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3화
당황한 얼굴의 손준영을 보며.
유진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이제 알았겠지? 내가 너에게 연기를 가르쳐줄 수 없는 이유.’
사실.
손준영에게도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오디션을 거치지 않고 곧장 캐스팅할 수도 있었고.
‘하지만, 무작정 띄워주는 게 아이들을 위한 길은 아니지.’
정글 같은 연예계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곤 해도.
그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눈에 띄어야 살아남는다는 것.
그렇기에.
유진이 제공해줄 수 있는 건, 모두가 행복한 동화 속 세상이 아니다.
선택받은 사람과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 존재하는 곳.
누군가는 성공의 짜릿함을 느낄 때.
누군가는 실패의 쓴맛을 느낄 수밖에 없는 곳.
다만.
아이들이 누릴 성공이 계속 되길 빌어주는 곳.
또한.
아이들이 실패를 겪고서, 다시 일어날 힘을 복돋아주는 곳.
유진은 그런 곳을 만들고자 했다.
“먼저 사전에 공지할 내용이 있습니다.”
유진이 손깍지를 끼며 말했다.
“이번 오디션에 뽑힌 분들은, 저와 함께 주연으로 활약하게 되실 겁니다.”
“그, 그 말은.”
“네. 작품 내 ‘형’ 역할을 제가 맡게 된다는 얘기죠.”
아역배우들의 롤모델이자 히어로, 세계적인 배우.
박유진과 주연으로 활약한다니!
이는 인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엄청난 기회였다.
그러니.
이런 기회를 누구에게나 거저줄 수는 없는 법.
“그럼, 오디션에 들어가기 위해 자기소개를 먼저 해주시겠어요?”
“안녕하십니까! 손준영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손준영.
유진은 그를 보며 온화하게 말했다.
“네, 손준영 배우님. 긴장 풀고, 준비가 되면 곧장 연기 시작해주세요.”
“아, 네!”
손준영도 그렇겠지만.
심사에 임하는 유진도 적잖은 두근거림을 느꼈다.
‘응. 나도 그, 연기인지 뭔지 하고 싶어! 나도 연기자 할래!’
머릿속에 울리는, 손준영과의 첫만남.
유진이 뿌린 씨앗.
그를 수확할 순간일지도 모르니까.
*
손준영은 왜 유진이 제게 직접적 도움을 주지 않았는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유진은 지금 심판의 역할이고.
손준영은 선수다.
심판이 선수를 도와주게 된다면, 오디션이 불공평할 테니까.
‘유진 형은 공과 사가 뚜렷한 사람이구나.’
손준영이 아는 박유진은.
언제나 다정하고 자상한 형이었다.
뮤지컬 티켓도 보내주고, 먼저 안부를 물어봐주는 사람.
그러나.
지금은 확실히 깨달았다.
이 업계 안에서, 박유진이 얼마나 멀리에 있는 존재인지.
‘정말 멋있어. 지금 내 나이보다도 어릴 때 많은 걸 이뤘고, 이젠 연출에까지 도전한다니.’
저 발치에 닿고 싶다.
나도 저 사람처럼.
그런 마음이 샘솟았다.
‘아니, 아니야. 나는 유진이 형이 될 수 없어.’
손준영은 곧 고개를 저었다.
박유진은 박유진만의 방식이 있듯.
손준영은 손준영의 방식대로 해나가면 그만이다.
비록 첫걸음을 뗀 지 얼마 안 됐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가야할지 감을 잡았으니.
이제 발을 내딛어야할 때.
“후우. 그럼, 시, 시작하겠습니다!”
자신이 봤던 것들.
그를 토대로 대본을 분석했고.
캐릭터의 감정을 쌓아갔다.
이제, 그를 보여줄 차례였다.
“히익! 누, 누구세요?”
곧 풀썩 쓰러지는 손준영.
상대역이 없기 때문에.
오로지 오디션을 보는 배우의 상상력과 연기력에 달려있다.
“형, 이라고요?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려고요?”
처음에는 목소리가 많이 떨리고,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유진 형이, 내 연기를 보고 있어. 어렸을 때는 내가 형의 연기를 보고 있었는데.’
자신의 우상이 제 연기를 보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아냐, 그런 생각을 버려. 난 지금······연서준이야.’
이내 정신을 차린 손준영.
곧 다시 캐릭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정제되지 않은, 다소 날 것의 연기란 인상.
하지만 그 일상적인 인상.
그게 연서준이라는 캐릭터와 잘 어울렸다.
정말 눈앞에 나타난, 알 수 없는 존재를 두려워하듯.
손준영은 벌벌 떨며 고개를 들었다.
“환상의 세계요? 그런 건 동화 속에서 나오는 얘기 아니었어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제가, 정말”
소름 돋는 연기라곤 할 수 없지만.
오히려 그 일상적 느낌이 캐릭터를 현실적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아냐, 아냐! 이건.”
환상 속 세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연서준이.
그 속에서 뒤틀린 트라우마와 마주하는 장면.
“아버지? 아버지, 가. 왜, 여기에. 그, 윽. 으윽······.”
손준영은 곧장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보단.
점진적으로 변해가는 연서준의 심리에 초점을 맞췄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분노.
“날 좀 놔줘. 아픈 사람이, 왜. 나한테. 그만, 숨막혀. 왜 그렇게 아파가지고······.”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과보호하며 옥죄는 어머니에 대한 애증.
그러나 동시에 몸이 편찮은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
“가기 싫어. 내가.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
지옥 같은 학교 생활에 대한 공포.
“제발, 그만······.”
허억, 후욱.
목소리에 숨소리가 많이 섞이기 시작했다.
“하악, 후욱.”
곧 과호흡이 온 것처럼 숨을 크게 몰아쉬는 손준영.
“후아, 흐윽, 후우, 후우.”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곧장 유진과 함께 심리전문가가 투입되어 손준영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요? 심호흡 하면서 진정해요.”
“네? 아, 그. 괜찮아요. 방금까지 연기하고 있던 거라서요.”
곧 괜찮다며 웃어보이는 손준영.
물론 연기의 여운 때문인지 감정과 호흡이 쉽사리 정리되진 않았지만 말이다.
잠시 후.
손준영이 안정을 되찾았을 때.
“손준영 배우.”
유진이 질문을 던졌다.
“혹시 괜찮으면, 오늘 펼친 연기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은데요.”
“흐읍, 제, 제 연기가 혹시 너무 안 좋았나요?”
배우는 연기로 말하는 사람이다.
그게 바로 박유진의 지론 아닌가.
그런 그가 설명을 요구하다니, 손준영은 지레 겁을 먹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어떻게 연기의 포인트를 잡았는지, 배우의 입장을 들어보고 싶어서요.”
유진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손준영은 곧 멋진 말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했으나.
연기하느라 에너지를 다 써서 어휘력이 모두 떨어져버렸다.
“관찰했어요. 사람들을.”
“관찰?”
“네. 미지의 존재인 형을 만나는 장면은, 낯선 사람을 방문할 때 유치원 아이들이 짓던 행동이나 몸짓을 관찰했어요. 그 이후 트라우마와 마주하는 장면은, 악몽을 꾼 아이들에게서 표정과 반응을 참고했어요. 가장 끝부분은 과호흡이 온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봤고요.”
그 때문에 나온 것은, 있는 그대로의 생각들.
“그, 제 생각에. 환상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보이후드>는 결국 현실을 사는 아이들에게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서요.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관찰해, 캐릭터로 표현해본······건데요.”
유진은 그에 대해 어떠한 코멘트도 하지 않고.
그저 담담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이내 곧.
“멋진 연기였습니다. 준비를 많이 해오셨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손준영.
오디션 결과는 모르겠지만.
유진의 그 한 마디에 여태까지의 노력이 모두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할게요!”
이는.
또다시 나아갈 동력이 되어줄 터였다.
*
오디션이 모두 끝난 직후.
“두고두고 아쉽네요.”
유진과 함께 심사를 본 송미연 작가가 말했다.
“뭐가요?”
“오늘 오디션이요.”
“설마 아역배우들이”
“아뇨, 인상적이었어요. 놀라울 정도였죠. 그래서. 박유진 배우가 연서준을 맡아주지 않은 게 아쉽네요.”
아역배우들이 활약할수록.
송미연은 박유진이 연기했을 연서준이 궁금해진 것이다.
애초에 연서준 역은 박유진을 위해 만든 역할.
수년 동안 기다린 송미연 입장에서는 아쉬울 법도 하다.
“하지만 전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니까요. 그 몫은 이제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넘어갔어요. 걱정 마세요. 제가 ‘형’ 역할을 멋지게 해낼 테니까요.”
과감히 핵심역할을 아역배우들에게 양보한 유진이다.
만약 아이들이 좋지 않은 연기를 보여줬다면.
유진도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고민이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보고 꿈을 키운 아이들이.
모두 훌륭한 연기를 펼쳐보였다.
그 중에서도.
‘잘했다, 준영아.’
눈에 띄는 사람이 또 있었고.
“전 기분 좋아요, 작가님.”
씨앗이 예쁘게 싹을 틔웠고.
유진은 방금 그걸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오디션도 끝났으니, 이제 맘편히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수 있겠네요.”
유진은 휴대폰을 흘끗거렸다.
스케줄 관리 어플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얼마 남지 않은 일정 하나.
<판데모니움 리딩>
*
“왜 그러세요?”
그 말을 들은 순간.
고PD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네? 뭐라고 하셨죠, 작가님?”
“아니, 별 건 아닌데. 조금 멍하신 것 같아서요.”
고PD에게 말을 걸고 있는 사람.
이번 작품, <판데모니움>을 집필한 드라마 작가였다.
“아, 아닙니다. 그냥 좀, 긴장한 거 같아서.”
“긴장이요? PD님 같은 경력을 가지신 분이요?”
고PD는 꿀꺽 침을 삼켰다.
마치 송미연 작가와 일했던 그 시절.
<유별난 친구들>을 찍던 때처럼, 애송이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도 벌써 이 바닥에 들어온지 20년이 넘었다.
날고 긴다 하는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보기도 했고.
해외에도 수출되는 여러 드라마를 연출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 업계 짬밥 먹은지도 벌써 그렇게 됐는데. 이번엔 좀 스케일이 큰 모양입니다.”
이번에는 차원이 달랐다.
“분명 제가 1대 1로 대면하고, 계약서에 사인까지 받아냈는데.”
재오, 한권주, 강사랑, 박유진.
거기에 이순철까지.
막상 그들이 모두 모여있는 그림을 상상하자니 뭔가 전율 비스무리한 게 느껴졌다.
이들이 한 작품에 모이는 건 본 적이 없다.
아마 백룡영화제 급은 되는 시상식이 열려야 가능한 일이리라.
이 다섯 명이 한 자리.
그것도 모두 주연으로 모인다니!
그것도 자신이 연출하는 작품에서 말이다.
그야말로······.
“유진이가 말했던 대로, 신들의 전쟁 느낌이 팍팍 드네요.”
“아, 그리 말씀하시니 뭔가 저도 긴장되기 시작했어요.”
덩달아 꿀꺽 침을 삼키는 작가.
곧 고PD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문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피디님!”
그러자 스탭들을 비롯.
배우들이 일어서서 고PD에게 인사하러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PD님.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오랜만입니다, 재오 씨.”
인기절정의 아이돌 출신이자.
연기자로 성공적 변신을 이뤄낸 재오.
“잘 부탁드립니다.”
간결한 인사.
냉미남 계의 대표주자였고.
<데드맨>을 기점으로 연기력이 눈에 띄게 상승.
이제 믿고 보는 배우이자, 미중년의 대표주자가 된 한권주.
“계약서 쓸 때도 말했지만, PD님이랑 작업하는 건 처음이네요? 재미있게 해봐요.”
두문불출하다, 불현 듯 <판데모니움> 출연을 결정한 강사랑.
틀에 얽매이지 않는 연기와.
순간순간 보여주는 센스가 발군인 여배우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오랜만에 뵙네요, PD님.”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배우, 이순철.
“선생님.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허허! 영광은 무슨. 이 노인네가 짐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죠. 다른 주연들이 아주 젊고 잘 나가는 배우들인데 말입니다.”
이 걸출한 배우들이.
<판데모니움>이라는 한 작품에서 격돌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배우들의 호흡보다도, 각자의 매력을 뿜어내는 게 중요해.’
이 작품의 장르는 피카레스크.
악인들끼리의 암투를 다루는 작품이니 만큼.
캐릭터들 간의 케미가 옅을 수밖에 없다.
‘즉, 배우의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판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해졌다.
캐스팅 티저가 공개된 이후.
고작 배우들 이름밖에 없는 그 영상 조회수는 벌써 수백만 회를 기록할 정도.
심지어 아직도 매일 조회수가 오른다.
이미 촬영도 들어가기 전에 대중들의 관심은 하늘을 찌르고.
심지어 먼저 온플러스 OTT 서비스, 플러스넷에 가입한 사람도 여럿 있을 정도.
‘우리도 이번 작품에 여러모로 회사 명운을 건 상태지만, 배우들의 부담감도 만만치 않겠어.’
하하호호 하며 마냥 즐겁게 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순간 삐끗했다간, 바로 뒤처질 수 있으니까.
‘그래. 최근 몇 년간 선한 영향력이니 뭐니 연예계가 바뀐 것처럼 떠들어댔지만, 본질 자체는 변하지 않아.’
태생적으로 이 연예계란 업계는.
누가 더 대중들의 눈을 사로잡느냐, 그 싸움 아닌가.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그때.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는 한 소년, 아니.
한 남자.
“배우 박유진입니다.”
이 거대한 판을 짠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