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예거-14화 (14/195)

14화

이현지가 대기실에 돌아오자마자 방송이 흘러나왔다.

“응시자분들은 잠시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응시자분들은 모두 나와주세요.”

강우를 포함한 응시자들이 모두 대기실에서 빠져나갔다. 히로는 이미 밖으로 나가있었고, 이현호가 문을 열어놓고 안내했다.

100명의 응시자들이 체력검정실에 다시 모였다. 이현호는 서류를 들여다보다가 응시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현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오늘은 정말 기록될만한 날입니다. 우수한 분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지금부터 합격자분들을 호명해드리겠습니다. 번호 순서대로 점수와 함께 호명해드릴 거고. 호명되지 않으신 분들은 불합격이므로, 후에 재시험 응시를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이현호는 서류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2번 이지연, 286점 일성 하급. 4번 김동준, 380점 일성 중급. 17번 김형태, 410점 일성 중급. 19번 이혜주, 349점 일성 하급. 31번 오하나, 351점 일성 중급. 44번 심석호, 290점 일성 하급. 98번 오만기, 277점 일성 하급.”

강우는 오만기를 보며 실실 웃었다.

“여태까지 네가 최하 점수 아니냐? 그래도 어떻게 붙었다?”

“입 닥쳐라.”

오만기는 얼굴을 붉힌 채 씩씩거렸다. 오만기처럼 불만이 있는 응시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이미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응시자들도 있었고, 몇몇은 곧바로 재시험 준비를 했다. 김동준의 경우는 자신과 같은 일성 중급이지만, 더 높은 점수를 얻은 김형태가 아니꼽다는 듯 노려보고 있었다.

이현호가 말했다.

“99번 지강우, 258점 일성 하급.”

이현호가 지강우를 호명하자마자 오만기가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하하하하하하! 258점! 258점도 점수냐? 이 씨팔놈아?”

이현호가 버럭 소리를 쳤다.

“아직 발표 안 끝났습니다! 조용히 해주십시오! 합격을 취소할 수도 있습니다!”

합격을 취소할 수도 있다는 말에 오만기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현지는 기대감을 품은 눈으로 이현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현호가 입을 열었고, 이현지는 입 모양을 따라 읽고 있었다.

“100번 이현지, 360점 일성 중급.”

이현호는 고개를 들고 응시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누군가를 발견한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아직 기다리고 계셨군요. 본인도 자신의 희소성을 아셔서, 가시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나가시려 해도 다른 심사관이 따로 모셨을 겁니다.”

이현호는 응시자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 최고득점자이자 오랜만에 처음부터 시작점을 크게 달리하는 예거가 있습니다. 86번 진현수, 득점은 490점, 희소성으로 인한 이성 하급! 모두 박수쳐주세요.”

이현호는 진현수를 가리켰고,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진현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손을 들어보였다.

강우는 진현수를 보며 생각했다.

‘저 새끼는 튀는 게 좋나? 뭐, 돈 벌기는 좀 더 쉬우려나? 높은 등급의 일을 맡아봐야 더 위험한 게 뻔할 테고, 그게 다 생명수당이잖아. 차라리 쉬운 일 여러 탕 뛰고 말지.’

강우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 진현수가 돌아봤다. 강우와 진현수의 눈이 마주쳤다. 진현수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진현수와 강우의 거리는 멀었다. 하지만 강우는 진현수의 입모양으로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진현수가 강우에게 “꼴통새끼.”라고 하는 것을.

강우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진현수를 노려봤다. 강우는 눈빛만으로 진현수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저 씹새끼가….’

진현수는 강우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주변에서 축하를 전하는 응시자들과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나눴다. 강우는 그때까지도 진현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탁.

누군가 강우의 등짝을 쳤다. 강우는 인상을 확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뒤에는 오만기가 이죽거리고 서있었다. 강우는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이며 말했다.

“뭐야?”

오만기는 재미있다는 듯 히죽거리길 멈추지 않았다.

“내 점수가지고 실실거리더니 쪽팔리냐?”

강우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난 특기시험에서 0점을 받아서 그런 거다.”

“그게 자랑이냐? 나도 특기시험에서 제대로 힘을 안 써서 저 점수밖에 안 나온 거야.”

강우는 오만기를 똑바로 쳐다보며 생각했다.

‘아… 점점 진짜로 짜증나네. 확 죽여버릴까….’

강우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띨띨한 놈이랑 시비 좀 붙었다고….’

오만기는 강우 앞에서 여전히 깐족거렸다.

“빡치냐? 응?”

오만기가 강우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그거 아냐? 우리가 예거 등록소에서 만난 게 아니었으면 넌 벌써 뒤졌어. 필기시험장에서… 그때 이미 뒤졌다고 새끼야.”

강우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넌 안 되겠다.”

강우가 오른손을 오만기의 얼굴로 가져가려 할 때였다. 누군가 오만기를 뒤에서 확 잡아당겼다. 오만기는 뒤로 나자빠졌고, 모든 응시자들의 시선이 쏠렸다. 오만기를 잡아당긴 것은 이현지였다.

이현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자빠진 오만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좀 비켜 돼지야.”

오만기는 자신이 나자빠진 것이 믿기지 않는 듯 몇 번이나 바닥과 자신의 몸을 확인했다. 오만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부라렸다.

“이 좆만 한 년이 뒈지고 싶나….”

이현지는 조소를 띠며 말했다.

“돼지가 사람 말도 할 줄 아네?”

이현지는 자신보다 체구가 두 배 이상 커다란 오만기에게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강우가 대화에 끼어들려고 했지만, 상황을 진정시킨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이현호가 응시자들을 향해 말했다.

“자, 모두들 벌써 친해지신 분들도… 원수지신 분들도 계신 것 같네요.”

이현호는 강우와 오만기, 이현지를 노려봤다. 강우는 멀뚱멀뚱 서있었고, 으르렁거리던 오만기와 이현지도 입을 닫았다.

이현호는 목을 가다듬은 후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합격되신 분들은 예거 등록을 위한 간단한 절차가 있으니 4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나머지 분들은 다음 기회에 또 응시해주시기 바랍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아직 남아있던 불합격자들은 웅성거리며 체력검정실에서 빠져나갔다. 합격자들은 이현호와 함께 4층으로 향했다.

이현호가 앞장서 한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안에는 히로와 5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책상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현호는 응시자들을 향해 돌아봤다. 이현호는 중년의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거 등록소장님께서 앞으로 여러분이 유의해야 할 점들을 몇 가지 알려주실 겁니다. 이 부분들을 잘 듣고, 정말로 예거 등록을 할 것인지 잘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예거 등록소장은 합격자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 모두 시험에 합격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예거 등록소장의 목소리는 심한 감기에 걸린 것처럼 쉬어있었다. 예거 등록소장은 다소 더운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양손에는 장갑을 끼고 있었다. 상의는 목을 감싸는 폴라티 위에 자켓까지 걸치고 있었다.

예거 등록소장은 예거로 활동할 때의 장점들을 늘어놨다.

예거 등록을 함으로써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도 있고, 다양한 활동이 가능, 일반인들에게는 열람되지 않는 정보의 습득이나 거래도 가능하고, 대표적으로 몬스터 사냥에 대한 것이나 몬스터 관련 거래에 대한 것이었다.

예거 등록소장이 하는 말들 중 특별할 것은 없었다. 이미 예거 등록을 하러 온 응시자들 모두가 숙지하고 있는 내용들이었다. 아니, 그러한 혜택들과 보상을 위해 예거가 되려 하는 것이니 당연했다.

강우는 팔짱을 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꼰대들은 꼭 쓸데없는 소리를 엄청 길게 한다니까….’

모든 합격자들이 귀담아듣기 시작했다. 예거 등록소장이 예거 등록을 하면 얻게 되는 리스크에 대해서 설명했다.

“예거는… 많은 기회를 가질 수도 있지만, 많은 걸 잃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 큰 것을 얻으려면, 큰 것을 내놓을 각오가 돼있어야 합니다. 예거가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범죄자를 소탕해 이 세상에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 세상에 피해를 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예거의 자질을 갖춘 사람들은 물론, 예거로 활동하면서도 범죄를 일삼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거 등록소장은 얘기 중 목이 타는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제가 앞의 얘기들을 한 이유는, 예거 등록을 하는 순간 일반인과는 달라집니다. 예거 등록을 한 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예거들 사이에서 현상수배자가 됩니다. 그리고 체포 과정에서 죽는다고 해도, 범죄를 저지른 예거를 죽였을 땐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습니다.”

예거 등록소장의 말에 이지연이 손을 들고 물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거죠? 결국 살인이 허가된다는 말이잖아요.”

예거 등록소장은 물을 한 번 더 들이킨 뒤 말했다.

“이건 전 세계 공통 예거 관련법입니다. 물론, 현상수배자 체포 시 생포를 원하는 경우도 있고, 무엇보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저런 위험에 처할 일은 없겠죠. 제 말의 요지는 그만큼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일반인과는 다른 법을 적용 받는다는 겁니다. 때로는 더 엄격하게, 때로는 더 관대합니다.”

예거 등록소장이 이현호에게로 이리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이현호는 예거 등록소장의 뒤로 다가섰다. 이현호가 예거 등록소장의 뒤를 붙잡고 당겼다. 이현호가 합격자들 앞으로 예거 등록소장의 뒤를 밀었다. 예거 등록소장이 앉아있던 곳은 휠체어였다.

예거 등록소장은 두 다리가 없었다. 합격자들의 시선은 예거 등록소장의 펄럭이는 바짓단에 쏠렸다. 예거 등록소장이 말했다.

“원래 타고 다니던 휠체어가 고장이 나서 수리를 맡겨 이현호 씨가 고생을 하네요. 하여튼 제가 하나 더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언제나 뒤를 따라다니는 위험부담입니다. 저는 몬스터에게 당해 이런 꼴이 됐습니다. 보험처리 같은 건 꿈도 꾸지 마시길 바랍니다. 목숨을 내놓고 사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들 보험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특히 예거 파티에 소속되길 원하는 분들은 더욱 많은 생각을 해보셔야 할 것입니다. 예거 파티에 소속되는 것은 단순히 직업을 갖는 게 아닙니다. 그 어떤 직업보다 사명감이 필요합니다. 위험한 임무에 투입돼 이런 꼴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몬스터 사냥을 할 수도, 전쟁을 치를 수도, 흉악한 범죄자들에게 대항할 수도 있습니다. 예거 클랜이나 프리랜서를 염두에 두고 있더라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합격자들은 침묵을 지킨 채 예거 등록소장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예거 등록소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현호를 향해 손짓을 했다. 이현호가 물을 한 잔 따라서 예거 등록소장에게 가져다줬다. 예거 등록소장은 물을 한 번에 들이킨 뒤, 이현호에게 건넸다. 예거 등록소장은 합격자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제가 왜 이렇게 물을 자주 마시는 줄 압니까?”

예거 등록소장은 오른손에 낀 장갑을 벗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렸다. 몇몇 합격자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몇몇은 자신도 모르게 “헉.”소리를 냈다. 예거 등록소장의 손과 팔은 붉은 계열의 고무덩어리들이 녹아 엉겨붙은 듯 극심한 화상자국으로 가득했다. 예거 등록소장은 목을 감싸고 있는 부분을 살짝 젖혀보였다. 목 역시 심한 화상자국이 있었고, 다른 부분의 골격에 비해 목젖부분이 작게 쪼그라들어있었다.

예거 등록소장은 다시 소매를 내리고, 장갑을 끼며 말했다.

“두 다리와 함께 잃은 것들입니다. 목소리와 피부. 대신에 물을 아무리 마셔도 끊이지 않는 갈증을 얻었습니다.”

사무실 안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김동준이 숙연한 분위기를 한 번에 깨트렸다.

“그러니까… 일종의 살인면허가 주어진다는 소리지? 우리는 일반인과 다르고… 뭐, 거의 일종의 병기(兵器)취급을 받는다는 거네? 사고를 당해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런 거 아니야?”

모두의 시선이 김동준에게로 쏠렸다. 김동준은 한쪽 입꼬리만을 올리며 말했다.

“당신이 장애를 갖고 살아가게 된 걸로 경각심이라도 품어줄 생각인가본데… 그건 당신이 약해서 몬스터에게 당한 거 아니야? 자신의 불행한 일을 남에게 대입시켜 상상하게끔 만들려 하지 말라고. 나한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이현호와 히로가 눈을 부라리며 동시에 말했다.

“말이 지나칩니다!”

“말이 심하군요!”

예거 등록소장은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만두라는 듯 손을 올렸고, 금방이라도 몸을 일으켜 김동준에게 달려들 것 같았던 이현호와 히로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예거 등록소장은 얼굴에 남아있던 미소를 싹 지우고 김동준을 노려봤다. 예거 등록소장의 두 눈에는 일순 피가 맺혀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섬뜩했다.

“예거 등록소장으로서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만… 해마다 수많은 예거들이 원인불명으로 죽는 거 알고 있습니까? 몬스터가 죽였는지, 범죄자한테 당한 건지, 다른 예거가 죽였는지… 원인을 알 길이 없는 시체들이 아주 많습니다. 세상이 좋아져서 CCTV가 참 많은데도… 예거들이 그거 하나 제거하는 건 일도 아니니… 능력으로 싸워대서 별다른 증거도 남지 않고….”

김동준은 흠칫 놀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예거 등록소장은 당장이라도 김동준을 찢어죽일 듯 노려보며 말했다.

“예거 등록소장직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반인 공무원들입니다. 하지만 근래에는 저처럼 은퇴한 예거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죠. 직원들도 대부분 전직 또는 현직 예거들로 구성돼있고요. 이 말은… 이제 갓 예거가 된 애송이들이 우습게 볼 사람은 없다 이겁니다.”

김동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시선을 회피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신 분들에게 정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항상 댓글들은 꼼꼼히 읽고 있습니다.

본래 제가 의도한 바가 있고, 사람마다 다르기에 작품을 100% 맞춰드릴 수는 없지만, 가능한 모든 분들이 재밌게 읽으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약간의 예고를 하자면, 다음 화에서 '예거 등록' 챕터는 마무리 지을 것입니다.

앞으로 더 흥미진진해질 것을 약속드립니다. ^^댓글과 선작,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