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박태종은 물론이요.
유진 역시 진심으로 놀랐다.
설마 공항에 이 정도로 많은 팬이 몰려들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니까.
“유진군! 여기!”
“싸라해요! 박유진!”
“꺄아아악!”
[사랑해요], [대박유진], [염라].
각종 한글이 적힌 플래카드를 든 팬들이 유진을 환영하고 있었다.
게다가 연령대도 어찌나 다양한지.
20대부터 50대는 되어보일 중년들까지.
모두 유진을 향해 열성적인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대박인데요?”
박태종의 입에선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미리 언질을 받았던 차동석조차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의 열기.
그런 와중.
“안녕하세요! 모두 반가워요!”
유진만이 태연히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니.
일본팬들이 내뿜는 에너지를 충분히 만끽하고 있다는 게 옳은 표현이리라.
게다가.
“꺄아아아악!”
유진의 인사 한 마디에.
일본팬들은 마치 콘서트장에라도 온 것처럼 환호를 내질렀다.
특히 <호구> 때부터 좋아한 팬들, 중년층의 반응이 격했다.
유진을 좋아한지는 벌써 몇 년 됐으나.
실제로 유진의 실물을 처음 보는 것이니까.
심지어는 울먹이는 사람도 있을 정도.
“와우.”
유진은 감탄사와 함께 성큼성큼 팬들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때, 차동석이 유진의 어깨를 붙잡았다.
“유진아. 이번 입국은 공식 행사가 아니야. 팬들에게 간단히 인사만 하고 넘어가도 돼.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차동석이라고 몰려든 팬들에게 고마움을 못 느끼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번 입국은 어디 에도 알리지 않은 비공식 입국.
어떻게 알려졌는지 팬들이 자발적으로 몰려든 것이다.
차동석으로선 이렇게 많은 외국인에게 둘러쌓인 유진이 위압감을 느끼진 않을까 걱정했다.
게다가 이만큼의 인파면 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으리란 법도 없고.
여러모로 유진의 안전을 걱정하는 것.
“괜찮아요. 우리 급한 스케줄도 없잖아요?”
그러나 유진은 차동석의 손을 잡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번 일본행은 일정이 제법 널널한 편.
고정 스케줄이라봐야 아이자와 감독과의 미팅, 재오의 오디션을 도와주는 정도.
“하지만.”
“그리고 저희 아빠가 그랬잖아요? 해외일수록 겸손해야 한다고! 이렇게 절 보러온 팬들에게 사인 정도는 해드려야죠. 그쵸, 아빠?”
그 말에 박태종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지.”
차동석도 할 말이 없어졌다.
대신 차동석과 박태종은 유진의 옆에 꼭 붙어 무슨 일이 생기지 않게 각별히 주의했다.
경비원들에게 부탁해 더더욱 안전에 신경을 썼고.
덕분에 유진은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팬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유진. 사랑해!”
“귀여워!”
짧은 한국말로 어떻게든 유진과 소통하려는 일본 팬들.
그럼 유진은 해맑게 웃었고.
“나도 사랑해!”
팬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짧게 대답했다.
그렇게 유진이 하네다 공항을 벗어나기까진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
잠시 후.
일본의 스윗터 실시간 트렌드에 등장한 키워드.
[스윗터 실시간 화제 검색어
지역 설정 - Japan
1. 하네다 공항
2. 박유진
3. Life After Life
4. 박유진 실물]
그건 바로 유진의 실물 목격담이었다.
[게이트에 사람이 많기에 누군가 했더니 웬 잘생긴 남자애가 있더라
한 명 한 명 사인해주고 있던데?? 어린아이가 정말 대단해]
이 키워드가 가장 먼저 나온 것은 평범한 공항이용객들로부터였다.
공식 행사도 없는데 사람이 몰려서 뭔가 했더니.
웬 잘생긴 남자애가 있더라는 것.
[박유진이잖아!!
ㄴ 그게 누군데? 한국인?
ㄴㄴ 뭐야 너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도 안 본 거야??
오 염라가 일본에 강림했다ww
이 아이는 드라마 밖에선 염라가 아닌 천사야 날개만 없다고
세상에. 저게 정녕 11살이야?
ㄴ 올해로 12살 된 아이다!
한국의 아이들은 모두 저렇게 생긴 거야?
그가 검도하는 드라마를 봤다. 그때는 귀여웠는데 지금은 잘생겼어]
이윽고 올라오기 시작한 팬들의 직찍.
워낙 사람이 많아 흔들린 짤도 많았지만.
그중에는 대포 카메라로 찍은 고화질 짤도 종종 올라왔다.
사진 속 유진은 팬들과 셀카를 찍거나, 사인을 해주는 모습이 대다수.
[내가 12살이라면 공항을 나오자마자 어른들이 잔뜩 있으면 무서워서 엉엉 울지도 몰라
ㄴ 요즘 12살을 너무 얕보지 마. 아이들은 강하다고
ㄴㄴ 하지만 박유진에게 일본은 해외야. 팬들이 모두 외국인이라고
그런 그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박유진. 사랑해!
이 아이, 처음 보는데 호감이 생겨버렸다]
이런 팬서비스는 당연히 스윗터 내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고.
발빠르게 기사화되기 시작했다.
[겸손함과 팬서비스까지 갖췄다. 한국의 아역배우, 일본 첫 방문!]
[팬들에게 셀카, 사인까지 해준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의 박유진 배우]
[“귀엽고 친절하다” 일본을 녹인 12살의 한국소년!]
유진의 첫 일본행.
시작부터 확실한 호감 이미지를 심었다.
*
그렇게 시끌벅적한 입국을 마치고.
유진은 아이자와 측에서 보내준 사람을 통해 차를 타고 이동했다.
“반갑습니다, 박유진 배우.”
“오랜만에 뵙네요, 아이자와 감독님!”
만나자마자 아이자와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유진 역시 덩달아 허리를 숙였고.
누가 더 공손하게 인사하는지 대결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중간에 통역자가 배석하고.
양측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여긴 각색을 맡아준 혼고입니다.”
“안녕하세요! 배우 박유진입니다.”
“만나뵙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박유진 배우님.”
유진과 악수를 나누는 혼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만큼 감격스러운 모양.
“출연작들 모두 챙겨보고 있습니다. 역시 대단하시더군요. 이번 도 개봉하자마자 관람했습니다.”
“와. 정말요?”
“물론입니다. 정말 독특하고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각본가로서 크게 자극을 받았어요. 박유진 배우의 목소리 연기, 정말 최고였습니다.”
혼고는 정말 스타를 만난 팬처럼 눈을 빛냈다.
“자, 혼고. 팬미팅은 나중에 하자고.”
그를 조금 자제시킨 뒤.
아이자와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저 역시 축하를 건넵니다. 는 여기 일본에서도 큰 인기입니다.”
확실히 일본에서 흥행돌풍이 거세다.
본래 애니메이션 강국이라, 극장판 애니메이션들의 극장 수입이 매우 높게 잡히는 곳.
이미 한국의 관객수를 넘어섰다고 한다.
뮤지컬이라는 생소한 장르.
최근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로 핫한 박유진의 참여.
유이치의 지원사격 등.
여러모로 시너지가 크게 난 것.
“안 그래도 영화 포스터가 크게 붙어있는 걸 봤어요.”
이동하는 길에 발견한 의 포스터들이 상당했다.
정말 가 일본에서 대단히 흥행하긴 한 모양.
‘<입김>이 개봉 하기 전, 일본 진출의 확실한 교두보가 되어주겠는걸.’
유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영화 <입김>의 대본입니다. 각색 과정에서 극단 ‘등불’ 측과 여러 이야기를 나눴고, 다행히 저희의 각색을 받아들여주셨습니다.”
아이자와가 두툼한 종이대본을 건넸다.
바로 영화 <입김>의 대본.
유진은 그를 건네받고 바로 속독에 들어갔다.
‘초반부만 봐도 느낌이 다르네.’
연극 <주변인>에 비해.
영화 <입김>은 확실히 독특한 부분이 있었다.
‘연극인 <주변인>이 오히려 장소에 구애받지 않았는데, <입김>은 산장이라는 장소로 공간을 한정했어. 보통은 반대가 대부분인데 말이야.’
보통 연극은 무대라는 공간제약이 있어 배경이 한정적이다.
반면 영화는 그런 제약에서 자유로운 편.
‘하지만 이 선택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야. 산장 안에서 벌어지는 미스테리만큼 고전적이고 확실한 문법은 없지.’
각색의 과정에서 미스테리 스릴러로서, 좀 더 장르영화의 쾌감을 더한 것.
‘그럼에도 말 한 마디, 자그마한 소문 하나가 모든 것을 망쳐놓을 수 있다는 메시지, 끝내 범인이 밝혀지지 않는다는 미스테리는 놓치지 않았어.’
유진은 흘끗 혼고 쪽을 흘겨보았다.
과연 아이자와와 일하는 사람답게 솜씨가 훌륭한 모양.
“괜찮겠습니까?”
“네? 뭐가요?”
“연극 <주변인>의 텍스트는 박유진 배우의 아이디어도 상당부분 반영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에겐 원작자와 같은”
아이자와가 보기에 유진은 <주변인>에 적잖은 지분을 가진 사람이었다.
극의 엔딩과 메시지를 바꿔버려,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작품으로 재탄생시켰으니까.
“그럼요. 이제 이 이야기는 국가도, 제목도 바뀌었으니까요. 영화는 영화대로 재밌고 흥미로운 대본이네요! 얼른 찍고 싶어요.”
유진의 칭찬에 각색가 혼고의 입이 찢어질 듯 했다.
그러는 사이.
“그런데 박유진 배우. 정말 많이 크셨군요.”
유진을 이리저리 둘러본 아이자와가 말했다.
이제 유진은 연극 <주변인>을 할 때의 그 유진이 아니었다.
키도 크고, 젖살도 제법 빠졌다.
뚜렷해지는 이목구비만큼 그 존재감도 더더욱 강해지는 느낌.
“네. 저도 변한 만큼, 캐릭터도 그만큼 변화할 것 같아요. ”
작품도, 유진도 많이 바뀌었다.
여러모로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할 예정.
그건 아이자와에겐 무척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감독님. 오디션이 이틀 뒤죠?”
“네. 무척 기대하고 있습니다. 박유진 배우가 추천해준 재오 씨가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를요.”
곧 아이자와가 부연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산점 같은 게 있는 건 아닙니다. 오디션엔 저 이외에도 혼고를 비롯, 다양한 스탭들의 의견을 물을 예정입니다.”
“그럼요! 그런데 감독님. 하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오디션을 참관하고 싶어요. 물론 말 그대로 보기만 할 거고요.”
아이자와는 흔쾌히 좋다고 대답했다.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마무리되어갈 때쯤.
“저, 감독님.”
직원 한 명이 아이자와를 찾아왔다.
“사카모토 씨가 사무실을 찾아왔어요.”
*
사카모토 하지메.
그는 아이자와의 동료로, 영화 평론을 업으로 삼고 있다.
평소 아이자와의 사무실에 불쑥 들려 영화 얘기를 자주 나누는 사이.
오늘도 아이자와와 격의없이 영화 얘기나 나누려고 온 것인데.
웬 낯선 인물들이 사무실에 앉아있었다.
“사카모토? 갑자기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아이자와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뭐 언제 용건이 있어서 찾아왔나. 그런데 타이밍이 나빴던 모양이네. 다음에 다시 올까?”
“아냐. 아, 마침 잘 됐다. 인사해. 여긴 박유진 배우. 내 신작 영화 <입김>에 참여할 배우지. 원작 연극에서 출연해 멋진 연기를 보여줬고.”
그러자 총총 앞으로 걸어나오는 소년이 한 명.
“반갑습니다! 박유진입니다.”
꾸벅 인사하며 자신을 소개하는 박유진.
사카모토는 통역으로부터 뜻을 전달받고 유진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영화 평론가 사카모토 하지메라고 합니다. 이야,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일본에 온 걸 환영합니다.”
그러나 웃는 낯과는 달리.
그는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꼬마가 바로 그 박유진인가? 지금 스윗터에서 난리던데.’
사실.
유진의 일본 입국 소식이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준 건 아니었다.
영화 평론가인 사카모토에게 박유진은 불쾌한 이방인이었다.
일본에서 한 번도 활동한 적 없으면서.
대뜸 아이자와 영화의 주역을 떡하니 차지해버린 낙하산이기도 했고.
‘아이자와 저 녀석에게 왜 굳이 한국 배우를 쓰냐고 물었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지. 안 그래도 요즘 한국 컨텐츠가 난리인데.’
최근 한국산 컨텐츠의 기세가 무섭다.
오히려 자국의 컨텐츠보다 순위가 높은 경우도 왕왕 있을 정도.
그 사실이 사카모토에겐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한국 배우면 한국에서 활동하지. 왜 일본에 오는 거야?’
사카모토는 그리 생각하며 유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아이자와가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그냥 뭐 있겠어? 영화 얘기나 하자고 온 거지. 실은 이번에 <벚꽃과 눈송이>를 다시 봤거든.”
느닷없이 사카모토가 꺼낸 것.
그건 매우 오래된 일본 영화에 관한 것이었다.
1970년대 일본 미스테리 영화의 대부격인 작품.
“네가 극찬했던 작품이지. 나도 좋아하는 작품이지만, 네가 말해주었던 시퀀스들의 디테일에 대해 다시 복기해보니 더욱 마음에 와닿더군. 특히 엔딩씬에서의 그 미장센의 훌륭함! 눈송이에서 벚꽃으로 이어지는 메타포가 심금을 울렸어. 피 묻은 눈송이가 벚꽃으로 전환될 때의 숏은 영화 전반을 다시 보게 만들었지.”
아이자와의 손님도 있는데, 불쑥 남들 앞에서 이런 얘기를 시작하는 건.
일종의 텃세와도 같았다.
저 어린아이가 외국어를 벌써 깨쳤을 리 없고.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해외 영화를 봤을 리는 더더욱 없다.
게다가 사카모토가 말하고 있는 건.
설령 정말 자국에서 나고 자란 12살짜리라도 알아듣기 어려운 단어들.
‘12살 꼬마 앞에서 벌이기엔 좀 유치한 것 같지만. 그래도 여긴 일본이야. 일본에 왔으면 일본말을 해야지.’
통역사가 있다곤 하지만.
아이자와와 사카모토, 두 사람의 대화를 굳이 유진에게 통역해줄 리도 없고.
그야말로 이 낯선 이방인들을 대화에서 배제시키는 것이 목적인 것.
‘그런 목적도 없이, 그냥 돈이나 한 푼 벌겠다고 온 거라면······.’
“어? <벚꽃과 눈송이>! 그 영화는 저도 관심이 많아요.”
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드는 목소리.
“1970년에 나온 구로사와 히데키 감독님의 작품. 맞죠?”
원어민 수준으로 유창하게 일본어를 구사하고 있었으니.
순간 당황한 사카모토가 멍한 얼굴로 박유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도 일본 영화에 관심이 엄청 많은데, 혹시 저도 이야기에 껴도 될까요?”
저 외국인 꼬맹이는 자신만만하게 사카모토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