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흐음.”
침음을 흘리며 펜을 굴리고 있는 유진.
그는 제 앞에 놓인, 영어로 된 기획서를 바라보았다.
그 타이틀은 바로.
[]
휘슬에서 준비하고 있는 히어로, <볼프강>.
<클라우 솔라스> 공연 직후 대기실에서 만난 벤 케이지.
그가 유진에게 쥐여주다시피 한 기획서다.
“진짜 평범한 사장이랑은 다르단 말이야.”
하긴.
그러니까 자신을 보려고 또 한국까지 날아왔겠지만.
“아무튼, 역시 이 작품에 나를 캐스팅하고 싶은 모양이네.”
설정에 따르자면.
그의 이름은 희대의 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정작 볼프강은 천재가 아니다.
오히려 신체 능력도, 지능도 지극히 평범한 소년일 뿐.
그렇기에 볼프강은 특별함을 동경한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특별한 능력이 생긴다.
‘자신이 원하는 걸 지휘할 수 있는 능력.’
마치 모차르트가 오케스트라를 통솔하는 것처럼.
볼프강은 자연물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뜻대로 지휘하는 것이 가능하다.
‘지휘, 라는 것 자체가 리더의 상징이야. 그런데 그런 능력을 미성년자 히어로가 갖게 된 거고. 매력적이야. 나중엔 휘슬의 히어로들 중 탑 5에 들 정도로 인기를 끌지.’
솔직히 욕심이 난다.
휘슬이라는 브랜드를 떼놓고 보더라도.
볼프강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매력적이었다.
재벌 2세, 천재, 신의 아들, 스파이.
각종 화려한 이력을 가진 히어로들 사이.
볼프강의 평범함은 오히려 그 자체로 특별했다.
‘게다가 부여받은 능력도 흥미로워. 볼프강 자체가 엄청 강해진 게 아니라, 그저 지휘하고 통솔할 수 있게 된 거니까.’
평범한 리더.
그게 바로 볼프강의 정체성이다.
실패를 모르고 멋지게 활약하는 다른 히어로들과 달리.
볼프강은 어리숙하고 경험이 없어 자주 실패한다.
그럼에도 좌절하지 않고, 그를 딛고 천천히 나아가는 성장형 히어로.
처음에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볼프강이.
진정 모두를 통솔하는, 진짜 리더가 되어가는 이야기다.
‘모두가 성장하면서 시행착오를 겪지. 그를 통해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거고.’
볼프강은 바로 그런 청소년들을 대변해줄 캐릭터다.
‘그리고 그 아치에너미이자 빌런, 팬시.’
팬시.
Fancy라는 이름부터가 아주 반짝반짝하다.
막강한 부를 자랑하는 재벌 2세 캐릭터.
또한 키도 크고 엄청나게 잘 생겼으며, 심지어 똑똑하고 운동도 잘한다.
그 때문에 볼프강은 줄곧 팬시를 부러워하고, 시기하고, 동경한다.
그만큼 ‘평범함’을 내세운 볼프강과는 대조되는 캐릭터.
‘하지만 부모님이 강도에게 살해당한 뒤, 모든 것이 뒤바뀌었지.’
복수의 화신이 된 팬시.
그는 제 부모를 죽인 강도를 찾기 위해 물려받은 재산, 자신의 두뇌, 힘. 모든 것을 사용한다.
그렇게 직접 복수에 성공했으나, 남는 것은 허무함 뿐.
그 속에서 다른 빌런들의 꾐에 넘어가, 완전히 타락하고 만다.
볼프강은 한순간의 기적으로 영웅이 되지만.
팬시는 한순간의 비극으로 인해 빌런이 된다.
이런 두 사람의 관계성 또한 <볼프강>이란 작품의 매력 포인트.
‘히어로, 빌런. 어느 쪽도 매력적인 캐릭터야.’
성장형 히어로인 볼프강과.
모든 것을 가졌다가, 한순간에 모든 걸 잃어버려 복수귀가 된 팬시.
둘 다 유진이 30이 넘어갈 동안 사랑받는 캐릭터들이다.
그러나.
유진으로서 한 쪽을 선택할 수 있다면.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유진은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 방긋 웃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나네요, 인경 형님.”
“그러게. 오랜만이야, 유진 동생.”
라이브 방송 이후.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연락을 주고 받을만한 사이는 아니니까.
“바쁘신데 이렇게 불러서 죄송해요. 제가 형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었는데.”
“나보다 네가 더 바쁠 걸. 그리고 조심해야 할 때잖아.”
스케줄을 멋대로 취소하고 온 주인경이지만.
그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유진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대답했다.
“네. 형님은 존 조그 감독님과 인연이 있죠?”
“그래, 맞아. 할리우드 진출을 타진했을 때, 가장 먼저 관심을 보였던 게 바로 그 사람이었거든.”
항상 최고가 되길 바랐던 주인경이다.
꿈의 무대라 불리는 할리우드 진출을 노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존 조그 감독이 연출한 가족 드라마 영화, <푸드트럭>에 조연으로 출연하셨죠? 푸드트럭 운영을 돕는 아시안계 미국인으로요.”
“조연······말이 그렇지, 사실상 단역이나 다름없었어. 내가 출연한 분량은 다 합쳐도 3분도 안 될 걸.”
주인경은 쓰게 웃었다.
나름 한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달리던 배우였으나.
할리우드에서는 아시아에서 온 수많은 배우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 쓰디쓴 현실을 주인경은 촬영 내내 느껴야만 했다.
“존 조그 감독은 어떤 사람이었어요?”
“굉장히 열정적이었지. 일단 배우의 자율성을 매우 존중해줘. 나쁘게 말하자면 배우에게 모든 걸 맡기는 식이지. 애드리브도 무척이나 좋아하고.”
그래도 좋은 추억이 있다면.
존 조그와의 작업 자체는 무척 즐거웠다는 점이다.
“존 감독님과 무척 친하다고 들었어요.”
“그 정도는 아니야.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진 않으니까.”
존 역시 작은 배역에도 열심히 연기하는 주인경을 마음에 들어했고.
촬영 당시엔 제법 친하게 지냈다.
하필 그게 한국에선 ‘존 조그의 총애를 받는 배우, 주인경! 할리우드가 주목하고 탐낸다!’라는 식으로 왜곡되어 국뽕에 이용당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정말 대단하네. 할리우드 쪽에서 먼저 컨택이 오다니 말이야. 하긴, 존 감독님이라면 너를 안 좋아할 리가 없지.”
이미 유진과의 승패는 명확했고.
그에 깔끔히 승복한 주인경이다.
유진의 할리우드 진출 역시 질투하기보다 깔끔하게 축하해주었다.
“그래서, 용건은 이걸로 끝이야?”
“아뇨. 존 감독님께 연락을 해주셨으면 하는데요.”
그 말에 주인경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뭐야. 결국 우리 유진 동생의 선택은 존인가?”
“아뇨? 전 무엇 하나 포기하지 않을 건데요?”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봐도 될까?”
“말 그대로예요. 벤 케이지, 존 조그. 그 두 사람은 함께 갈 수 있어요.”
유진은 아직 공란으로 남겨진 <볼프강>의 스태프 명단을 힐끔거렸다.
“저와 함께요.”
*
서울의 5성급 호텔.
“후우”
호텔룸에 혼자 있는 존 조그는 위스키를 한 잔 마셨다.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서였는데, 별 보람이 없었다.
마치 이번 한국행처럼 말이다.
[할리우드에서 원하는 박유진! ‘벤 케이지 vs 존 조그’, 박유진은 누굴 선택할까?]
휴대폰 화면 위로 보이는 불쾌한 헤드라인.
“젠장.”
짧은 욕지기를 내뱉으며.
존 조그는 의자에 몸을 묻었다.
존 조그.
<라스트 원>, <코드네임>, <푸드트럭> 등.
할리우드에서 다양한 영화를 흥행시킨 감독.
그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데뷔작은 전형적인 할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였는데.
그 이후론 SF부터 가족 드라마, 심지어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매 작품 새로운 도전을 하면서도, 평균 이상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러다 보니 감독 자체가 전세계적으로 팬덤을 거느리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데뷔작 <라스트 원>이 500만 관객을 동원해 이름이 알려졌다.
즉.
존 조그는 어디 가서도 꿇릴 게 없는, 오히려 대우를 받아야 할 감독이라는 것.
“그런데 하필 경쟁자가······.”
그때 울리는 전화.
존은 힘없이 전화를 받았다.
“이봐. 괜찮아?”
그의 친구이자 <클라우 솔라스>의 작곡가, 프랭크였다.
존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아니. 안 괜찮아. 교통사고라도 당한 기분이라고.”
“그 정도인가?”
“그럼. 설마 벤 케이지가 거기서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
설마 경쟁자가 끼어들 줄이야.
그것도 휘슬의 최고경영자가 말이다.
“자네, 이 기분 알겠어? 마치 맛있는 마카롱을 사려고 프랑스까지 날아가 3시간 동안 줄을 섰는데, 마지막으로 남은 1개를 누군가 새치기로 가져간 느낌이라고.”
“제법 극단적인 비유군.”
“그만큼 슬프다는 말이야, 친구.” 느낌이야. 심지어 새치기한 녀석은 마피아라 따질 수도 없어.”
프랑스는 한국으로.
마피아는 벤 케이지로.
그리고 마카롱은 박유진으로 치환 가능했다.
“하긴. 그의 연기를 직접 봤으니, 그런 기분이 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겠지. 특히 배우에 대한 리스펙이 큰 자네니까 말이야. 꽤 감동을 받은 눈치던데.”
“물론이야. 내가 본 그 어떤 뮤지컬보다 굉장했지. 그 공은 전적으로 한국의 배우들, 특히 유진 팍에게 있고 말이야.”
존 조그가 작품을 준비하는 방식은 제법 독특하다.
대다수의 감독은 먼저 아이템이 구체화되거나, 각본이 윤각을 드러내면 그 다음 배우를 그에 맞춰 캐스팅한다.
하지만 존 조그는 그 반대.
먼저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그에 맞는 각본을 구하는 방식.
“배우야말로 영화의 시작이고, 완성이야. 배우가 없다면 그건 그저 풍경을 찍는 다큐멘터리겠지.”
“하긴. 그게 자네의 작품관이었지.”
이런 성향을 보이는 것은.
그가 어릴 적부터 영화가 아닌, 영화배우들의 광팬이었기 때문이다.
존 조그가 영화를 좋아했던 건 영화기법, 스토리, 연출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 숨쉬는 캐릭터, 배우들 때문이었다.
그가 다루는 장르가 다양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배우를 캐스팅하고 그 이후 그에 맞춰 각본을 구하니, 자연스레 여러 장르를 다룰 수밖에.
“그래서, 유진 팍을 캐스팅한다면 대략 어떤 장르가 될 거 같아? 역시 뮤지컬? 아니면 <열다섯, 서른다섯>과 같은 하이틴 로맨스인가?”
“모르겠어. 그라면 어떤 장르든 소화 낼 테니까. 그렇기에 그가 필요해.”
그렇기에 존 조그는 박유진을 강력히 원했다.
차기작에 대한 첫 번째 단추.
어느 장르라도 소화해낼 거라는 믿음이 굳건했으니.
“하지만 유진 팍이 머리에 총을 맞지 않는 이상, 나를 선택할 이유는 없겠지.”
아무리 존 조그가 할리우드에서 명성이 있다고 해도.
상대는 휘슬이다.
전세계에서 지금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히어로 프랜차이즈.
심지어 사장이 직접 찾아오지 않았나.
“솔직히 그렇지. 나라도 휘슬을 선택할 거야.”
“나쁜 녀석.”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라고, 존.”
“후우, 그래. 나도 알아. 하지만 벤 케이지가 욕심을 내는 걸 보니, 오히려 더 놓치고 싶지 않아졌어.”
휘슬 사장이 직접 움직일 정도의 아역배우.
제 친구 마이클까지 붙은 상황이라면 제 안목이 정확했다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 뮤지컬 공연이 계속되는 동안, 나도 최대한 유진 팍에게 너에 대해 어필해볼 테니까.”
“고마워, 프랭크. 네 말 몇 마디에 그가 마음을 바꿀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뚝.
전화를 끊은 이후.
이제 샤워나 하고 잠에 들려던 존.
그런데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또 프랭크인가 했는데.
“주인경?”
의외의 인물이 자신을 찾고 있었다.
*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군요, 유진 팍.”
벤 케이지.
그는 전에 유진을 만나러 왔을 때보다 훨씬 표정이 좋았다.
존 조그를 제치고 자신과의 만남을 먼저 주선했다.
이는 곧 자신의 승리라는 뜻.
유진이 휘슬을 선택한 셈이니 말이다.
“그간 당신의 행적을 쭉 지켜봤습니다. 정말 놀랍더군요. 한 소녀를 위해 그런 멋진 콘서트를 열다니.”
벤이 만사 제쳐두고 한국으로 달려온 이유.
그건 <힐러들의 수다> 콘서트의 영향이 컸다.
“정말 감동받았습니다. 지혜원? 그 아이 역시 처한 현실에 맞서 싸워 멋진 꿈을 꾸고 있더군요. 심지어 그게 당신의 작품을 보고 나서였다니!”
휘슬의 창립이념을 생각나게 만드는, 멋진 콘서트였다.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것.
그게 바로 히어로의 본분 아닌가.
너드였던 벤 역시 히어로들을 통해 꿈을 꾸게 되었으니.
그리고 유진은 만화나 영화 속에서가 아닌.
현실에서 그를 이뤄가고 있다.
이게 히어로가 아니라면 대체 무어란 말인가?
“벤. 혹시 그 속담 아시나요?”
잔뜩 흥분한 벤 케이지와 달리.
유진은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무슨 속담 말이죠?”
“한 명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선 하나의 마을이 필요하다. 전 그저 마을의 구성원 중 하나였을 뿐이에요. 절 도와주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저 아이디어로 남았을 테니까요. 모두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어쩜 이리 생각이 깊을까.
벤은 재차 감탄했다.
“그래서. 제가 당신에게 준 기획서는 읽어봤습니까?”
“물론입니다. 정말 흥분되는 기획이었어요. 새로운 히어로의 탄생이라니. 그리고 또 그 기회가 제게 주어졌다는 것도 영광이고요. 무슨 역할을 맡을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사실 벤은 아직도 고민 중이었다.
유진에게 볼프강 역을 맡길지.
아니면 팬시 역을 맡길지 말이다.
그에 대해 유진의 의견을 물어보려는데.
“다만 하나 여쭤보고 싶네요. 감독이 정해졌나요?”
유진이 먼저 화제를 돌렸다.
“아직이요. 하긴, 배우 입장에서 캐스팅 제의를 받을 때 꽤 중요한 문제겠죠.”
어떤 감독이 맡느냐에 따라.
히어로의 평판도 달라질 수 있으니까.
캐릭터를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표현해내는지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조만간 감독 리스트를 추려서 당신과 공유하도록 할게요.”
“벤.”
유진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가능하다면, 제가 감독을 추천하고 싶은데요. 한 번 검토해줄 수 있어요?”
“오, 당신이 추천하는 감독이라니. 정말 궁금한데요. 누군지 말해줄래요?”
빈말은 아니었다.
유진이 추천하는 감독이라면, 분명 능력 있고 범상치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으니.
우선 그 이름을 후보군 리스트에 추가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사실 전 존 조그 감독님과 일하고 싶어요.”
벤으로선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