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힐러들의 수다> 사랑의 집 편.
본격적인 촬영에 앞서.
먼저 지혜원 집의 상태를 보고, 사전점검을 위해 유진과 이지혜는 반지하를 찾아갔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그들을 맞이한 것은 얼마 전에 퇴원한 지혜원의 어머니였다.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병원비도 다 보태주시고, 대체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할지.”
유진의 손을 붙잡고 거듭 감사를 표했고.
“하하. 말 편하게 하세요, 어머니.”
유진은 오히려 그 손을 더욱 꽉 잡아주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병원에서 좀 더 쉬셔도 되는데.”
“아뇨. 그래도 저희를 도와주러 방송국에서 오셨는데. 제가 집에 있어야죠.”
그렇게 어머니가 앞장서서 집을 소개해주었다.
잠시 후.
“어후.”
이지혜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자신이 청소년기에 지내던 자취방보다 열악한 집.
그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방 천장에 거미줄도 보이고.
벽지엔 곰팡이가 슬어있었다.
가전기기도 모두 구형인데다, 관리도 잘 안 된 모양.
다만.
“······.”
유진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에겐 어느 정도 익숙한 광경이었으니까.
‘내가 지내던 단칸방도 여기와 별반 다를 바 없었지.’
집안에 걸린 지혜원 아버지의 사진부터.
화장실이 집 바깥에 있다는 사실까지.
지상에 있든 지하에 있든.
열악한 환경이란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기 마련이다.
“어머니께선 거의 쉬는 날 없이 일을 하고 계시죠?”
“네. 식당일을 하고 있어요.”
“혜원이가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을 텐데. 주로 뭘 하나요?”
“저는 TV를 봐요.”
지혜원은 어머니 대신 직접 대답했고.
모두를 TV 앞으로 이끌었다.
“짜잔.”
마치 보물을 소개하듯 양팔을 펼쳐보이는 지혜원.
그건 한눈에 봐도 고물같은 TV였다.
트는 순간 지직거리는 소리가 귀를 거슬리게 만들었으니.
“재미있는 드라마 많이 해서 좋아요.”
하지만 이 고물TV는 지혜원의 유일한 탈출구이자.
새로운 꿈을 꾸게 만들어준 존재였다.
TV를 틀자 일본 드라마 전문채널에서 <메모라이즈>를 방영 중이었다.
근래 <메모라이즈>만큼 대흥행한 드라마가 없기 때문에.
방송국으로선 재방으로 줄창 울궈먹고 있는 것.
“저 대사도 다 말할 수 있어요. 일본어로요!”
그리 말하며 정말 <메모라이즈> 속 대사를 달달 외워 읊는 지혜원.
그러자 다소 침체되었던 분위기가 환기되고.
모두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혜원아. 집을 새롭게 꾸미면서 갖고 싶은 거 없어?”
“덤벨이 갖고 싶어요.”
“덤벨?”
“나쁜 녀석들을 때려잡으려면 체력을 길러야한대요. <메모라이즈>에 나왔어요.”
확실히 그런 대사가 있긴 했다.
후루야가 맡았던 사고뭉치 형사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체력과 격투술이었으니.
“봐요. 저 윗몸일으키기 엄청 잘해요!”
지혜원은 즉석에서 윗몸일으키기를 보여주었다.
어머니가 자연스레 지혜원의 발을 잡아주었는데.
아무래도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저 체력장에서도 반에서 5등 했어요!”
가방을 뒤적여 구깃한 종이를 보여주는 지혜원.
사람들이 칭찬해주자 해사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근데 팔힘은 좀 약해요. 덤벨로 팔힘 기르고 싶어요.”
멋진 집을 가지고 싶기보다.
미래 꿈을 위해 덤벨을 갖고 싶다는 어린아이.
지혜원은 자신과 일면식도 없던 아이지만.
유진은 최대한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 그래야지. 체력이 국력이니까.”
자신이 출연한 드라마를 통해 경찰이란 꿈을 꾸게된 아이.
그러니 드라마를 벗어나 현실에서도 진짜 희망을 주고 싶었다.
지혜원 뿐만 아니라, 비슷한 처지에 있을 다른 아이들에게도.
“혜원이를 위해서 힘내야겠네. 이 집을 모두 싹 바꿔주고, 혜원이가 원하는 운동기구도 잔뜩 사줄게.”
“그래도 돼요? 전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요.”
지혜원이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그 대답에 잠시 놀란 유진이었지만.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훌륭하게 잘 컸잖아.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데.”
회귀 전.
단칸방에 살던 유진은 매우 소심하고, 표현도 잘 하지 않는 아이였다.
그렇기에 아버지인 박태종과 사이도 서먹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평생을 후회 속에 살았다.
그러나 지혜원, 이 아이는 적극적으로 제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아마 이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시절을 후회하지 않겠지.
그만큼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아이였다.
“열심히 하는 사람에겐 복이 오거든.”
그래서 알려주고 싶었다.
인생에 한 번쯤은.
제 삶을 바꿔줄 기적 같은 순간이 온다는 걸.
‘내가 갑자기 어린시절로 회귀한 것처럼 말이야.’
*
얼마 뒤.
<힐러들의 수다> 사랑의 집 아이템편.
그 대략적인 방식이 정해졌다.
“가면을 쓴 유진이 네가 정오부터 서울을 돌아다닐 거야. 동선은 네 마음대로. 하지만 최대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 좋겠지.
그리고 오후 6시에 지정된 장소로 돌아온다.
그곳에 모여든 사람의 숫자에 따라, 방송국에서 정한 금액이 올라가고.
그 금액을 모두 채우면 미션 성공.
물론 미션에 실패한다고 해서 큰일나는 건 아니다.
그때는 가면을 벗고 다시 시도하는 방식.
“장소는 홍대. 버스킹 장소는 이미 헌팅해놨어.”
“엥? 그 정도 규모면 많아야 200명 밖에 수용 못 할텐데요.”
“그게 말이지. 이미 시뮬레이션을 몇 번 돌려봤거든.”
김오태PD는 이미 유진이 아닌 다른 연예인들이 가면을 쓰고 해당 포맷을 소화해보았다.
옆에 붙은 카메라 덕에 촬영이라는 걸 알고 몇몇 사람들이 흥미를 보이긴 했지만.
그리 많은 인원이 모이지 않았다.
적게는 수십, 많게는 100명 내외 정도.
“원래는 극장이나 운동장 같은 곳을 섭외하려 했는데 말이야. 얼굴도 모르는 연예인을 위해, 그날 저녁에 홍대까지 올 사람들이 그리 많진 않더라고.”
그만큼 연예인에게 얼굴은 중요한 요소.
얼굴이 곧 사람을 인식하는 가장 직관적 부분이니 말이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네가 스스로 네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건 금지야. 그리고 스윗터를 비롯한 SNS의 공식 계정을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
“한 가지라면서 너무 여러 가지인데요.”
“이해 좀 해줘.”
“제 정체를 특정할 수 있는 건요? 제 싱글인 ‘작은 별’을 부른다거나. 출연작 캐릭터 연기를 보여준다거나.”
“일단 최대한 자제해줘. 물론 사람이 너무 안 모이면 현장에서 재량에 따라 허용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그 말에 유진이 피식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제약이 많은 거 아니에요?”
“넌 슈퍼스타잖아. 티켓도 3분만에 6만개 팔아버린 녀석이. 진짜 솔직히 말하면 음성변조기도 달아놓을까 생각해놨다고.”
“하하. 그건 듣던 중 다행이네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유진은 전혀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종일관 여유를 내뿜고 있었으니.
“PD님, 하나만 확인할게요. 제 이름만 아니면 되는 거죠?”
“음? 그렇지.”
“흐음.”
잠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유진.
잠시 후.
“PD님. 그래도 장소 바꾸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뭐?”
“사람 엄청 몰릴 거 같은데.”
유진이 내보이고 있는 자신감.
그 원천을 물어보고 싶었으나 김오태는 꾹 참았다.
그걸 미리 알면 재미없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흥분됐다.
이 작은 천재가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말이다.
“그럼 얼마나?”
“최소 1000명 수용 가능한 공연장이요.”
최소 1000명.
최대도 아니고 최소란다.
예상을 뛰어넘은 수치에 김오태도 흠칫 놀랄 수밖에.
“못 채웠을 경우 그림이 이상해질 텐데.”
자칫 잘못했다간 유진의 이미지에 타격이 갈 수도 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뒤, 관객들을 채우지 못한다면.
인터넷에 얼굴빨이라느니 뭐니 하는 악플이 달릴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공연장을 꽉 채웠을 때, 시청자분들이 느낄 카타르시스도 훨씬 커지겠죠. 그렇죠?”
그리 말하며 빙긋 웃는 유진.
“게다가 혜원이네를 도울 수 있는 금액도 훨씬 많아지고요. 인당 금액이 올라가는 형식이니까. 그쵸?”
그러자 김오태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감탄했다.
“크으. 역시 뭘 좀 알아.”
객석을 꽉 채우기만 한다면, 방송으로 뽑을 그림도 훨씬 좋아지고.
지혜원에게 좀 더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도 있는, 일거양득의 기회니까.
“혜원아. 오빠가 약속하나 할게.”
유진은 지혜원에게 걸어가 말했다.
“약속?”
“응. 일주일 뒤 밤 7시에, 너를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모이게 될 거야.”
“나를 위해서?”
“그래. 너희 엄마랑 혜원이 힘내라고 말이야.”
“얼마나?”
“음. 발을 뗄 수 없을 만큼 많이?”
“헉. 어떻게?”
“글세. 이 오빠가 천재적인 힘을 발휘해서?”
그리 말하며 유진은 제 얼굴을 매만졌다.
“익명성이라는 건 참 좋은 거거든.”
제 최고의 장점 중 하나인 비주얼.
이번 아이템인 가면은 그를 가리는 족쇄였다.
하지만 유진은 이 가면을 기꺼이 즐길 생각이었다.
무기상에게서 권총 하나 빼앗는다고 큰일이 생길 리가.
“가면에 가려져 있다는 건,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거니까.”
지혜원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오빠. 뭐하려고?”
“큰 그림을 그리는 거지. 오랜만에 버스터 콜을 날리려고.”
“버스터 콜?”
유진은 싱긋 웃더니, 쪼그려 앉아 지혜원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보여주었다.
“혜원아. 이게 뭔지 알아?”
“응. 스마트폰.”
“아니, 틀렸어. 이건 말이지, 거대한 버튼이야.”
“버튼?”
유진이 주소록 앱에 들어가는 순간.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보였다.
“그래. 누르기만 하면 원하는 사람을 불러낼 수 있는 마법의 버튼.”
*
일주일 뒤.
김오태PD가 직접 대관한 공연장.
그곳은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김오태는 유진에게 붙어 촬영에 들어갔고.
‘힐러’ 출연진인 이지혜는 공연장에서 다른 출연진들과 함께 토크 중이었다.
“마치 옛날에 하던 게릴라 콘서트가 떠오르는군요.”
“아무리 박유진 배우라고 해도, 하루만에 발로 직접 뛰어가며 이 공연장을 다 채울 수 있을까요?”
“얼굴을 드러낸다면 손쉽게 할 수 있겠지만, 가면을 쓴다는 게 변수인 거 같아요.”
<힐러들의 수다>라는 제목에 충실하게.
그들은 이번 아이템을 가지고 수다를 나누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정말 힘들다고 봅니다.”
그런 의견을 개진한 것은 바로 개그맨 류태준.
“이게 또 제가 직접 해보지 않았겠습니까?”
“태준 씨가 총 몇 명 모았었죠? 100명이었나요?”
“두 배나 뻥튀기하시네. 50명쯤이었을 거예요.”
“아니, 그것도 진짜 대단한 거였다니까요? 가면 쓰고 사람 모으는 거 진짜 힘들어요!”
유진이 이번 아이템을 하기 전.
류태준 역시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모아보았다.
하지만 모인 것은 50명 남짓한 인원뿐.
“진짜 별 걸 다해봤어요. 성대모사, 즉석 꽁트, 노래 부르기. 그런데 이게 정체를 밝힐 수가 없으니까 되게 답답해요. 솔직히 가면 쓴 사람이 저녁 7시에 갑자기 홍대로 오라고 하면, 올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런데 2천 명을 채워야 한다라. 진짜 걱정이네요, 저는.”
“그렇죠. 우리 혜원이를 도와주기 위해선 박유진 배우가 정말 힘내줘야 하겠는데요. 지혜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곧 힐러들의 시선이 이지혜 쪽으로 향했다.
“우리 지혜 씨는 또 박유진 배우랑 같은 소속사죠. 게다가 친남매처럼 가까운 사이라고 들었는데.”
이지혜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으음. 저도 조금 힘들지 않을까 생각해요. 보통이라면요.”
“역시 그렇죠?”
“하지만, 유진이라면 모른다고 생각해요.”
이지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그 아이는 항상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보여줬으니까요.”
그 아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그때.
“어? 벌써 첫 번째 손님이 오셨습니다!”
류태준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현재 시간은 오후 2시.
아직 약속시간인 오후 7시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다.
힐러들은 자리에서 뛰쳐나가 첫 번째 관객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어? 류태준이다! 어? 이지혜도 있네? 뭐야, 뭐야 이거? 대박. 오늘 진짜 무슨 콘서트해요?”
연예인들이 잔뜩 있는 걸 보고선 꽤 당황한 눈치.
“하하. 비슷합니다. 여기까진 어떻게 오셨나요?”
곧 류태준이 관객에게 마이크를 넘기며 물었다.
“한권주 배우가 나온다고 해서요.”
그런데.
“예? 한권주 배우요?”
관객의 입에서 매우 뜬금없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이후 곧장 두 번째 관객이 입장했다.
“정성진 뮤지컬 넘버 들으려면 여기 오라고 하던데.”
“예에? 정성진 씨라니. 이건 또 무슨······.”
한권주에 정성진.
출연진에 이름조차 없는 사람들이 갑자기 왜 언급됐단 말인가?
게다가 잠시 후 도착한 고등학생은.
“재오 오빠 보러왔어요!”
빅터의 공식 응원봉을 흔들며 말했다.
세 사람이 보러 왔다는 연예인.
그는 모두 제각각이었다.
“아니, 홍보는 박유진 배우가 뛰고 있는데 대체 왜?”
단체로 멘붕에 빠진 힐러들.
그 중 단 한 사람.
“설마.”
이지혜만이 무언가를 눈치챈 표정이었다.
‘PD님, 하나만 확인할게요. 제 이름만 아니면 되는 거죠?’
그 말이 불현듯 이지혜의 머릿속을 스쳤다.
“유진이는 지금······가면을 쓰고, 다른 스타들을 연기하고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