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4화
몇 시간 전.
재오의 회사인 UB 엔터.
그곳에서 재오는 오래 알고 지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웃긴 일이지. 음악하는 놈들이 여길 떠나고, 배우하는 네가 남았다니.”
“뭐, 비즈니스가 다 그런 거지.”
조실장, 아니.
조부장은 이제 UB 엔터 내 아이돌들을 총괄하게 되었다.
즉.
배우 파트로 빠진 재오와는 접점이 많이 줄어든 것.
하지만 함께 해온 세월이 길기에.
이렇게 가끔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곤 했다.
유일하게 UB엔터와 재계약한 멤버가 재오였거든.
나머지 멤버들은 다른 곳에 둥지를 틀었다.
“남아줘서 고맙다. 내심 네가 우리 회사에 남아줬으면 했거든.”
“왜? 날 또 뭐 이상한데 굴리려고?”
“짜식, 그게 아니라. 약속을 했잖아. 연기 원없이 해주겠다는 약속. 그 약속,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다.”
사실 UB엔터는, 빅터에서 홀로 남은 재오를 예능 쪽으로 더 굴리길 원했다.
배우 활동을 막진 않았지만.
예능의 비중을 높이는 방향을 고려했던 것.
그러나.
조실장이 나서서 그를 설득했다.
재오를 온전히 배우로서 밀어보자고.
“고마워, 형.”
“고맙기는. 약속을 지키는 게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
재오의 어깨를 툭 치는 조부장.
“그래서, 행복하냐?”
“어? 뭐가?”
“배우로 활동하는 거. 행복하냐고.”
그 말에 재오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연기를 시작한지는 제법 됐다.
일본 영화 <입김>의 오디션에 합격했을 때.
그때의 짜릿함은 아직도 강렬히 남아있을 정도.
‘하지만 그 이후엔, 제대로 즐기지 못한 거 같아.’
뭐든 열심히, 완벽할 때까지 연습만 반복하는 재오의 성향.
아이돌 시절의 버릇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
그렇기에 그토록 좋아하는 연기도, 그저 하나의 일처럼 취급해버린 것.
“나는······.”
그때.
“근데 너 왜 그래?”
“뭐가?”
“아까부터 손을 벌벌 떨고 있잖아.”
조부장의 말에, 그제야 재오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어?”
“뭐야. 긴장이라도 한 거냐?”
“긴장? 내가?”
“오늘 너 새로 들어가는 작품 리딩 한다며. 근데 너 긴장하는 모습을 내가 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재오가 누구인가.
노력의 천재이자, 연습의 화신.
노래든, 연기든.
연습한 대로 기계처럼 해낼 때까지 반복한다.
긴 경력동안 여태 실수한 적도 없고.
이러니 고작 리딩에서 긴장할 것도 없을 텐데.
“······.”
재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곧 회사 차를 타고 이동한 곳은.
바로 온플러스의 건물.
어느새 도달한 온플러스 회의실.
그 문 앞에 붙은 문구.
[<판데모니움> 작품 리딩]
그 종이 한 장을 보는 순간.
재오는 미칠 듯한 두근거림을 느꼈다.
‘왜 이러지? 컨디션이 안 좋은가?’
재오는 베테랑 아이돌이다.
무대와 연기를 비롯, 안 해본 활동이 없고.
해외도 자주 나왔으며, 수만 명 앞에서 해마다 공연을 했다.
배우로서도 이제 제법 많은 작품을 소화했고.
많은 배우와 호흡을 맞췄다.
새삼 손이 떨릴 일도.
두근거릴 일도 없을 텐데.
‘역시, 참여하는 배우들 때문인가?’
리딩이 펼쳐진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니 보이는 건.
백룡영화제 남우주연상에 빛나는 한권주.
그리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강사랑.
재오가 예전부터 꼭 같이 호흡을 맞추고 싶어했던 배우.
‘이상해. 마치 TV나 영화 속에 들어온 거 같아.’
예전부터 동경했던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여있고.
자신과 함께 호흡을 맞출 것이다.
그 사실을 재오는 이제야 체감하기 시작한 것.
‘아주, 아주 먼 길을 돌아온 기분이야.’
배우 연습생으로 들어가.
아이돌을 하고.
해체 후 배우라고 불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잘못된 길로 가진 않고.
“어휴. 다들 일찍 왔네?”
“······!”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곧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이 바닥에서 전설적인 존재.
바로 이순철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느낀 재오의 감정은.
‘내가, 내가 이순철 선생님이랑 연기를 한다니.’
전율이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재오라고 합니다!”
신인시절로 돌아간 듯.
꾸벅 고개를 숙이는 재오.
그러자 이순철이 웃으며 그를 반겼다.
“아아, 재오 씨?”
“편하게 말씀하십쇼!”
“좀 일찍 태어난 게 뭐 대수겠습니까. 그럴 순 없죠. 클클! 아무튼 잘 보고 있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몇 번이고 이순철을 향해 꾸벅이는 재오.
이순철과 악수한 손을 믿기지 않다는 듯 바라보았다.
‘잘 보고 있다고 하셨어. 나를. 배우로 활동하는 나를, 이순철 선생님이 보고 칭찬해주신 거야.’
곧 자리로 돌아와 얼떨떨해하는 그에게.
“안녕하십니까! 배우 박유진입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곧 귓가에 울렸다.
“재오 형. 일찍 왔네?”
이내 곧 톡톡 어깨를 건드리며 웃는 한 사람.
곧 그는 다른 배우들에게 다가가 웃으며 인사했다.
“권주 삼촌! 왜 이리 오랜만에 보는 거 같죠? 사랑 이모. 안에서는 선글라스 좀 벗어요. 아, 할아버지! 밥은 드셨어요? 든든한 걸로?”
“허허허!”
살갑게 다른 배우들과 인사하는 유진.
그를 대하는 배우들은 모두 한결같이 웃고 있었다.
‘유진이가 강사랑 배우님, 그리고 이순철 배우님까지 세팅했다고 들었어.’
박유진의 힘.
이 녀석을 만나고서, 인생이 점차 바뀐 느낌이었다.
그때 박유진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자신은 어떤 인생을 살았을 것인가?
‘어떤 인생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지금보다 불행했을 거 같아.’
이 순간에 도달하기까지, 인생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악바리처럼 노력했다.
걸어온 길이 꽃길까지는 아니었어도.
가는 길목마다 꽃 한 송이 정도는 보이는, 그런 길이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 그럼 지금부터, 드라마 <판데모니움> 리딩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
배우들이 모두 자리에 앉고.
본격적으로 시작을 알리려던 고PD.
그런데 갑자기 재오 쪽을 빤히 바라보는 게 아닌가.
“재오 씨. 무슨 일 있어요?”
“네?”
“아니, 그. 괜찮아요?”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니, 눈물을 흘리고 계시길래.”
“예?”
그 말에.
그제야 자신의 얼굴을 매만져보는 재오.
“오늘 왜 이러지? 죄, 죄송합니다. 잠시 화장실 좀.”
곧 훌쩍이며 화장실로 달려간 재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슬픈 것도 아닌데.
어쩐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 감정은.
‘가슴이 뜨겁게 벅차올라. 근데, 그게 기분 나쁘지 않아.’
빅터로서 처음으로 1위를 차지했을 때도.
서울돔에서 수만 명이 제 이름을 환호할 때도.
물론 좋고 행복했지만.
지금 느끼는 건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바로, 어릴 적 염원이 이루어지는 순간.
먼 길을 돌아 꿈을 이룬 사람이 느끼는 벅차오름.
“······하하.”
이 느낌을 모르고, 평생 아이돌로서 살아왔다면.
아마 재오는 평생 죽을 때까지 후회했으리라.
“하하, 하하하.”
눈물을 흘리다, 대뜸 이젠 거울을 보고 웃고 있다.
누가 보면 미친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저 이 순간의 감정을 만끽하고 싶을 뿐.
그리고 그 모습을.
“······.”
박유진이 문틈 사이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발연기의 대명사’ 재오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조부장 형. 행복하냐고? 그래, 나 행복해!”
홀로 중얼거리는 재오.
“드디어, 이 순간이 왔어. 드디어!”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꿈이 이뤄지는 순간을 보는 건 언제나 짜릿했다.
*
재오가 자리로 돌아온 뒤.
그제야 <판데모니움>의 리딩이 시작되었다.
“갑자기 울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 여기 계신 배우님들을 보며 연기자의 꿈을 키워왔는데······조금 벅찼던 것 같습니다.”
재오가 자리에 돌아와 사과했다.
어안이 벙벙했다가, 뒤늦게 진상을 알게 된 사람들.
그들 모두 모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재오의 진심을 알아차린 것이리라.
“결코 누가 되지 않게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눈물 자국이 그대로 남은 얼굴을 하고선.
마치 신인 시절로 돌아간 듯.
파이팅 넘치게 말하는 재오.
이어서.
“한권주입니다. 좋은 환경에서 연기할 수 있어 기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과연 한권주답게 간결한 인사.
그 다음은 강사랑의 차례였다.
“어, 음. 오랜만에 뵙는 분들이 많네요? 방가방가. 아, 좀 옛날 말인가? 요즘엔 뭐라고 하죠? 아무튼, 반갑습니다. 강사랑이에요.”
이를 지켜보는 반응은 두 가지.
정말 강사랑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놀라는 부류.
그리고 그녀의 범상치 않은 어휘에 웃음을 참는 부류였다.
“한 꼬마가 재미있는 작품이 있다고 꼬셔서요. 근데 벌써 리딩부터 기대되고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 이후.
“안녕하십니까! 배우 박유진입니다.”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자, 유진은 90도 인사와 함께 웃어보였다.
“전역 후 복귀작에 이렇게 좋은 배우님들과 함께할 수 있게 되어서 무척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처음 도전해보는 장르라 많이 두근거리는데요. 부디 좋은 작품 만들어봅시다! 아자아자!”
할리우드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돌아왔음에도.
유진은 거들먹거리거나 오만하게 굴지 않았다.
스태프 한 명 한 명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네고.
특유의 친화력으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사람.
여전히 싹싹하고, 웃는 얼굴이 예쁜 배우였다.
그리고 마지막.
“예, 이순철입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많아서 반갑네요.”
자리에서 일어난 이순철.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워워. 다들 그럴 필요 없어요. 밖에서야 나이 대접 받겠지만 여기선 다 같은 배우 아닌가요.”
그러자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다시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거두절미하고, 이 작품은 내 은퇴작이 될 겁니다.”
그 말에.
회의실은 충격에 빠졌다.
“으, 은퇴요?”
“그게 정말입니까, 선생님?”
이순철과 대면해 계약을 맺은 고PD조차 처음 듣는 이야기.
충격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
박유진뿐이었다.
그는 평온하게 이순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예. 사실이죠. 농담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런 일로 하진 않으니까요.”
이순철은 덤덤히 말을 이어갔다.
“제 배우 인생의 마지막 작품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들과 함께 마무리할 수 있게 되어 기쁘네요.”
그리 말하며 이순철은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마지막이니만큼, 누구 말처럼 한바탕 놀아볼 생각입니다.”
그 말은 즉.
이순철도 전력으로 임하겠다는 이야기.
“즐겨보자고요, 모두들.”
*
몇 시간 뒤.
고PD는 침을 꿀꺽 삼켰다.
‘리딩에서······벌써 이런 수준이라고?’
러프하게 진행되는 리딩 같지만.
그 속에서 살아숨쉬는 것은.
바로 서늘한 긴장감이었다.
대사 한 번 틀리는 사람이 없고.
흐름이 끊기는 일조차 없다.
보통의 리딩이라면 작가나 PD가 개입하여 디렉팅을 해주기 마련.
‘그럴 필요조차 없어. 다들 처음부터 완벽하니까.’
그만큼.
모두가 칼을 갈고 준비해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게다가 이순철 선생님의 은퇴작이라는 말을 듣고, 모두에게 동기부여가 된 것이겠지.’
재오의 경우.
초반부에 많이 긴장한 듯한 모습이었지만.
갈수록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강사랑은 자신에게 찰떡인 캐릭터를 맡아서 그런지.
제 마음대로 곳곳에 애드리브까지 넣으며 아주 날아다니고 있다.
작중 시작은 이렇다.
최고의 재벌그룹인 대한그룹.
그곳의 3세인 진정일이 마당발이라는 인물로부터 모종의 정보를 구입한다.
“마당발. 오랜만입니다.”
“어머. 이게 누구야? 대한그룹의 진정일 도련님 아니세요? 어쩐 일이에요? 이렇게 절 다 찾아주시고.”
“오랜만에 봐도 참 쾌활하시네요. 부탁했던 정보는 어떻게 됐습니까?”
“제가 누굽니까? 찾느라 고생 좀 했지만, 확보했죠. 바로 넘겨드릴 수 있습니다. 값을 제대로 치루기만 해주시면요.”
“하하. 당신의 그 능글맞고 호들갑스러운 점이 내 심기를 건드리곤 합니다.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요.”
귀족처럼 우아한 자태를 유지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살기를 내뿜는 재오의 진정일.
“저 아시잖아요, 도련님. 저 죽으면 도련님에 대한 정보가 세상에 쫙 퍼질텐데. 그래도 괜찮으세요?”
그에 지지 않고, 능글맞게 맞받아치는 강사랑의 마당발.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 입으로 돈을 버는 만큼, 더 큰 걸 잃지 않게요.”
“감사합니다, 고객님!”
두 캐릭터가 확실한 대비를 이루어, 각자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
“이기태 씨. 일입니다.”
“의뢰 내용은?”
“간단합니다. 태건파라고 알 겁니다. 깡패들. 거기서 제거해줘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뢰 난이도 상급. 최소 5억이 필요합니다.”
“그 정도는 충분히 내어드리죠.”
“그건 의뢰에 필요한 자금입니다. 보수로는 10억.”
“하하. 정말 어디서든 돈 타령이군요. 좋습니다.”
살인청부업자, 이기태 역을 맡은 한권주의 경우.
기계적으로 돈만을 요구하는 캐릭터.
그러나.
몇 없는 대사로도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잠시 후.
“허.”
곧 매우 무겁게 가라앉은 저음이 회의실에 울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름이랄게 딱히 없는 사람입니다만, 저를 아는 사람들은 저를 ‘설계자’라고 부릅니다.”
“······!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얼어붙었다.
‘포스 있는 악당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순철이 나서 직접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역시 이순철 선생님이야.’
‘차원이 달라. 다른 배우들만으로도 무게감이 엄청났는데, 이게 바로 클라스라는 건가?’
현 세대 최고 배우들이 모인 자리이지만.
이순철의 존재감은 과연 남달랐다.
그렇게 서늘해진 분위기 속에.
“에라이 시발, 이 좆같은 새끼. 설계자는 빌어먹을 설계자야? 노인네가 노망났어?”
뜨거운 공기가 흘러들어왔다.
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저도 모르게 흘끗.
박유진을 바라보고 말았다.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박유진이 거친 욕설을 내뱉는 장면이었으니까.
“됐고, 빨리 날 이렇게 만든 새끼가 누군지 쳐 불라고!”
초반부에 마당발이 진정일에게 판 정보.
그 정보로 인해 진정일이 이기태에게 살인을 의뢰했고.
곧 태건파 내부 간부가 살해당한다.
그런데 그 누명을 쓴 게 바로 김준인 것.
‘박유진도 미쳤네. 단번에 또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오는 저 존재감이라니.’
‘박유진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욕설이랑은 상극인 거 같은데, 이걸 또 맛깔나게 살려버리네. 게다가 목소리며 저 눈빛에 느껴지는 독기까지!’
박유진은 그 심리를 매우 뜨겁게 표현하고 있었다.
“하하. 모든 일엔 근원이 존재하고,”
“씹, 너 죽고 싶어?! 빨리 쳐 불기나 하라고!”
묵직한 이순철의 설계자와.
뜨겁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박유진의 김준.
둘 사이 긴장감의 줄다기리는, 리딩 현장임을 잊게 만들 정도로 뜨거웠다.
“당신이 속해있던 태건파. 그곳의 자금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압니까?”
“그거야 우리 조직 돈이지.”
“하하. 당신은 역시 태건파의 중추인물은 아니었군요.”
“뭐, 이 새끼야?”
“고작 깡패들이 자금을 굴려봤자 얼마나 되겠습니까.”
“알아듣게 말해.”
“분명 뒷배가 있다는 뜻입니다. 태건파를 후원하고 있던 건 성공그룹입니다. 대한그룹과 가장 큰 라이벌 관계에 있다 불리는 곳이죠.”
“그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인데?”
“이번에 벌어진 사건. 그건 대한그룹.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대한그룹 회장의 3세인 진정일이 벌인 짓입니다 오로지 성공그룹을 엿먹이고 싶다는 생각에서 말이죠.”
그 말을 듣는 순간.
“뭐?”
자신의 목표를 전해들은 김준.
그런데.
“······.”
“······?”
그를 연기하고 있는 박유진이.
이어 대사를 치지 않았다.
‘음?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고PD조차 그런 의문이 들 때쯤.
“······후우.”
희미하게 들리는 숨소리.
애써 제 분노를 죽이는, 뜨거운 호흡이었다.
지금 박유진은 대사 사이사이의 호흡을.
매우 길게 가져가고 있는 것.
‘왜 저러는가 했더니. 제 복수의 목표를 전해듣고, 그 분노를 애써 삭이는 걸 표현하고 있잖아?’
대사와 대사 사이의 공백마저.
박유진은 이 리딩 단계에서 철저히 활용하고 있는 것.
그를 캐치하고.
이순철도 중간중간 웃음소리를 섞으며 텐션을 계속 유지해주고 있었고.
‘그래. 이거야.’
그제야 고PD는 실감할 수 있었다.
‘박유진이······돌아왔다.’
아역 시절부터 연예계를 씹어먹은 배우.
그가, 마침내 연기자로 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