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최희숙은 당황한 얼굴로 유진과 유신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설마 여기서 유신애가 등장할 줄은 생각도 못했던 모양.
“죄송해요. 신애가 여러모로 불안해하고 있었거든요.”
유진이 최희숙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일단 두분이서 얘기를 나누는 게 좋겠어요.”
유신애는 쭈뼛대며 최희숙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이 덩치만 좀 다르지, 꼭 데칼코마니를 한 듯한 모양새.
“크흠. 여, 여긴 무슨 일이니?”
“엄마 만나러 왔어.”
다소 답답해 보이긴 했지만.
유진은 당장 끼어들지 않고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가족끼리 어떻게 풀어나갈지 지켜보는 게 가장 좋을 테니.
“방금 다 들었어. 엄마가 내 작품을 그렇게 생각해주는지, 정말 몰랐어.”
부끄러운 건지, 기쁜 건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말하는 유신애.
“신애야.”
“으, 응?”
“넌 괜찮겠니? 엄마한테 네 작품을 맡겨도.”
“엄마야말로 괜찮아? 내 작품을 맡아도? 엄마 지금 막 대본 쓰고 있잖아.”
그 말에 최희숙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응? 엄마 요즘 대본 안 쓰는데 무슨 소리야?”
“그럼, 막 키보드로 뭐 쓰고 있던 건 뭐야? 방에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잖아.”
그 질문에 유진이 서포트했다.
“네 작품에 달리는 악플들. 그거 보면서 욕하시는 거 같던데?”
그러자 최희숙의 얼굴이 붉어졌다.
많이 부끄러운 모양인지 황급히 화제전환을 시도했다.
“그러는 신애 너는, 엄마한테 한 번도 작품 보여준 적이 없잖아.”
“그, 그건.”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유신애.
그러자 유진이 유신애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괜찮아. 솔직히 말하면 아마 기뻐하실 거야.”
속삭이는 유진의 목소리.
그러자 그에 힘을 얻었는지.
유신애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엄마는 내 우상이란 말이야.”
“응?”
“엄마는 대단한 사람이잖아. 유진이랑 같이 만든 첫 작품도 엄청 잘 나가고. 그에 비해서 나는 너무 초라해 보였어.”
최희숙과 유진이 성공을 이끌어낸 영화 <리플레이>.
이는 곧 유신애에게 여러 감정을 들게 만들었다.
제 엄마는 첫 작품부터 상을 휩쓸었고.
제 친구는 첫 영화부터 엄청난 주목을 받았으니.
“그래서 함부로 아무 작품이나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내가 진짜 떳떳하고 자신감이 생겼을 때, 그때 보여주고 싶었단 말이야.”
하지만 유신애는 착한 심성답게 열등감을 품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채찍질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그렇기에 이른 나이부터 로맨스 소설을 출판할 수 있었던 것.
최희숙도 유신애도.
서로를 위하고 있었지만.
사소한 오해가 쌓여있던 모양이다.
“이런 못난 엄마가 우상이라니.”
최희숙이 유신애를 껴안았다.
유신애가 어릴 때부터, 최희숙 본인은 영화를 찍는다며 다소 소홀했거늘.
그런 엄마를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우상으로 여겨주고 있다니.
“너는 항상 내게 최고였단다.”
유진은 그를 지켜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최희숙과 샤샤토끼는 그야말로 대한민국 문화계에 다신 없을 모녀 조합.
그 둘이 만들어낼 드라마가 벌써 기대됐다.
‘지금이기에 만들어낼 수 있는 시너지가 분명 있을 거야.’
세상에 사랑의 형태가 꼭 연애감정만 있는 건 아니니까.
지금 저 두 사람이 느끼고 있는 감정은.
분명 <열다섯, 서른다섯>을 드라마로 만들 때 도움이 될 것이다.
‘서로를 생각하지만 결국 그것 때문에 어긋나버린 <열다섯, 서른다섯>의 테마와도 잘 맞아떨어져.’
감독으로서, 작가로서는 인정받고 있으나.
엄마로서, 딸로서는 아직 서툰 두 사람이기에 더더욱.
“좋아. 엄마가 연출을 맡을게.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
최희숙이 말했다.
“15살의 남주는 우리 신애가, 그리고 35살의 남주는 넷플러스가 정했지. 그렇다면 15살의 여주는 내가 정하게 해줬으면 좋겠구나.”
이미 주연 4명 중 3명이 꽉 찬 상황.
마지막 한 명만큼은 자신이 정하고 싶은 게 당연했다.
“혹시 캐스팅이 마음에 안 드시나요?”
유진의 물음에 최희숙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감독으로서 원하는 그림을 뽑아내기 위해선, 최소한 그 정도는 해야할 것 같아서 말이야.”
캐스팅이야말로 감독의 고유 권한이다.
나머지 한 명만큼은 자신이 선택하고 싶다.
이는 감독으로서 최희숙이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일 터였다.
“넷플러스 측에선 원작자의 동의만 있으면 상관없다는 입장이야. 그리고 너에게도 물어보는 게 맞을 거 같고.”
“제 입장을요?”
“너의 파트너가 될 아이니까.”
“감사해요. 그럼 혹시 누군지 여쭤봐도 돼요?”
“아마 너도 마음에 들 거야.”
곧 최희숙이 유진의 귓가에 해당 배우의 이름을 속삭였다.
그러자 유진은 흠칫 놀란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헐. 기열이한테 허락받아야겠는데요?”
그러나.
표정만큼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것처럼 웃고 있었다.
*
서울 모처의 한 광고 촬영장.
그곳에선 한창 화장품 광고가 촬영 중이었다.
곳곳에 설치된 조명과, 흩날리는 머릿결을 표현하기 위한 강풍기 등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모든 걸 받아내고 있는 건 어마어마한 미모를 가진 한 여성.
“네, 사랑 씨. 좋아요. 지금! 거기서 잠깐 싱긋 미소 한 번! 굿! 그레이트!”
팡팡 터지는 플래시.
촬영은 순식간에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야, 우리 브랜드 광고 촬영 역사상 최단시간인 거 같은데요?”
수근대는 스태프들.
곧 포토그래퍼가 따봉을 날리며 말했다.
“역시 사랑 씨. 사랑 씨랑 작업하면 빨리 끝나서 좋다니까. B컷이 없어요, B컷이. 나도 상상 못했던 구도나 포즈를 만들어주니까. 이게 참······.”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뵐게요.”
제게 쏟아지는 칭찬에도 강사랑은 별 관심없다는 태도였다.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적당히 대답하고서 촬영장을 나왔다.
그녀는 차에 타자마자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 힘들다. 광고 촬영은 별로 재미가 없단 말이야. 언니, 우리 초불닭 조지러 갈까? 저녁 때까진 시간 뜨니까.”
그러나 대답한 것은 그녀의 매니저가 아니었다.
“오랜만입니다. 선배님.”
중저음의 깔끔한 목소리.
강사랑은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간파해냈다.
“오. 이게 무슨 일이야? 내 차에 선물이 타 있었네?”
강사랑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바로 주인경이 차 뒷좌석에 탑승해있었으니까.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네, 선배님.”
“야. 누나라고 부르랬지? 데뷔 1년 차이 가지고 무슨 선후배야?”
“후배된 도리가 그런 거죠.”
누구에게든 저렇게 선을 긋는 태도.
강사랑이 아무리 치대도, 주인경은 결코 강사랑에게 말을 놓거나 누나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올곧은 후배님께서 왜 하늘 같은 선배의 차에 타 있는 거야?”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차에 타려던 건 제 의지가 아니었어요. 선배님 매니저께서 눈에 띄니까 차에 타있으라고 하셨거든요.”
“우리 차 썬팅 안 진한데. 어디 기자가 사진이라도 찍어서 우리 스캔들 나면 재밌겠다. 안 그래? 세기의 커플! 주인경과 강사랑, 한국 최고의 배우 커플 탄생! 이렇게 말이야.”
강사랑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마치 재미있는 놀이를 생각해낸 악동 꼬마처럼.
그러나 주인경은 무뚝뚝하게 받아쳤다.
“저희 회사는 물론이고, 선배네 회사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쩌겠어? 그리고 그런 스캔들 막으라고 회사가 있는 거 아니겠어? 소속 연예인 관리하는 게 바로 소속사잖아.”
“선배님. 전 터지지도 않은 기사 얘기보다, 이미 터진 기사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주인경은 그리 말하며, 미리 준비해두었던 것처럼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 화면에 보이는 것은 두 사람의 이름이 적힌 헤드라인.
[넷플러스 오리지널 드라마 <열다섯, 서른다섯>에 강사랑 합류! 주인경&강사랑, 팬들이 염원하던 조합이 이루어지다!]
그러나 그에 관심 없다는 듯.
“뭐야, 번호 찍어달라고? 번호 잘 따네, 주인경.”
그러나 주인경은 정색을 하며 휴대폰을 거둬갔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뭐가?”
“선배님께서 넷플러스 측에 말했다고 하더군요. 이 작품 참여하고 싶다고.”
“그래? 소문 참 빨리 도네.”
“이 작품에 들어오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냥. 재미있을 거 같아서?”
주인경이 연기에 미친 사람이라면.
강사랑은 그야말로 쾌락주의자였다.
재미있어 보이는 일에 서슴없이 뛰어드는 성격.
덕분에 스캔들도 정말 많이 터졌고, 여러 사소한 논란도 많은 편.
그럼에도 그녀가 젊은 여배우 중 최고라 평가받는 이유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연기와 표현력.
그리고 장르를 가리지 않고, 독립과 상업, 예술을 넘나드는 작품선택에 있었다.
예쁘고 멋진 역할만 고집하지 않고 망가지는 것도, 사이코 같은 역할도, 푼수 역할도.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해내는 것이 바로 강사랑이다.
그게 그녀를 톱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겸사겸사 내가 도와주려고.”
“도와준다고요?”
“그래. 너, 박유진이랑 한번 붙어보고 싶은 거지?”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지난 3년간 인터뷰 때마다 같이 하고 싶은 배우로 박유진을 찍었지.”
그 말에 주인경은 눈썹을 찌푸렸다.
“너 그런 식으로 같이 하고 싶은 배우로 지목한 거. 이순철 선생님밖에 없잖아. 업계 톱을 노리는 너에게 이순철 선생님은 뛰어넘어야 할 목표였을 거고. 그런데 영화 <찬란>을 통해, 그 어린아이에게로 후계자 자리를 물려주셨지.
딱 그 타이밍에, 너 계속 박유진한테 집착했잖아. 안 그래?”
육감이라고 해야 할지, 통찰력이라고 해야 할지.
강사랑은 상황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었다.
“우리 인경이는 승부욕이 너무너무 강해서 탈이야. 하긴, 그 성격 덕분에 이 자리까지 올라온 거겠지만. 향상심. 참 중요한 덕목이지?”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선배님.”
“오해는 무슨. 무슨 연기력으로 겨뤄보겠다, 그런 소리 하려는 거 아니야? 그런데 넌 가끔 너무 순수해. 연기력이 무슨 수능 성적처럼 점수가 나오는 줄 알아? 수치화되는 건 화제성이야. 시청률, 인터넷 검색 비중, 이런 거.”
강사랑은 그리 말하더니, 스마트폰으로 한 뉴스를 띄워 주인경에게 내밀었다.
[한국 복귀 박유진, 화제성에서 세계최대 검색 엔진 ‘고글’에서 주인경에 검색량 앞서]
[고글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열다섯 서른다섯>과 함께 가장 많이 검색된 키워드를 분석한 결과 1위가 박유진, 2위가 주인경, 3위가 샤샤토끼였다.]
“벌써 기자들은 줄 세우기 들어갔다, 이 말이지. 뭐, 박유진이야 3년 만의 국내 복귀라 사람들의 이목이 엄청 쏠려있는 상태긴 해도. 명색이 주인경인데, 15살짜리한테 밀린다는 건 자존심 좀 상하는 일이지?”
“선배님께서 제 일에 이렇게 관심이 많으실 줄은 몰랐네요. 이렇게 데이터도 활용할 줄 아시는 분이었군요?”
계속 정곡을 찔린 탓일까.
주인경답지 않게 명백히 비꼬는 말을 내뱉었으나.
“난 원래 재미있어보이는 일엔 누구보다 진심으로 임하거든.”
오히려 강사랑은 웃으며 받아쳤다.
“박유진 그 애 별명이 뭐야? 케미 귀신. 형, 누나, 삼촌, 심지어 동갑내기 여자애까지. 붙는 사람마다 엄청 떴지 아마? 그런 박유진한테 멜로?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야. 반면 너는 어때?”
그리 말하며 강사랑은 주인경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내가 도와줄 수 있거든. 나 연기 좀 하잖아? 얼굴은 말해 뭐하고.”
주인경은 예측불허인 강사랑을 좀처럼 신뢰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으나.
방금 강사랑이 한 말은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넷플러스 아니면 우리 몸값 감당해줄 곳도 없고 말이야. 이번 기회 아니면 우리가 같이 호흡 맞출 기회가 또 있겠어?”
“왜 굳이 여기에 끼어드는 겁니까?”
“왜긴. 말했잖아? 재미있을 것 같다고. 주인경이 이길지, 박유진이 이길지. 그걸 구경하는 게 말이야.”
이렇게 들으면 강사랑이 주인경에게 큰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일방적으로 주인경을 밀어주려는 것 같지 않은가?
“박유진의 일방적 승리가 나오면 재미없잖아. 안 그래?”
그러나.
강사랑의 관심은 주인경이 아닌.
박유진 쪽에 쏠려있는 모양이었다.
*
[단독! <열다섯, 서른다섯>의 연출에 영화감독 최희숙 낙점!]
[주인경, 강사랑, 박유진, 거기에 최희숙 감독까지! 넷플러스, 오리지널 컨텐츠로 가입자수 모으기에 총력!]
[촬영도 전인데······ <열다섯, 서른다섯>에 쏠리는 폭발적 관심! “과연 15살의 여주는 누가 맡을까?” 기대 쏠려]
“와. 최희숙 감독님이 여길 참여하네?”
그네에 앉아있는 김선미.
휴대폰 속 뉴스를 보고 감탄을 내뱉었다.
넥스트 멤버들이 다니는 중학교.
그곳에서 10분 거리에는 의외로 인적 드문 놀이터가 있다.
정기열과 김선미는 시간이 날 때면 그곳에서 휴식을 가졌다.
이젠 얼굴이 제법 알려진 두 사람이라 어딜 맘편히 다닐 수 없기 때문.
“최희숙 감독님? 신애 어머니 맞지? 너 작년에 그 감독님이랑 작업하지 않았냐?”
옆 그네에 앉아있는 정기열이 말했다.
“응. 신애가 소개해줬으니까.”
<리플레이> 당시 유진과 작업했던 게 좋은 경험으로 남았는지.
유진이 한국에서 자리를 비운 사이.
최희숙은 차기작 <사랑할 각오>에서 유신애의 친구인 김선미와 함께 작업했다.
물론 유진만큼 높은 비중은 아니었으나.
충분히 눈도장은 찍었다는 평가.
“그때 감독님이 칭찬도 많이 해주시고 좋았는데.”
“예예, 그러시겠죠.”
“하. 나도 이 작품 못 들어가나. 유진이도 있고, 감독님도 참여하시는데.”
“꿈 깨. 네가 여길 어떻게 들어가냐?”
“야! 나도 잘 나가거든?”
빈말은 아니었다.
김선미도 지난 3년간 꾸준히 드라마, 영화에서 활약해왔고.
본업이라 할 수 있는 키즈모델 활동도 멈추지 않았다.
비슷한 또래의 아역배우 중에선 상당히 잘 나가는 축.
“물론 주인경, 강사랑, 박유진에 비하면 좀······좀 부족하긴 해도! 나 정도면 안 꿇린다고.”
“누가 너 못 나간대? 그게 아니라 너 모쏠이라서 못 한다고. 모쏠 어린애가 무슨 멜로야, 멜로는?”
정기열의 말에 김선미가 코웃음쳤다.
“웃겨 진짜. 너도 15살이거든? 그리고 넌 뭐 모쏠 아니냐?”
“난 성인 되기 전에 멜로물 찍을 생각 없거든.”
“꼰대같기는. 모쏠이든 뭐든 멜로 좀 할 수도 있지. 연기자가 분야를 가리면 쓰냐? 그리고 유진이는 잘만 찍잖아?”
“걔는······박유진은 박유진이잖아. 어쩔 때보면 진짜 한 80 먹은 할아버지 같단 말이야.”
“뭐, 그건 인정해.”
투닥거리는 것 같다가도 또 공감대를 형성하는 두 사람.
곧 정기열이 툭툭 김선미의 어깨를 찔러댔다.
“야, 김선미.”
“왜?”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이 자판기에서 음료 뽑아오기. 콜?”
“난 목 안 마른데.”
“난 마르거든.”
“그럼 혼자 가.”
“재미없잖아.”
“에이씨.”
“자, 그럼 한다. 안 내면 진 거, 가위 바위 보!”
그 결과.
정기열 바위, 김선미 가위로 김선미의 패배였다.
“아오, 진짜! 정기열, 진짜 내 인생이 도움이 안 돼요!”
“응. 얼른 자판기나 갔다 와. 난 사이다로다가.”
자판기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는 편.
김선미는 씩씩대며 자판기로 걸어갔고.
그 모습을 보며 정기열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런데 그때.
“야, 기열아!”
유진이었다.
유진의 등장에 정기열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놀이터는 자신과 김선미만의 비밀공간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거기에 다른 사람이 오다니!
“야, 야! 너, 너 뭐야. 여기 어떻게 알고 왔어?”
“응? 너랑 선미 둘, 맨날 여기 있잖아.”“어, 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 아니지, 야. 아니야! 맨날은 무슨. 그냥, 우연찮게 만난 거야. 우연찮게!”
허둥지둥 변명하는 정기열.
하지만 유진은 그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무튼. 야. 네 여친 힘 좀 빌리자!”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리고 누가 내 여친인데?”
“선미 말이야. 지금 어디 있어?”
“아오, 진짜! 여친 아니라고! 그 소리 그만 좀 해.”
그렇게 정기열이 질색하고 있을 때.
“어? 뭐야. 유진이?”
자판기에 다녀와, 사이다 두 캔을 들고 있는 김선미가 나타났다.
유진은 정기열을 제치고 김선미에게 다가가더니.
덥석 두 손으로 김선미를 붙잡으며 말했다.
“선미야! 나랑 같이 멜로 한 편 안 찍을래?”
그 말에 누구보다 놀란 사람.
김선미 본인이 아닌 정기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