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진심입니까?”
스티븐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한 명의 배우가 히어로와 빌런.
둘을 맡는다는 건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어떤 제작사, 감독이 한 배우에게 히어로와 빌런을 맡기겠는가?
“물론 1인 2역이 영화에 심심찮게 등장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건 두 사람이 결국 같은 인물이라는 상징성을 주기 위한 의도적 연출이죠.”
스티븐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가뜩이나 말도 안 되는 일이 연달아 벌어지고 있는 와중.
“게다가 둘은 안티테제, 아치에너미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그리 만들었죠. 둘은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그런 존재란 말입니다. 서로가 지향하는 바가 완전히 다르죠.”
평범함과 특별함.
그 공존할 수 없는 가치.
그렇기에 볼프강과 팬시는 WU 내에서도 손꼽히는 숙적이 된다.
“굳이 한 사람이 맡아야 할 이유가 없어요. 알겠어요? 비즈니스적으로도 좋지 않은 선택이죠. 캐스팅이 흥행을 좌우한다는 건, 한국에서 어마어마한 스타인 당신도 잘 알고 있을 텐데요.”
히어로 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가 무엇인가?
히어로 역을 맡은 배우는 누구일까.
빌런은 이번에 누가 맡게 될까.
그에 대한 기대감을 즐기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히어로와 빌런을 한 배우가 동시에 맡다니!
“오, 오, 오!”
그러나 스티븐의 우려와는 달리.
벤은 그 자리에서 방방 뛸 정도로 흥분했다.
도무지 사장이라곤 보이지 않는, 품위라곤 없는 모습.
“히어로와 빌런을 한 배우가 동시에 맡다니.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 혁신적이고 창의적이군!”
“벤! 이건 혁신이나 창의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감독 존도 그리 말했잖아! 유진 팍이라면 히어로도, 빌런도 모두 맡을 수 있다고 말이야. 저 얼굴을 봐! 선과 악이 공존하는 페이소스!”
“기본적으로 관객들의 몰입을 확 깨버릴 거야. 영화를 볼 아이들도 혼란스러워하겠지. 어? 왜 우리 영웅이랑 악당의 얼굴이 비슷하지?”
현실적인 부분을 지적하자, 벤도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곧 스티븐의 시선은 유진에게로 향했다.
“뭐든 다 해보겠다는 자세는 존중해요, 유진 팍. 하지만 이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 한 번 연기로 보여드릴게요.”
“연기?”
“네. 배우의 언어는 바로 연기니까요. 그걸로도 설득이 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겠죠.”
유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바쁘신 분들이니 제가 시간을 잡아먹고 싶진 않아요. 지금 제게 10분만 주시겠어요?”
“지금, 이곳에서 말입니까?”
“네.”
따로 연습실을 준비해달라는 말도 없고.
준비할 시간을 달라는 얘기도 없다.
단 10분.
휘슬 사장들 앞에서 볼프강과 팬시, 두 캐릭터를 보여주겠다 선언한 것.
“대신 이 사무실의 비품들을 좀 활용하고 싶은데요.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허락을 받자마자, 유진은 지체없이 움직여 두툼한 책을 찾아냈다.
“저런. 화가 난다고 해서 그걸 폭력으로 풀어버리면 안 돼. 인내심을 가지고, 절차에 따라 차분히 상대방의 처벌을 기다려. 그게 바로 법치주의라는 거니까.”
유진이 그 말을 하는 순간.
스티븐과 벤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유진의 연기가 시작되었음을.
왜냐?
유진의 목소리며 몸짓, 표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변했으니까.
“괴물과 싸우려면 괴물이 되선 안 된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현재 다소 추레한 행색의 유진이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느낌은 킹카의 그것이었다.
당당한 표정, 자신감 있는 몸짓, 확신에 찬 어조.
거기에 싱긋 웃는 미소까지.
그게 비주얼과 겹쳐지니, 오히려 날라리 같은 느낌이 풍겨서 묘한 매력을 자아냈다.
날 것 그대로의 감각이라고나 할까.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유진에게 준 대본에도 있는 이 대사.
모욕당한 친구가 폭력으로 이를 앙갚음하려 하자, 팬시가 말리며 하는 이야기다.
추후 부모님의 죽음으로 타락하고 마는 팬시의 미래를 생각하면.
오히려 팬시는 스스로 한 말을 지키지 못한 셈이다.
여러모로 비극성과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책인 <선악의 저편>에서 등장하는 문구야. 범죄심리학 쪽에선 무척 유명하지. 악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고 그를 분석하는 건 좋지만, 그에 열중한 나머지 동화되어선 안 된다는 뜻이지.”
그리 말하며 책을 펼쳐드는 스티븐.
극중에서.
팬시는 일찌감치 온갖 학문에 통달한 천재로 묘사된다.
그렇기에 그의 타락이 더욱 가속화된다.
세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많은만큼.
그 허점을 제대로 파고 드는 게 바로 팬시라는 빌런이니까.
“그러니까 폭력은 그만둬. 알았지?”
탁.
책을 덮은 뒤, 유진은 스티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겉으로 보기엔 옳을 소리를 하며 친구를 말리는 리더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묘하게 교조적인 목소리 톤.
마지막 대사를 칠 때 느껴지는 미묘한 위압감.
거기다.
붙잡은 스티븐의 어깨에 느껴지는 손의 악력.
‘저 눈빛 너머에 보여지는 은은한 광기. 너무 완벽하고 특별한 존재로 대우받기에 품을 수밖에 없는 우월감과 특권의식. 내 말을 넌 무조건 들어야한다, 그걸 비언어적인 요소로 표현하고 있어.’
스티븐은 유진을 올려다보며 내심 감탄했다.
저 추레한 비주얼로도 팬시를 완벽히 연기해내고 있다니!
그것도 감정이 두드러지는 타락 장면이 아니라.
타락하기 전, 그저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장면을 말이다.
‘그야말로 내가 생각했던 팬시의 느낌. 비주얼만 <클라우 솔라스> 때로 바꿔놓는다면 완벽할 거야.’
스티븐은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가졌다.
“팬시로서의 연기는 이걸로 충분합니다. 이제 볼프강을 보여주세요.”
벤도 스티븐과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유진은 눈을 한 번 끔뻑이곤 평소대로 돌아왔다.
“아, 네. 그러죠. 으음, 그럼 아이템을 또 찾아봐야겠는데.”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유진은 주변을 살폈다.
“오. 마침 좋은 게 있군요.”
유진이 찾아낸 것은 도수 없는 블루라이트 안경.
스티븐이 컴퓨터를 할 때면 쓰곤 하는 것이었다.
“제가 볼프강으로서 보여드릴 장면은, 최후반부의 장면이에요.”
*
유진에게 회귀 전의 삶은 잊고 싶은 과거였고.
반복되선 안 될 역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진은 그때의 경험 덕분에 감쪽같이 스티븐을 속여넘길 수 있었다.
그때의 삶이 토양이 되어.
비로소 지금에 이르러 꽃을 피운 셈.
‘만약 내가 그 시절을 겪지 않고, 쭉 성공 가도만을 달렸다면 결코 몰랐을 거야.’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노잼 연기자라는 게 무엇인지.
뛰어난 존재들보다 뒤처진다는 게 무슨 기분인지.
유진은 절절히 체감했었다.
‘그리고, 특별하지 못한 존재가 느끼는 무력감도.’
영화 <볼프강>의 최후반부는 꽤 충격적이다.
타락한 팬시는 특별한 능력을 얻고도 평범하게 가족, 친구들과의 삶을 이어가는 볼프강을 질투하고.
결국 볼프강의 친구 중 한 명을 죽게 만든다.
하이틴 히어로 영화라곤 생각할 수 없는, 암울한 전개.
“안 돼!”
볼프강은 절규한다.
결국 자신의 힘으로 친구를 구해내지 못했으니까.
“으흑, 흐윽, 미안해. 미안해······.”
자신의 무능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고.
자신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능력이 있었더라면 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래, 그때의 나와 같아.’
마치 아버지를 잃었던, 그날의 유진처럼.
특별해지고 싶다는 볼프강의 욕망.
그는 곧 유진이 회귀하기 직전, 강렬히 바랐던 것과 동일했다.
“자. 볼프강. 내가 밉지? 죽이고 싶지? 그럼 날 죽여. 그럼 넌 어마어마하게 특별한 힘을 얻고, 복수를 끝마칠 수 있어.”
볼프강에게 다가가 대놓고 제 목을 내어주려는 팬시.
팬시가 그런 짓을 저지른 이유.
자신의 타락을 합리화하고, 모두에게 증명해 보이려는 목적이다.
그 누구라도, 소중한 사람을 악에게 잃으면 악을 통해서라도 징벌할 것이라고.
그러나.
볼프강은 타락하지 않는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무력감을 느끼지만.
결코 잘못된 길로 가지 않는다.
“난, 널, 죽이지 않아.”
그것이 바로 평범했던 볼프강이 영웅으로 선택된 이유.
실수는 할지언정, 스스로 악행을 저지르진 않겠다는 숭고한 의지 때문이다.
동시에 평범함에 대한 찬사이기도 했다.
이 땅에서 악을 저지르지 않고, 평범하게 이 세계를 유지해가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난 괴물이 되지 않을 거니까.”
앞서 팬시가 했던 말.
괴물과 싸우려면 괴물이 되선 안 된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널 붙잡아서, 감옥에 보내고······내 친구에게 사죄하게 만들 거야.”
정작 그 말을 지킨 건 볼프강 쪽이었던 것이다.
“내 힘으로.”
그렇기에.
볼프강은 특별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훌쩍, 크흡. 크흠.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진이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인사했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두 관객.
벤과 스티븐은 아무 말 없이 유진을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심지어 중간엔 유진이 볼프강과 팬시, 1인 2역을 선보였다.
그러나 전혀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팬시를 연기할 때는 부스스하고 긴 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볼프강일 때는 그를 걷어, 자신의 표정을 온전히 보여주었으니.
“빌어먹을.”
잠시 후.
“빌어먹을, 젠장!”
욕지기를 내뱉으며 일어서는 벤.
그러나 그 얼굴은 환희 그 자체였다.
“난 이 아이디어 좋아. 좋다고! 젠장, 머릿속에 영감이 마구 샘솟고 있어! 이봐 스티븐! 종이랑 펜 좀 줘. 얼른! 지금 떠오르는 걸 모조리 적어둬야 한다고!”
벤은 그리 말하며 스티븐의 사무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반면 스티븐은 여전히 망부석이 되어있었다.
“어떠셨나요?”
유진이 스티븐에게 묻자.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스티븐은 오히려 되레 질문했다.
“이른 나이부터 한국의 슈퍼스타면서, 동시에 평범한 인간의 감성과 삶도 완벽히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도무지 17살의 나이에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마치 모든 걸 경험한 사람 같군요. 지금 유령이라도 보는 기분입니다.”
그 질문에 유진은 싱긋 웃었다.
눈물과 웃음이 공존하는 얼굴.
특별함과 평범함을 동시에 보여주었던, 방금 전의 연기처럼.
“진흙 속에 핀 꽃, 이라고 해두겠습니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자신도 벤에게 물든 것인지.
아니면 유진이 보여준 연기가 정말 감명 깊었던 것인지.
스티븐은 스스로도 몰랐다.
‘내가 지금 감성에 지배당한 건 아니야. 난 지금 너무도 멀쩡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있어. 그가 보여준 연기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그의 비즈니스적 감각, 이성이 외치고 있었다.
박유진.
그를 잡으라고.
“좋습니다. 이 엉망진창인 프로젝트, 어디 한 번 제대로 해보죠.”
시작부터 좌충우돌로 진행되었던 이번 프로젝트.
이 <볼프강> 프로젝트가 어디로 향하는 알 수 없는 마차라면.
스티븐은 기꺼이 고삐를 쥐기로 했다.
*
“베팅할 수 있는 기간도 마감됐겠지.”
뉴욕 브루클린.
가난한 대학생 피터 초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박유진이 팬시를 맡는다는 마이클의 스윗으로부터 제법 시간이 지났으나.
아직도 볼프강 캐스팅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올인에서 묘한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다.
“조만간 볼프강 배역을 맡은 배우가 오피셜로 나온다고 했지.”
이 때문에 베팅할 수 있는 시간도 지났고.
모든 배우의 배당률은 확정되었다.
[박유진 – 200.5]
즉.
유진에게 베팅했던 피터 초이에게 이변은 없었던 것.
“하아.”
솔직히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미 박유진은 빌런으로 캐스팅되었다.
그 발표를 뒤집고 히어로로 캐스팅된다?
차라리 복권에 당첨될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다만.
“내 1000달러.”
베팅한 1000달러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서 말이지.
남들처럼 심심풀이로 10달러나 걸었으면 됐을 것을.
뭐하러 1000달러라는 거금을 걸었을까.
아무래도 지나치게 감성에 취했던 모양이다.
“한국.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인데.”
그를 적잖이 후회하고 있을 무렵.
휴대폰에 울리는 알람.
바로 스윗터 알람이었다.
“마이클이네? 또 쓰잘데기 없이 자기자랑이나 올려놨겠지.”
이게 다 마이클 론도 때문이다.
그 인간이 박유진 가지고 호들갑만 안 떨었어도!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피터는 스윗터를 열어보았다.
그런데.
[Michael Rondo 님의 스윗 : 오피셜) 유진 팍이 휘슬의 WU 새 영화 <볼프강>의 히어로, 볼프강을 맡게 되었다]
생각도 못한 내용의 스윗이 눈에 들어왔다.
“응?”
피터는 몇 번이고 눈을 끔뻑이고.
눈을 비비고.
심지어는 인공눈물까지 투여한 뒤 다시 확인해보았다.
그러나.
스윗터 내용은 달라진 게 없다.
당연하다.
“오피셜 정보잖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피터는 당장 올인에 접속해 박유진의 배당률부터 다시 확인했다.
[박유진 – 200.5]
즉.
그에게 떨어지는 건.
1000달러의 약 200배.
“잠깐. 1000달러. 그리고 여기에 200을 곱하면?”
과도한 흥분으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때문에 피터는 계산기로 두 수를 곱해야만 했다.
“20만 달러?!”
가난한 한국계 미국인 대학생 피터 초이.
단숨에 거금을 벌어들였다.
바로 먼 타지에 있는 한국인 배우.
박유진 덕분에.
“우와아아아아아악! 우아아아아아악!”
피터는 괴성을 내지르며 환호했다.
바로 옆집에서 항의가 들어왔으나.
그 옆집 사람을 대뜸 껴안아버릴 정도로 피터는 흥분한 상태였다.
하루아침에 제게 20만 달러가 생기다니!
“후우, 후우. 잠깐. 그럼 유진 팍이 팬시 대신 볼프강을 맡게 된 건가?”
배역 자체에서 하차하는 경우는 있어도.
이런 식으로 배역 자체가 달라지는 경우는 또 처음 봤다.
그에 피터가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이.
띠링-!
또 다시 올라온 마이클의 스윗.
[Michael Rondo 님의 스윗 : 첨부. 팬시 역 캐스팅에 변동은 없음.]
“엥? 이게 무슨 소리야?”
피터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해졌다.
팬시 역을 맡았던 박유진이 볼프강으로 옮겨간 것 아닌가.
그렇다면 새로 캐스팅을 해야지, 변동이 없다니?
[Michael Rondo 님의 스윗 : 다시 한 번 말하지. 좀 더 쉽게 설명해줄까? 팬시 역도 유진 팍이 맡기로 했다고.]
마이클은 피터 같은 사람들을 위해.
재차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Michael Rondo 님의 스윗 : 히어로와 빌런, 모두 그의 몫이란 뜻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