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강우는 주변에 펼쳐진 펜션들을 둘러보다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여기가 블랙마켓이 맞기는 한 거죠?”
“맞지.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블랙마켓 중 하나야. 대부분 이런 식으로 펜션들을 사들여 개조한 다음 이용하고 있지. 아니면 겉만 펜션처럼 새로 지어버리던가… 그나저나 뒤를 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강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 없어요.”
“그럼 자네한테 일은 못 줘. 여기서 무언가 사거나 팔 수는 있지만, 일을 구하기는 힘들 거야.”
“어째서죠?”
남자는 블랙마켓에서 일을 구할 수 있는 기준에 대해 설명을 늘어놨다.
블랙마켓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전부 검증돼있었다. 이전부터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추천을 받거나 다른 업체의 추천 혹은 소속된 곳이 크거나 예거로서 등급이 높았다.
아무에게나 일을 주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현재 예거 파티에서는 직간접적으로 블랙마켓에 대해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예거 파티와 직접적으로 충돌이 있는 경우에는 달랐다. 예거 파티의 입장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때문에 다른 블랙마켓 관련 업체, 예거, 사람들은 건들지 않아도, 직접적인 충돌이 있었던 업체에게만큼은 확실히 철퇴를 내렸다. 때문에 아무나 고용했다가 사고를 일으키면 굉장히 곤란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검증되지 않은 능력 때문이었다. 이 바닥도 신용이 중요했다. 중간 업체를 겸하는 블랙마켓에서 어떠한 사람에게 일을 제공했을 때, 그 일을 실패하면 손해가 컸다. 어떠한 일인지와 계약 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돈을 못 받는 것은 당연했고, 계약금을 돌려줘야 되거나, 심한 경우에는 손해배상을 해야 될 수도, 고객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인상을 찌푸린 채 손으로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자네 예거 등록은 했나?”
“네, 등록된 상태입니다.”
“등급이 어떻게 돼?”
강우는 본래의 등급을 말하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일성 하급이라고 하면 안 될 거야. 조그만 클랜들한테도 일 구하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블랙마켓에서는….’
강우는 자신이 일성급 랭킹 3위인 신준섭을 해치운 것을 떠올리며 말했다.
“일성 상급입니다.”
남자는 눈썹을 가운데로 모으며 말했다.
“그래? 일성 상급이면 대충 잡일거리들이 좀 있긴 하지… 등록증 좀 보여줄 수 있나? 뭐든지 확실히 해둬야 하니까… 아, 그리고 신분 노출 걱정은 하지 마. 등급이 적힌 부분만 살짝 보여주면 되니까.”
강우는 주머니를 뒤적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제가 지금 등록증을 안 가지고 와서….”
“그럼 가지고 다시 와. 지금 당장 자네한테 일거리를 줄 수는 없어.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증명해보여도 되고.”
강우는 갈등에 빠졌다. 강우에겐 특별히 살짝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사로잡을 능력은 없었다. 화염을 일으키거나, 눈보라를 일으키거나, 음파 혹은 염동력 등의 능력 따위는 없었다. 혹은 있어도 사용할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무언가를 부수거나 빠르게 움직이는 걸로 능력을 보이는 것도 애매했다.
강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커다란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라도 부술까요?”
“그런 건 일성 하급 정도만 돼도 다 하는 거야. 뭐, 특기 있을 거 아냐?”
강우는 뒷목에 오른손을 얹은 채 고민하다가 말했다.
“제가 좀 빠르기도 빠른데… 점프도 엄청 높게 뛸 수 있고요.”
“아니, 뭐 하나 특별한 걸 내놔보라니까. 내 마음을 확 끌 수 있는 거 말이야.”
강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땅바닥에 커다란 구멍이라도 내주면 되겠지.’
강우는 바닥으로 시선을 옮기며 주먹을 치켜들었을 때였다.
“오, 설마 당신일 줄이야.”
강우와 대화하던 남자가 아닌 어떤 여자의 목소리였다. 강우는 주먹을 내리며 시선을 돌렸다. 남자의 옆으로 한 여자가 서있었다.
여자는 남색 헤어밴드를 이마 윗부분까지 올려 쓰고 있었다. 헤어밴드 안쪽으로 나온 머리는 뒤로 빼 묶어 말총머리를 하고 있었고, 이른 새벽부터 진한 화장을 하고 있었다. 나이는 30대 초중반으로 보였다. 긴팔 티셔츠에 청바지 위로 열심히 운동해서 관리한 몸매의 흔적이 드러났다.
여자는 씩 웃으며 말했다.
“아까 연락했었죠?”
“아, 네.”
여자는 다른 블랙마켓 업체의 사장이었다. 강우가 문자를 보냈던 블랙마켓 업체들은 전부 포천 산길에 있는 업체들의 번호였다. 블랙마켓의 오픈시간과 마감시간은 저마다 달랐지만, 평일 오전 7시부터 오후 2시까지는 대부분 영업을 했다. 그 외 시간에 거래를 하고 싶을 땐 업체 측과 따로 연락을 하면 됐다.
여자는 강우에게 다가와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전화번호와 ‘이부선’이라는 이름만이 적혀있었다. 처음 강우를 맞이했던 남자는 몸을 돌려 펜션으로 들어갔다.
강우는 명함을 주머니에 챙기며 말했다.
“일을 좀 하고 싶은데요.”
이부선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떤 일을 찾으시죠?”
이부선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아,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죠.”
이부선이 앞장서 걸었고, 강우는 뒤를 따랐다.
이부선의 펜션은 2층으로 돼있었고, 1층은 작은 앞마당, 2층은 테라스가 있었다. 옥상은 따로 없었다. 원래는 여러 손님들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건물에 여러 방들이 있었고, 가장 큰 특실은 2층까지 사용하는 구조였지만, 이부선에게 매입된 이후로 벽을 허물어 모든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강우는 펜션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흠칫 놀랐다. 정면으로 타우로스의 머리가 벽에 걸려있기 때문이었다. 이부선은 씩 웃으면서 말했다.
“멋지죠? 저건 타우로스 중에도 매우 드물게 큰 녀석이죠. 아마 당장 팔아도 500만… 경매를 붙이면 600만 겔드도 가능할 걸요?”
“대단하네요….”
이부선은 강우를 1층에 있는 한 방으로 안내했다. 모든 방에는 문이 달려있지 않았다. 펜션 안에는 예거들 전용 무기부터 몬스터의 박제, 몬스터들이 지니고 있던 무기나 옷, 장신구 등이 가득했다.
‘전부 돈으로 하면 얼마야? 감도 안 잡히는군….’
강우와 이부선이 방으로 들어섰다. 방은 약 16평 정도였고, 한 가운데는 커다란 테이블과 의자들이 늘어져있었다. 벽은 진열장으로 이뤄져 각종 물건들이 가득 차있었다. 이부선은 모서리 부근에 의자를 빼 자리를 잡고, 바로 옆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앉아요.”
강우는 자리에 앉아서도 진열장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굉장하네요.”
“그렇죠? 그래도 그쪽은 제법 침착한 편이예요. 입을 벌리고 계속 두리번거리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이부선은 자신이 설명한 종류의 사람들처럼 눈의 초점을 흐리고 입을 벌리며 흉내를 냈다. 강우는 씩 웃었다.
‘이 아줌마 귀엽네.’
이부선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와, 복면을 썼는데도 표정이 드러나네요?”
“아, 네. 제법 괜찮죠? 재밌기도 하고….”
“집행자 씨는 대단한 거 같아요.”
강우는 표정을 확 굳히고 이부선을 쳐다봤다.
“집행자?”
“사형집행자. 그게 당신의 닉네임 아니에요?”
강우는 눈썹을 잔뜩 찡그리며 이부선을 노려봤다. 강우가 쓰고 있는 복면의 두 눈이 매섭게 변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부선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어머, 복면이 무섭게 보일 수 있을 줄이야… 당신 이미 유명해졌어요.”
“무슨 말인지 똑바로 대답하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 어제 퍼플 헤드를 쳐부쉈다며? 이미 이 바닥에서 유명인사라니까?”
강우는 차분히 앉아있었다. 하지만 강우의 복면의 눈꼬리는 하늘로 치솟아 분노를 표하고 있었다.
“방금 전에 다른 업자는 냉대했는데 다짜고짜 이곳까지 데려온 것부터 이상했어. 신준섭과 한패인가? 날 함정에 빠트린 건가?”
이부선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오해하지 마요. 나랑 신준섭하고는 전혀 관계없으니까. 진정하고, 얘기 좀 하죠?”
“말해봐.”
“말 짧아진 것 좀 봐. 뭐, 남자가 너무 조곤조곤해도 매력 없지.”
이부선은 의자를 틀어 정면으로 강우를 바라보며 다리를 꼬은 뒤, 말을 이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신한테 일거리를 줄 수 있어요. 나뿐만이 아니라, 이쪽에 있는 블랙마켓 업체는 전부 일거리를 줄 거예요.”
“신준섭을 해치워서?”
“그렇죠. 혼자서 퍼플 헤드 클랜을 무너트렸으니, 꽤 화려한 데뷔라고 할 수 있어요.”
강우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좋아… 일을 구할 수 있다는 건 좋아. 그런데 당신이 신준섭하고 관련이 없다는 건 확실한 건가? 관련이 없는데 어떻게 내가 그랬다는 걸 알았지?”
이부선은 담배를 하나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이부선은 깊게 담배를 한 모금 빤 뒤에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신준섭의 형, 신준혁이 당신을 찾고 있어. 자기 동생을 팔병신으로 만들어놨으니 오죽 열이 받았겠어? 이쪽 업체 사람들은 모두 신준혁에게 연락을 받았지. 아마 연락이 닿는 블랙마켓 업체에는 전부 연락을 돌린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신기할 정도로 위기감이 없네… 대체 어디서 나오는 여유야? 앞으로 당신은 쫓기는 몸이라고. 잡히면 반드시 죽을 테고 말이야.”
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 그런데 나한테 왜 이런 얘기들을 하는 거지? 일거리는 줄 건가?”
이부선은 재미없다는 듯 손으로 턱을 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재미없네… 어떻게 그렇게 침착할 수 있어? 약 같은 거 해?”
강우는 말없이 이부선을 쳐다봤다. 이부선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까 복면을 써도 표정이 보인다고 했던 말 취소야. 사람 속을 알 수가 없네… 말한 이유는 딱히 없어. 우리 업자들은 언제나 일을 맡기는 사람들과 일을 구하는 사람들을 연결시켜주잖아? 수많은 사람들 중 네가 나한테 연락을 한 것뿐이야.”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군.”
“일을 받고 싶으면 내일 오후 1시에 명함에 적힌 번호로 연락해. 그러면 연결해줄 테니까. 퍼플 헤드를 무너트려서 어느 정도 검증은 됐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큰 건을 맡을 수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 바닥에서는 높은 등급의 일을 깔끔하게 끝낼 때마다 들어오는 일거리는 더 많으니까 괜찮을 거야.”
강우는 팔짱을 끼며 물었다.
“등급?”
“일도 난이도에 따라 예거나 몬스터와 마찬가지로 등급이 나뉘어. 블랙마켓에서의 일은 최하가 이성 하급부터야. 아마 당신한테도 이성 하급의 일이 갈 거야. 하지만 퍼플 헤드 클랜 정도를 무너트렸다고 단독으로 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지. 아마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는 일이 주어질 거야.”
강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일의 내용은?”
“그건 조율을 해봐야 돼. 집행자 씨,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그럼 내일 전화하겠다.”
강우는 말을 마친 뒤, 곧바로 몸을 돌려 펜션을 빠져나왔다.
밖에는 어느새 몇몇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다른 펜션에서 나온 업자도 있었고, 무언가를 거래하러 혹은 일을 맡기러 혹은 일을 구하러 온 사람들 등 다양했다.
강우의 차림새에 몇몇은 잠시 눈길을 줬지만, 사람들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강우 말고도 각각의 방법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은 많았다.
강우는 블랙마켓을 벗어나 집 쪽으로 향했다. 시간은 오전 9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강우는 인적이 드문 곳에 멈춰 섰다. 강우는 복면을 벗기 전에 주위를 한참 동안 둘러봤다. 인기척은 없었다.
‘신준혁이라고 했나….’
강우는 가방에서 재킷부터 꺼내 걸치고, 복면을 벗었다. 강우는 손에 쥔 복면을 유심히 내려다봤다.
‘이것만 뒤집어쓰면 자꾸 나답지 않게 구네… 신준섭도 팔병신으로 만들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말이야. 아까도 순간 열 받아서 그 아줌마 대가리를 테이블에 처박고 싶었어.’
강우는 복면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 작품 후기 ============================
선작과 추천 부탁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