거렸다.
“아, 그렇군요. 혹시 라는 영화, 그곳에서 상영하고 있나요? 죄송해요. 이런 걸 여쭤봐서.”
.
직원도 잘 알고 있는 영화다.
왜냐면 유이치가 커버 OST를 발표했으니까.
‘설마 이 영화를 보려고 한국에 온 건가? 에이, 그럴 리가. 애니메이션 한 편 보자고 해외를 오겠어?’
“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직원은 그리 말한 뒤, 컴퓨터를 이용해 상영시간표를 확인했다.
당연하게도
“가장 빠른 상영시간이 언제입니까?”
“지금으로부터 1시간 뒤, 15시 15분 상영이 가장 빠릅니다.”
“아아. 감사합니다. 스마트폰으로 보려고 했는데, 한국 영화관 사이트에 들어가는 방법을 잘 몰라서요.”
“상영시간표를 프린트해드릴까요?”
중년 여성이니만큼, 해외 사이트 접속은 충분히 어려울 수 있었다.
직원은 이 기묘한 여행객이 마음에 쓰였고.
결국 상영시간표까지 프린트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정말인가요? 감사합니다. 정말 친절하시군요. 이게 한국의 정이라는 거군요.”
“하하. 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여행, 좋은 관람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상영시간표를 받아든 여성은 곧 선글라스를 슬쩍 올렸다.
직원은 아무 생각 없이 그 얼굴을 흘끗 봤다.
“······어?”
그런데.
그 얼굴이 어쩐지 낯익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거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
“흐음.”
그러거나 말거나.
그 여성은 상영시간표를 살피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넨 뒤, 선글라스를 쓰며 멀어지는 중년 여성.
직원은 그제야 눈치챘다.
그 기묘한 관광객은, 빅터 찐팬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유이치의 어머니는 빅터 관련 다큐며 유이치가 출연한 예능에 자주 소개되었으니까.
유이치와 쏙 빼닮았으니 더더욱 말이다.
“서, 서, 설마.”
직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유이치의 어머니?!”
빅터의 팬으로서 상상하지도 못한 호사를 누린 공항 직원.
그러나.
이미 유이치의 어머니, 미유키는 시야에서 멀어진 뒤였다.
*
한국으로 입국한 미유키.
곧장 아들의 얼굴을 보러갈 법도 한데.
그녀가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바로 영화관이었다.
-유이치 : 미안해요 어머니
-유이치 : 스케줄이 있어서
-미유키 : 괜찮다
-미유키 : 어머니는 한국에서 할 일이 있으니
-미유키 : 시간날 때 보자구나
아이돌답게 매우 바쁜 유이치의 스케줄.
그러나 미유키는 전혀
애당초 미유키가 입국한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까.
“. 가장 빠른 걸로 한 장 부탁드립니다.”
순조롭게 예매를 마친 미유키.
잠시 후, 시간이 되자 기쁜 마음으로 영화관 안에 들어갔다.
그러나 두근거리는 마음과는 달리, 영화는 곧장 시작하지 않았는데.
“한국도 광고가 긴 건 똑같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미유키.
그놈의 광고, 광고, 광고.
그런데 곧 그녀의 눈을 사로잡은 광고가 있었으니.
[촤아악-]
겨울 시즌에 맞춘 깨끗한 스키장.
거기서 자그마한 몸집의 누군가 스키를 타고 내려왔다.
광고 속 인물은 고글과 모자, 각종 안전장비를 입고 있어 누군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매우 능수능란하게 스키를 타는 그 인물.
자리에 멈춰서자 촤악, 하고 눈이 멋지게 흩날렸다.
이어 그 인물은 고글과 모자를 벗었다.
[후아.]
순간 미유키는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 인물이 다름 아닌 박유진이었으니.
곧이어.
[꿀꺽- 꿀꺽-
후아.]
이온음료 한 잔을 시원하게 마시는 박유진.
그건 한 편의 화보 영상과 같았다.
[나를 위한 가장 시원한 선택. 아침바람.]
최근 박유진이 새로 찍은 아침바람 광고가 송출되고 있었다.
이번엔 겨울 시즌을 노린 맞춤광고인 것.
스키복을 입은 유진은 청량함과 귀여움, 두 가지를 모두 뽐내고 있었다.
거기에 땀 때문에 젖은 앞머리는 화룡점정.
랜선이모, 랜선삼촌들의 심장을 강타하기 충분했다.
“세상에.”
그 증거로 미유키가 입을 틀어막았다.
미유키가 영화라도 본 듯, 아침바람 광고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무렵.
[제작 – 블루컬쳐 스튜디오]
암전 속.
자막과 함께 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