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3년 후.
송미연 작가의 작업실.
“네. 네. 마지막화 봤어요. 고생하셨어요, 피디님. 네? 제가 종방연을 왜 가겠어요. 배우들이랑 재밌게 즐기고 오세요. 전 일이 있어서. 네. 네.”
상투적인 어투로 나눈 대화.
송미연은 최근 3년간 2편의 드라마 작업을 끝냈다.
[송미연 지상파 복귀작 드라마 <그대 뿐이야> 호평 속 종영. 엔딩도 깔끔했다!]
[작가 송미연의 힘인가? 온플러스 드라마 <목소리를 전하는 방법> 매회 시청률 올라갔다······마지막회 ‘자체 최고시청률 기록’]
<유별난 친구들> 이후 화려하게 부활에 성공.
지상파에서 한 작품, 케이블에서 한 작품.
모두 높은 시청률과 화제성을 기록했다.
그러나 송미연의 표정은 영 좋질 못했는데.
심지어 방금은 종방연 회식 참석조차 거절해버렸다.
“왜 안 와.”
누굴 기다리고 있는 듯, 초조한 얼굴.
잠시 후.
“교수님.”
그녀의 제자이자 드라마 작가인 민용석이 등 뒤에서 나타났다.
그러자 송미연은 보기 드물게 초조함을 드러내며 물었다.
“그래, 연락해봤어?”
“네. 주역 매니지먼트 쪽에도 연락해봤는데, 노코멘트라고 하네요. 배우가 지금 중학생이라 학업에 집중하고 있다면서 이해해달라고요.”
“······.”
그 대답에 송미연은 곧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박유진 배우.”
3년 전.
오로지 박유진만을 염두해두고, 제자인 민용석과 공동대본까지 집필했던 송미연.
사실 대본은 진즉에 완성했으나.
갑자기 유진이 일본 진출을 선언하는 바람에 미룰 수밖에 없었다.
‘저 당분간은 일본 쪽 활동에 집중해보고 싶어서요.’
유진은 송미연에게 직접 그리 말했다.
드라마는 트렌드에 민감하다.
시기를 놓치면 제대로 흥행하기 힘들 터.
때문에 해당 원고는 잠시 묵혀둘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리메이크할 여지는 충분했고.
민용석과의 공동작업 덕분에 퀄리티가 높아 활용도는 무궁무진했다.
‘기다릴게. 너를 위해 쓴 대본이니까.’
‘기다리지 마세요. 작가님 글 재밌잖아요! 더 많은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줘야죠. 안 그래요?’
당시 유진은 송미연에게 그리 말했다.
‘저만을 위한 작품이니만큼, 언젠간 꼭 참여할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안 될 거 같아요. 대신 나중에 두 배로 갚아드릴게요! 저 금의환향해서 돌아올 테니까요.’
유진은 공수표를 날리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 덕분에 송미연도 유진을 믿고 다른 작품을 집필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건 여러모로 옳은 선택이었다.
송미연 역시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갔으니.
이제 남은 건 유진과의 약속 뿐이거늘.
“그런데 설마 3년이나 일본 활동만 할 줄은 몰랐지. 게다가 요즘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최근 반년간 행보가 얼마나 두문불출한지.
아역배우 박유진의 팬카페 ‘대박유진’만 봐도 알 수 있다.
[유진이 떡밥 좀 ㅠㅠㅠㅠㅠ
최신 근황이 백룡이 넙튜브 영상 속 손바닥인 게 말이 되냐고요...
그 잘난 얼굴 왜 안보여조 ㅠㅠㅠㅠㅠㅠ]
초등학생 당시만 해도 매우 핫한 시절을 보냈던 박유진.
그가 일본 진출을 결정한 이후.
한국에선 그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영향력을 잃지 않았잖아요. 와, 진짜 대단하더라고요. 미리 준비해놓고 간 것처럼 느껴졌어요.”
민용석의 말대로.
지난 3년간 박유진이라는 이름은 꾸준히 대중들에게 언급되었다.
유진이 준비해놓은 포석들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
첫 시작은 유진이 처음 일본으로 넘어갔던 12살의 가을.
영화 <찬란>이 개봉했다.
[충무로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세대교체는 없었다! 영화 <찬란>이 안기는 묵직한 감동]
[배우 이순철 인생 최고의 역작! 그의 인생은 찬란했다]
[일상에서 포착한 예술······ <찬란>이 훌륭한 영화인 이유]
한 명의 배우이자 인간의 인생.
그를 예술적으로 승화해낸 영화 <찬란>은 평단으로부터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덕분에 이순철은 적지 않은 나이로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독식했다.
심지어 그 다음해, 백룡영화제에 최고령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을 정도.
그와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된 이름이.
[와 엔딩장면 진짜 가슴이 웅장해지더라
내가 본 영화 최고의 엔딩이었음
머리 길어가지고 얼굴 안 보여서 누군가 했는데 박유진이더라
와 머리카락 걷어내고 햇빛 보이는 연출 진짜... 그때 박유진 눈빛 봄??
한 배우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영화...그 영화 엔딩이 처음 꿈을 꾸던 시절이라니... 수미상관 덕후 이마 팍팍 친다...]
바로 엔딩을 장식한 유진이었다.
고작 5분 남짓한 시간이었으나.
극의 여운을 증폭시키는 순수한 연기를 펼쳤으니.
그야말로 <찬란> 속 신의 한 수로 평가받았다.
‘<찬란> 첫 촬영이 바로 엔딩씬이었습니다. 네. 박유진 배우가 나왔던 바로 그 장면. 그 장면 촬영하고서 느꼈습니다. 첫 단추를 아주 잘 꾀었구나. 생각합니다. 박유진 배우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백룡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 당시.
이순철이 수상소감으로 유진을 언급했을 정도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콕 집어 누군가를 칭찬하고, 공을 돌린 적이 없는데.”
이순철은 매번 출연한 모든 배우들, 스탭들에게 공을 돌리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유진을 지목해 고마움을 전한 것.
이순철과 가까운 사이인 송미연도 놀랄 일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에도 엄청난 일이 벌어졌죠.”
“아아. 그 영화가 칸에 간 거?”
그리고 그 직후 날아온 또 하나의 희소식.
[‘죽음조’가 출연한 좀비물. 대학생들의 졸업작품 <스마트 좀비>가 칸국제영화제 단편영화부문 수상!]
[대한민국들의 대학생, 신선한 영화로 단편영화 경쟁부문 수상 영광을 안다!]
[칸국제영화제 단편영화 부문 심사위원장 조 윌슨, <스마트 좀비> 수상 이유를 밝히다! “연출은 참신했고, 배우들은 노련했으며, 스토리는 사회적이었다” 극찬]
수상 이후 수상수감도 여러모로 화제가 되었는데.
‘정말, 정말 저희가 받은 거 맞아요?’
‘진짜 이게 무슨 일이야. 믿기지 않아요. 흐윽, 흑. 흐윽······.’
졸업작품 <스마트 좀비>. 이새아와 김도희.
두 여학생이 줄줄 눈물을 흘리며 한국어로 수상소감을 전했다.
‘흐윽, 흑. 졸업유예까지 해가며 만들었는데. 설마 이렇게 큰 영광을 받게 될 줄은 몰랐어요. 진짜, 진짜 감사해요.’
‘특히 유진이······박유진 배우한테 진짜 너무 감사해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저희한테 와서 칭찬해주고, 출연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죽음조 배우분들 추천해주고······. 덕분에 꿈같은 시간을 보냈어요. 다 박유진 배우 덕분이에요. 진짜, 진짜 고마워요.’
유진이 죽음조 배우들까지 동원하여 출연한 <스마트 좀비>.
처음에는 무슨 대학생 작품에까지 출연하냐는 여론도 있었으나.
유진은 결과로 증명해냈다.
또한 유진이 작품 고르는 안목을 재차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해엔 또 애니메이션으로 난리가 났죠. 북미랑 유럽 쪽에서요.”
그리고 유진이 13살이 되던 봄에는.
[국산 창작 뮤지컬 애니메이션 , 넷플러스 북미지역 인기순위 TOP 5에 진입!]
[유럽을 울린 ······그곳에 퍼져나간 대한민국 아역배우들의 노래!]
[, 프랑스국제영화상 최우수작품상 수상! 한국작품&애니메이션 영화 최초 수상 ‘겹경사’]
[박유진, 미국애니메이션평론협회에서 주최하는 목소리연기상 수상의 영광을 안다! “감동이란 인종과 국적을 뛰어넘는다는 걸 배웠다” 영상을 통해 수상소감 밝혀]
애니메이션 가 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넷플러스 인기 최상위권을 유지한데다.
각종 시상식에서 목소리 연기상, 애니메이션상, 음악상 등을 휩쓸었다.
<찬란>.
<스마트 좀비>, 그리고 .
이 세 작품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수상소감에서 박유진 배우를 언급했지.”
감독인 이선화 감독도 매번 수상소감마다 유진을 언급했다.
‘우리 영화를 한 단계 높은 경지에 올려준 성우가 있습니다. 유진아. 넌 언제까지고 내 아기천사야. 고마워!’
작품마다 유진의 존재감이 얼마나 컸는지 체감할 수 있는 부분.
그런데.
“근데 대체 요즘은 뭐하는 거야?”
이따금 넙튜브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곤 있지만.
최근 반년간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다.
말 그대로 ‘생존신고’만 하는 중.
때문에 팬들만 애가 타는 중이었다.
“누구는 역변한 거 아니냐고 걱정하더라고요.”
“역변은 무슨. 그 잘난 얼굴이 역변할 거 같아?”
“혹시 모르죠. 애들은 크면서 얼굴이 달라지니까요. 저도 어렸을 땐 귀여웠는데 지금은 이렇게 생겨 먹었잖아요.”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많이 컸다.”
다소 자신감이 없던 민용석도.
점차 여러 작품을 거치며 방송국물을 먹은 상태.
이젠 송미연을 상대로 실없는 농담도 던질 수 있게 되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네요. 반년이나 아무 소식이 없다니.”
한국에서든 일본에서든.
쉬지 않고 배우로서 활동해온 유진이다.
그런 유진이 반년이나 아무 소식이 없다니.
유진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불안감이 커져갔다.
“호, 혹시 번아웃이라던가? 아니면 연기에 흥미가 식어버린 거 아닐까요? 이른 나이에 너무 많은 걸 이뤘으니까······.”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송미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너도 박유진 배우랑 같이 작업해봤잖아.”
“화, 확실히 그럴 아이는 아니었죠. 하지만 3년이나 시간이 흘렀으니까요. 혹시 중2병이라도 온 거 아닐까요? 헉. 딱 중2 아닌가요 지금?”
성장과정에서 아이들의 성격이 변하는 거야 흔한 일이다.
특히 유진처럼 이른 나이에 큰 성공을 겪은 아이들이라면 더더욱.
어린 천재들이 빨리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지는 것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니까.
“박유진 배우는 배우로서의 정체성이 그 누구보다 확고하게 잡혀있는 아이니까. 그러니 예능 출연도 꺼려했던 거고.”
“그럼 왜 요즘 아무 소식이 없을까요?”
“그거야 모르지. 내가 독심술사야? 남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박유진 배우의 생각을 그 누가 알 수 있겠어?”
“그, 그런 건 아닌데요. 죄송합니다.”
퉁명스레 대답하는 송미연과 쩔쩔매는 민용석.
“분명 무슨 생각이 있는 거야.”
곧 송미연의 시선이 휴대폰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마 복귀도 제법 요란하게 하겠지.”
*
얼마 뒤.
서울에 있는 혜화역.
막차가 끊기기 직전의 시간이라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기열아. 얼른!”
그곳으로 들어오는 두 명의 소년.
15살 남짓 되어보이는 소년이 다른 한 소년, 정기열에게 손짓했다.
“하암.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정기열이 하품을 길게 내뱉었다.
12살이던 때보다 훨씬 키가 자란 모습.
무엇보다 얼굴살이 매우 많이 빠졌다.
갈수록 어머니인 김주현을 쏙 빼닮은 모습.
“너 이제 어린이 아니야. 15살이잖아.”
그리 말하는 것은 검은색 마스크를 쓴 한 소년.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여튼 한 마디를 안 져요.”
정기열이 투덜대며 소년 쪽으로 걸어갔다.
“자, 자. 얼른 와. 사람 없을 때 후딱 찍어야지.”
“네, 네. 갑니다, 가요.”
바쁜 걸음으로 걸어가는 두 소년.
곧 정기열이 소년의 행색을 훑어보곤 말했다.
“근데 넌 왜 교복 차림이냐?”
“학교 끝나자마자 어딜 좀 다녀왔거든.”
“어딜 다녀온 건데? 가서 뭐했어?”
“비밀.”
“맨날 비밀이래. 너 요즘 낯설다? 학교 끝나면 바로 어디 가버리고. 놀아주지도 않고. 선미랑 신애가 서운해하더라.”
“미안해. 그런데 매일 해야 하는 일이라. 걱정 마. 금방 끝날 거니까.”
“금방 안 끝나기만 해봐라.”
곧 그들은 전광판 앞에 도착했다.
지하철 광고가 걸리는 바로 그 장소.
거기엔 감각적 분위기의 축하광고가 게시되어 있었다.
[#대박유진
유진이의 15번째
봄을 축하해]
바로 배우 박유진의 15살을 기념하기 위해.
팬카페 대박유진에서 진행한 지하철 광고다.
“우와. 예쁘다.”
감탄을 터뜨린 소년,
그는 곧 전광판 앞에서 브이를 그렸다.
“자, 얼른 찍어줘!”
그러자 정기열이 눈살을 찌푸렸다.
“야. 촌스럽게 포즈가 그게 뭐냐? 진짜 아재 같이. 누가 그런 촌스러운 브이를 해?”
“브이가 어때서? 인증샷에 브이는 국룰이잖아.”
“너 화보도 매년 찍지 않냐? 잠깐. 야! 왼손! 그 어정쩡한 왼손 좀 어떻게 해봐. 차라리 주머니에 손을 넣던가.”
“에이. 팬들이 해준 광고 앞이잖아. 어떻게 주머니에 손을 수가 있겠어? 건방지게.”
“어휴. 그럼 등 뒤에라도 좀 숨겨보든가.”
“으음. 이렇게?”
“······그래. 그나마 낫긴 하다.”
“잠깐. 마스크 좀 내리고.”
“가지가지 하네.”
제법 오래 걸린 포즈 잡기.
“그럼 이제 찍어줘.”
“자, 그럼 찍는다. 하나, 둘!”
찰칵!
소년의 모습이 전광판을 배경으로 찍혔다.
“오. 잘 나왔네. 나 톡으로 보내줘.”
소년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정기열이 슬쩍 물었다.
“이거 스윗터에 올릴 거냐? 아니면 팬카페?”
“올리긴 할 건데, 지금은 아니야.”
“왜?”
그때.
다른 사람에게서 톡이 도착했다.
-재오형 : 스승님
-재오형 : 우리 콘서트 게스트 명단 말인데
-재오형 : 미리 공개할까?
-재오형 : 조실장형이 물어봐서
그 톡을 보며 유진은 피식 웃었다.
-박유진(나) : 아니 비공개로 해줘 형
-박유진(나) : 특별 게스트는 비밀이어야 맛이지
연예계를 씹어먹다시피 했던 아역배우, 박유진.
중학생이 된 그가 한국 복귀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