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박태종은 요즘 좀 무서워졌다.
너무 좋은 일만 생기면 도리어 불안해지는 게 바로 사람의 심리.
박태종이 딱 그런 상태다.
“전세계 1등 드라마, 세종문화회관 전석매진, 하루만에 2천명 모아서 게릴라 콘서트로 기부.”
박태종은 괜히 소리 내어 말해봤다.
말해놓고도 도무지 현실성이 없는 일들.
그걸 제 아들이 해나가고 있는 중이었으니.
“거기에 할리우드 진출까지.”
가장 믿을 수 없는 사실이다.
단순한 진출이 아니다.
소위 말하는 강제진출.
할리우드 감독에, 대형 히어로 프랜차이즈 사장이 직접 유진이를 보러 왔다.
게다가 곧 계약을 하러 미국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일본 진출한다고 했을 때도 꿈만 같았는데······믿겨지니, 백룡아?”
“냐아?”
길쭉해진 백룡이가 박태종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백룡이 해외 이름도 지어야 할지도 몰라. 칸, 아카데미, 베니스. 이런 걸로 말이야.”
“우냐앙!”
곧바로 고주파 울음을 내며 반발하는 백룡이.
‘내 이름은 백룡이뿐이다’라고 항변하는 것만 같다.
“그, 그래. 미안해. 츄르 줄테니 화 풀어.”
“먀아앙.”
의외로 유진은 백룡이에게 간식을 주는데 인색한 편이지만.
박태종은 백룡이 눈치를 자주 보는 편이라, 화난 것 같이 보이면 츄르를 내준다.
백룡이가 그를 알고 이용해먹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모양이지만.
어쨌든.
역시 아버지 마음은 어쩔 수 없는 모양.
그렇게 백룡이에게 츄르를 먹이며.
박태종은 재차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거기다 휘슬 히어로가 될지도 모른다고.”
박태종은 어린 시절, 외화 더빙을 보고 자란 세대다.
그렇기에 할리우드에 관해 갖고 있는 환상이 더욱 큰 편.
게다가 어렸을 때 자신도 히어로 코믹스를 몇 번 읽은 적이 있으니까.
“이렇게 훌륭한 아들이 또 어디 있을까.”
이따금 제 아들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제 속을 썩이기는커녕, 매 순간 자신의 자랑이었던 아들.
엄마를 일찍 잃어서 철도 빨리 든 것인지.
그 흔한 사춘기 한 번 오지 않았다.
남들은 애 키운다는 게 너무 힘들다, 어쩐다 하는데.
자신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으니.
심지어 얼마 전에는.
‘아빠. 아빠는 꿈이 뭐예요?’
‘응? 꿈?’
그런 질문을 하더란 것이다.
‘아빠는 이미 꿈 이뤘지. 너처럼 멋진 아들을 얻었으니까. 흐윽!’
‘아니, 그거 말고. 어렸을 때 꿈이 아빠가 되는 건 아니었을 거 아니에요.’
‘어릴 적 꿈? 음. 어렸을 때부터 워낙 집안사정이 안 좋아서 일만 했거든. 그래서 꿈을 가질 여유가 없었는데······아! 그래. 생각났다. 아빠가 되고 싶었던 건 뭔가를 기록하는 사람이었어.’
‘기록이요?’
‘그래. 아빠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사정이 좋지 않았거든.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신문도 돌리고 그랬지. 그렇게 바쁘게 살다보니까, 시간이 너무 빠르게 가는 거야. 정작 내게 추억으로 남은 건 없고 말이야. 그러니까 사진이든 영상이든 뭐든, 나나 누군가의 삶을 기록한다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지.’
‘어? 그럼 아빠는 꿈을 이룬 거네요?’
‘응?’
‘아빠는 항상 제 영상을 찍어주고 계시잖아요. 벌써 몇 년째 넙튜브에 다 기록되어 있는 건데.’
그 말대로.
박태종은 유진의 전담 영상팀으로 몇 년째 계속 일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유진의 영상은 질리도록 많이 본다.
물론 질린 적은 없지만.
엄연히 비즈니스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때만큼은 최대한 사적인 감정을 빼려 한다.
그래서 스윗터로 대신 아들 덕질을 하는 것이기도 하고.
“기록이라.”
박태종은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으로 가서 뒤적이는 것은, 아직 풀지 않은 제 이삿짐.
“찾았다.”
박태종이 찾아낸 건 낡은 캠코더였다.
수십 년도 더 된 물건이지만.
“오, 작동한다.”
다행히 충전기도, 캠코더도 작동했다.
결혼 당시.
박태종의 아내, 즉 유진의 어머니가 그에게 선물로 사준 것.
박태종이 그런 물건을 그냥 방치해놨을 인물인가.
그 어떤 물건보다 소중히 간직하고, 관리해왔다.
다만 먹고 살기가 바빠 실제로 작동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
박태종도 이 안에 뭐가 찍혀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한 번 볼까.”
가장 첫 번째 파일은.
[아부바부바아.]
자꾸만 TV 앞으로 기어가는 아기 유진이의 모습이 조악한 화질로 담겨있었다.
아마 유진이가 한두살 때쯤인 모양.
엉금엉금 바닥을 기어가는 아기 유진이.
그런데 그 갓난아기가 신통하게 TV 전원 버튼을 누르는 게 아닌가.
[유진아! 또 얘가 TV를 켜네. 왜 이리 TV를 좋아하지?]
캠코더를 든 박태종이 서둘러 달려가 유진을 안아 들었다.
가던 길을 방해받아, 갓난아기로선 서러워 눈물을 터뜨릴 법도 하건만.
[우꺄아앙.]
울지도 않고.
아빠 얼굴만 보면 방긋방긋 웃는다.
[아이구, 우리 유진이.]
그런 유진이를 어르며 미소 짓던 영상 속 박태종의 웃음소리는.
[크흡, 크흐으읍. 흐윽······]
곧 울음소리고 바뀌었다.
그땐 제 아내를 쏙 빼닮은 유진을 볼 때마다 눈물이 차올랐으니.
그러자.
[우으으으, 으아아아앙!]
갓난아기인 유진도 덩달아 울음을 터뜨리는 게 아닌가.
[크흐흐읍, 유진아. 울지 마. 크흐윽!]
지금보다 한참 어린 두 부자는 그렇게 서로 눈물을 터뜨렸다.
짠하면서도 뭔가 웃긴 장면.
“하하.”
박태종은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유진이가 우는 걸 본지가 언젠지 모르겠네. 아주 의젓하게 컸지.”
이 조그마한 아이가.
어느덧 박태종 자신보다 훨씬 덩치가 커졌고.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배우가 되었다.
집조차 갖지 못하고, 월세 단칸방에 살던 그들은.
톱스타 연예인들만이 거주한다는 고급 아파트에 살며.
게다가 이젠 저소득층 어린아이들에게 기부까지 한다.
“참, 세월이라는 게 빠르네.”
이 영상이 아마 박태종이 캠코더로 찍은 몇 안 되는 영상 중 하나일 것이다.
때문에 기껏해야 남은 영상은 한두 개일 거라 생각했는데.
“어?”
그런데.
그의 예상보다 영상은 훨씬 많았다.
녹화 시간을 보니 몇 년 전까진 제법 촘촘히 녹화가 되어있었다.
“난 찍은 기억이 없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파일을 재생시켜보는 박태종.
그러자 그의 눈앞에 보인 것은.
[으음, 이게 맞나?]
바로 유년기 시절 유진의 모습.
4살쯤 되었을 까.
혼자 이리저리 캠코더를 세팅하는 유진의 모습이 그대로 담겼다.
[박유진임니다! 나이는 4살 먹었구요.]
대체 저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건지.
최대한 또박또박 발음하며 유진은 캠코더를 향해 인사했다.
[지금부터 자유연기 해보겠슴니다!]
유진은 마치 오디션에 참가하는 배우처럼.
자기소개를 한 뒤 연기를 펼쳐보였다.
[장미란 다른 이름으로 불리워도 향기가 마찬가지에요. 로미오란 그 이름을 버리고 대신 저의 모든 것을 가지세요.
눈이여 보아라 마지막이다 팔이여 마지막 포옹을 생명의 창인 입술이여 고결한 입맞춤으로 닫히고 죽음의 신과도 영원한 계약을 맺으며 내 사랑을 위해서.]
처음부터 범상치 않았다.
마치 연극배우처럼 <로미오와 줄리엣>을 1인 2역 연기를 보여주는 게 아닌가.
저 어린 꼬마가, 옛스런 대사를 맛깔나게 살리면서 말이다.
그 다음 동영상에선.
[걱정하지 마. 우리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갈 수 있으니까. 희망을 절대 잃지 마. 알았지?]
전쟁 영화에 참여한 영화 배우처럼 비장하고도 디테일한 감정연기를 보여주었고.
[엄마 어디 있어요
나 너무 무서워
나를 혼자 두지 말아요
이 밤은 너무 길고 어두워
유령이 나올 거 같아요]
그 다음 동영상에선 뮤지컬 배우처럼 노래하며 연기를 하기도 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어린아이 유진.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연기력이 나날이 늘어가는 배우 박유진.
그 두 가지 모습이 동시에 보였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유진이에 대한 기록.”
박태종은 캠코더를 들고 일어섰다.
그는 다시 꿈꾸는 소년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유진이가 나의 꿈이지.”
박태종.
그에게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
유진의 팬카페 대박유진.
그곳엔 오랜만에 유진이 직접 쓴 편지가 올라왔다.
[여러분에게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러 왔어요.
대박이들이 진행해주신 인천공항 광고 덕분에 휘슬 사장님이 저를 눈독들이게 됐다고 해요!
대박이들이 제게 보내주신 정성과 사랑 덕분에 저는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어요.
그래서 준비한 역조공 이벤트!
다다음주 토요일, 홍대에서 ‘유진카페’를 진행해요.
제가 하룻동안 빌린 유진카페에서 마음껏 다과를 즐기세요!
제 최애 음료 대추차 마시는 분은 특별 굿즈도 제공해드려요 ๑❤‿❤๑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언제나 여러분을 생각하며 연기할게요.
-내 인생의 대박, 대박이들에게 유진이가]
이에 대한 반응은.
[ㅠㅠㅠㅠㅠ 우리 유지니 어쩜 말도 저리 이쁘게 해
진짜...갓기천사...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일...유진이 덕질 시작한 일...
역조공 머선일이야 ㅠㅠㅠㅠ 대박이들 생각하는 마음에 찐눈물남 ㅠㅠ
나 지하철에서 읽다가 사연녀됨...
ㄴ 2222
ㄴ 33333]
그야말로 감동의 물결이었다.
대박유진은 박유진이 9살 때 설립된 카페.
벌써 8년이란 시간 동안 유진과 함께 해왔다.
하지만 한 번도 서로의 존재를 당연히 여기지 않았고.
서로 자신이 더 아낀다는 걸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박이들이 이벤트를 진행하면, 유진은 그게 크든 작든 꼭 감사인사와 인증을 남겨주었으니.
[ㅁㅊ 진짜? 진짜 인천공항 광고 보고 눈도장 찍었대?
내가 말했자나 이거 외국인들한테 대박으로 먹힐거라니까]
아무튼.
유진의 할리우드 진출 소식이 터진 후.
최근 대박유진은 평소보다 10배는 더한 화력을 뽐내고 있었다.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지만.
가장 대표되는 의견은 두 가지.
[그리고 빌런유진... 단 네글자에 내 심장이 개같이 뛴다...
유진이가 WU??? 그것도 빌런???
벌써 카리스마 폭발한다;;;
저 얼굴로 막 나쁜 짓하고 그런다는 거임??
아...히어로 맡았으면 했는데...
ㄴ 초치지 말자
ㄴ ㄹㅇ 유진이 축하는 못해줄망정 마플로 흐르게 하고 싶음??]
유진의 할리우드 진출에 놀라워하며 기뻐하고, 밀어주는 사람들.
[우리 유지니 어디가 ㅠㅠㅠㅠㅠㅠ
한국 복귀한지 얼마나 됐다고 ㅠㅠㅠㅠㅠㅠ
ㄴ 15살에 복귀했으니 2년쯤 됐네 오래됨 ㅎ
ㄴㄴ 너 MBTI 잇티제지 ㅡㅡ
할리우드 간다니 기쁜데...슬퍼...
클라우 솔라스 끝나면 유진이 실물 또 당분간 못봄...? ㅠㅠㅠㅠ
콘서트 해줘...팬미팅 해줘...뮤지컬 또 해줘...제바류ㅠㅠㅠ]
할리우드 진출에 기뻐하면서도.
또다시 유진이 해외로 나간다는 사실에 아쉬워하는 사람들.
유진이 일본 진출했을 때도 반년의 휴식기가 있지 않았나.
대박이들은 이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것.
[우리 유진이 아직 애기입니다...이제 고1이에요
맞아요 유진이의 선택을 존중해줘야죠
그래두... 힝 ㅠㅠ
ㄴ 유진이의 행복이 대박이의 행복이니까
나도 유진이가 건강하고 오래오래 배우 생활 해줬으면 좋겠음]
아역배우를 덕질하는 만큼 대박이들의 팬 의식은 매우 훌륭한 편이었고.
그만큼 자정작용도 잘 되는 편.
덕분에 대박유진은 유진의 할리우드 진출을 응원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유진이 보여줄 빌런 연기에 대한 기대감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접한 또 한 사람.
“아니, 또 어딜 간다는 거예요?”
송미연 작가는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할리우드요.”
눈앞의 유진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촬영은? 언제 들어가죠?”
“아직 몰라요. 주인공 히어로가 아직 캐스팅이 안 됐거든요.”
송미연은 민용석과 함께 유진을 위한 대본을 집필해놓은 상태다.
그래서 유진의 스케줄이 빌 날만을 기다리고 있거늘.
이젠 일본도 모자라 할리우드로 가버리다니!
“또 나를 기다리게 하려는 거군요.”
“죄송해요. 저도 이건 예상 못했거든요.”
유진이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송미연이 피식 웃었다.
“근데 기분 나쁘진 않아요. 이젠 기다리는 입장이 된 게 상당히 익숙하단 말이야.”
“으으. 죄송하다는 말씀 밖에 드릴 게 없네요.”
“아니, 어쩌면 가장 늦게 찍는 게 이득이 아닐까 싶어.”
“음? 왜요?”
“박유진 배우는 항상 우상향이니까. 다음에 돌아올 땐 더 대단한 배우가 되어 돌아오겠죠. 안 그래요? 그때 내 대본으로 작품을 찍는다면, 내 작품은 더 고평가 받을 테고요. 아닌가요?”
그 말에 유진은 오잉, 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곧 자신 있게 웃었다.
“네. 약속드릴게요.”
원래 송미연은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유진에 대해서만큼은 너그러움 그 자체.
몇 년이 더 걸리더라도.
아니, 몇 십년이 더 걸리더라도 기다릴 수 있을 거 같았다.
왜냐면.
“근데 대본 진짜 좋았어요. 저 그 작품 꼭 하고 싶어요! 저를 위한 작품이라고 하셨으니까요.”
대본 초고를 보고 박유진이 그리 약속했으니까.
작품 보는 안목이 기계보다 정확한 유진 아닌가.
그런 유진이 보증했다면, 분명 이 작품도 대박이 날 것이다.
“아무튼 축하해요. 박유진 배우의 연기는 분명 할리우드에서도······음?”
그런데 그때.
송미연에게 도착한 한 통의 메시지.
[작가님, 저 박태종입니다. 유진이랑 같이 계신 것으로 알고 있어 문자 드립니다. 유진이 몰래 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 잠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매우 정중한 문자.
그건 유진의 아버지, 박태종에게서 온 것이었다.
“잠시 전화 좀 하고 올게요.”
“네. 다녀오세요.”
그렇게 유진을 남겨두고 잠시 밖으로 나온 송미연.
곧장 박태종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아버님? 문자 봤습니다.”
“아, 그게. 일단 먼저 죄송합니다. 제가 그나마 알고 지내는 창작자분이 송미연 작가님뿐이라.”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사과부터 하는 박태종.
송미연은 매번 명절 때가 되면 유진의 집에 선물을 보냈다.
그것도 매우 비싸고 고급으로.
이러다보니 박태종이 송미연에게 감사를 표하는 일이 많았고.
덕분에 명절마다 안부를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박유진 배우 몰래 부탁할 일이라니.”
“그게, 저.”
박태종은 머뭇거리다가, 이내 결심한 듯 이어 말했다.
“유진이에 관한 작품을 하나······만들려고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