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씹어먹는 천재배우님-183화 (183/237)

183화

183회

“뮤지컬?”

며칠 뒤.

차를 타고 촬영장으로 향하는 길.

유진이 차동석에게 이후 계획에 대해 말했다.

“블루컬쳐 스튜디오 쪽에서 또 뭐 신작 낸대? 아니면 휘즈니 쪽?”

유진이 뮤지컬을 하고 싶다 말하니, 차동석이 내놓은 반응이었다.

여태 유진이 뮤지컬 애니메이션 더빙만 줄곧 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반응.

“아뇨. 이번엔 더빙 말고 직접 무대에 서고 싶어서요.”

유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자 차동석이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역시 우리 배우님이네. 넷플러스 한국 오리지널 첫 작품 이후 뮤지컬 무대로 갈 생각을 하다니.”

“요즘 또 대본 들어온 것들 검토해봤는데요. 별로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요.”

“뮤지컬 좋지 뭐. 그래, 좋긴 한데. 좀 우려스럽네.”

“뭐가요? 저 잘할 자신 있어요.”

차동석이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아니, 네 실력이야 당연히 믿지. 그런데 요즘 스타 캐스팅이다 뭐다 해서 뮤지컬 쪽에 워낙 말이 많거든.”

아무래도 인맥왕 차동석답게 관련 업계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다.

“스타 캐스팅이요?”

“응. 뮤지컬 바닥이라는 곳이 워낙 돈이 많이 들잖아? 배우들 몸값에, 오케스트라, 공연장 대관료, 무대소품······그래서 요즘 제작자들이 어떻게든 홍보하고 표 팔려고 아이돌이나 인기 많은 매체 배우들 끌어다 쓴다고 비판을 많이 받고 있어. 스타 캐스팅이라는 명목으로 말이야.”

어휴, 하고 차동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처음에야 홍보도 되고 인기도 끌었지만, 갈수록 제작사들이 너나할 거 없이 아이돌이나 스타들을 캐스팅하니까 오히려 대중들 사이에서 반발이 생긴 거지. 실력은 떨어지는 사람들이 주연 자리만 차지한다고 말이야. 업계 내부 사람들에게서도 안 좋은 소리가 흘러나오고.”

그 말만 듣고도 유진은 차동석이 우려하는 바를 짚어냈다.

즉, 전문 뮤지컬 배우가 아니라면 캐스팅 되는 것이 마이너스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

게다가 유진은 지금 말 그대로 ‘스타’ 아닌가.

유진이 뮤지컬에 참여하면 분명 이런 여론에 휩쓸릴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좀 걱정이네. 괜히 욕 들어먹을까 봐.”

“걱정 마세요. 제가 작품 들어갈 때 그냥 들어가는 거 보셨어요?”

유진은 그리 말하며 창문에 팔을 기댔다.

“제가 참여하고 싶은 작품, 곧 오디션이 열릴 거예요.”

스타 캐스팅?

실력만 있으면 그보다 좋은 게 없을 것이다.

*

“됐습니다.”

대한민국의 뮤지컬 제작사 두잇컴퍼니.

해당 회사의 미팅룸.

“두잇컴퍼니와 <클라우 솔라스> 라이센스 계약 절차가 모두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곳에 자리한 건 총 두 사람.

두잇컴퍼니의 대표, 엄기현.

그와 마주하고 있는 것은 실내에서도 커다란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여자.

<클라우 솔리스> 오리지널 프로덕션의 협상 대리인, 조디였다.

“감사합니다. 진통이 있었지만, 협상까지 다다를 수 있어 기쁩니다.”

엄기현이 조금 힘빠진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만큼 세부조항 조율이 쉽지만은 않았다는 뜻.

그러나 이번 <클라우 솔라스>만큼은 꼭 잡아야할 공연이었다.

프랭크 프리우드와 데이비드 프리우드.

브로드웨이에서 유명한 두 형제가 의기투합하여 제작한 뮤지컬 <클라우 솔라스>.

그 작품이 토니상 뮤지컬 최우수상 부문을 수상한 것.

이번 한국 공연은 ‘전세계 최초 라이센스 공연’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무대를 올릴 수 있을 터.

토니상 수상 직후이기에, 이는 어마어마한 프리미엄이 될 것이다.

“이제 와서 물어보는 겁니다만. 왜 하필 한국이었습니까? 다른 국가, 특히 일본 쪽에서 어마어마하게 공을 들였단 소식을 들었는데요.”

일본 뮤지컬계는 한국 뮤지컬계의 몇 배나 되는 규모를 가지고 있다.

즉, 흥행 규모를 생각하자면 당연히 일본 쪽을 픽하는 게 당연한 상황.

그럼에도 원작자들은 한국을 선택했다.

“저희 오리지널 프로덕션 측은 한국 배우들의 실력을 높이 사고 있다고 합니다. 이미 다수의 공연이 브로드웨이에서 한국으로 진출하여, 놀라운 성과를 얻기도 했고요.”

조디가 선글라스를 스윽 올리며 대답했다.

“또한 저희 작곡가인 프랭크 프리우드의 아내가 한국인 배우입니다. 이 점이 아마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봅니다.”

“아아. 그렇군요.”

때론 중요한 결정을 내리도록 이끄는 건, 생각지도 못한 사소한 부분들이다.

프랭크는 애처가로 유명하니까, 아마 아내의 영향이 컸으리라.

“캐스팅은 전원 오디션으로,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그와 관련해 아직 드리지 못한 말씀이 있네요. 초연 오디션은 작곡가 프랭크 프리우드, 작사가이자 각본가 데이비드 프리우드 모두 참가해 직접 의견을 개진하고 싶다고 합니다.”

“원작자가 직접 한국에 오겠다는 말씀입니까?”

엄기현이 놀라서 되물었다,

보통은 오디션 영상이나 코멘터리를 듣고서 캐스팅에 대해 코멘트를 하기 마련인데.

굳이 한국까지 행차해 오디션을 직접 참관하겠다니?

“프리우드 형제 측에선 이런 첨언을 했습니다. 한국의 뮤지컬은 환상적이다. 관객들은 열정적이고, 배우들은 재능이 넘치며, 제작사는 멋진 무대를 만들 줄 안다.”

여기까진 극찬에 가까운 말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그러나 스타 캐스팅에 의지해, 그 시장이 기형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케이팝 스타들을 위시로 하여 티켓파워에만 열중하고 있다.”

꽤 가시가 돋쳐있었다.

“우리는 그러한 부분에 다소 우려를 가지고 있다. 한국엔 분명 재능 많은 배우가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직접 오디션에 참관해, 재능 있는 배우들을 직접 골라내고자 한다.”

그 말에 엄기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프랭크의 아내도 대극장 주연급을 따내진 못했다고 들었어. 스타 캐스팅에 밀려서 말이야. 그 점에 대해 우려하는 것도 당연한 일인가.’

하지만 제작자로서, 그 점에 대해선 마냥 비난받기 억울한 측면도 있었다.

“인정합니다. 안타깝지만 한국 뮤지컬 시장의 현실이 그렇죠.”

엄기현은 순순히 인정했다.

“토니상 수상작이라고 해도, 초연 공연이지 않습니까. 초연의 흥행이 앞으로 이어질 공연들의 흥행 척도가 되곤 합니다. 아무리 좋은 공연이라도 관객들이 돈을 내고 보지 않는다면 지속불가능하죠. 여러모로 불가피한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 뮤지컬 계의 스타 캐스팅은 결국 자본과 관련이 있다.

스타가 캐스팅되어야 투자사도 많이 붙고, 홍보도 잘 된다.

그래서 아이돌들이 최근 뮤지컬판에 많이 뛰어든 것.

“원작자분들의 뜻은 확고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오디션 시기가 오면 직접 조율해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조디는 물러섬이 없었다.

그들로서도 한국 제작사 측의 사정이야 별로 알 바는 아니겠지.

“······그러죠.”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추후에 다시.”

“네. 감사합니다.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조디가 돌아간 이후.

엄기현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긴 한숨을 내뿜었다.

“아. 역시 라이센스 공연은 이런 부분이 피곤하단 말이지. 이래서 창작 뮤지컬을 하고 싶었는데.”

사실 원작 프로덕션 측이야 라이센스 관련 비용만 지급받으면 그만이지만.

한국 공연을 제작하는 두잇컴퍼니 입장에선 흥행에 실패하면 타격이 크다.

뮤지컬 제작비가 한두 푼이어야 말이지.

“블루컬쳐 스튜디오랑 얘기만 잘 됐어도.”

라이센스를 구입해 공연을 올릴 생각은 없었다.

사실 두잇컴퍼니 측은 지속적으로 블루컬쳐 스튜디오에 연락을 넣었다.

애니메이션이 아닌.

실제 공연으로 올릴 수 있게 판권을 구입하려 한 것.

그러나 블루컬쳐 스튜디오의 대답은 매번 똑같았다.

‘죄송합니다만, 저희 작품은 실사 공연으로 제작되길 희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비교적 최근.

엄기현은 이선화 감독에게 직접 문의한 적이 있다.

‘그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이선화 감독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희가 만든 작품은 온전히 애니메이션 안에서만 표현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설계했습니다. 그리고 저희 작품 속 캐릭터들의 목소리는 대체불가입니다. 다른 식으로 재해석되길 원치 않습니다.’

성우를 맡아준 아역배우들에 대한 존중.

이 때문에 넷플러스를 통해 수십여 개국에 서비스 되고 있지만.

각 나라별 더빙 없이, 자막으로만 서비스하고 있다.

“공연으로 올리면 멋질 텐데.”

하지만 이미 떠나간 배다.

지금은 우선 잡은 물고기를 어찌 요리할지, 그에 대해 궁리하는 것이 우선이다.

엄기현은 주머니를 뒤적여 담뱃갑을 꺼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계약 끝났고, 슬슬 오디션 공고 돌리자.”

*

“유진아! 이것 좀 봐라.”

주역 매니지먼트 사무실.

차동석이 들뜬 발걸음으로 유진 쪽에 걸어왔다.

그의 손에는 태블릿PC가 들려있었다.

“뭔데요?”

“너 남자 배우 브랜드 평판 10위권 내에 다시 진입했어! 이게 몇 달 만인지 모르겠다.”

스타 브랜드 평판.

빅데이터를 추출하여, 소비자들의 행동을 지표화해 나타낸 것이다.

점수가 높을수록 스타 브랜드 평판도 높아지는 방식.

유진은 최근 반년 간의 휴식기 덕분에 해당 순위가 떡락했으나.

최근 ‘작은 별’의 1위 수상, <열다섯, 서른다섯>의 출연 소식으로 점차 높여가는 중이다.

“오오. 진짜 많이 올랐네요? 5위라니.”

“배우가 음방에서 1위 했으면 올라갈 법도 하지. 요즘 너 SNS도 그렇고, 포털 사이트도 그렇고 검색량도 미쳤다고! 이번 리딩 생중계에서 제대로 임팩트를 준 모양이다.”

잔뜩 흥분해서 말하는 차동석.

지난 공백기를 딛고, 유진이 성공적으로 한국에 복귀했으니 꽤 기쁜 모양이다.

아니, 물론 그것도 있겠지만.

오늘 전체적으로 차동석은 매우 하이텐션이었다.

“사장님. 오늘 유독 기분 좋아보이시네요?”

“음? 그러냐? 하하! 사장님은 언제나 기분이 좋아요. 우리 든든한 박유진 배우님이 있으시니까!”

과장된 웃음을 터뜨리는 차동석.

그를 자세히 관찰하던 유진은 뒤늦게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근데 사장님. 그 헤어스타일은 대체 뭐예요?”

유진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차동석이 어울리지 않게 체리 모양의 머리끈을 묶고 있었으니까.

그 험상궂은 얼굴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악세서리였다.

“아, 이거? 우리 딸이 해준 거야. 어때? 귀엽지?”

“하나도 안 귀여워요.”

“아니, 나 말고. 우리 딸 말이야! 아빠 꾸며준다고 자기가 아끼는 고무줄도 나한테 줬다니까?”

“그래서 안 풀고 사무실까지 오신 거예요?”

“이걸 어떻게 풀겠어. 우리 딸이 처음으로 나한테 머리 손질을 해준 건데!”

감격해서 말하는 차동석.

그야말로 영락없는 딸바보의 모습이었다.

“나도 유진이가 저렇게 해주면 좋을 텐데.”

그리고.

그를 이해한다는 듯, 혹은 부럽다는 듯.

박태종이 차동석을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전 아빠한테 안 해줄 거거든요? 저러다 머리 빠지면 어떻게 해요.”

“히잉.”

두 철부지 아빠들을 뒤로 하고서.

유진은 남자배우 브랜드 평판 순위를 다시 면밀히 살펴보았다.

1위는 단연.

“역시 주인경 형님이네.”

작품의 흥행은 물론이고 광고며 화보, 예능 출연 등.

여러모로 주인경은 압도적인 순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걱정 마. 빅데이터 언급량 같은 곳은 네가 훨씬 앞서거든.”

유진이 아직 1위권을 위협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당장 개봉하거나 방영 중인 작품이 없기 때문이다.

배우에게 있어 그 점은 순위 매기기에 여러모로 치명적이다.

하지만 이는 달리 말하자면.

작품이 없는데도 유진은 남자 배우들 중에서도 평판 5위에 랭크되었다는 것이다.

유진의 현재 화제성은 그 누구보다 뜨겁다는 사실.

“빅터콘에서의 컴백, 케챔 1위, 리딩 생중계 대박······진짜 이게 어딜 봐서 15살 먹은 아역배우의 행보냐? 안 그래?”

차동석이 잔뜩 비행기를 태워주고 있지만.

유진은 별다른 리액션 없이 태블릿PC만을 살펴보았다.

여자 배우 쪽 1위는 강사랑, 2위는 나은주였다.

“그런데 이번 작품으로는 뒤집기가 쉽지는 않겠어. 하필 같은 작품에 출연하니 말이야.”

유진도, 주인경도 모두 <열다섯, 서른다섯>에 참여한다.

그렇기에 이로 인한 가산점이 붙는다면 둘 다 동일한 점수를 부여받을 터.

그게 일반적인 시각이겠지만.

“아뇨? 그러니까 오히려 쉬울 거예요.”

유진의 생각은 달랐다.

“같은 작품일수록, 연기력을 비교하기 쉬울 테니까요.”

<열다섯, 서른다섯>.

이 작품으로 남자 배우 브랜드 평판 순위는 바뀔 것이다.

*

얼마 뒤 후.

<열다섯, 서른다섯>의 촬영은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섰다.

유진은 김선미와 함께 꽁냥꽁냥, 설레는 10대 로맨스를 촬영했고.

현장 분위기도 좋아, 공개 됐을 때의 반응이 기대될 정도.

그러나 그와 별개로.

유진은 촬영이 끝난 시간이면 어김없이 정기열에게서 톡을 받아야 했다.

-기열놈 : 촬영 잘 끝냈음?

-기열놈 : 어땠음?

-기열놈 : 오늘은 무슨 장면 찍었음?

-기열놈 : 또 손 잡았음?

유진이 리딩 생중계에서 김선미와 손가락을 얽힌 일.

이를 정기열은 ‘손가락 사건’이라 명명했다.

그 이후로 어찌나 예민하게 구는지.

매 촬영마다 스킨십이 있느냐, 또 무슨 짓을 벌이진 않았느냐.

매번 유진에게 체크하기 시작한 것.

“네 여친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왜 나한테 물어봐?”

참다 못한 유진이 정기열에게 전화를 걸어 따졌다.

“누가 내 여친이야?”

“넌 여친도 아닌 애한테 그렇게 질투하는 거야?”

“질투 아니거든? 그냥, 우리 같이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그런 걸 하면 안 되니까 그런 거야.”

“그런 게 뭔데?”

“아무튼! 좀 조심하란 얘기야. 또 저번처럼 손 잡고 그러지 말고!”

“야. 기열아. 손가락 정도로 그러면 어떻게 하냐?”

“뭐뭐뭐, 뭐? 야. 손가락 정도? 손가락 정도오오오??”

“앞으로 극이 진행되면서 나랑 선미는 포옹도 하고, 키스도 할텐데. 손 좀 잡은 거 가지고 벌써 그러면 어떡해?”

“포옹? 키이이이스으으??”

정기열의 목소리가 엿가락마냥 늘어졌다.

평소 정기열의 모습을 생각하면 상상이 안 가는 모습.

심지어는.

‘이 녀석이 이런 면모도 있었나? 자기 여친한테는 집착 쩌는구만.’

회귀 전부터 친구였던 유진조차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귀찮게 굴 줄이야.

“너, 너 정말 할 거야?”

“뭘 해?”

“포포포, 키키키······그 남사스러운 것들 말이야.”

“연기니까 당연히 해야지.”

“뭐야?! 야, 너 오늘도 선미랑 촬영할 거 아니야. 설마, 설마 너······!”

“아니. 오늘은 선미랑 안 찍어. 그리고 오늘은 그런 장면 없거든?”

“구라 치지 마! 네가 선미 아니면 누구랑 찍는데?”

“강사랑.”

“뭐?”

“나 이제 촬영 들어가야해. 끊는다.”

뚝.

전화를 끊은 뒤, 유진은 무음 모드로 설정한 이후 가방 깊숙이 넣어버렸다.

“에휴. 기열이 놈 때문에 노이로제 생기겠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유진.

이럴 줄 알았다면 정기열과 김선미가 가까워지지 않게 하는 건데!

“에휴. 뭐 그게 내 마음대로 되나.”

하긴.

촬영장에 나타나 깽판치지 않는 게 어디야.

게다가 김선미도 정기열을 생각하며 열심히 하는 눈치고.

여러모로 어쩔 수 없었다.

“오늘 장면은 조금 특별합니다.”

잠시 후.

감독인 최희숙 앞에 유진과 강사랑이 섰다.

“서른다섯의 민유라의 내면 속 갈등이, 열다섯 정은호와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씬입니다. 즉, 민유라라는 캐릭터를 이해하고 그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중요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죠. 두 배우가 긴장감 있게 임해주어야 합니다.”

쌀쌀맞고 계산적인 것처럼 보이는 서른 다섯의 민유라가.

사실 정은호를 얼마나 의식했고.

열다섯에 헤어진 이후, 그간 얼마나 상처와 아픔이 많았는지를 보여주는 씬.

무엇보다 유진과 강사랑이 붙는 유일한 장면이었다.

회상씬이지만 각기 두 캐릭터의 감정이 부딪치는 씬이기도 했다.

어느 한쪽의 밸런스가 무너져버리면 장면 자체가 어그러질 터.

“사랑 씨가 유진이를 잘 배려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최희숙의 당부에 강사랑이 피식 웃었다.

“제가 아니라 오히려 박유진 배우 쪽에서 절 도와줘야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어쨌든 잘 부탁해, 꼬마야.”

뜻밖의 호칭.

그러자 유진이 눈을 끔뻑이며 되물었다.

“저 꼬마인가요? 벌써 중학교 2학년인데요.”

“아, 미안해. 기분 나빴어?”

유진이 15살이 아니라 8살이래도 꼬마라는 표현은 다소

“아뇨. 오히려 귀엽게 봐주시는 것 같아 좋아요. 계속 그렇게 불러주세요, 이모.”

유진이 이모라고 받아치자.

강사랑은 이것 보게, 하는 표정이 되었다.

“이모?”

“절 꼬마라고 부르시니까요. 아무래도 나이차이가 좀 있는 거 같은데, 누나라고 부르기엔 좀 그럴 거 같아서요.”

“얘. 너 은주 언니를 누나라고 부르지? 내가 은주 언니보다 더 어리거든?”

“아하. 그래요? 은주 누나는 은주 누나고, 사랑 이모는 사랑 이모죠.”

제법 뻔뻔하게 대답하는 유진.

그러자 강사랑은 빵 터지고 말았다.

“푸훗, 푸하하하! 그래, 재밌네. 너니까 특별히 봐줄게.”

그렇게 박유진과 강사랑.

이모와 꼬마.

두 사람의 촬영을 앞두고 심상치 않은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자, 그럼 강사랑 배우. 박유진 배우! 촬영 준비 들어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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