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사카모토는 이후 자신이 원하는대로 영화 이야기를 맘껏 나누었다.
그러나 표정이 내내 좋진 못했다.
괜히 애 앞에서 으스대다 체면을 제대로 구긴 꼴이니까.
“······박유진 배우. 정말 아는 것이 많네요.”
유진은 일본어 실력뿐 아니라.
일본 영화 전반에 대한 지식도 엄청 났다.
영화 평론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카모토에게 결코 뒤쳐지지 않을 정도.
오히려 사카모토가 예상치 못한 해석을 내놓는 등.
여러모로 사카모토를 쩔쩔 매게 만들었다.
“감사합니다!”
게다가.
사카모토가 유진을 속을 알 수 없는 요물이라고 생각하려다가도.
“사카모토 평론가님. 오늘 얘기 엄청 즐거웠어요!”
정작 유진은 저렇게 웃는 얼굴로 순진하게 자신을 대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사카모토는 양심이 찔릴 수밖에 없었다.
저 순진무구한 꼬맹이에게 괜한 텃세를 부린 셈이니.
“······.”
대화가 끝나고 나서 두 사람의 얼굴은 상반됐다.
마치 흡성대법이라도 쓴 것처럼.
유진이 사카모토의 정기를 모두 빨아들인 듯 보일 지경이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박유진 배우,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사카모토가 도망치듯 돌아간 이후.
“죄송합니다.”
아이자와가 뒤늦게 사과했다.
긴 한숨은 덤이다.
뒤늦게 제 동료의 의도를 눈치챈 것.
일부러 대화에서 유진을 배제하려던 것 말이다.
“제 동료지만, 유치하고 어른답지 못했습니다. 저 친구에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그 담백한 사과가 오히려 유진의 흥미를 끌었다.
‘동료라서 감싸줄 법도 한데, 전혀 변호하지 않네?’
원래는 착한 녀석이다.
한 번 실수한 것이다.
동료니만큼 그런 식으로 은근히 포장을 할 법도 한데.
‘자기 소신이 분명하고, 그걸 굽히지 않는 사람이야.’
저런 성미 때문에 일본 영화계에서 아웃사이더로 불리는 게 아닐까.
그것이 고스란히 작품에 녹아들어, 독특하고 감각적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성향이, 바로 유진이 아이자와를 선택한 이유다.
‘바로 저 성미가 아이자와 감독의 작품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니까.’
화제성만 받쳐준다면.
분명 해외에서도 먹힐 감독임은 분명했다.
곧 유진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뇨. 괜찮아요. 사카모토 씨라고 했죠? 그 평론가님은 일본 영화계를 무척이나 사랑하시는 분 같아요. 전 한국에서 왔으니, 잘 모를 거라 생각하시는 것도 당연해요.”
유진은 유려한 일본말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 말은 진심이었다.
‘모두에게 환영받을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없었어.’
팬이 많다고 해서 안티가 없는 게 아니다.
자신을 향하는 조명이 강해지는 만큼 그림자도 길어지는 법.
그 점을 유진도 잘 알고 있다.
회귀 전부터.
빛나는 스타들의 주위를 맴돌며, 그들의 명암을 누구보다 많이 봐오지 않았나.
‘게다가 여긴 일본이야. 갑자기 들어온 외국인 꼬맹이가 아니꼽게 보일 수도 있겠지.’
연예계란 국적 불문 정글과도 같은 곳.
언제, 어디서든 빛나는 존재만이 살아남는다.
그런데 대뜸 한국에서 잘 나가는 아역배우가 왔다면?
시기와 질투, 배타심이 없을 수가 있겠나.
“그런데 박유진 배우. 일본어를 매우 능숙하게 하는군요.”
아이자와가 뒤늦게 감탄하며 말했다.
유진은 뿌듯하다는 듯 V자를 그리며 웃었다.
“아이자와 감독님의 영화화 소식 이후 열심히 공부했거든요.”
회귀 전부터 일본어는 제법 친숙한 언어였는데.
유진이 집중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하자 실력이 쑥쑥 늘었다.
게다가 유이치라는 훌륭한 원어민 선생님이 있었으니.
“그리고 해외 영화에 출연하는데, 외국어를 공부하는 건 당연한 거죠.”
물론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당연한 일을 안 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설령 한다고 해도, 유진처럼 이렇게 능숙하게 해내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 짧은 기간 내에 이런 고급 어휘에, 억양까지 완벽하게 익히는 건 매우 힘든 일입니다. 박유진 배우는 언어적 센스가 무척 뛰어난 모양이군요.”
“음, 아직 뇌가 말랑말랑해서 그런 걸까요?”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중얼거리는 유진.
그러자 아이자와가 빵 터졌다.
“하하! 박유진 배우는 참 재미있는 표현을 쓰는군요.”
곧 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마치 처음 연극 <주변인>을 봤을 때처럼 말이다.
“이번 영화 <입김>, 정말 기대가 됩니다.”
“네! 저도 기대가 커요.”
어느 새 일본어로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그런 와중, 유진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작품성과 재미만 있으면 안 되지.’
아이자와의 연출.
혼고의 각색.
유진이 보기에 재미와 작품성은 분명히 잡을 수 있는 고기였다.
‘확실한 흥행 카드가 필요해.’
유진 역시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곤 하지만.
아이돌 빅터만큼은 아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엔 재오의 힘이 필요했다.
*
일본 도쿄에 위치한 한 음식점.
그곳은 특정 금액 이상을 쓰는 손님에겐 방을 따로 내주었다.
그 안에서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재오.
잠시 후.
“재오 형!”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오는 유진을 보며 재오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가까이 마주 선 두 사람은 짝, 하고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야. 일본에서 만나니까 더 반가운데?”
“그러게요. 배경이 달라지니까 되게 신선한데요?”
“근데 너, 일본 스윗터에서 난리더라? 입국하면서 팬들한테 셀카며 사인을 다 해줬다고. 다들 엄청 좋아하던데?”
“아, 정말요? 처음 알았어요.”
“뭐야. 스윗터 안 봤어?”
“아뇨. 스윗터야 매번 보는데, 그런 내용을 못 봤거든요.”
“그럴 리가. 어디 네 휴대폰 좀 줘봐. 뭐야, 지역 설정이 아직 한국으로 되어있잖아. 안 바꾼 거야?”
“지역 설정? 스윗터에 그런 기능이 있어요?”
“······넌 진짜 요즘 애 같지 않다. 스윗터 팔로워만 100만이 넘는 녀석이 스윗터 기능도 모르고.”
한국이든 일본이든.
여전히 기계치인 유진이다.
“오. 근데 재오 형. 얼굴이 뭔가 편해 보이는데요?”
반면 재오는 조금 달라진 것 같은 인상.
출국 전.
오디션에 대한 강박 때문인지 여러모로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던 재오다.
그러나 지금은 얼굴색이 꽤 밝아 보였다.
“빅터가 일본에서 잘 나간다고 해도, 한국에 비할 바는 아닌가 봐.”
재오는 그리 말하며 피식 웃었다.
물론 모자와 마스크, 선글라스 등을 쓰고 다니긴 했으나.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한국에 비하면 확실히 적었다.
“마치 여행하듯 여러군데를 돌아다녔어. 분명 일본에 와서 연습만 할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덕분에 재오는 오랜만에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중.
그 역시 한창 청춘인 20대 청년 아닌가.
“어? 그럼 연습을 안 했다는 거예요?”
“음. 하긴 했는데, 일본에 온 이후로는 그렇게 열심히 한 거 같진 않아.”
재오의 대답에 유진이 흠칫 놀랐다.
그 연습벌레 재오가 연습을 쉬엄쉬엄했다니?
“사실, 그때 너한테 얘기를 듣고 여러 생각을 해봤거든.”
그리 말하더니 후우, 하고 긴 한숨을 뿜어내는 재오.
“유진아.”
“넵?”
“넌 왜 이 작품 오디션에 날 추천한 거야?”
“음? 그건 왜요?”
“궁금해서. 왜 하필 일본에서 찍는 영화에 오디션 보라고 추천했는지. 다른 작품도 많잖아?”
그 말에 유진은 잠시 커다란 눈망울을 끔뻑였다.
그러더니.
“그냥요. 형이 잘할 거 같아서요!”
별 이유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대답이 재오의 가슴을 울렸다.
“그냥?”
“네, 그냥. 그냥 그런 믿음이 들던데요?”
유진이 데뷔한 이래, 여태 유진의 선택은 모두 옳았고.
모두 결과로 증명된 사실이다.
그런 유진이 재오를 믿고, 잘할 거라며 믿어준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졌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네.”
가타부타 미사여구를 곁들여 이유를 설명해주기보다.
그 담백한 한 마디가 재오에겐 큰 힘이 되었다.
유진이 함께 연기하고 싶은 배우 중 하나로 자신을 원하고 있고.
오디션이라는 기회를 통해 증명할 기회를 주었다.
“여러모로 부담감이 많았는데. 그 말을 들으니 한결 가벼워졌어.”
재오는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자신을 보여주려 했다.
연기자로서 공식적으로 도전하는 첫 오디션에, 유진이 선택한 작품이니까.
작품이 무조건 성공할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 때문에 오디션에 무조건 붙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고.
의욕이 과욕이 된 것.
“<입김>은 네가 선택한 작품이지. 하지만 그 이전에, 나라는 배우도 네가 선택한 거니까.”
틀린 선택을 한 적 없는 유진이, 자신을 믿고 오디션에 추천해주었다.
그 하나만으로도 마치 모든 게 잘 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꽉 막혔던 시야가 탁 트이고.
덤으로 캐릭터 해석에 관한 여러 영감이 솟구친 것.
“아, 맞다. 나 연기 한 번 봐줄래?”
“지금요?”
“응. 사실 보자고 한 것도 그거 때문이야. 스승님한테 마지막으로 검사받고 싶어서.”
“좋아요! 연기에 관한 거라면 언제든 환영이에요.”
재오는 유진에게 <입김> 오디션 대본을 내밀었다.
일본어로 되어있긴 하지만.
연극 <주변인>의 주인공 오디션 대본과 영화로 각색된 <입김>의 오디션 대본은 큰 차이가 없었다.
“역시 연극으로 올릴 때와는 주인공이 조금 달라졌네요.”
<주변인>의 주인공이 다소 경박하고 입이 가벼운 편이었다면.
<입김>의 주인공은 굉장히 멀끔하고 사교성이 높은 청년으로 나온다.
인맥 또한 넓어서, 지인들과 함께 산장으로 함께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거기서 점차 여행을 온 지인들이 하나 둘 사라져가며 진실이 드러난다.
굉장히 끈끈해보였던 관계가 사람들의 실종, 죽음으로 인해 파탄에 이르고.
결국 서로를 의심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완벽하고 친절해보였던 주인공의 과거와 이면이 드러나며 미스테리가 증폭되는 것.
오디션에선 주인공의 양면적 모습을 모두 보여줘야한다.
친절하고 사교성이 높은 평소의 모습.
그리고 점차 과거가 드러나며 혼란스러워하는 후반부의 모습 말이다.
“확실히 한국인이 일본어로 연기하기엔 어려운 캐릭터죠.”
멀끔하고 사교성이 높은 캐릭터로 나오는데.
언어가 서툴러서야 캐릭터를 완벽히 재현해낼 수 없으니.
“애당초 내 캐릭터 분석은 방향이 잘못된 걸지도 모르겠어.”
재오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네가 말한 대로, 나는 완벽히 일본인 흉내를 낼 수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이용해보기로 했어.”
그리 말하며 재오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연기에 곧 몰입할 것이라는 신호.
유진은 그 앞에 가만히 앉아, 재오를 위한 관객이 되어주었다.
잠시 후.
재오의 연기가 끝난 뒤.
“우와.”
유진은 순수한 감탄을 토해냈다.
“형. 대박이에요! 형도 이제 하산해도 되겠는데요?”
“비행기 태우지 마.”
“진짜에요. 캐릭터 해석이 너무 좋았어요!”
유진이 재차 칭찬하자 재오의 입꼬리도 슬쩍 올라갔다.
“크흠! 뭐, 다 네 덕분이지.”
“에이. 제 덕분은요. 형이 생각해낸 거잖아요? 그건 형만의 무기가 될 거예요.”
“역시 넌 내 스승님이야, 유진아. 최고의 스승님.”
직접적인 조언을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깨우치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재오가 유진을 진정한 스승으로 모시는 이유다.
“음, 제가 제자는 재오 형 한 명만 둬서 잘 모르겠지만. 형이 그렇게 말해주니 좋은 스승이란 소리겠죠? 하긴. 엣헴. 제가 누군데요!”
갑자기 태세를 전환해 가슴을 쭉 펴는 유진.
그러자 두 사람 사이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영화 <입김> 주연 오디션이 다가왔다.
*
일본 굴지의 연예기획사, JG 매니지먼트.
높은 고층건물은 그 위압감을 나타내기 충분했다.
그 때문일까.
수뇌부들의 회의실도 매우 높은 층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 높은 곳에 위치한 수뇌부들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최근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인터넷 언급량, VOD 다운로드 횟수, 시청률······한국산 컨텐츠들이 모두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최근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를 기점으로 재차 불게 된 한류열풍.
그를 타고 한국의 배우들이 일본 진출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드라마를 통해 한국 배우의 일본 내 팬덤도 무시 못 할 정도로 커진 상황.
“어차피 한류는 지나갈 바람입니다. 여태 이런 적이 한두 번입니까? 굳이 우리가 나서서 한국 배우들을 포섭할 이유가 없을 텐데요.”
“하지만 그 유행에서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다면, 마땅히 그래야지요. 바람이 분다면, 그 바람을 이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기업이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마쓰야마 엔터테인먼트는 한류 배우들의 일본 활동을 지원하여 상당한 이익을 봤습니다. 이는 수치가 증명하죠.”
“하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외국 배우들은 관리하기가 어렵죠. 언어, 문화, 생활상. 모든 것이 다르니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모릅니다. 괜한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배우가 없던 게 아니잖습니까.”
기획사마다 한류열풍에 대처하는 방식도 제각기다.
JG 매니지먼트 수뇌부 안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가운데.
“자네 생각은 어떻지? 와타베.”
그때.
최근 창설된 ‘해외전략부서’라는 요상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부서.
그곳의 부장을 맡고 있는 와타베라는 남자에게 시선이 쏠렸다.
“늦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공격적인 활동에 나서야 합니다. 최근 인기를 끄는 한류 배우들의 일본 활동을 지원하고, 그에 따라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연예인이 일본 진출시.
일본 활동을 서포트 받기 위해 일본 기획사와 계약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한국 연예인은 원활한 일본 활동이 가능하고, 일본 기획사는 이익을 볼 수 있고.
상호이익이 되니까.
“하지만 현재 인기를 끌고 있는 한국 배우들은, 이미 양국에 모두 잘 알려진 스타 배우들이지.”
“설령 인기가 있다고 해도, 일본 활동에 적합한지는 검증이 필요하지 않나.”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를 비롯.
현재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밤바람 불어올 때>, <여름의 냄새> 등.
그 드라마의 주역들은 대부분 이미 일본에서도 익숙한 얼굴들이 많았다.
그들은 이미 다른 유명 기획사들과 일본 활동 관련 계약을 맺은 상황.
한류에 대한 대처가 다소 보수적이었던 JG 매니지먼트로선 뼈아픈 일이다.
“한 명 있습니다.”
그때.
와타베가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일본에서 현재 인기를 끌고 있으며, 아직 일본 활동 계약이 없고, 신선한 얼굴이며, 일본 활동에 적합한 인물이.”
“그게 누군가?”
“박유진입니다.”
그의 얼굴엔 확신이 깃들어있었다.
“이 한류열풍 속에서, 다소 큰 개런티를 지불하더라도 무조건 박유진을 잡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