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유진이 단골로 이용하는 고급 편집숍 포멀.
“정말 포기하는 거야? 이 예쁜 금발을?”
솔미 실장이 아깝다는 듯 유진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공연 기간 동안 틈틈이 뿌리염색도 했을 정도로, 나름 오랫동안 유지했던 금발이다.
보는 사람마다 잘 어울렸다고 칭찬이 자자했고.
대박유진을 비롯한 팬덤에서도 역대급이라며 찬양하고 있는 중.
그만큼 평가가 좋았으나.
“네. 공연도 끝났으니까요. 게다가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어차피 염색도 풀긴 해야하고요.”
유진은 미련이 없어보였다.
오히려 솔미 실장이 진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아쉽네. 내가 해본 염색 중에 최고 걸작이었는데. 탈색한 김에 이것저것 다양한 색도 시도하면 좋았을 거 같은데 말이야.”
“아하하. 영광이에요, 실장님. 사실 염색머리가 잘 어울리는 것도 좋긴 한데, 그러면 맡을 수 있는 역이 한정되거든요.”
그러나.
이제 평범해질 시간이었다.
유진이 언제까지고 왕자님, 영웅 역할만 할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이제 유진이 보여줘야하는 건, 금발처럼 화려한 색깔이 아니었다.
금발은 <클라우 솔라스> 속 헨리.
즉 유진이 해석한 아이돌, 슈퍼스타로서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부터 유진에게 필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그래. 우리 고객님의 의견이 최우선이지.”
“언젠간 또 할지도 모르니까요. 성인이 되고나서는요.”
그렇게 유진의 금발이 염색약에 뒤덮여 다시 흑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유진의 머리카락에 염색약을 바르며 솔미 실장이 물었다.
“근데 이제 슬슬 미국 갈 준비도 해야하는 거 아니야? WU에 빌런으로 나온다며? 우리 조카가 WU 완전 좋아하는데!”
“으음. 글쎄요, 아직 히어로 쪽 캐스팅이 완료가 안 돼서요.”
유진은 그 이유를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게 유일한 기회라는 것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다.
“저, 솔미 실장님.”
“응?”
“머릿결이요. 일부러 상하게 할 수도 있어요?”
“아니, 왜? 이 비단결 같은 걸.”
“걱정 마세요. 머릿결만 상하게 할 거 아니니까. 당분간 운동은 줄이고, 엄청 먹어서 살도 좀 찌울 생각이에요.”
유진의 폭탄 발언에 솔미 실장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니, 이 잘난 얼굴을 두고. 대체 왜?”
유진의 얼굴이 어떤 얼굴인가.
데뷔 때부터 역대급 비주얼의 아역배우로 인터넷에서 유명해졌고.
이후 역변은커녕 정변의 정석을 보여주며 나날이 미모 리즈를 찍는다는 평을 듣는 중이다.
게다가 요즘엔 운동까지 해서 제법 체격이 다부진 상태.
금발로 활동하던 <클라우 솔라스>는 그야말로 고등학생이 보여줄 수 있는 비주얼의 정점이었다.
그런데 그걸 다 포기하겠다니!
“그러다 대박이들 다 운다? 나도 울 거야. 아주 펑펑!”
“에이. 실장님도 아시잖아요. 연기자가 항상 예쁘고 잘생길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캐릭터에 맞춰서 체중조절을 하는 건 배우가 하는 자기관리의 기본인걸요.”
“그것도 배우 나름이지. 비주얼 특화 배우들은 그런 짓도 잘 안 해.”
“어? 저 비주얼 특화 배우 아닌데요?”
역대급 비주얼을 가지고 있는 유진이지만.
유진을 비주얼 특화 배우라 단정짓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역이라는 제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진의 연기폭이 매우 변화무쌍했다.
“윽. 아무튼! 그건 알지만. 넌 아직 어리잖아. 그렇게까지 해야해?”
“이번이 좀 특별한 경우긴 해요.”
모든 창작물의 주인공이 다 예쁘고 잘생긴 건 아니다.
어떤 작품에는 못생긴 사람도, 험상궂은 사람도, 삐쩍 마른 사람도, 매우 뚱뚱한 사람도.
경우에 따라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래서 솔미 실장님한테 부탁 좀 하고 싶은데요. 눈에 띄지 않고 조용해보이는, 그러니까. 아무런 특색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싶거든요.”
“그거 참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요구네. 이렇게 잘난 얼굴을 내 손으로 망치라고?”
“망치는 게 아니라, 캐릭터에 맞게 세팅해주시는 거죠.”
물론 솔미 실장도 알고 있다.
편집숍 운영 경력만 10년이 넘어가는데, 작품에 들어가는 배우들의 자기관리를 모르겠는가.
하지만 어릴 때부터 유진의 메이크업을 담당해오지 않았나.
마치 인형을 제 손으로 망가뜨리는 기분인 것.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해주세요. 지금의 저랑 완전 반대 되는 느낌이요.”
“으음, 그게 어떤 느낌일까? 감이 잘 안오는데.”
침음을 흘리는 솔미실장.
유진은 그런 솔미실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그래! 노잼 연기자처럼 만들어주세요.”
*
[Michael Rondo 님의 스윗 : 때로는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지며, 그 일은 우리를 예기치 못한 곳으로 이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인생은 그저 인생이니까.]
[Michael Rondo 님의 스윗 : 누가 한 말이냐고? 바로 위대하신 마이클 론도님이지
#받아적어 #오늘의명언]
마이클 론도가 어째서 저런 뜬금없는 스윗을 썼느냐.
이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누구도 진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그런 스윗을 쓴 이유.
그건 바로, 갑작스레 박유진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마이클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
“이렇게 만나 뵙게 되네요. 반갑습니다.”
마이클 론도와 박유진.
두 사람이 이렇게 대면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신, 유진 팍 맞습니까?”
마이클이 눈을 가늘게 뜨며 유진의 모습을 살폈다.
“네, 맞아요.”
“흐음. <클라우 솔라스> 때와는 모습이 많이 달라졌군요.”
그 말대로다.
빛나고 윤기가 흐르던 금발은 사라졌고.
소위 ‘개털’이라 부르는, 잔뜩 상한 머리가 부스스하게 얼굴을 가리고 있다.
게다가 살도 좀 찐 모양인지.
그때의 그 화려한 비주얼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
“캐릭터 준비를 위해서죠.”
“캐릭터 준비?”
마이클 론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휘슬 홍보라인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박유진이 맡게 될 팬시라는 캐릭터는 세상 잘난 캐릭터다.
그런데 저런 후줄근한 비주얼이라니?
“아무튼 정말 팬입니다, 유진 팍. 이건 진심이에요.”
아무튼.
마이클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박유진을 주목한 건 비주얼 때문만이 아니었으니.
“이렇게 절 보자고 한 이유가 궁금한데요.”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혹시 <볼프강>의 히어로가 캐스팅이 완료됐는지 궁금해요.”
“아하. 당신이 궁금해할 법한 정보긴 하군요. 제가 알고 있는 정보통에 따르면, 결정권자인 벤 케이지가 아직도 고심 중이라고 합니다.”
벤은 유진을 강력히 원했으나.
스티븐의 반대에 부딪쳐 결국 유진은 팬시를 맡게 되었다.
그 이후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캐스팅에 별다른 조짐이 보이질 않는다.
빌런은 정해졌는데, 히어로가 정해지지 않은 이례적인 상황인 것.
“다만 점점 시간이 촉박해져, 벤 케이지가 결단을 내릴 거라는 예측도 있습니다.”
“캐스팅 될 확률이 높은 배우가 있나요?”
“최종 후보군 정도는 추린 것 같더군요. 베팅 사이트인 올인에선 미키 유우토와 드메인 창의 캐스팅을 유력하게 보더군요. 아마 두 사람 중 한 명이 볼프강을 맡게 되겠죠.”
그 말을 듣고 잠시 고민에 빠진 유진.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마이클이 물었다.
“궁금한 건 이게 다입니까? 이 정도 정보라면 나에게 물을 게 아니라, 휘슬 측에 문의하는 게 빨랐을 텐데요.”
유진은 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마이클 씨. 이제 거래를 하나 제안하고 싶은데요.”
마이클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거래?”
“네. 전 조만간 미국으로 출국할 생각이에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충분히 알아내겠죠.”
마이클 론도 정도의 기자라면 어렵지 않게 유진의 출국 소식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유진이 아무리 조심해서, 비밀리에 출국한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이죠. 제 팔로워들이 모두 제 정보통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제가 이번에 미국에 가는 걸 눈감아주세요. 아니, 비밀리에 입국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럼 제가 엄청난 고급 정보를 안겨드릴게요.”
“엄청난 고급 정보?”
그 말에 마이클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건 분명 유진 팍, 당신에 대한 정보겠군요.”
“맞아요.”
“어렵지 않은 요구군요. 하지만 한 명의 기자이자 당신의 팬으로서 궁금증이 안 생길 수가 없어요. 미국에 가서 대체 뭘 할 생각입니까?”
“마이클 씨. 제가 좋아하는 게임이 있습니다. 지금이야 통 바빠서 잘 즐기지 못하지만, AOS라는 장르죠. 제가 주로 다루는 챔피언의 궁극기의 이름이 참 멋져요.”
마이클 론도는 대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진은 이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영웅 출현.”
“예?”
“마이클 씨. 아마 곧 새 히어로의 탄생을 볼 수 있을 겁니다.”
*
휘슬이 소유하고 있는 청소년 지원 센터.
그곳에서 스티븐은 제법 멀끔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쯧. 이런 일을 맡는 건 도통 익숙해지질 않는단 말이야.”
벤의 부탁으로 맡게 된 청소년 대상 강연 진행.
그를 위해 정장을 차려입은 것.
“강연을 듣는 청소년들이 누구인지 참가자 명단이 있습니다. 보여드릴까요?”
직원이 묻자 스티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개별 면담 시스템도 아니니까.”
보통 휘슬 사장의 강연이라고 하면 수백, 수천 명 앞에서 하는 걸 떠올리겠으나.
벤의 경우 특이하게도 10명 내외의 청소년들만을 선별해서 강연한다.
‘그 친구의 철학이지. 한 아이의 인생만이라도 확실하게 바꿀 수 있다면, 우리는 성공한 것이라고.’
소수 인원이라도 더 확실히, 더 가까이서 자신과 교류하길 원하는 것.
그리고 그게 강연을 듣는 청소년들의 인생에 영향을 주길 바라는 것.
그게 바로 벤이 원하는 바였다.
‘괴짜에 너드긴 해도, 확실히 존경할 만한 친구지. 아이들의 인생을 더욱 긍정적으로 바꿔주겠다는 일념 하나로 휘슬을 여기까지 이끌었으니.’
덕분에 그가 벌이는 기행들도 커버할 수 있는 거고.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런 벤의 철학과 신념을 현실적으로 녹여내는 거야.’
그래서 벤을 제어하기 위해 애쓰는 것.
안타깝게도 현실은 꿈처럼 그리 달콤하지만은 않으니까.
이번 강연도 그에 대한 내용이 될 것이다.
“참석자들은 모두 착석 완료했습니다. 준비되시면 강연장으로 입장하시면 됩니다.”
“오케이.”
스티븐은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뒤.
곧장 강연장으로 입장했다.
그가 들어서자마자 쏠리는 시선.
아직 무르익지 않은 얼굴들이 긴장한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미리 공지를 들었겠지만, 벤 케이지 사장님은 비즈니스가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다. 해서 공동사장인 나, 스티븐 니콜슨이 강연을 진행하게 되었다. 나에 대해선 모두 알고 있겠지? 시간낭비를 좋아하지 않으니,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그의 성격대로라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겠지만.
벤이라는 고약한 친구는 이 강연장에 PC를 설치하지 않았다.
덕분에 스티븐은 화이트보드를 이용해야만 했다.
“오늘의 강연 주제는 간단하다. 들어가기 앞서서 이것만 기억해주길 바란다.”
그리 말하며 스티븐은 화이트보드에 글자를 써내려갔다.
[Something Special]
“우리 WU 속 히어로들은 모두 특별한 존재들이다. 아마 이 강연을 듣는 너희들도, 모두 히어로들처럼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을 테지. 그렇지 않나?”
“네!”
청소년들이 힘껏 대답했다.
“그래. 그렇다면 특별함이란 무엇일까. 이 사회에서 특별해지려면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 오늘은 그에 대한 강연을 해보고자 한다. 자, 다들 특별해지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는 건 동일하다. 하지만 특별함에 대한 개념은 각기 다르겠지. 누군가 특별함에 대해 말해볼 사람 있나?”
“저요. 특별함이란 희소성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남들과 다르면 다를수록, 즉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특기가 있다면 특별한 거 아닐까요?”
“좋아. 자신만의 장점을 갈고 닦아야 한다. 자네 장점이 궁금해지는군. 그럼 다른 사람?”
“돈을 많이 버는 거겠죠! 자본주의사회에서 그만큼 특별한 건 없으니까요.”
“현실적이지만 동시에 추상적인 대답이군. 어떻게 돈을 많이 벌 건지에 대한 계획이 먼저 선행되어야 하겠어.”
이후에도 끊임없이 제 의견을 표출하며 높은 참여율을 보이는 청소년들.
사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모두가 눈에 들고 싶어한다.
무려 휘슬 사장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듣고 제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리다.
그곳에서 하나라도 더 얻어가려는 욕심이거나.
아니면 뭔가 특별한 기회를 얻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그런데.
‘흠.’
오히려 스티븐의 눈에 띈 것은.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청소년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저 친구는 왜 그냥 가만히 있는 거지?’
중간자리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어쩐지 펑퍼짐한 옷을 입고.
잔뜩 상한 곱슬머리와 푹 눌러 쓴 모자 때문에 얼굴도 잘 안 보이는 상태.
‘겉으로 보기로는 아시안계인 모양이군.’
그나마 눈에 띄는 특징이 있다면.
푹 눌러쓴 모자와 부스스한 개털머리에 가려 얼굴이 잘 안 보인다는 점이다.
때문에 마이클은 속으로 그를 ‘개털머리’라 지칭했다.
“이봐, 거기.”
스티븐이 개털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스티븐이 강연장에 등장한 이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장면이었다.
그 아시아계 청소년은 주변을 둘러보다, 이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설마 저요?
이렇게 묻는 것처럼.
“그래. 자네 말이야. 자네는 특별함이 뭐라고 생각하나?”
입을 오물거리던 그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음, 어. 다른 사람들이 좋은 답변을 많이 해줘서요. 그 의견들에 저도 동의해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
특색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음색.
남들에게 묻어가려는 저 답변까지.
‘인상이 희미하군.’
스티븐은 그리 느끼며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래. 그럼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지.”
이후에 작성케 한 작문도 무난.
풍기는 인상도 무난.
적극적으로 참여할 정도의 열의는 없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뒤처진 것도 아닌.
세상의 절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부류.
딱 중간 정도의 사람이다.
‘아마 이런 걸 두고 평범하다고 하는 거겠지. 벤이 여기 왔으면, 저 녀석을 보고서 볼프강을 맡기지 않았을까 싶군.’
스티븐은 머릿속으로 우스갯소리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개털머리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열심히 하는 녀석들을 챙기기도 바빠. 다른 녀석들에게 여력은 없어. 그건 비효율적이니까.’
시간은 한정되어있고.
스티븐이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는 특별해지는 방법을, 비즈니스맨의 마인드로 강연 중이니까.
그리고.
스티븐이 점점 제게서 관심을 끄는 것을 보고.
“······훗.”
개털머리가 몰래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