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유신애는 계약할 때를 제외하곤 평생 샤샤토끼라는 이름을 내걸고 누군가의 앞에 나설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리딩이나 촬영장에도 일체 발걸음 하지 않을 생각.
<열다섯, 서른다섯>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엄마가 감독을 맡아주셨으니, 분명 잘 해주실 거야.’
어머니를 믿고 있기도 했고.
앞으로도 드라마화에 별다른 관여를 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제 작품이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건 기쁜 일이지만.
그거야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
의외로 자신의 작품에 관해선 매우 관조적 시선을 유지하는 유신애다.
본래라면 캐스팅에 관여도 안 했을 테지만.
‘이 작품 속 열다섯의 정은호만큼은 내 손으로 직접 캐스팅하고 싶었어.’
원작자로서.
친구로서.
그건 계속 바라왔던 일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리딩만큼은 꼭 봐두고 싶었다.
무엇보다 제 소설 속 남주의 롤모델이었던 유진.
그가 어떻게 열다섯의 정은호를 연기해낼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리고 역시나.
“우와.”
박유진은 예상을 뛰어넘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마치 제 머릿속 정은호를 그대로 끄집어낸 것 같은 모습.
아니, 오히려 감정표현이 풍부한 정은호라고 해야 할까.
특히 열다섯의 정은호와 민유라가 손가락을 얽히는 장면.
작가로서 쓸 때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저 수업 중인 교실에서 두 사람이 마음을 주고받는 모습이 필요했고.
당시 떠올렸던 게 손가락이었다.
그런데.
막상 눈으로 그 비주얼을 확인하니 엄청 설레는 장면이라는 걸 깨달았다.
원작에서도 이 정도로 임팩트 있는 장면은 아니었는데!
“후우.”
그런데.
그때 옆에서 들리는 무거운 한숨.
정기열이 아주 미쳐 돌아버리겠다는 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기, 기열아. 괜찮아?”
사실 유신애는 혼자 보고 싶었으나.
정기열이 함께 보자고 권해왔기에 정기열의 집에서 함께 보는 중이다.
아무래도 정기열로선 혼자 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모양.
“괜찮냐고? 다아앙연히 괜찮지.”
정기열과 김선미의 관계를 알고 있는 유신애.
그러나 정작 정기열은 유신애가 그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아아아. 연기 잘~하네. 우리 유진이.”
애써 덤덤한 척 표정 관리를 하려는 듯하지만.
뜻대로 안되는 모양이다.
과연 아역 성우답게 목소리는 나름 태연하게 꾸며냈지만 말이다.
“진짜 사심 없는데 저렇게 달달해지고 말이야. 이러다가 두, 둘이 사귀기라도 하면 어쩌지? 에이. 그럴 리가 없지. 유진이도 김선미도 천상 연기자니까. 그치, 신애야?”
단어 하나하나 감정을 꾹꾹 눌러담는 느낌.
“으응? 응. 그, 그렇지 뭐.”
“채팅창 좀 봐봐. 반응이 아주 폭발적이야.”
그 말대로 채팅창을 확인하니.
[와 손가락 진짜 ㅋㅋㅋ
리딩 때부터 그러면... 벌써 심장 터져...
중딩들 꽁냥꽁냥에 내 입꼬리 찢어진다 ㅋㅋㅋ
하 어른 연애가 뭐냐 애기들 연애가 최고야]
반응은 여러모로 폭발적이었다.
벌써 두 사람의 모습에 과몰입하는 시청자가 여럿.
[정은호 민유라 둘이 벌써 결혼함 내가 봄...
ㄴ 서른다섯 때까지 둘이 솔로인거 못봤냐고 ㅋㅋㅋ
근데 박유진이랑 김선미 저 둘이 진짜 사귀는 거 아님?
아니 리딩 생중계에서 저렇게 설레게 손잡을 일이냐구~~
하긴 알고 지낸지 엄청 오래되지 않았나
솔직히 한쪽이 감정이 없었을까?? 누군가는 짝사랑했을 듯 ㅋㅋ
ㅁㅇㅁㅇ~ㅁㅇㅁㅇ~
애기들이 얼마나 연기를 잘했으면 벌써 우결충이 엮이냐 ㅋㅋ]
과몰입을 하다 못해 심지어 둘이 사귀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유진과 김선미의 인연이 오래 되었고.
‘첫사랑’ 뮤비, 웹드라마 <연년생> 등.
제법 여러번 호흡을 맞췄기 때문에 심증이 더해지는 모양이다.
물론 이 모든 추측들은 팬들이야 과몰입의 요소 중 하나였지만.
정기열의 속은 뒤집어질 뿐이었다.
빠득-!
“어······어?”
유신애는 똑똑히 보았다.
정기열이 손에 쥐고 있는 볼펜이 부러지는 것을.
“얼마나 연기를 잘 하면 저 둘이 진짜 사귀는 줄 알겠어. 그치? 응? 그치?”
“하, 하하. 그러네.”
유신애가 적잖이 공포를 느끼고 있을 무렵.
우웅!
정기열의 휴대폰이 울렸다.
-밉상 : 야 정기열 너 보고 있지?
-밉상 : 나 잘했지? 그치?
바로 김선미에게서 온 톡.
리딩이 끝난 직후, 곧장 정기열에게 보낸 모양이었다.
“후, 하.”
정기열은 심호흡을 하더니, 곧 자판을 눌러대기 시작했다.
-정기열(나) : 너무 잘했어
-정기열(나) : 둘이 손가락을 막 그렇게 막 어휴
-정기열(나) : 진짜 둘이 사귀는줄 ^^
-밉상 : 뭐래
-밉상 : 죽을래?
아무래도 이 두 사람은 갈 길이 먼 모양이다.
*
SBW 사옥 지하에 입점한 커피숍.
지상에도 커피숍이 있긴 하지만.
지하에 있는 커피숍은 주차장과 가까워 주로 손님들이 많이 쓰는 편.
방송국에 드나드는 손님 하면 역시 연예인들.
그렇기에 이 지하 커피숍에서 연예인들을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
지금 여기.
선글라스를 쓰고 의자에 앉아있는 강사랑처럼 말이다.
[<열다섯, 서른다섯> 리딩 생중계, 최고 시청자수 10만명 달성!]
[박유진X김선미의 ‘손가락 로맨스’ 화제! “드라마 최고 명장면이 될 듯” 기대감 폭발!]
[주인경X강사랑도 제쳤다······세계최대 검색 엔진 ‘고글’에서 박유진X김선미 언급량이 더 많았다!]
[‘손가락 연기’ 스윗터 화제 키워드 달성! 관련 클립 조회수만 벌써 20만 돌파]
그녀가 휴대폰으로 보고 있는 기사들.
온통 박유진과 김선미의 케미를 칭찬하는 내용이었다.
그만큼 마지막 손가락 씬의 임팩트가 어마어마했던 것.
강사랑으로서는 주인경과 함께 꽤 좋은 합을 보여주고도 스포트라이트를 빼앗긴 셈.
이에 질투를 느끼거나 기분이 언짢을 법도 한데.
“후훗.”
오히려 그녀는 웃으며 기사를 보고 있었다.
“어? 언니!”
잠시 후.
곧 누군가를 발견하곤 자리에서 일어서는 강사랑.
손까지 흔드는 게 어지간히 반가운 모양이다.
“강사랑.”
강사랑이 기다리고 있던 사람.
그건 바로 나은주였다.
“안녕하세요, 언니!”
제게 달려오는 강사랑을 밀어내는 나은주.
곧 쯧, 하고 혀를 찼다.
“언니 말고 선배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버릇없는 건 여전하네.”
“에이, 저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있는데. 이 정도는 좀 봐주세요.”
“너랑 알고 지낸 세월 같은 게 어디 있어.”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언니께서 저한테 연락을 먼저 다 주시고.”
“그냥. 할 얘기가 있어서.”
“커피 드실래요? 제가 한 잔 살게요.”
“됐어. 내가 사먹을 거야.”
나은주가 유진을 대할 때면 한없이 부드러워지고.
엄마 미소가 폭발하는 것과는 달리.
강사랑을 대하는 나은주의 태도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얼음 공주’라는 오글거리는 닉네임이 왜 붙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
“에이. 제가 한 잔 사드리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그에 비하면 강사랑은 마치 유진한테 앵기는 백룡이처럼 개냥이스러웠다.
아무튼.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그래서 하실 말씀이 뭐예요?”
“너 이번에 유진이랑 같이 작품 하지?”
“유진이요? 아아, 박유진? 네. 같이 하죠.”
그러자 나은주가 제법 싸늘한 톤으로 말했다.
“유진이한테 허튼 짓 하지마. 그럼 너 내 손에 죽어.”
“그런 말씀 정도는 전화나 톡으로 해도 되셨을 텐데. 저야 물론 언니를 만나니 기쁘지만요.”
강사랑이 나은주를 좋아하는 이유야 명확했다.
나은주는 정말 내숭없이 있는 그대로 강사랑을 대하니까.
즉, 그냥 대놓고 극혐한다는 얘기다.
그 점이 강사랑의 흥미를 끌었다.
이 연예계에서 이렇게 대놓고 자신을 극혐하는 사람, 얼마 없거든.
강사랑이 확 뜨기 전.
여배우 원탑은 단연 나은주였다.
즉, 두 사람은 ‘급’이 맞는다는 이야기.
급도 안 맞는 인간이 자신을 극혐하면 그냥 웃으며 넘길 일이지만.
오히려 급이 맞는 인간이 그러니 더 흥미가 생겼다.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나은주가 말했다.
“그 애한테 어떤 짓도 하지 마. 그냥 주변에 어슬렁거리지도 마.”
“경고하시는 거예요? 어머, 무서워라.”
강사랑은 양팔로 제 팔뚝을 문지르며 몸을 뺐다.
“설마 내가 애한테 무슨 짓을 하겠어요? 그리고 주변에 어슬렁거리지 말라니. 같이 촬영하는 사이인데, 그럴 수가 있나요?”
“어차피 붙는 씬도 없을 거 아니야. 애한테 똥물 튀기지 말고 네 갈 길이나 가라고.”
“제가 그리 나쁜 사람인가요?”
“네가 나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인 건 확실하지.”
나은주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강사랑은 각종 스캔들을 몰고 다니는 인물.
어려서부터 각종 선한 이미지를 쌓아 올리고.
거의 성역 취급받는 유진과는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혹여 강사랑과 엮여 안 좋은 소문이라도 퍼지지 않을까.
나은주는 그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
“너무 과보호하면 애가 제멋대로 커요.”
“유진이는 그럴 애가 아니니까 신경 꺼.”
“언니가 누군가를 그렇게 감싸고, 보호하는 것도 처음 봐요. 그 정도로 그 아이가 소중해요?”
“당연히 소중하지.”
<데드맨>으로 맺은 인연.
이후 <스마트 좀비>로 칸에서 수상하기까지.
죽음조는 나은주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동료이자 친구들이었고.
그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유진은 특히나 더 소중했다.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어린아이라서 더더욱.
“부럽다. 나도 그렇게 누가 날 소중하게 대해줬으면 좋겠어요.”
“넌 너를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잖아. 뭘 더 바래?”
“으음, 글쎄요?”
의미심장하게 웃는 강사랑.
그녀는 곧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 그 애한테 아무 짓도 안 할 거예요. 그냥 지켜보기만 할 거라고요.”
“거짓말. 네 마음대로 마구 헤집고 다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제가 그런 짓 안 해도, 제게 충분한 즐거움을 주고 있는걸요. 보셨죠? 리딩 생중계. 설마 리딩에서 그렇게 앙큼한 짓을 할 줄 누가 알았을까요?”
그때를 떠올리는지 쿡쿡 웃는 강사랑.
그를 보며 나은주가 기분 나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저희 같이 붙는 씬도 있다고요.”
“뭐? 작중에 나이가 다른데 어떻게?”
“원작 안 보셨구나? 회상씬이 있거든요. 서른다섯의 민유라가, 열다섯의 정은호를 떠올리며 상상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
강사랑은 커피를 들고 자리에서 말했다.
“엄청 기대하고 있어요. 그땐 언니가 아끼는 그 아이가 뭘 보여줄지 말이에요.”
*
-은주 누나 : 내가 강사랑한테 따끔하게 말해놨어
-은주 누나 : 그러니까 넌 걱정하지 마
-은주 누나 : 무슨 일 있으면 꼭 바로 연락하고.
갑자기 나은주로부터 날아온 톡.
유진은 자판을 움직여 대답했다.
-박유진(나) : 고마워요 누나!
-박유진(나) : 넘 든든해요
-우주최강 석태삼촌 : 머야 무슨 일 있음??
-우주최강 석태삼촌 : 먼데먼데
-은주 누나 : 신경 꺼
-우주최강 석태삼촌 : ㅠㅠㅠㅠ
-우주최강 석태삼촌 : 나만 왕따시켜
-우주최강 석태삼촌 : 우리 사이에 비밀이 왜 있어야함!!!
-권주 삼촌 : 나도 모름
-우주최강 석태삼촌 : 아 그래??
-우주최강 석태삼촌 : 그럼 ㅇㅋ
오늘도 평화로운 죽음조 단톡방.
그를 보며 유진은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강사랑이라.’
회귀 전에도 유진은 강사랑과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으니.
‘자기 흥미를 끄는 일에는 주저없이 달려든다고 했으니까.’
노잼 연기자라 불리며 존재감의 희미했던 박유진.
그가 강사랑의 레이더에 걸릴 일이 뭐가 있겠나.
그런데, 이번엔 그 레이더에 제대로 걸려든 느낌이었다.
‘리딩 때 나를 엄청 의식하는 것 같았는데. 기분 탓은 아니겠지?’
특히나 리딩이 끝난 직후.
히죽 웃으며 제 쪽을 바라보던 모습은 여러모로 인상 깊었다.
마치 좋은 장난감을 발견한 악동의 눈빛이라고나 할까?
‘은주 누나가 경계할 정도면 여러모로 평판이 안 좋은 모양인데.’
하지만 별다른 걱정은 되지 않았다.
접점이 없었다 뿐이지.
강사랑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선 유진도 잘 알고 있었으니.
“냐아아옹.”
그때 울리는 귀여운 울음소리.
유진이 박수를 두어 번 치자, 백룡이는 날쎄게 달려와 유진 무릎 위에 자리 잡았다.
“야야, 백룡아. 너 이번 영상 엄청 히트쳤어.”
“먀아?”
“자. 이거 봐.”
유진은 그리 말하며 휴대폰 화면을 백룡이 앞에 내밀었다.
그건 바로 ‘작은 별’로 <케이팝 챔피언>에 참여했던 유진을 보고 있는 백룡이.
그걸 박태종이 찍은 영상이었다.
특히 댄스 브레이크 타이밍.
백댄서로 등장한 은호와 민혁이 유진과 얽히는 구간.
그때 백룡이가 유진의 동선에 맞춰 졸졸 이동하는 모습이 찍혔다.
마치 주인을 쫓아다디는 강아지처럼 말이다.
[백룡이 진짜 유지니 껌딱지네 ㅋㅋㅋㅋㅋㅋ
아구 귀요미 ㅠㅠㅠㅠ 쫑쫑대면서 따라다니는 것좀 봐]
백룡이 채널의 상승세가 매섭다.
3년 전.
10만명을 넘겼던 구독자수는.
[고양이 백룡이의 레드카펫
동영상 – 54개, 구독자 – 504,022명]
어느덧 5배, 50만명으로 늘어났다.
유진의 팬들은 당연히 구독하고.
백룡이 자체 팬도 늘어났기에 생긴 일.
유진이에게만 개냥이고, 남들에겐 도도한 고양이인 그 반전매력은 여러 사람을 홀렸다.
“귀여운 게 세상을 정복한다더니, 맞는 말이야. 그치?”
“흐냐아아아암.”
제 영향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상 순수한 얼굴로 하품을 하는 백룡이.
그러더니 곧 암모나이트처럼 몸을 말고는.
그대로 곯아떨어져 버렸다.
“잘자, 백룡아.”
제 무릎 위에서 잠들어버린 백룡이를 얼마간 쓰다듬어준 이후.
유진은 인터넷 서핑을 시작했다.
“어?”
그런 유진의 눈에 들어온 한 헤드라인.
[금년 토니상 뮤지컬 부문, <클라우 솔라스>가 수상! 프리우드 형제, 또 일 냈다!]
그건 바로 어떤 작품의토니상 수상 소식이었다.
토니상.
토니상은 미국 연극, 뮤지컬 계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시상식이다.
영화로 비유하자면 칸이나 아카데미상과 견줄 법하다.
[<클라우 솔라스>의 전세계 최초 라이센스 공연은 어디? 유력 후보지는 일본!]
그 헤드라인을 본 유진은 어림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무슨 소리래? 당연히 한국이지.”
<열다섯, 서른다섯>의 촬영이 임박한 지금.
슬슬 다음 스텝을 준비할 타이밍이었다.
유진은 <클라우 솔라스>라는 작품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